반응형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한국시화에 나타난 존당파ㆍ존송파의 평론연구 - 4.1 이인로와 권응인의 존송파(尊宋派)에 대한 평론(評論) 본문

카테고리 없음

한국시화에 나타난 존당파ㆍ존송파의 평론연구 - 4.1 이인로와 권응인의 존송파(尊宋派)에 대한 평론(評論)

건방진방랑자 2022. 10. 23. 10:43
728x90
반응형

4. 존송파(尊宋派)의 개별(個別) 시인(詩人)에 대한 평론(評論)

 

 

1. 이인로와 권응인의 존송파(尊宋派)에 대한 평론(評論)

 

 

조선 전기의 학자 조신(曹伸, 1450~1521?)이 쓴 소문쇄록(謏聞瑣錄)에는 (李定) “하루는 궁중의 잔치에서 술에 매우 취하여 임금 앞에 나아가 소식과 왕안석 중에 누가 더 낫습니까?’라고 하니, 왕이 대답을 하지 않고 다만 아직 잘 모르겠다.’라고 했다. 이정이 왕안석이 더 낫습니다.’라고 했다[一日侍內宴, 醉甚, 近就御前平坐, 請曰: ‘蘇與王孰優?’ 上不答, 但曰: ‘未可知.’ 永川曰: ‘荊公優矣.’].”위의 책, 1권의 謏聞瑣錄, 237는 기록이 있다. 소문쇄록(謏聞瑣錄)중종(中宗) 201521년에 만들어진 책으로 조선전기의 대표적 시화서이다. 1장에서 이미 조선전기에는 송시가 유행하였다고 언급하였는데, 이 문장을 통하여 조선초기(朝鮮初期)에 송시(宋詩)가 자못 유행을 하였고 그 중에서도 소식(蘇軾)왕안석(王安石)에 대한 선호가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조선 전기는 소식(蘇軾)을 전범(典範)으로 삼았다가 황정견(黃庭堅)진사도(陳師道)로 옮기고, 다시 선조(宣祖) 연간(年間)에 당시풍(唐詩風)으로 전환하였다고 보기 때문에 한국에서 존송파는 고려 말과 조선전기에 유행하였다.

 

 

 

소식과 황정견을 높이 평가한 이인로

 

존송의 시대적 상황과 소식ㆍ황정견의 시에 대하여서는 이인로(李仁老), 권응인(權應仁), 김창협(金昌協), 이의현(李宜顯)이 잘 논하였는데 아래에 고려후기의 학자 이인로(李仁老, 1152~1220)파한집(破閑集)권상 21권하 3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문장을 다듬는 방법은 소릉(少陵)만이 유독 그 묘함을 다 발휘했다. “내 신세는 해와 달 아래서 조롱속의 새와 같기도 하고, 하늘과 땅 사이에서 물 위에 뜬 부평초와 같기도 하네.’십년 여름동안 민산에서 갈포옷을 입고 살았고, 삼년 가을 동안 초지방의 다듬이소리를 들었네.”와 같은 것이다. ……

소동파와 황산곡에 이르러 용사(用事)에 더욱 정교하였으며, 뛰어난 기개가 흘러넘치니 절묘함이 가히 소릉과 견줄 수 있다고 하겠다.

琢句之法, 唯少陵獨盡其妙. 日月籠中鳥, 乾坤水上萍’, ‘十年岷山葛, 三霜楚戶砧之類是已.……

及至蘇, 則使事益精, 逸氣橫出, 琢句之妙, 可以與少陵幷駕.

 

시인들은 시를 지을 때 전고를 많이 사용하는데 이것을 점귀부(點鬼簿)라고 한다.…… 요즈음 소동파와 황산곡이 우뚝 일어나서 그들의 풍조를 따르기는 하지만 언어가 더욱 정교하여 조금도 어색한 흔적이 없으니 푸른 물감이 쪽보다 더 푸르다고 할 수 있다.

詩家作詩多使事, 謂之點鬼簿; …… 近者蘇黃起, 雖追尙其法, 而造語益工, 了無斧鑿之痕, 可謂靑出於藍矣. ……

 

 

이인로는 존송파의 입장에서 한국시인과 중국시인의 작품을 많이 비교하고 소식과 황정견의 평론에 치중했는데, 첫 번째 인용문에서 두보는 조탁미가 매우 뛰어나지만 소식과 황정견은 용사와 전고를 활용하여 시를 잘 써서 감히 두보와 견줄 수 있다고 극찬하였다. 두 번째 인용문에서는 소식과 황정견의 시법을 배운 고려의 시인이 시에서 인공적인 조탁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을 만큼 우수하다고 평가하였다. 이상에서 두 가지 점을 엿볼 수 있는데 하나는 이인로가 두보를 조탁미의 전범으로 삼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소식과 황정견을 높이 평가하였다는 것이다.

 

 

동파의 시를 만당시보다 낫다고 본 권응인

 

다음으로 조선중기의 학자 권응인(權應仁, ?~?)송계만록(松溪漫錄)권하 10에서 송시와 소식에 대하여 상세하게 논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지금의 시학(詩學)은 오로지 만당(晩唐)을 숭상하고 소동파(蘇東坡) ()를 버려두고 있다. 정사룡(湖陰)이 듣고 웃으며 소동파의 시를 낮게 보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라 하였고, 퇴계선생 역시 소동파의 시가 과연 만당에 미치지 못하는가?”라 하였다.

나 역시 생각하기를 소동파의 시에 이른바 어찌 청주의 육종사가 오유선생이 될 줄 알았으리오? 옥루가 얼어붙어 소름이 돋을 만큼 춥고, 은해가 빛에 일렁이니 눈이 부실만큼 빛나네. 바람에 날린 눈은 장춘원에 잘못 들어오고 구름 낀 달은 불야성에 오래도록 임하네.”라는 시구가 있는데, 만당시 가운데 이처럼 기절(奇絶)한 것과 대적할만한 것이 있는지 모르겠다. 고려 시대에 과거의 방이 붙을 때마다 “33인의 소동파가 나왔다.”라고 하였다. 고려의 문장은 우리 조선보다 우수한데 그때 온 세상이 소동파를 본보기로 삼았으니, 소동파의 시를 수준 낮은 것이라 할 수 없다.

만약 그 사람됨을 가볍게 보아서라면 만당의 시인으로 소동파보다 나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유독 퇴계 대감은 소동파시를 즐겨 읽어 언제나 구름 흩어져 달 밝으니 그 누가 가리겠는가? 하늘색과 바다 빛은 본디 맑은 것이네.”라는 구를 외우며, 자신이 지은 시에도 소동파의 시를 끌어 쓴 것이 많다.

今世詩學, 專尙晩唐, 閣束蘇詩. 湖陰聞之笑曰: ‘非卑之也, 不能也.’ 退溪亦曰: ‘蘇詩果不逮晩唐耶?’

愚亦以爲如坡詩所謂豈意靑州六從事, 化爲烏有一先生’, ‘凍合玉樓寒起粟, 光搖銀海眩生花.’, ‘風花誤入長春苑, 雲月長臨不夜城’, 不知晩唐詩中有敵此, 奇絶者乎? 高麗時每榜云: ‘三十三東坡出矣.’ 麗代文章優於我朝, 而擧世師宗, 則坡詩不可謂之卑也.

若薄其爲人, 則晩唐詩人賢於蘇者幾何人耶? 唯退溪相公好讀坡詩, 常誦雲散月明誰點綴, 天容海色本澄淸.’之句, 其所著詩, 使坡語者多矣.

 

 

권응인은 송계만록(松溪漫錄)에서 주로 소동파 시를 논하였고 그의 시 3인용시 맨 처음 2구는 章質夫送酒六壺, 書至而酒不遠, 戱作小詩問之라는 시이고, 두 번째 두 구는 雪後書北臺壁이라는 시이고, 마지막 두 구는 雪後到乾明寺라는 시이다.를 직접 인용하여 만당시에는 소동파와 대적할 만한 기절(奇絶)한 시가 없다고 하였다. 아울러 당시 고려 시대에는 소동파 시가 몹시 유행하여 과거시험에 합격한 사람을 ‘33명의 소동파가 나왔다.’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지적하였다. 여기에서 하나 주목할 점은, 동파시가 만당시보다 뛰어나다는 것으로 그 비교 대상이 성당의 이백두보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시는 역시 성당의 시가 제일이라는 인식하에 송시의 우수성을 평가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인용

목차

한문 논문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