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설선작시 본무차별(說禪作詩, 本無差別)
두보(杜甫)는 “시 짓고 용사(用事)함은 마땅히 선가(禪家)의 말과 같아야 한다. 물속에 소금이 녹아 있어도 물을 마셔 보아야 소금의 짠 맛을 알 수가 있듯이.”라고 말했다. 물속에 소금을 넣으면 소금은 물에 녹아 보이질 않는다. 입을 대고 마셔 보면 그제서야 짠 맛이 드러난다. 시의 언어는 물속에 녹아든 소금의 맛과 같아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있는 맛, 직접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뜻, 선가(禪家)의 언어가 또한 그렇다. 『서청시화(西淸詩話)』에 보인다.
당나라 때 시승(詩僧) 제기(齊己)는 그의 「유시(喩詩)」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日用是何專 吟疲卽坐禪 | 날마다 힘쓰는 일 무엇이던가 읊조리다 지치면 좌선(坐禪)을 하지. |
하루 종일 시에 골몰하다가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좌선삼이(坐禪三怡)에 들어 누인다. 그 밖에 일이야 상관할 것이 없다. 그에게 있어 시(詩)와 선(禪)은 따로 노는 별개의 물건이 아니다.
또 그는 「기정곡낭중(寄鄭谷郞中)」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詩心何以傳 所證自同禪 | 시심(詩心)을 어떻게 전한단 말인가 증명함이 절로 선(禪)과 같구나. |
시심(詩心)을 설명하기나 선(禪)을 설명하기나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전수임에는 한 치의 차이가 없다. 선(禪)을 말로 설명할 수 없듯이, 시(詩)의 깨달음 또한 언어의 영역 밖에 있다. 수많은 이론가들이 시론(詩論)을 집필하였어도, 그 글을 읽어 시인이 되는 법이 없다.
소식(蘇軾)도 「발이단서시권후(跋李端敍詩卷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暫借好詩銷永夜 | 좋은 시 잠시 빌려 긴 밤 새우다 |
每逢佳處輒參禪 | 좋은 곳을 만나면 문득 참선(參禪)하네. |
깊은 밤 고요히 앉아 시를 읽다가 득의회심(得意會心)의 구절과 만나면 시집을 놓고 고요히 삼매(三昧)의 선정(禪定)에 빠져든다는 것이다. 이럴 때 그에게 있어 시(詩)를 읽는 것은 선(禪)의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함과 다름이 없다.
송(宋) 나라 때 이지의(李之儀)는 「여이거언(與李去言)」에서 “선(禪)을 말하는 것과 시(詩)를 짓는 것은 본시 차별이 없다[說禪作詩, 本無差別].”고 하였고, 엄우(嚴羽)는 『창랑시화(滄浪詩話)』에서 “시를 논함은 선(禪)을 논함과 같다. 대저 선도(禪道)는 오직 묘오(妙悟)에 달려 있고, 시도(詩道) 또한 묘오(妙悟)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 또 범온(范溫)은 『잠계시안(潛溪詩眼)』에서 유자후(柳子厚)의 시를 논하면서, “문장을 앎은 마치 선가(禪家)에 돈오(頓悟)의 문(門)이 있는 것 같이 해야 한다. 대저 법문(法門)은 천차만별이니 모름지기 한 번 말을 돌려 깨달음에 들어감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양시(楊時)가 “시를 배움은 언어문자에 있지 아니하니, 마땅히 그 기미(氣味)를 생각해야만 시의 뜻을 얻는다.”고 한 것도 다 한 뜻이다.
원호문(元好問)은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詩爲禪客添錦花 | 시는 선객(禪客)에게 비단 위 꽃이 되고 |
禪是詩家切玉刀 | 선(禪)은 시가(詩家)의 옥(玉)을 끊는 칼이라네. |
선객(禪客)이 참선(參禪)의 길에서 깨달은 오의(奧義)를 시(詩)의 형식을 빌려 쓰니 금상첨화(錦上添花)가 아닐 수 없다. 시인(詩人)은 또 선(禪)의 방식을 빌어 자신의 의상(意象)을 표현하니 절옥도(切玉刀)를 지닌 셈이라는 것이다.
선학(禪學)이 발흥한 송(宋) 나라 이래로 시(詩)와 선(禪)을 나란히 보는 이러한 ‘시선일여(詩禪一如)’의 인식은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시선일여(詩禪一如)의 인식이 보편화됨에 따라, 시를 배우는 과정을 선(禪)에 비유한 이선유시(以禪喩詩)의 생각도 활발하게 제출되었다.
學詩渾似學參禪 | 시 배움은 흡사 참선(參禪) 배움 같거니 |
竹榻蒲團不計年 | 대 걸상 부들자리에 해를 따지지 않네. |
直待自家都了得 | 스스로 깨쳐 얻음을 얻게 되면 |
等閑拈出便超然 | 멋대로 읊조려도 문득 초연하리라. |
북송(北宋)의 시인 오가(吳可)의 「학시시(學詩詩)」이다. 대나무 걸상 위에 부들자리를 깔고 좌선(坐禪)을 오래 했다 해서 선(禪)의 화두(話頭)를 터득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자연(自家)의 ‘료득(了得)’이다. 증심(證心)하는 깨달음이 있고 보면 그저 심상히 읊조리는 말도 초연(超然)한 상승(上乘)의 경계가 된다. 오가(吳可)의 위 시가 널리 알려지자, 많은 시인들의 그 첫 구를 관주(貫珠)하여 비슷한 작품들을 여럿 남겼다. 명나라 때 도목(都穆)의 「논시시(論詩詩)」 3수 같은 것이 그 좋은 예이다.
學詩渾似學參禪 | 시 배움은 흡사 참선(參禪) 배움 같거니 |
不悟眞乘枉百年 | 진제(眞諦)를 깨닫잖곤 백년이 부질없다. |
切莫嘔心幷剔肺 | 심장 토하고 폐부 도려냄도 더할 나위 없겠지만 |
須知妙悟出天然 | 묘오(妙悟)는 천연(天然)에서 나옴을 알아야지. |
깨달음 없는 참선(參禪)은 공연히 제 몸을 들볶는 것이나 같다. 살아 숨 쉬는 깨달음이 없는 시는 말장난일 뿐이다. 선승(禪僧) 신찬(神贊)은 일찍이 깨달음 없이 습관이 되어버린 참선(參禪)을 일러, “열린 문으로는 나가려 하지 않고, 창문을 두드리는 어리석음이여. 문종이를 백년을 두드려 본들, 언제나 나가볼 기약 있을꼬[空門不肯出, 投窓也大痴. 百年鑽古紙, 何日出頭期].”라 노래한 바 있다. 방 안으로 날아든 벌은 환히 열린 문은 마다하고 굳이 닫힌 창문만 두드린다. 자유의 문은 저기 저렇게 활짝 열려 있는데 집착을 놓지 못해 그걸 보지 못한다. 시인이 시의 묘리를 깨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다. 심장을 토해내고 폐부를 도려내는 고심참담도 좋지만, 진정한 깨달음이란 원래 없는 것을 쥐어 짜내는 조탁과는 관계가 없다.
學詩渾似學參禪 | 시 배움은 흡사 참선(參禪) 배움 같거니 |
筆下隨人世豈傳 | 앞 사람을 흉내 내면 그 누가 알아주리. |
好句眼前吟不盡 | 좋은 시구 눈앞에서 끝없이 읊조려도 |
痴人猶自管窺天 | 어리석은 이들은 우물 안 개구리라. |
예전 불법(佛法)의 대의(大義)를 묻는 제자의 물음에 임제(臨濟)는 할(喝)로, 덕산(德山)은 몽둥이로 대답하였다. 선가(禪家)의 화두(話頭)도 송대(宋代) 이후로 오면 아포리즘의 어조를 띄게 되어 영동(靈動)하는 활법(活法)으로서가 아닌 어정쩡한 흉내가 되고 만다. 자가(自家)의 체인(體認) 없는 흉내만으로는 무문(無門)의 관문도 소용이 없다. 시(詩)의 법도 이와 같다. 눈앞에 놓인 좋은 시구들을 백날 읊조려 본들, 미묘한 깨달음과 만나지 못하면 종내 한 소식은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좋은 시를 읽으면서는 그 안에 녹아 있는 생기(生機)를 느낄 일이지, 어투를 흉내 내어서는 안 된다. 대롱을 통해 하늘을 보니 그 하늘이 온전히 보일 턱이 없다.
예전 사명당이 금강산 유점사로 서산대사를 찾아갔다. “어디서 왔는고?” “어디서 왔습니다.” “몇 걸음에 왔는고?” 이 대목이 중요하다. 만보계를 달고 온 것도 아니니 그걸 어찌 안단 말인가. 그래도 대개 오늘 내가 걸은 시간이 몇 시간이니 한 시간에 몇 걸음을 걸을까. 뭐 이런 궁리를 하고 앉았다가는 할(喝)이나 몽둥이 밖에는 기다릴 것이 없다. 사명당은 즉시 벌떡 일어난다. 양 팔을 활짝 펴들고 한 바퀴 빙 돈다. “이렇게 왔습니다.” 이걸로 끝이 아니다. “어느 길로 왔는고?” “옛 길을 따라 왔습니다.” 스승은 벌컥 소리 지른다. “옛 길을 따르지 말라.” 제법 근사한 대답을 했다고 득의하던 사명당이 이번엔 한방 제대로 맞았다. 이른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逢佛殺佛]’는 심법(心法)의 전수이다.
옛 사람의 길을 따르지 말라. 너는 너의 길로, 나는 나의 길로 선(禪)에 도달하고 시(詩)를 깨달을 뿐이다. 남의 흉내로는 안 된다. 추사(秋史)는 한 사람만으로 족하다. 추사(秋史)와 방불한 조희룡(趙熙龍)은 오히려 그로 인해 손가락질을 받는다. 그러나 안목 없는 세상은 자꾸만 옛 길을 따라오라고 요구한다. 이렇게 쓰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요한다. 그렇다면 좋은 시는 끊임없는 반란의 산물이어야 한다. 친숙한 관습과의 결별, 익숙해진 접점에서 벗어나기를 쉼 없이 추구해야 한다. 증기(曾幾)가 “시를 배움은 참선(參禪)함과 같나니, 삼가하여 죽은 시구일랑은 거들떠보지 말라[學詩如參禪, 愼勿參死句].”라 한 것이 바로 이 뜻이다. 다시 이어지는 셋째 수이다.
學詩渾似學參禪 | 시 배움은 흡사 참선 배움 같거니 |
語要驚人不在聯 | 말이 사람 놀라게 해야지 꾸밈만으론 안 되지. |
但寫眞情幷實境 | 단지 진정(眞情)과 실경(實境)만을 그려낼 뿐 |
任他埋沒與流傳 | 묻히고 전함은 내 맡겨 둘 일이다. |
말이 사람을 놀래키려면 어떠해야 할까? 낡고 정체된 인식을 깨부수는,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전환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것은 자구를 탁련(琢聯)하는 기교로 성취될 수 없다. 절묘기발한 수사도 능사가 아니다. 시인은 거짓 없는 진정(眞情)을 꾸밈없는 실경(實境)에 담아 그려낼 뿐이다. 내 시가 뒷세상에 잊혀질까, 길이 기억될까 하는 것은 내 간여할 바 아니다.
인용
1. 산은 산, 물은 물
2. 선기와 시취
3. 설선작시 본무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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