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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미학, 보여주는 시인 당시와 말하는 시인 송시 - 4. 송조, 머리로 쓴 시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미학, 보여주는 시인 당시와 말하는 시인 송시 - 4. 송조, 머리로 쓴 시

건방진방랑자 2021. 12. 5.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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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송조(宋調), 머리로 쓴 시()

 

 

김시습의 이지적인 무제시

 

당시풍에 대비되는 송시풍의 특징을 일괄하여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대체로 송시는 이 시기 발달한 선종(禪宗)과 성리학(性理學)의 영향으로 인생에 대한 철학적 음미를 내용으로 하는 철리적 성향이 강하고, 쓸데없는 수식을 배제하고 섬세한 관찰과 개성적 표현을 중시하였으며, 제재 상에 있어서는 일상생활에의 관심과 밀착이 두드러짐을 그 특징으로 한다. 이에 따라 시의 공용성은 더욱 강조되었고, 표현은 다분히 산문적이고 서술적이 되어, 정감이 풍부하고 유려한 당시에 비해 송시는 이지적이고 심원한 풍격을 갖추게 되었다. 또 송대(宋代)에 발달한 사문학(詞文學)은 시()에 비해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세계를 노래하여, 송대(宋代)에는 시()와 사() 사이에 역할 분담이 이루어진 것도 간과할 수 없다.

 

終日芒鞋信脚行 종일 짚신 신고 발길 따라 가노라니
一山行盡一山靑 한 산을 가고 나면 또 한 산이 푸르도다.
心非有想奚形役 마음에 생각 없으니 어찌 형상에 부림 당하며
道本無名豈假成 ()는 본시 무명(無名)하니 어찌 거짓 이룰까.
宿露未晞山鳥語 간 밤 이슬 마르지 않아 산새는 지저귀고
春風不盡野花明 봄바람 끝나지 않았는데 들꽃은 피었구나.
短笻歸去千峯靜 지팡이 짚고 돌아갈 때 천봉이 고요터니
翠壁亂烟生晩晴 푸른 절벽 어지런 안개에 저녁 햇살 비쳐드네.

 

우선 앞서 송시풍을 대우해 주지 않는다며 반란을 일으켰던 김시습(金時習)무제(無題) / 증준상인(贈峻上人)라는 작품을 감상해 보기로 하자. 앞서 본 세 작품과는 우선 사물에 접근하는 태도가 판이하다. 무언가 그냥 읽기만 해서는 의미가 명료하게 잡히지도 않는다. 34구로 보아 시인은 지금 무엇인가 묵직한 주제를 말하고 있는 듯한데 그것은 무엇일까?

 

1구에는 짚신을 신고 하루 종일 길을 가는 나그네가 나온다. 그의 생각에 눈앞에 있는 저 산만 넘어가면 길이 끝나겠지 싶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이 자신의 희망사항이었을 뿐 산은 산에 연하여 끝없이 펼쳐져 있다. 12구는 옛 시에 저 들판 끝난 곳이 바로 청산인데, 행인은 다시금 청산 밖에 있도다[平蕪盡處是靑山, 行人更在靑山外].”라 한 탄식을 일깨운다.

 

34구에서는 12구의 체험이 이끌어낸 깨달음을 노래하고 있다. 하루 종일 몸을 피곤하게 길을 걸었던 것은 저 산의 끝까지 가고야 말겠다는 내 마음의 집착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집착을 마음에서 걷어내 전미개오(轉迷開悟)하고 나면 공연히 육신을 괴롭힐 이유가 없다. 4구에 가서야 시인은 의도를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난데없이 도()는 본래 무명(無名)한 것인데 이것을 어찌 이루고 말고 하는 이치가 있겠느냐고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를 이루고야 말겠다는 욕망, 즉 성도(成道)ㆍ성불(成佛)에의 욕망은 한 산을 가고 나면 또 한 산이 막아서듯 이루어질 수 없는 마음이 빚어낸 허망한 집착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12구의 언술은 구도(求道)의 행각(行脚)에 나선 구도승의 수행 과정을 비유하고 있고, 34구는 그 과정 끝에 도달한 어떤 깨달음을 말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다시 56구에 오면 시적 화자는 숨고 사물의 세계를 노래한다. 간 밤의 이슬이 채 마르지도 않았는데 새들은 어느새 날이 샌 것을 알고 광명을 노래한다. 봄바람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꽃들은 망울을 터뜨린다. 누가 알려 주었는가. 아무도 알려준 사람은 없다. 알려주지 않아도 제 스스로 알아 지저귀고 망울 부프는 것이 자연의 섭리가 아닌가. 구도(求道)의 깨달음도 이와 같아서 누가 알려주어서 관념으로 깨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스스로의 삶 속에서 통연자득(洞然自得), 활연관통(豁然貫通) 해야 한다.

 

이제 먼 데 산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던 화자는 다시금 발길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온다. 7구에서 천봉(千峯)이 고요하다고 한 것은 사실 앞서의 깨달음이 가져온 내면의 고요, 내면의 평정(平靜)을 말하려 함이다. 돌아온다는 것은 밖을 향해 있던 집착에서 놓여나 본래의 자신에게로 판본(返本)함을 뜻한다. 8구의 푸른 절벽 어지런 안개는 무슨 말인가. 절벽은 아득한 높이로 사람의 길을 막는다. 앞선 행각의 길에서 이 절벽은 무문(無門)의 관문(關門)처럼 앞길을 막았고, 어지러운 안개는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끔 혼란을 가중시켰었다. 그러나 이제 모든 미망(迷妄)을 던져 버리고 돌아오는 길에 늦저녁의 햇살이 비쳐들어 이전 나를 괴롭히던 망집(妄執)의 실체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언뜻 볼 때 위 시는 자연 속을 서성이는 나그네의 노래쯤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그 의미를 하나하나 따져 보면 뜻밖에 이같이 심오한 깨달음의 세계를 노래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마치 어느 고승(高僧)의 상승법문(上乘法文)과 접하고 난 느낌마저 든다. 흔히 큰 사찰의 대웅전 둘레에 그려진 심우도(尋牛圖)의 이치를 시()로 표현한다면 이보다 적절한 것이 있을까.

 

 

 

봄은 바로 곁에 있었는데, 그걸 몰랐구나

 

그런데 김시습(金時習)의 위 시는 송() 나라 어느 여니(女尼)가 지은 오도시(悟道詩)의 분위기와 흡사하다. 오도시(悟道詩)란 도를 깨달은 순간의 법열(法悅)을 노래한 시이다.

 

終日尋春不見春 종일 봄을 찾았어도 봄은 보지 못했네.
芒鞋踏破嶺頭雲 짚신 신고 산 머리 구름 위까지 가 보았지.
歸來偶把梅花臭 돌아올 때 우연히 매화 향기 맡으니
春在枝上已十分 봄은 가지 위에 벌써 와 있었네.

 

그녀는 봄을 찾기 위하여 하루 종일 온 산을 찾아 헤매이고 있다. 산꼭대기 구름 위에까지 올라가 보았지만 그녀는 봄을 찾지는 못하였다. 지칠 대로 지친 그녀는 이제 봄을 찾으려는 생각을 접어두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녀의 코끝에는 매화의 향기가 스쳐오는 것이 아닌가. 정작 봄은 자기 집 뜰 매화가지 위에 와 있었던 것이다.

 

앞의 시와 마찬가지로 그녀가 봄을 찾으려고 온 산을 헤매이는 것은 도()를 깨달으려고 구도(求道)의 행각에 나섬을 뜻한다. 그녀는 온갖 고행을 무릅쓰며 일념으로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온 산 어디에도 없는 봄처럼, ()의 실체는 끝내 찾을 수 없었다. 지친 그녀는 이제 집으로 돌아온다. 무엇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집착 속에서 우리는 아무 것도 얻을 수가 없다. 위의 시는 메텔링크(Maurice Meterlink, 1862~1949)파랑새 이야기를 떠올려 준다. 치르치르와 미치르는 파랑새를 찾기 위해 온 세상을 헤매이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파랑새는 정작 자기 집 마당에서 울고 있었던 것이다. 깨달음은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가까이 바로 우리 곁에 있다. 그런데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욕망과 아집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잔잔한 이치의 마음이 흔들릴까 걱정되네

 

특히 성리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우리나라에 있어 송시풍은 흔히 염락풍(濂洛風)의 철리적(哲理的) 내용을 노래한 시풍을 지칭하는 의미로 인식되기도 한다. 이는 즉 자연물을 통해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온유돈후(溫柔敦厚)하고 충담소산(沖澹蕭散)한 경지를 노래함으로써 음영성정(吟詠性情)하는 시풍으로 대표된다. 퇴계야당(野塘)이란 시를 한 수 보기로 하자.

 

露草夭夭繞水涯 이슬 젖은 풀잎은 물가를 둘러 있고
小塘淸活淨無沙 조그마한 연못 맑고 깨끗해, 모래도 없네.
雲飛鳥過元相管 구름 날고 새 지남은 어쩔 수 없다지만
只怕時時燕蹴波 때때로 제비 와서 물결 찰까 두려워라.

 

퇴계가 연곡리라는 곳에 갔다가 맑은 못을 보고 느낌이 있어 지었다는 시이다. 조그마한 연못이 있고 그 연못가에는 여리디 여린 풀잎이 이슬에 함초롬히 젖어 있다. 연못의 물은 어찌나 맑은지 모래조차 보이질 않는다. 그 위로 이따금 지나가던 구름이 와서 쉬고 새가 날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시인은 거울 같이 매끄러운 그 수면 위로 제비가 날아와 물결을 차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하고 있다. 제비가 물결을 차면 수면의 평정이 깨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를 읽고 나면 아무도 없는 고요한 연못가에 홀로 엎드려 맑고 잔잔한 수면 위를 바라보는 순수한 동심의 세계가 사람의 마음을 고요하게 함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퇴계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물 자체의 세계가 아니다. 맑고 일렁임이 없는 못은 사실은 일체의 삿됨이 개재됨 없는 순수무구(純粹無垢)한 마음을 상징하고 있다. 그래서 이 시를 두고 제자인 김부윤(金富倫)천리가 유행함에 인욕이 여기에 끼어듦을 두려워 한 것이다[天理流行而恐人欲間之].”라고 설명한 바 있다. 사람의 마음은 본디 순선(純善)하여 맑고 깨끗하기가 이슬 머금은 풀잎이나 물결 없는 수면과도 같다. 그러나 그 위로는 변화하는 구름과 새들이 지나감으로써 그 고요와 평정을 위협한다. 마찬가지로 사람 또한 타고난 그대로의 순선(純善)한 본성을 지키려 해도 언제나 인욕(人欲)이 여기에 끼어들어 순수를 잃게 되기 쉽다. 그러므로 제비가 물결을 차고 지나감을 두려워하듯 혹 자신의 삶 속에 인욕이 개입되어 본성을 잃는 일은 없어야겠다고 시인은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시인이 표층에서 묘사하고 있는 외물은 시인이 전달코자 하는 내용의 표피에 불과하다. 그 안에는 깊고 유원(幽遠)한 사변의 세계가 자리 잡고 있다.

 

송시풍의 시는 이와 같이 담담한 가운데 깊이를 지니고 있다. 또한 일반적으로 당시가 대상 그 자체에 몰입함으로써 자연스레 시인의 정의(情意)를 드러내는 방식을 취하는데 반해, 송시는 시인이 자신의 정의(情意)를 대상을 통해 드러내는 방식을 취한다.

 

 

 

 

인용

목차

1. 꿈에 세운 시()의 나라

2. 작약의 화려와 국화의 은은함

3. 당음(唐音), 가슴으로 쓴 시

4. 송조(宋調), 머리로 쓴 시()

5. 배 속에 넣은 먹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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