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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한시미학, 19. 선시, 깨달음의 바다 - 2. 선기와 시취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미학, 19. 선시, 깨달음의 바다 - 2. 선기와 시취

건방진방랑자 2021. 12. 7.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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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선기(禪機)와 시취(詩趣)

 

 

일본의 타쿠안(澤庵) 화상은 유명한 검술가였다. 그는 제자인 야규우에게 검술에 대한 충고의 말을 남겼다. 그 충고의 핵심은 항상 마음을 흐르는상태로 유지하라는 것이었다. 진정한 검술은 의식적으로 얻어진 기술적 기교를 넘어서는 것이다. 높은 경지의 검술가는 적과 마주하여 서 있을 때, 적도 자신도 적의 검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모든 기교를 잊고 무의식의 명령에 몸을 맡기고 서 있다. 검을 휘두르는 것은 이제 그가 아니다. 실제 어떤 검술가들은 적을 쓰러뜨리고 나서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스즈키 교수의 ()과 정신분석(精神分析)이란 책에 실려 있는 이야기이다. 항상 흐르는상태로 마음을 유지하라. 흘러가는 상태에 자신의 정신을 얹으라.

 

개심사(開心寺)에 가면 심검당(尋劒堂)이란 건물이 있다. 또 오대(五代)의 시인 영운(靈雲) 지근선사(志勤禪師)의 오도송(悟道頌)에도 구도(求道)의 추구를 검객(劍客)을 찾아다님에 비유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三十年來尋劍客 삼십 년 세월 동안 검객 찾느라
幾回落葉又抽枝 그 몇 번 낙엽 지고 새 닢 났던가.
自從一見桃花後 단 한 번 복사꽃 보고 나서는
直至如今更不疑 이 날에 이르도록 의심 없다네.

 

최고의 고수(高手)를 만나 상승의 검법을 익히려고 삼십 년의 세월을 방황했었다. 낙엽 지는 가을 산과 꽃망울 부푸는 봄 뫼를 헤매기 그 얼마였던가. 그러나 정작 그가 그 방랑의 길에서 전신으로 만난 것은 그토록 찾아 헤매던 검객(劍客)이 아니라, 어느 산모롱이에 무심히 피어나던 복사꽃 한 떨기였다. 그 한 번의 만남으로 그는 지금까지 지고 다니던 의심의 자락에서 완전히 놓여날 수 있었다. 검객(劍客)은 어디 있는가. 마음이 흘러가는 곳, 마음의 문이 열려 사물과 내가 하나 되는 자리에 있다. 함초롬 이슬 머금은 꽃잎 위에 칼끝 같은 깨달음이 있다.

 

 

예전 선승들은 깨달음을 묻는 제자에게 봉()이나 할()을 안겨주거나, 아니면 아예 주먹질을 하는 등의 방법을 썼다. 그도 저도 안 될 때에는 시법게(示法偈)를 남겼는데, 그 깨달음의 세계란 것이 워낙에 미묘하고 알기 어려운 것이어서 구체적인 설명 대신에 앞서 본 것과 같은 해괴한 상징과 비유를 동원하여 그들의 오성(悟性)을 열어주려 하였다. 그밖에 도를 깨닫는 순간의 느낌을 노래하는 오도송(悟道頌) 같은 것도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길 없는 깨달음의 경지를 비유와 상징의 화법으로 전달하려 하였다. ()의 사유와 시()의 방법은 이 지점에서 서로 만나게 된다.

 

고려 때 선승 경한(景閑)조사선(祖師禪)이란 글에서 시와 선이 만나는 지점을 이렇게 설명한다.

 

 

달마(達摩)가 동쪽으로 온 까닭은 무엇입니까?”하고 물으면, “아득히 강남 땅 2,3월을 생각자니, 자고새 우는 곳에 온갖 꽃 향기롭네[遙憶江南三二月, 澝嘑啼處百花香].”라고 대답한다. 또 스님이 조사(祖師)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은 무엇입니까?”하고 물으면, 대답하기를, “뉘엿한 해에 강과 산은 곱기도 하고, 봄바람에 꽃과 풀은 향기롭구나[遲日江山麗, 春風花草香].”라고 한다. 또 이르기를, “산꽃이 활짝 피자 비단만 같고, 시냇물은 쪽빛보다 더욱 푸르다[山花開似錦, 澗水碧於藍].”라고도 한다.

 

 

이것을 묻는데 저것을 대답한다. 도무지 요령부득의 동문서답(東問西答)이다. 그러면서도 성동격서(聲東擊西), 지상매회(指桑罵檜)의 통쾌함이 있다.

 

다음 선승(禪僧)들의 몇 편 시는 선기(禪機)와 시취(詩趣)가 한데 넘나, 시선일여(詩禪一如)의 높은 경계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는 경우이다.

 

飢來喫飯飯尤美 배고파 밥 먹으니 밥맛이 좋고
睡起啜茶茶更甘 일어나 차 마시니 차맛이 달다.
地僻從無人扣戶 후진 곳 문 두드리는 사람도 없어
庵空喜有佛同龕 텅 빈 암자 부처님과 함께 함이 기쁘다.

 

충지(沖止)한중우서(閑中偶書)란 작품이다. 배고프면 밥 먹고, 잠깨어 목마르면 차를 마신다. 외진 곳에 자리한 빈 암자엔 아무도 찾는 이 없어 사립문은 늘 걸린 그대로이고, 그 속에 한 스님이 부처님과 함께 불당에 앉아 있다. 그는 기쁘다고 말한다.

 

 

白雲堆裡屋三間 흰 구름 쌓인 곳에 세 칸 초가집
坐臥經行得自閑 앉아 눕고 쏘다녀도 제 절로 한가롭네.
澗水冷冷談般若 시냇물은 졸졸졸 반야(般若)를 속삭이고
淸風和月遍身寒 맑은 바람 달빛에 온 몸이 서늘하다.

 

고려 말의 선승(禪僧) 혜근(慧勤)산거(山居)란 작품이다. 배고프면 밥 먹고, 곤하면 자는 생활이지만 무위도식과는 엄연이 다르다. 흰 구름 속 초가삼간에서도 일말의 누추를 찾을 길 없다. 시냇물은 졸졸졸 흘러가며 반야(般若)의 설법을 들려주고, 맑은 바람과 흰 달빛은 내 정신을 쇄락케 한다.

 

卷箔引山色 連筒分澗聲 구슬 발 걷어서 산 빛 들이고 대통 이어 시냇물 소릴 나누네.
終朝少人到 杜宇自呼名 아침내 아무도 오지를 않고 두견새 제 홀로 이름 부른다.

 

충지(沖止)한중잡록(閑中雜詠)가운데 한 수이다. 발을 걷어 산빛을 방안으로 끌어들이고, 대통을 이어서 시냇물소리를 뜰 안에서 듣는다. 산빛과 시냇물소리를 함께 하는 아침, 아무도 이 흥취(興趣)를 깨는 이 없다. 이따금 적막을 견디다 못한 두견새가 제 이름을 부르며 울 뿐이다.

 

다시 그의 거산시(居山詩)한 수를 보자.

 

日日看山看不足 날마다 산을 봐도 또 보고 싶고
時時聽水聽無厭 물소리 늘 들어도 싫증나잖네.
自然耳目皆淸快 저절로 귀와 눈 맑게 트이니
聲色中間好養恬 소리와 빛깔 속에 마음 기른다.

 

산은 언제나 거기 그렇게 서 있고, 나는 언제나 여기 이렇게 산을 바라본다. 물은 쉬임 없이 흘러가며 무상(無上)의 설법을 들려준다. 산 빛을 채워 해맑고, 물소리로 씻어 깨끗해진 눈과 귀를 안으로 돌려 고요 속에 마음을 기른다.

 

高臺獨坐不成眠 높은 누대 홀로 앉아 잠 못 이루니
寂寂孤燈壁裏懸 쓸쓸히 외론 등불 벽 위에 걸려있네.
時有好風吹戶外 창밖으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却聞松子落庭前 뜰 앞에서 들리는 솔방울 지는 소리.

 

조선조 정관선사(靜觀禪師)가 금강대(金剛臺)에 올라지었다는 시다. 사바의 세계는 구름 아래 펼쳐져 있고, 그 위의 스님은 잠 못 이룬다. 속세에 두고 온 까닭 모를 근심이 있는 것도 아닐진대, 가물거리는 외로운 등불은 모두 잠들어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보리(菩提)의 불빛이 아닐 것인가. 꺼지지 않는 등불과 오롯이 깨어있는 나는 등가의 심상으로 교감한다. 바로 그때 바람은 그 마음을 헤아렸다는 듯이 문풍지를 흔들고, 또 솔방울은 소리를 내며 뜨락으로 떨어진다.

 

 

閱過行年六十七 더듬어 지나온 길 예순 일곱 해
及到今朝萬事畢 오늘 아침 이르러 모든 일 끝나도다.
故鄕歸路坦然平 고향 돌아가는 길 평탄도 한데
路頭分明曾未失 갈 길이 뚜렷하여 길 잃지 않겠구나.
手中纔有一枝笻 수중엔 겨우 지팡이 하나지만
且喜途中脚不倦 도중에 다리 품 덜어줌 기뻐하노라.

 

충지(沖止) 스님의 임종게(臨終偈)이다. 어떤 삶 끝에서 이렇듯 투명한 정신의 자락이 펼쳐지는가. 스님은 이 게송을 남기고 옷을 갈아입은 뒤 그대로 입적하였다. 생사(生死)의 바다를 훌쩍 건너 저승길을 마치 소풍 가듯 떠나가고 있다. 보우(普愚) 스님의 사세송(辭世頌)또한 생사(生死)의 바다를 단숨에 뛰어넘는 장엄함이 있다.

 

人生命若水泡空 인생은 물거품 부질없는 것
八十餘年春夢中 여든 몇 해 생애가 봄 꿈속이라.
臨終如今放皮袋 죽음 임해 가죽 자루 벗어던지니
一輪紅日下西峯 한 덩이 붉은 해 서산에 지네.

 

인생은 물거품이요 한바탕 봄꿈이다. 육신을 버리는 것은 가죽 부대를 벗어던지는 것이다. 무엇이 남는가. 붉은 해가 서산에 진다. 내 육신은 가도 지는 해는 내일 아침이면 다시 붉은 불덩이로 되살아난다. 무엇이 슬프고 안타까울 일이 있는가. 그렇다면 이런 시는 어떨까?

 

 

새벽에 일어나 큰 산에 절하고

저녁 자리에 들기 전에

다시 산에 머리 숙인다.

 

말없이 이렇게 하며 산다.

이러는 것은 아무 다른 뜻이 없다.

산 곁에서 오래 산을 바라보다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된 것.

 

무슨 소리를 들었다 할 수도 없다.

 

산에게 무엇 하나 묻지도 않는다.

고요히 산을 향해 있다가 홀연

자신에게 돌아서는 일

 

이것이 산과 나의 유일한 문답법이다.

 

 

이성선의 시 산문답(山問答)이다. 앞선 선승들의 지취(旨趣)와 방불치 아니한가. 말 없는 가운데 마음을 흐르게 하는 일, ()은 시인(詩人)에게 이러한 심법(心法)을 일깨워 준다.

 

 

 윤두서, 탁족도(濯足圖), 18세기, 23.5X17.3cm, 개인소장

옷자락 걷고 발을 담근다. 물끄러미 바라본다. 누가 보는가? 무얼 보는가? 이 소식을 알겠는가?

 

 

인용

목차

1. 산은 산, 물은 물

2. 선기와 시취

3. 설선작시 본무차별

4. 거문고의 소리는 어디서 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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