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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한시미학산책 - 19. 선시, 깨달음의 바다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미학산책 - 19. 선시, 깨달음의 바다

건방진방랑자 2021. 12. 7.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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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선시(禪詩), 깨달음의 바다

 

 

1. 산은 산, 물은 물

 

 

노승(老僧)30년 전 참선(參禪)하러 왔을 때는 산을 보면 산이었고 물을 보면 물이었다. 뒤에 와서 선지식(善知識)을 친견(親見)하고 깨달아 들어간 곳이 있게 되자, 산을 보아도 산이 아니었고 물을 보아도 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몸뚱이 쉴 곳을 얻으매 예전처럼 산을 보면 산이요 물을 보면 물일뿐이로다.

 

 

성철(性澈) 스님의 법어(法語)로 해서 유명해진 청원유신(靑源惟信) 선사의 공안(公案)이다. 선사(禪師)30년간의 수행 끝에 처음 본래 자리로 돌아와 앉아 있다. 그러고 보면 30년의 공력은 본래 자리로 돌아오기 위한 고초일뿐이었다. 한때 눈앞이 번쩍 열리는 깨달음의 빛 속에서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닌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와 다시 보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일 뿐이다. 무엇이 어떻다는 말인가? 3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은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그 사이의 소식을 알 수 있다면 그는 이미 깨달음의 경계에 진입한 자일 터이다.

 

이 뜻을 받아 고려 때 혜심(慧諶)은 다시 이렇게 말한다.

 

 

하늘이 땅이고 땅이 곧 하늘이라. 산은 물이요 물은 산이로다. 중은 속인이요, 속인이 중이로다. 이 이치를 이미 깨닫는다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며, 중은 중이고 속인은 속인일러니.

 

 

이것이 무슨 말인가? 이 깨달음의 경지를 그는 다시 부연한다.

 

 

깨달은 자는 포의준자(布袋尊者)가 똥덩이를 들고서 이것이 극락세계다라 하고, 마른 생선 조각을 들고서 이것이 도솔천의 궁전 밑이다.”라 한 뜻을 알게 될 것이다. 깨달은 자는 절굿대에 꽃이 피고, 부처의 얼굴이 온통 추함을 알게 될 것이다. 깨달은 자는 빈손에 호미를 쥐고 머리로 걸어가며, 물소를 타고서 사람이 다리 위를 지나는데, 다리가 흐르고 물은 흐르지 않는 이치를 알게 될 것이다.

 

 

선가(禪家)의 깨달음은 미묘하여 말로 세워 전할 수가 없다. 초조(初祖) 달마(達摩)가 동쪽으로 건너 와 말로도 세울 수 없고 가르침으로도 전할 수 없는 교외별전 불립문자 직지인심 견성성불(敎外別傳, 不立文字; 直指人心, 見性成佛)”의 법을 전한 이래, 새로운 사유의 방식을 제시한 선풍(禪風)이 중국에서 크게 진작되었다.

 

()이란 무엇인가. 범어(梵語)댜나(Dhyāna)를 옮긴 이 말은 원래는 명상(瞑想)’의 의미를 지녔다. ()은 달리 정려(靜慮)’ 또는 사유수(思惟修)’라 옮기기도 하나, ‘정혜(定慧)’와 같은 뜻으로 보기도 한다. 규봉(圭峯) 종밀(宗密)선원제전집(禪源諸詮集)에서 근심과 기쁨을 마음에서 잊는 것, 이것이 바로 선(, 憂喜心忘便是禪).”이라 하였다. 남천축국보리달마선사관문(南天竺國菩提達摩禪師觀門)이란 불경에 보면, 달마와 제자 사이에 선()의 의미를 두고 다음과 같은 문답이 보인다.

 

 

묻기를,

무엇을 이름하여 선정(禪定)이라 합니까?”

대답하기를,

()은 어지러운 마음이 일어나지 않음을 말하나니, 생각도 없고 움직임도 없는 것이 선정(禪定)이니라. 마음을 단정히 하고 생각을 바로 하여, ()도 없고 멸()도 없으며 감도 없고 옴도 없이 고요히 움직이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선정(禪定)이라 하느니라. 말을 비우고 생각을 정히 하여 마음으로 깨달아 고요 속에 침잠하여, 갈 때나 머물 때나 앉았거나 누웠거나 언제나 고요하여 흐트러짐이 없는 까닭에 선정(禪定)이라 하느니라.”

 

 

내가 나를 잊어, 나도 없고 물()도 없는 자리, 일체의 경계가 모두 허물어지고 난 그 텅 빈 허공, 이것이 선()의 세계이다. 이 세계는 증심상조(證心相照), 통연자득(洞然自得)의 깨달음이 있을 뿐, 언어와 사변으로서는 도달할 길이 없다.

 

 

혜심(慧諶)은 위 같은 글에서 회양선사(懷讓禪師)의 시를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懷州牛喫草 益州馬腹脹 회주(懷州) 땅의 소가 풀을 뜯는데 익주(益州)의 말이 배가 터졌네.
天下覓醫人 炙猪左膊上 천하에 의원을 찾아가 보니 돼지의 어깨 위에 뜸질을 하네.

 

말 그대로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다. 풀은 회주(懷州)의 소가 먹었는데, 수 천리 떨어진 익주(益州)의 말이 배가 터진다. 고쳐 달라고 의원을 찾아가니 엉뚱하게 돼지의 어깨에다 뜸질을 한다. 럭비공처럼 이리저리 튀니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아니 혜심(慧諶)은 아예 갈피를 잡을 생각은 버리라고 요구하는 듯하다. ‘이언절려(離言絶慮)’, 말을 떠나고 생각이 끊어진 곳, 그곳의 소식은 언어로 설명하려 하면 이렇듯 헛김이 샌다. 언어의 집착에서 벗어나라. 분별하는 생각을 끊어라.

 

海底燕巢鹿胞卵 바다 밑 제비 둥지에 사슴이 알을 품고
火中蛛室魚煎茶 불 속 거미집선 고기가 차 달이네.
此家消息誰能識 이 집안 소식을 뉘 능히 알리
白雲西飛月東走 흰 구름 서편으로, 달은 동으로.

 

근대의 선객(禪客) 효봉선사(曉峯禪師)의 오도송(悟道頌)이다. 말이 꼬여도 한참 꼬였다. 허공을 나는 제비의 집이 어째 바다 밑바닥에 있으며, 태생동물인 사슴은 어쩐 일로 바다 속 제비 둥지에 들어와 알을 품고 있는가. 불 속에 거미집이나, 거기에 올라와 차를 달이는 물고기에 와서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달은 서편에 떨어지는 것인데, 어찌 동으로 달려가는 이치가 있는가. 꼬집어내려 하면 할수록 오리무중이다. 시인이 말하고 있는 이 집안 소식의 정체는 무엇일까.

 

 

(曉峯) 스님의 다음 법어(法語)에서도 이러한 반상(反常)’은 계속된다.

 

若人欲越四相山 누구든 사상산(四相山)을 건너랴거든
也要須杖兎角杖 토끼 뿔 지팡이를 짚어야 하고,
若人欲渡生死海 생사(生死)의 바다를 건너려 하면
也要須駕無底船 밑 빠진 배를 타야 하리라.

 

토끼에게 무슨 뿔이 있으며, 설사 있다 한들 상아가 아닌 다음에야 어찌 지팡이로 만들 수 있으랴. 밑 빠진 배를 타고 건널 수 있는 바다는 어떤 바다인가? 읽을수록 알쏭달쏭하고 들을수록 해괴하다. 그렇다고 그 누구도 사상산(四相山)과 생사해(生死海)를 건널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니, 행간의 뜻은 찾을수록 첩첩산중이다.

 

斫來無影樹 燋盡水中漚 그림자 없는 나무를 베어와서는 물속의 거품에다 태워 버린다.
可笑騎牛者 騎牛更覓牛 우습구나, 소를 타고 있는 이 소 타고서 다시금 소를 찾다니.

 

서산대사(西山大師)가 고제(高弟) 소요(逍遙) 태능선사(太能禪師)에게 내린 게송(偈頌) 가운데 한 수이다. 이번에는 그림자 없는 나무를 물속에서 태워 버린다고 한다. 무슨 말인가? 그래도 34구는 좀 알아들을 법하다. 소를 타고 있는 이가 소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니 말이다. 불가에서 멱우(覓牛)’는 구도(求道)와 같다. ()의 실체를 붙들고 있으면서도 미망(迷妄)에 사로잡혀 자꾸만 몸 밖에서 소를 찾는다는 말이다.

 

百千經卷如標指 온갖 경전의 말 표지와 같아
因指當觀月在天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봐야지.
月落指忘無一事 달 지고 손가락 잊어 아무 일 없거니
飢來喫飯困來眠 배고프면 밥 먹고 곤하면 자네.

 

소요(逍遙) 태능(太能)의 시이다. 온갖 경전에 쓰여진 불법(佛法)의 말씀들은 모두 깨달음의 바다로 이끌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경전 탐구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손을 들어 달을 가리키는데, 달은 안 보고 손가락만 보고 있으니 이 아니 안타까운가. 그러나 따지고 보면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어늘 어디에서 티끌 생각이 일어난단 말인가. 달도 지고 손가락도 잊은 그곳, 분별하고 사량(思量)하는 마음조차 끊어진 그곳에서 하는 일이란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잠자는 것뿐이다. 언어를 버려라. 생각을 버려라. 그 생각을 버려야겠다는 생각마저 버려라. 그때 깨달음의 세계가 통쾌하게 열리리라.

 

김석신(金碩臣), 고승한담도(高僧閑談圖), 18세기, 36X31cm, 개인소장.

감도 없고 옴도 없다. 텅 비었고 꽉 찼다. 나는 누군가? 너는 누구냐!

 

 

2. 선기(禪機)와 시취(詩趣)

 

 

일본의 타쿠안(澤庵) 화상은 유명한 검술가였다. 그는 제자인 야규우에게 검술에 대한 충고의 말을 남겼다. 그 충고의 핵심은 항상 마음을 흐르는상태로 유지하라는 것이었다. 진정한 검술은 의식적으로 얻어진 기술적 기교를 넘어서는 것이다. 높은 경지의 검술가는 적과 마주하여 서 있을 때, 적도 자신도 적의 검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모든 기교를 잊고 무의식의 명령에 몸을 맡기고 서 있다. 검을 휘두르는 것은 이제 그가 아니다. 실제 어떤 검술가들은 적을 쓰러뜨리고 나서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스즈키 교수의 ()과 정신분석(精神分析)이란 책에 실려 있는 이야기이다. 항상 흐르는상태로 마음을 유지하라. 흘러가는 상태에 자신의 정신을 얹으라.

 

개심사(開心寺)에 가면 심검당(尋劒堂)이란 건물이 있다. 또 오대(五代)의 시인 영운(靈雲) 지근선사(志勤禪師)의 오도송(悟道頌)에도 구도(求道)의 추구를 검객(劍客)을 찾아다님에 비유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三十年來尋劍客 삼십 년 세월 동안 검객 찾느라
幾回落葉又抽枝 그 몇 번 낙엽 지고 새 닢 났던가.
自從一見桃花後 단 한 번 복사꽃 보고 나서는
直至如今更不疑 이 날에 이르도록 의심 없다네.

 

최고의 고수(高手)를 만나 상승의 검법을 익히려고 삼십 년의 세월을 방황했었다. 낙엽 지는 가을 산과 꽃망울 부푸는 봄 뫼를 헤매기 그 얼마였던가. 그러나 정작 그가 그 방랑의 길에서 전신으로 만난 것은 그토록 찾아 헤매던 검객(劍客)이 아니라, 어느 산모롱이에 무심히 피어나던 복사꽃 한 떨기였다. 그 한 번의 만남으로 그는 지금까지 지고 다니던 의심의 자락에서 완전히 놓여날 수 있었다. 검객(劍客)은 어디 있는가. 마음이 흘러가는 곳, 마음의 문이 열려 사물과 내가 하나 되는 자리에 있다. 함초롬 이슬 머금은 꽃잎 위에 칼끝 같은 깨달음이 있다.

 

 

예전 선승들은 깨달음을 묻는 제자에게 봉()이나 할()을 안겨주거나, 아니면 아예 주먹질을 하는 등의 방법을 썼다. 그도 저도 안 될 때에는 시법게(示法偈)를 남겼는데, 그 깨달음의 세계란 것이 워낙에 미묘하고 알기 어려운 것이어서 구체적인 설명 대신에 앞서 본 것과 같은 해괴한 상징과 비유를 동원하여 그들의 오성(悟性)을 열어주려 하였다. 그밖에 도를 깨닫는 순간의 느낌을 노래하는 오도송(悟道頌) 같은 것도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길 없는 깨달음의 경지를 비유와 상징의 화법으로 전달하려 하였다. ()의 사유와 시()의 방법은 이 지점에서 서로 만나게 된다.

 

고려 때 선승 경한(景閑)조사선(祖師禪)이란 글에서 시와 선이 만나는 지점을 이렇게 설명한다.

 

 

달마(達摩)가 동쪽으로 온 까닭은 무엇입니까?”하고 물으면, “아득히 강남 땅 2,3월을 생각자니, 자고새 우는 곳에 온갖 꽃 향기롭네[遙憶江南三二月, 澝嘑啼處百花香].”라고 대답한다. 또 스님이 조사(祖師)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은 무엇입니까?”하고 물으면, 대답하기를, “뉘엿한 해에 강과 산은 곱기도 하고, 봄바람에 꽃과 풀은 향기롭구나[遲日江山麗, 春風花草香].”라고 한다. 또 이르기를, “산꽃이 활짝 피자 비단만 같고, 시냇물은 쪽빛보다 더욱 푸르다[山花開似錦, 澗水碧於藍].”라고도 한다.

 

 

이것을 묻는데 저것을 대답한다. 도무지 요령부득의 동문서답(東問西答)이다. 그러면서도 성동격서(聲東擊西), 지상매회(指桑罵檜)의 통쾌함이 있다.

 

다음 선승(禪僧)들의 몇 편 시는 선기(禪機)와 시취(詩趣)가 한데 넘나, 시선일여(詩禪一如)의 높은 경계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는 경우이다.

 

飢來喫飯飯尤美 배고파 밥 먹으니 밥맛이 좋고
睡起啜茶茶更甘 일어나 차 마시니 차맛이 달다.
地僻從無人扣戶 후진 곳 문 두드리는 사람도 없어
庵空喜有佛同龕 텅 빈 암자 부처님과 함께 함이 기쁘다.

 

충지(沖止)한중우서(閑中偶書)란 작품이다. 배고프면 밥 먹고, 잠깨어 목마르면 차를 마신다. 외진 곳에 자리한 빈 암자엔 아무도 찾는 이 없어 사립문은 늘 걸린 그대로이고, 그 속에 한 스님이 부처님과 함께 불당에 앉아 있다. 그는 기쁘다고 말한다.

 

 

白雲堆裡屋三間 흰 구름 쌓인 곳에 세 칸 초가집
坐臥經行得自閑 앉아 눕고 쏘다녀도 제 절로 한가롭네.
澗水冷冷談般若 시냇물은 졸졸졸 반야(般若)를 속삭이고
淸風和月遍身寒 맑은 바람 달빛에 온 몸이 서늘하다.

 

고려 말의 선승(禪僧) 혜근(慧勤)산거(山居)란 작품이다. 배고프면 밥 먹고, 곤하면 자는 생활이지만 무위도식과는 엄연이 다르다. 흰 구름 속 초가삼간에서도 일말의 누추를 찾을 길 없다. 시냇물은 졸졸졸 흘러가며 반야(般若)의 설법을 들려주고, 맑은 바람과 흰 달빛은 내 정신을 쇄락케 한다.

 

卷箔引山色 連筒分澗聲 구슬 발 걷어서 산 빛 들이고 대통 이어 시냇물 소릴 나누네.
終朝少人到 杜宇自呼名 아침내 아무도 오지를 않고 두견새 제 홀로 이름 부른다.

 

충지(沖止)한중잡록(閑中雜詠)가운데 한 수이다. 발을 걷어 산빛을 방안으로 끌어들이고, 대통을 이어서 시냇물소리를 뜰 안에서 듣는다. 산빛과 시냇물소리를 함께 하는 아침, 아무도 이 흥취(興趣)를 깨는 이 없다. 이따금 적막을 견디다 못한 두견새가 제 이름을 부르며 울 뿐이다.

 

다시 그의 거산시(居山詩)한 수를 보자.

 

日日看山看不足 날마다 산을 봐도 또 보고 싶고
時時聽水聽無厭 물소리 늘 들어도 싫증나잖네.
自然耳目皆淸快 저절로 귀와 눈 맑게 트이니
聲色中間好養恬 소리와 빛깔 속에 마음 기른다.

 

산은 언제나 거기 그렇게 서 있고, 나는 언제나 여기 이렇게 산을 바라본다. 물은 쉬임 없이 흘러가며 무상(無上)의 설법을 들려준다. 산 빛을 채워 해맑고, 물소리로 씻어 깨끗해진 눈과 귀를 안으로 돌려 고요 속에 마음을 기른다.

 

高臺獨坐不成眠 높은 누대 홀로 앉아 잠 못 이루니
寂寂孤燈壁裏懸 쓸쓸히 외론 등불 벽 위에 걸려있네.
時有好風吹戶外 창밖으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却聞松子落庭前 뜰 앞에서 들리는 솔방울 지는 소리.

 

조선조 정관선사(靜觀禪師)가 금강대(金剛臺)에 올라지었다는 시다. 사바의 세계는 구름 아래 펼쳐져 있고, 그 위의 스님은 잠 못 이룬다. 속세에 두고 온 까닭 모를 근심이 있는 것도 아닐진대, 가물거리는 외로운 등불은 모두 잠들어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보리(菩提)의 불빛이 아닐 것인가. 꺼지지 않는 등불과 오롯이 깨어있는 나는 등가의 심상으로 교감한다. 바로 그때 바람은 그 마음을 헤아렸다는 듯이 문풍지를 흔들고, 또 솔방울은 소리를 내며 뜨락으로 떨어진다.

 

 

閱過行年六十七 더듬어 지나온 길 예순 일곱 해
及到今朝萬事畢 오늘 아침 이르러 모든 일 끝나도다.
故鄕歸路坦然平 고향 돌아가는 길 평탄도 한데
路頭分明曾未失 갈 길이 뚜렷하여 길 잃지 않겠구나.
手中纔有一枝笻 수중엔 겨우 지팡이 하나지만
且喜途中脚不倦 도중에 다리 품 덜어줌 기뻐하노라.

 

충지(沖止) 스님의 임종게(臨終偈)이다. 어떤 삶 끝에서 이렇듯 투명한 정신의 자락이 펼쳐지는가. 스님은 이 게송을 남기고 옷을 갈아입은 뒤 그대로 입적하였다. 생사(生死)의 바다를 훌쩍 건너 저승길을 마치 소풍 가듯 떠나가고 있다. 보우(普愚) 스님의 사세송(辭世頌)또한 생사(生死)의 바다를 단숨에 뛰어넘는 장엄함이 있다.

 

人生命若水泡空 인생은 물거품 부질없는 것
八十餘年春夢中 여든 몇 해 생애가 봄 꿈속이라.
臨終如今放皮袋 죽음 임해 가죽 자루 벗어던지니
一輪紅日下西峯 한 덩이 붉은 해 서산에 지네.

 

인생은 물거품이요 한바탕 봄꿈이다. 육신을 버리는 것은 가죽 부대를 벗어던지는 것이다. 무엇이 남는가. 붉은 해가 서산에 진다. 내 육신은 가도 지는 해는 내일 아침이면 다시 붉은 불덩이로 되살아난다. 무엇이 슬프고 안타까울 일이 있는가. 그렇다면 이런 시는 어떨까?

 

 

새벽에 일어나 큰 산에 절하고

저녁 자리에 들기 전에

다시 산에 머리 숙인다.

 

말없이 이렇게 하며 산다.

이러는 것은 아무 다른 뜻이 없다.

산 곁에서 오래 산을 바라보다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된 것.

 

무슨 소리를 들었다 할 수도 없다.

 

산에게 무엇 하나 묻지도 않는다.

고요히 산을 향해 있다가 홀연

자신에게 돌아서는 일

 

이것이 산과 나의 유일한 문답법이다.

 

 

이성선의 시 산문답(山問答)이다. 앞선 선승들의 지취(旨趣)와 방불치 아니한가. 말 없는 가운데 마음을 흐르게 하는 일, ()은 시인(詩人)에게 이러한 심법(心法)을 일깨워 준다.

 

 

 윤두서, 탁족도(濯足圖), 18세기, 23.5X17.3cm, 개인소장

옷자락 걷고 발을 담근다. 물끄러미 바라본다. 누가 보는가? 무얼 보는가? 이 소식을 알겠는가?

 

3. 설선작시 본무차별(說禪作詩, 本無差別)

 

 

두보(杜甫)시 짓고 용사(用事)함은 마땅히 선가(禪家)의 말과 같아야 한다. 물속에 소금이 녹아 있어도 물을 마셔 보아야 소금의 짠 맛을 알 수가 있듯이.”라고 말했다. 물속에 소금을 넣으면 소금은 물에 녹아 보이질 않는다. 입을 대고 마셔 보면 그제서야 짠 맛이 드러난다. 시의 언어는 물속에 녹아든 소금의 맛과 같아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있는 맛, 직접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뜻, 선가(禪家)의 언어가 또한 그렇다. 서청시화(西淸詩話)에 보인다.

 

당나라 때 시승(詩僧) 제기(齊己)는 그의 유시(喩詩)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日用是何專 吟疲卽坐禪 날마다 힘쓰는 일 무엇이던가 읊조리다 지치면 좌선(坐禪)을 하지.

 

하루 종일 시에 골몰하다가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좌선삼이(坐禪三怡)에 들어 누인다. 그 밖에 일이야 상관할 것이 없다. 그에게 있어 시()와 선()은 따로 노는 별개의 물건이 아니다.

 

또 그는 기정곡낭중(寄鄭谷郞中)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詩心何以傳 所證自同禪 시심(詩心)을 어떻게 전한단 말인가 증명함이 절로 선()과 같구나.

 

시심(詩心)을 설명하기나 선()을 설명하기나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전수임에는 한 치의 차이가 없다. ()을 말로 설명할 수 없듯이, ()의 깨달음 또한 언어의 영역 밖에 있다. 수많은 이론가들이 시론(詩論)을 집필하였어도, 그 글을 읽어 시인이 되는 법이 없다.

 

소식(蘇軾)발이단서시권후(跋李端敍詩卷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暫借好詩銷永夜 좋은 시 잠시 빌려 긴 밤 새우다
每逢佳處輒參禪 좋은 곳을 만나면 문득 참선(參禪)하네.

 

깊은 밤 고요히 앉아 시를 읽다가 득의회심(得意會心)의 구절과 만나면 시집을 놓고 고요히 삼매(三昧)의 선정(禪定)에 빠져든다는 것이다. 이럴 때 그에게 있어 시()를 읽는 것은 선()의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함과 다름이 없다.

 

() 나라 때 이지의(李之儀)여이거언(與李去言)에서 ()을 말하는 것과 시()를 짓는 것은 본시 차별이 없다[說禪作詩, 本無差別].”고 하였고, 엄우(嚴羽)창랑시화(滄浪詩話)에서 시를 논함은 선()을 논함과 같다. 대저 선도(禪道)는 오직 묘오(妙悟)에 달려 있고, 시도(詩道) 또한 묘오(妙悟)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 또 범온(范溫)잠계시안(潛溪詩眼)에서 유자후(柳子厚)의 시를 논하면서, “문장을 앎은 마치 선가(禪家)에 돈오(頓悟)의 문()이 있는 것 같이 해야 한다. 대저 법문(法門)은 천차만별이니 모름지기 한 번 말을 돌려 깨달음에 들어감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양시(楊時)시를 배움은 언어문자에 있지 아니하니, 마땅히 그 기미(氣味)를 생각해야만 시의 뜻을 얻는다.”고 한 것도 다 한 뜻이다.

 

원호문(元好問)은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詩爲禪客添錦花 시는 선객(禪客)에게 비단 위 꽃이 되고
禪是詩家切玉刀 ()은 시가(詩家)의 옥()을 끊는 칼이라네.

 

선객(禪客)이 참선(參禪)의 길에서 깨달은 오의(奧義)를 시()의 형식을 빌려 쓰니 금상첨화(錦上添花)가 아닐 수 없다. 시인(詩人)은 또 선()의 방식을 빌어 자신의 의상(意象)을 표현하니 절옥도(切玉刀)를 지닌 셈이라는 것이다.

 

선학(禪學)이 발흥한 송() 나라 이래로 시()와 선()을 나란히 보는 이러한 시선일여(詩禪一如)’의 인식은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시선일여(詩禪一如)의 인식이 보편화됨에 따라, 시를 배우는 과정을 선()에 비유한 이선유시(以禪喩詩)의 생각도 활발하게 제출되었다.

 

學詩渾似學參禪 시 배움은 흡사 참선(參禪) 배움 같거니
竹榻蒲團不計年 대 걸상 부들자리에 해를 따지지 않네.
直待自家都了得 스스로 깨쳐 얻음을 얻게 되면
等閑拈出便超然 멋대로 읊조려도 문득 초연하리라.

 

북송(北宋)의 시인 오가(吳可)학시시(學詩詩)이다. 대나무 걸상 위에 부들자리를 깔고 좌선(坐禪)을 오래 했다 해서 선()의 화두(話頭)를 터득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자연(自家)료득(了得)’이다. 증심(證心)하는 깨달음이 있고 보면 그저 심상히 읊조리는 말도 초연(超然)한 상승(上乘)의 경계가 된다. 오가(吳可)의 위 시가 널리 알려지자, 많은 시인들의 그 첫 구를 관주(貫珠)하여 비슷한 작품들을 여럿 남겼다. 명나라 때 도목(都穆)논시시(論詩詩)3수 같은 것이 그 좋은 예이다.

 

學詩渾似學參禪 시 배움은 흡사 참선(參禪) 배움 같거니
不悟眞乘枉百年 진제(眞諦)를 깨닫잖곤 백년이 부질없다.
切莫嘔心幷剔肺 심장 토하고 폐부 도려냄도 더할 나위 없겠지만
須知妙悟出天然 묘오(妙悟)는 천연(天然)에서 나옴을 알아야지.

 

깨달음 없는 참선(參禪)은 공연히 제 몸을 들볶는 것이나 같다. 살아 숨 쉬는 깨달음이 없는 시는 말장난일 뿐이다. 선승(禪僧) 신찬(神贊)은 일찍이 깨달음 없이 습관이 되어버린 참선(參禪)을 일러, “열린 문으로는 나가려 하지 않고, 창문을 두드리는 어리석음이여. 문종이를 백년을 두드려 본들, 언제나 나가볼 기약 있을꼬[空門不肯出, 投窓也大痴. 百年鑽古紙, 何日出頭期].”라 노래한 바 있다. 방 안으로 날아든 벌은 환히 열린 문은 마다하고 굳이 닫힌 창문만 두드린다. 자유의 문은 저기 저렇게 활짝 열려 있는데 집착을 놓지 못해 그걸 보지 못한다. 시인이 시의 묘리를 깨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다. 심장을 토해내고 폐부를 도려내는 고심참담도 좋지만, 진정한 깨달음이란 원래 없는 것을 쥐어 짜내는 조탁과는 관계가 없다.

 

 

學詩渾似學參禪 시 배움은 흡사 참선(參禪) 배움 같거니
筆下隨人世豈傳 앞 사람을 흉내 내면 그 누가 알아주리.
好句眼前吟不盡 좋은 시구 눈앞에서 끝없이 읊조려도
痴人猶自管窺天 어리석은 이들은 우물 안 개구리라.

 

예전 불법(佛法)의 대의(大義)를 묻는 제자의 물음에 임제(臨濟)는 할(), 덕산(德山)은 몽둥이로 대답하였다. 선가(禪家)의 화두(話頭)도 송대(宋代) 이후로 오면 아포리즘의 어조를 띄게 되어 영동(靈動)하는 활법(活法)으로서가 아닌 어정쩡한 흉내가 되고 만다. 자가(自家)의 체인(體認) 없는 흉내만으로는 무문(無門)의 관문도 소용이 없다. ()의 법도 이와 같다. 눈앞에 놓인 좋은 시구들을 백날 읊조려 본들, 미묘한 깨달음과 만나지 못하면 종내 한 소식은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좋은 시를 읽으면서는 그 안에 녹아 있는 생기(生機)를 느낄 일이지, 어투를 흉내 내어서는 안 된다. 대롱을 통해 하늘을 보니 그 하늘이 온전히 보일 턱이 없다.

 

예전 사명당이 금강산 유점사로 서산대사를 찾아갔다. “어디서 왔는고?” “어디서 왔습니다.” “몇 걸음에 왔는고?” 이 대목이 중요하다. 만보계를 달고 온 것도 아니니 그걸 어찌 안단 말인가. 그래도 대개 오늘 내가 걸은 시간이 몇 시간이니 한 시간에 몇 걸음을 걸을까. 뭐 이런 궁리를 하고 앉았다가는 할()이나 몽둥이 밖에는 기다릴 것이 없다. 사명당은 즉시 벌떡 일어난다. 양 팔을 활짝 펴들고 한 바퀴 빙 돈다. “이렇게 왔습니다.” 이걸로 끝이 아니다. “어느 길로 왔는고?” “옛 길을 따라 왔습니다.” 스승은 벌컥 소리 지른다. “옛 길을 따르지 말라.” 제법 근사한 대답을 했다고 득의하던 사명당이 이번엔 한방 제대로 맞았다. 이른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逢佛殺佛]’는 심법(心法)의 전수이다.

 

옛 사람의 길을 따르지 말라. 너는 너의 길로, 나는 나의 길로 선()에 도달하고 시()를 깨달을 뿐이다. 남의 흉내로는 안 된다. 추사(秋史)는 한 사람만으로 족하다. 추사(秋史)와 방불한 조희룡(趙熙龍)은 오히려 그로 인해 손가락질을 받는다. 그러나 안목 없는 세상은 자꾸만 옛 길을 따라오라고 요구한다. 이렇게 쓰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요한다. 그렇다면 좋은 시는 끊임없는 반란의 산물이어야 한다. 친숙한 관습과의 결별, 익숙해진 접점에서 벗어나기를 쉼 없이 추구해야 한다. 증기(曾幾)시를 배움은 참선(參禪)함과 같나니, 삼가하여 죽은 시구일랑은 거들떠보지 말라[學詩如參禪, 愼勿參死句].”라 한 것이 바로 이 뜻이다. 다시 이어지는 셋째 수이다.

 

學詩渾似學參禪 시 배움은 흡사 참선 배움 같거니
語要驚人不在聯 말이 사람 놀라게 해야지 꾸밈만으론 안 되지.
但寫眞情幷實境 단지 진정(眞情)과 실경(實境)만을 그려낼 뿐
任他埋沒與流傳 묻히고 전함은 내 맡겨 둘 일이다.

 

말이 사람을 놀래키려면 어떠해야 할까? 낡고 정체된 인식을 깨부수는,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전환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것은 자구를 탁련(琢聯)하는 기교로 성취될 수 없다. 절묘기발한 수사도 능사가 아니다. 시인은 거짓 없는 진정(眞情)을 꾸밈없는 실경(實境)에 담아 그려낼 뿐이다. 내 시가 뒷세상에 잊혀질까, 길이 기억될까 하는 것은 내 간여할 바 아니다.

 

 

 

 

4. 거문고의 소리는 어디서 나는가

 

 

장자(莊子)』 「산목(山木)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숲 속에 천년 묵은 나무는 옹이가 많이 져서 재목으로 쓸 수가 없는 까닭에 나무꾼의 도끼를 피할 수 있었고, 여관집의 거위는 잘 울지 않아 쓸모없다 하여 목숨을 잃었다. 둘 다 쓸모없기는 매 일반인데 하나는 그로 인해 수명을 연장하였고, 하나는 그 때문에 명을 재촉하였다. ! 그대는 어디에 처하겠는가? 장자는 망설임 없이 그 중간에 처하겠다고 한다.

 

그곳은 어디인가? 연암 박지원(朴趾源)낭환집서(蜋丸集序)에서, 익숙한 황희 정승의 이야기를 패러디 하여 이런 이야기로 들려준다.

 

 

황희 정승이 퇴근하여 집에 오니, 딸이 맞이하며 말하기를, “아버지! 이가 어디서 생겨요? 옷에서 생기죠?” “그렇지.” 그러자 딸이 좋아 하며 내가 이겼다!”한다. 이번엔 며느리가 나서며, “아버님! 이는 살에서 생기지요?” “맞았다.” “봐요. 아가씨! 아버님은 내가 맞다시는 걸.” 옆에 있던 부인이 화를 내며 말한다. “도대체 누가 영감더러 지혜롭다고 하는지 모르겠구려. 어떻게 둘 다 옳아요?” 정승은 빙그레 웃으며 말한다. “얘들아! 이리온. 내가 설명해 주마. 이란 놈은 살이 아니면 알을 까지 못하고, 옷이 아니면 붙어 있을 수가 없단다. 그래서 두 사람의 말이 다 옳다고 한 것이야. 그렇지만 옷을 장농 속에 두더라도 이는 있을 것이고, 벌거벗고 섰더라도 또한 가려울 테지. 땀이 무럭무럭 나서 온몸이 끈적끈적할 때 옷도 아니고 살도 아니고, 옷과 살의 그 사이에서 이는 생겨난단다.”

昔黃政丞自公而歸. 其女迎謂曰: “大人知蝨乎? 蝨奚生? 生於衣歟?” : “,” 女笑曰: “我固勝矣.” 婦請曰: “蝨生於肌歟?” : “是也婦笑曰: “舅氏是我.” 夫人怒曰: “孰謂大監智, 訟而兩是.” 政丞莞爾而笑曰: “女與婦來. 夫蝨非肌不化, 非衣不傅, 故兩言皆是也. 雖然, 衣在籠中, 亦有蝨焉; 使汝裸裎, 猶將癢焉, 汗氣蒸蒸, 糊氣蟲蟲, 不離不襯衣膚之間.”

 

 

이것과 저것의 사이, 그 중간의 텅빈 공간에서 이는 생겨난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니 그 중간쯤에서 타협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윤집궐중(允執厥中), 그 중간을 잡아라.

 

 

이 이야기를 소동파(蘇東坡)는 그의 금시(琴詩)에서 다시 이렇게 읊조린다.

 

若言琴上有琴聲 거문고에 소리가 있다 하면은
放在匣中何不鳴 갑 속에 두었을 젠 왜 안 울리나.
若言聲在指頭上 그 소리 손가락 끝에 있다 하면은
何不於君指上聽 그대 손끝에선 왜 안 들리나.

 

거문고의 소리는 어디서 나는가. 거문고와 손가락의 사이에서다. 거문고에 손가락이 닿아 소리로 울리는 이 미묘한 이치를 아는가? 소리는 그렇다면 어디에 숨어 있었더란 말인가? 깨달음은 어디에 있는가?

 

도연명(陶淵明) 음주(飮酒)시의 뒤 네 구절을 보면 다음과 같다.

 

山氣日夕佳 飛鳥相與還 산 기운 저녁이라 더욱 고운데 나는 새 짝을 지어 돌아가누나.
此中有眞意 欲辨已忘言 이 가운데 참된 뜻이 있으나 말을 하려 하나 이미 말을 잊었네.

 

동쪽 울타리 께에서 국화를 캐다가 허리를 펴고 먼 산을 바라본다. 남산 너머론 노을이 불타고, 산빛은 빗기는 햇살을 받아 몽환적 색조를 띠고 있다. 그 사이로 새들은 아스라한 영상을 남기며 날아간다. 그것을 넋 놓고 바라보던 시인은 가슴으로 다가서는 느낌을 가졌다. 그러나 그 느낌은 무어라고 말하려는 순간 혀끝을 감돌다 사라지고 말았다. 언어가 힘을 잃고 사라진 자리. 남산과 시인의 사이에 아무런 간격도 없다. 내가 남산이 되고, 남산이 곧 내가 된다. 언어가 끼여들 틈이 없다. 그래서 시인은 이미 말을 잊었다고 한 것이다. 송의 시덕조(施德操)남창적과록(北窗炙輠錄)에서 이 시를 두고 이때 달마는 아직 중국에 오지도 않았는데, 연명은 이미 선을 알고 있었다.”고 했다. 정곡을 통쾌하게 찌른다.

 

 

空山不見人 但聞人語響 빈 산 사람은 보이질 않고 다만 사람의 말소리만 들리네.
返景入森林 復照靑苔上 저물녘 볕 숲속에 비치어들어 다시금 푸른 이끼 비추는 구나.

 

시불(詩佛) 왕유(王維)녹시(鹿柴)란 작품이다. 산은 비어 사람도 없다. 그런데 어디서 도란도란 말소리가 들려온다. 그때 뉘엿한 햇볕은 다시 금 숲속에 들어 푸른 이끼 위에 빗긴다. 사람은 어디 있는가? 시인은 또 어디에 있는가? 시의 내용을 앞에 놓고 화가를 불러 그림으로 그리려 해도, 사람이 비집고 들어갈 자리는 그 어디에도 없다. 숲속에 비쳐드는 투명한 햇살처럼 허공에 빛나는 투명한 정신의 광휘가 감돌고 있을 뿐이다. 마음을 맑게 씻어준다.

 

월산대군의 시조에 다음과 같은 절창이 있다.

 

 

추강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치나 고기 아니 무노매라

으스름 달빛만 싣고 빈 배 저어 오노매라

 

 

그런데 사실 이 시조는 화정(華亭) 선자화상(船子和尙)의 게송을 시조역한 것이다. 원시를 보면 다음과 같다.

 

千尺絲綸直下垂 긴 낚시줄을 아래로 곧장 드리우니
一波纔動萬波隨 한 물결 일렁이자 일만 물결 움직이네.
夜靜水寒魚不食 고요한 밤 물이 차서 고기는 입질 않고
滿船空載月明歸 빈 배 가득 밝은 달만 싣고서 돌아오네.

 

포물선을 그으며 낚시줄이 물위로 떨어진다. 바늘이 수면 위에 한 점을 찍자, 동심원을 그리며 일만 물결이 파문을 일으킨다. 파문이 잔잔히 가라앉을 동안 나는 그저 그렇게 바라볼 뿐이다. 깊은 밤 만뢰(萬籟)는 적막한데 고기는 입질이 없다. 아니 애초부터 이편에서도 고기에는 마음이 없다. 돌아오는 길 배엔 고기 대신 휘황한 달빛을 가득 실었다. 말 그대로 텅 빈 충만의 세계이다.

 

 

寺在白雲中 白雲僧不掃 절집은 흰 구름 가운데 있고 흰 구름을 스님네는 쓸지를 않네.
客來門始開 萬壑松花老 손님 와야 비로소 문이 열리니 골짝마다 송화松花가 늙어가누나.

 

조선시대 이달(李達)불일암(佛日庵)이란 작품이다. 절집 뜨락엔 구름이 낙엽처럼 쌓여 있고, 무심한 흰 눈썹의 스님네는 푸른 눈으로 문을 열어준다. 손님이 아니었다면 영영 열리지 않았을지도 모를 문이다. 열린 문으로 구름을 쓸자 드러나는 골짜기 능선마다에선 송홧가루 날리며 세월이 늙고 있다. 속세에서 짊어지고 온 나그네의 근심도 흰 구름 속에 파묻혀 송홧가루로 날리운다.

 

 

南窓終日坐忘機 하루 종일 남창에서 마음 비워 앉았자니
庭院無人鳥學飛 뜨락에 사람 없어 새가 날기 배우네.
細草暗香難覔處 가는 풀의 여린 내음 찾기가 어려운데
淡烟殘照雨霏霏 엷은 안개 지는 해에 비는 부슬부슬.

 

강희맹병여음(病餘吟)이다. 큰 병을 앓은 뒤라서인지 눈빛이 더없이 투명하다. 볕 좋은 남창에 기대 해바라기를 하고 앉았는데, 발길 끊긴 마당에선 어린 새가 걸음마를 배우고 있다. 첫 비상을 시작하려 푸드득거리는 어린 새의 날갯짓에서 시인은 뜨거운 생명력을 느낀다. 그 생명력은 가는 풀의 여린 향기로 전이되어 나의 후각을 자극하고, 두리번거리는 눈길에 희뿌연 안개와 저녁노을, 부슬부슬 내리는 봄비, 선취(禪趣)가 물씬하다.

 

흔히 선시를 말하는 것을 보면, 앞에서 본 언어도단의 세계를 선시의 정수로 보아 다다이즘이나 쉬르리얼리즘의 시정신에 견주기도 한다. 겉만 보면 비슷하지만 실상은 전혀 같지가 않다. 언어의 충격적 배열이나 일상성의 파괴는 어디까지나 방편일 뿐이다. 깨달음의 세계를 언어로 설명하려는 무도함을 한 폭 풍경으로 읊는다면 이쯤 될 것이라는 비유이다. 오해가 깊다 보니 말장난도 모두 선시가 된다.

 

한편에선 승려가 쓴 시면 모두 선시라고 한다. 시중에 나와 있는 선시집이나 관련 연구서들에서 선시의 기준은 더욱 혼란스럽다. 불리(佛理)의 교조적 외침도 다 선시라 한다. 선시는 결코 선가의 전유물이 아니다. 선시는 언어도단을 즐기는 파괴적 취미도 아니고, 승려라는 신분으로 묶어 둘 수도 없다. 선시는 관성을 거부하고, 투명한 정신으로 사물과 만날 것을 요구한다. 선시는 자아를 버리고 사물과 하나될 것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물()과 아()의 사이를 가로막는 일체의 경계를 허물고, 내가 우주가 되고 우주가 내가 되는 존재 차원의 변환을 가져올 것을 요구한다.

 

선의 화두가 그러하듯이, 좋은 시는 타성에 젖은 뒤통수를 후려친다. 그러고 보면 문자로도 세울 수 없는 깨달음은 큰 깨달음이랄 수도 없겠다. 고려 때 진각국사(眞覺國師)의 설날 법어에 이런 것이 있다. “아이는 한 살 더 먹기를 바라고, 늙은이는 한 살 더 줄기를 바랄 것이다. 누가 한 해라는 시간을 정해놓았더냐. 차라리 한 해라는 시간을 없애버림은 어떨꼬?” 통쾌하지 않은가.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을 새로 시작한다. 담배 한 갑을 사면 스무 번을 새로 시작할 수 있고 운운한 것은 예전 어느 시인의 당선 소감이다. 상쾌하지 않은가. 시와 선은 이렇게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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