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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한시미학, 19. 선시, 깨달음의 바다 - 4. 거문고의 소리는 어디서 나는가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미학, 19. 선시, 깨달음의 바다 - 4. 거문고의 소리는 어디서 나는가

건방진방랑자 2021. 12. 7.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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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거문고의 소리는 어디서 나는가

 

 

장자(莊子)』 「산목(山木)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숲 속에 천년 묵은 나무는 옹이가 많이 져서 재목으로 쓸 수가 없는 까닭에 나무꾼의 도끼를 피할 수 있었고, 여관집의 거위는 잘 울지 않아 쓸모없다 하여 목숨을 잃었다. 둘 다 쓸모없기는 매 일반인데 하나는 그로 인해 수명을 연장하였고, 하나는 그 때문에 명을 재촉하였다. ! 그대는 어디에 처하겠는가? 장자는 망설임 없이 그 중간에 처하겠다고 한다.

 

그곳은 어디인가? 연암 박지원(朴趾源)낭환집서(蜋丸集序)에서, 익숙한 황희 정승의 이야기를 패러디 하여 이런 이야기로 들려준다.

 

 

황희 정승이 퇴근하여 집에 오니, 딸이 맞이하며 말하기를, “아버지! 이가 어디서 생겨요? 옷에서 생기죠?” “그렇지.” 그러자 딸이 좋아 하며 내가 이겼다!”한다. 이번엔 며느리가 나서며, “아버님! 이는 살에서 생기지요?” “맞았다.” “봐요. 아가씨! 아버님은 내가 맞다시는 걸.” 옆에 있던 부인이 화를 내며 말한다. “도대체 누가 영감더러 지혜롭다고 하는지 모르겠구려. 어떻게 둘 다 옳아요?” 정승은 빙그레 웃으며 말한다. “얘들아! 이리온. 내가 설명해 주마. 이란 놈은 살이 아니면 알을 까지 못하고, 옷이 아니면 붙어 있을 수가 없단다. 그래서 두 사람의 말이 다 옳다고 한 것이야. 그렇지만 옷을 장농 속에 두더라도 이는 있을 것이고, 벌거벗고 섰더라도 또한 가려울 테지. 땀이 무럭무럭 나서 온몸이 끈적끈적할 때 옷도 아니고 살도 아니고, 옷과 살의 그 사이에서 이는 생겨난단다.”

昔黃政丞自公而歸. 其女迎謂曰: “大人知蝨乎? 蝨奚生? 生於衣歟?” : “,” 女笑曰: “我固勝矣.” 婦請曰: “蝨生於肌歟?” : “是也婦笑曰: “舅氏是我.” 夫人怒曰: “孰謂大監智, 訟而兩是.” 政丞莞爾而笑曰: “女與婦來. 夫蝨非肌不化, 非衣不傅, 故兩言皆是也. 雖然, 衣在籠中, 亦有蝨焉; 使汝裸裎, 猶將癢焉, 汗氣蒸蒸, 糊氣蟲蟲, 不離不襯衣膚之間.”

 

 

이것과 저것의 사이, 그 중간의 텅빈 공간에서 이는 생겨난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니 그 중간쯤에서 타협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윤집궐중(允執厥中), 그 중간을 잡아라.

 

 

이 이야기를 소동파(蘇東坡)는 그의 금시(琴詩)에서 다시 이렇게 읊조린다.

 

若言琴上有琴聲 거문고에 소리가 있다 하면은
放在匣中何不鳴 갑 속에 두었을 젠 왜 안 울리나.
若言聲在指頭上 그 소리 손가락 끝에 있다 하면은
何不於君指上聽 그대 손끝에선 왜 안 들리나.

 

거문고의 소리는 어디서 나는가. 거문고와 손가락의 사이에서다. 거문고에 손가락이 닿아 소리로 울리는 이 미묘한 이치를 아는가? 소리는 그렇다면 어디에 숨어 있었더란 말인가? 깨달음은 어디에 있는가?

 

도연명(陶淵明) 음주(飮酒)시의 뒤 네 구절을 보면 다음과 같다.

 

山氣日夕佳 飛鳥相與還 산 기운 저녁이라 더욱 고운데 나는 새 짝을 지어 돌아가누나.
此中有眞意 欲辨已忘言 이 가운데 참된 뜻이 있으나 말을 하려 하나 이미 말을 잊었네.

 

동쪽 울타리 께에서 국화를 캐다가 허리를 펴고 먼 산을 바라본다. 남산 너머론 노을이 불타고, 산빛은 빗기는 햇살을 받아 몽환적 색조를 띠고 있다. 그 사이로 새들은 아스라한 영상을 남기며 날아간다. 그것을 넋 놓고 바라보던 시인은 가슴으로 다가서는 느낌을 가졌다. 그러나 그 느낌은 무어라고 말하려는 순간 혀끝을 감돌다 사라지고 말았다. 언어가 힘을 잃고 사라진 자리. 남산과 시인의 사이에 아무런 간격도 없다. 내가 남산이 되고, 남산이 곧 내가 된다. 언어가 끼여들 틈이 없다. 그래서 시인은 이미 말을 잊었다고 한 것이다. 송의 시덕조(施德操)남창적과록(北窗炙輠錄)에서 이 시를 두고 이때 달마는 아직 중국에 오지도 않았는데, 연명은 이미 선을 알고 있었다.”고 했다. 정곡을 통쾌하게 찌른다.

 

 

空山不見人 但聞人語響 빈 산 사람은 보이질 않고 다만 사람의 말소리만 들리네.
返景入森林 復照靑苔上 저물녘 볕 숲속에 비치어들어 다시금 푸른 이끼 비추는 구나.

 

시불(詩佛) 왕유(王維)녹시(鹿柴)란 작품이다. 산은 비어 사람도 없다. 그런데 어디서 도란도란 말소리가 들려온다. 그때 뉘엿한 햇볕은 다시 금 숲속에 들어 푸른 이끼 위에 빗긴다. 사람은 어디 있는가? 시인은 또 어디에 있는가? 시의 내용을 앞에 놓고 화가를 불러 그림으로 그리려 해도, 사람이 비집고 들어갈 자리는 그 어디에도 없다. 숲속에 비쳐드는 투명한 햇살처럼 허공에 빛나는 투명한 정신의 광휘가 감돌고 있을 뿐이다. 마음을 맑게 씻어준다.

 

월산대군의 시조에 다음과 같은 절창이 있다.

 

 

추강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치나 고기 아니 무노매라

으스름 달빛만 싣고 빈 배 저어 오노매라

 

 

그런데 사실 이 시조는 화정(華亭) 선자화상(船子和尙)의 게송을 시조역한 것이다. 원시를 보면 다음과 같다.

 

千尺絲綸直下垂 긴 낚시줄을 아래로 곧장 드리우니
一波纔動萬波隨 한 물결 일렁이자 일만 물결 움직이네.
夜靜水寒魚不食 고요한 밤 물이 차서 고기는 입질 않고
滿船空載月明歸 빈 배 가득 밝은 달만 싣고서 돌아오네.

 

포물선을 그으며 낚시줄이 물위로 떨어진다. 바늘이 수면 위에 한 점을 찍자, 동심원을 그리며 일만 물결이 파문을 일으킨다. 파문이 잔잔히 가라앉을 동안 나는 그저 그렇게 바라볼 뿐이다. 깊은 밤 만뢰(萬籟)는 적막한데 고기는 입질이 없다. 아니 애초부터 이편에서도 고기에는 마음이 없다. 돌아오는 길 배엔 고기 대신 휘황한 달빛을 가득 실었다. 말 그대로 텅 빈 충만의 세계이다.

 

 

寺在白雲中 白雲僧不掃 절집은 흰 구름 가운데 있고 흰 구름을 스님네는 쓸지를 않네.
客來門始開 萬壑松花老 손님 와야 비로소 문이 열리니 골짝마다 송화松花가 늙어가누나.

 

조선시대 이달(李達)불일암(佛日庵)이란 작품이다. 절집 뜨락엔 구름이 낙엽처럼 쌓여 있고, 무심한 흰 눈썹의 스님네는 푸른 눈으로 문을 열어준다. 손님이 아니었다면 영영 열리지 않았을지도 모를 문이다. 열린 문으로 구름을 쓸자 드러나는 골짜기 능선마다에선 송홧가루 날리며 세월이 늙고 있다. 속세에서 짊어지고 온 나그네의 근심도 흰 구름 속에 파묻혀 송홧가루로 날리운다.

 

 

南窓終日坐忘機 하루 종일 남창에서 마음 비워 앉았자니
庭院無人鳥學飛 뜨락에 사람 없어 새가 날기 배우네.
細草暗香難覔處 가는 풀의 여린 내음 찾기가 어려운데
淡烟殘照雨霏霏 엷은 안개 지는 해에 비는 부슬부슬.

 

강희맹병여음(病餘吟)이다. 큰 병을 앓은 뒤라서인지 눈빛이 더없이 투명하다. 볕 좋은 남창에 기대 해바라기를 하고 앉았는데, 발길 끊긴 마당에선 어린 새가 걸음마를 배우고 있다. 첫 비상을 시작하려 푸드득거리는 어린 새의 날갯짓에서 시인은 뜨거운 생명력을 느낀다. 그 생명력은 가는 풀의 여린 향기로 전이되어 나의 후각을 자극하고, 두리번거리는 눈길에 희뿌연 안개와 저녁노을, 부슬부슬 내리는 봄비, 선취(禪趣)가 물씬하다.

 

흔히 선시를 말하는 것을 보면, 앞에서 본 언어도단의 세계를 선시의 정수로 보아 다다이즘이나 쉬르리얼리즘의 시정신에 견주기도 한다. 겉만 보면 비슷하지만 실상은 전혀 같지가 않다. 언어의 충격적 배열이나 일상성의 파괴는 어디까지나 방편일 뿐이다. 깨달음의 세계를 언어로 설명하려는 무도함을 한 폭 풍경으로 읊는다면 이쯤 될 것이라는 비유이다. 오해가 깊다 보니 말장난도 모두 선시가 된다.

 

한편에선 승려가 쓴 시면 모두 선시라고 한다. 시중에 나와 있는 선시집이나 관련 연구서들에서 선시의 기준은 더욱 혼란스럽다. 불리(佛理)의 교조적 외침도 다 선시라 한다. 선시는 결코 선가의 전유물이 아니다. 선시는 언어도단을 즐기는 파괴적 취미도 아니고, 승려라는 신분으로 묶어 둘 수도 없다. 선시는 관성을 거부하고, 투명한 정신으로 사물과 만날 것을 요구한다. 선시는 자아를 버리고 사물과 하나될 것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물()과 아()의 사이를 가로막는 일체의 경계를 허물고, 내가 우주가 되고 우주가 내가 되는 존재 차원의 변환을 가져올 것을 요구한다.

 

선의 화두가 그러하듯이, 좋은 시는 타성에 젖은 뒤통수를 후려친다. 그러고 보면 문자로도 세울 수 없는 깨달음은 큰 깨달음이랄 수도 없겠다. 고려 때 진각국사(眞覺國師)의 설날 법어에 이런 것이 있다. “아이는 한 살 더 먹기를 바라고, 늙은이는 한 살 더 줄기를 바랄 것이다. 누가 한 해라는 시간을 정해놓았더냐. 차라리 한 해라는 시간을 없애버림은 어떨꼬?” 통쾌하지 않은가.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을 새로 시작한다. 담배 한 갑을 사면 스무 번을 새로 시작할 수 있고 운운한 것은 예전 어느 시인의 당선 소감이다. 상쾌하지 않은가. 시와 선은 이렇게도 만난다.

 

 

 

 

인용

목차

1. 산은 산, 물은 물

2. 선기와 시취

3. 설선작시 본무차별

4. 거문고의 소리는 어디서 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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