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계로 가는 중에
월계도중(月溪途中)
유희경(劉希慶)
山含雨氣水生煙 靑草湖邊白鷺眠
路入海棠花下轉 滿枝香雪落揮鞭 『村隱集』 卷之一
해석
山含雨氣水生煙 산함우기수생연 | 산은 빗기운 머금어 물에선 안개 피어나 |
靑草湖邊白鷺眠 청초호변백로면 | 호수가 푸른 풀에서 백로가 자네. |
路入海棠花下轉 로입해당화하전 | 길은 해당화 밑에 진입하여 꺾이니 |
滿枝香雪落揮鞭 만지향설락휘편 | 가지 가득 향기로운 눈이 휘두르는 채찍에서 떨어진다네. 『村隱集』 卷之一 |
해설
이 시는 강원도 양양 유람길에서 얻은 것이라 자주(自注)해 있다.
주제는 만춘(晩春)의 여정(旅情)으로, 전반은 사실이요, 후반은 낭만이다.
바람 한 올 없는 구름 낀 날씨, 산은 어둑어둑 우기로 그물어 있고, 물연기 그윽히 서린 호숫가 풀섶에는 흰 해오라기가 느직이 졸고 있는, 이상 정적의 한낮이다.
여기 한 흰옷차림의 나그네가 활태처럼 휘어드는 해당화꽃 아랫길을, 그야말로 ‘구름에 달 가듯이’ 말을 채쳐가고 있다. 가지마다 가득가득 흐드러진 꽃잎들이, 휘두르는 채찍 서슬에, 붉은 눈이 쏟아지듯 후루룩후루룩 떨어진다. 꼭지 짬이 제물에 돌려, 바람이 있었으면 진작 떨어졌을 것들이, 핑계 없어 못 지고 있다가, 채찍 바람 빌미삼아 무더기로 쏟아지는 낙화다. 봄도 함께 여지없이 허물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세월이……… 인생이……’, 감겨드는 상념을 뿌리치기라도 하듯, 짐짓 채찍을 휘두르며, 끝없이 이어져가는 꽃 사잇길을 한결로 달리고 있는, 이 나그네의 풍정(風情)을 짚어 보라. 송강(松江)의 ‘관동별곡’의 한 대문은 아래와 같다.
명사(鳴沙)길 익은 말이 취선(醉仙)을 비끼 실어, 바다를 곁에 두고 해당화로 들어가니, 백구야 나지마라, 네 벗인 줄 어찌 아난?
또 다른 풍미(風味)가 감돌고 있음을 보지 않는가? 마치 색향(色鄕)의 이색지대(異色地帶)를 누비는 춘정(春情) 겨운 풍객(風客)과도 같은……
해당화는 늦봄에 피어 그 봄과 함께 지는 꽃이다. 같은 장미과의 출신이지만, 인간의 애호하에 있는 장미만큼의 귀품(貴品) 대접을 받지 못함은 물론, 마치 서출(庶出)인 양 야한 꽃으로 홀대하기가 일쑤다. 농염(濃艶)한 진홍빛에 진한 향기를 뿜는 이 정열의 꽃은, 혹은 홍등가(紅燈街)의 유녀(遊女)로 비유되기도 하나, 줄기며 가지에 밀생(密生)하여 있는 날카로운 가시는 결코 그녀가 헤프거나 천골(賤骨)이 아님을 말해 주고 있다. 산야에 자생하여 스스로 자신을 지키자니 장미보다 몇 갑절이나 많은 가시가 필요했음에서이리라. 관목(灌木)이기는 하나, 나귀 탄 키가 묻힐락말락한 높이로 떨기를 이루고 또 숲을 이루어 자란다. 동해안, 특히 원산 부근의 명사십리는 고래의 명산지로 많은 시가에 오르내렸으니, 고려의 중 선탄(禪坦)의 ‘鳴沙十里海棠花 白鷗兩兩飛疏雨’란 시구가 있고, 이를 시조로 의역한 신위(申緯)도 그 하나이다.
묻노라 저 선사야 관동 풍경이 어떻더니?
명사십리에 해당화 붉어 있고,
원포(遠浦)에 양량 백구는 비소우를 하더라.
화창한 바람, 눈부신 햇살을 짐짓 피한 저의, 우기를 머금은 산의 침묵, 엷은 물연기 수면에 서려 있는 무풍 상태, 아니라도 한가로운 해오라기를 잠들게 하여, 시공(時空)을 온전히 정지 상태로 이끌어 간 의취, ‘청초(靑草)’와 ‘백로(白鷺)’의 색조(色調), 하필이면 구부정한 길로 휘어들게 한 ‘전(轉)’의 멋, 채찍 하나로 와랑차랑 달리고 있는 말이며, 말 탄 이의 끄떡자떡하는 몸짓까지 방불케 한 ‘편(鞭)’의 묘용(妙用) 등을 음미할 것이다.
-손종섭, 『옛 시정을 더듬어』, 정신세계사, 1992년, 404~405쪽
인용
'한시놀이터 > 조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달 - 차윤서중운(次尹恕中韻) (0) | 2019.07.23 |
---|---|
이달 - 제김양송서첩(題金養松畫帖) (0) | 2019.07.23 |
신광한 - 과개현김공석구거 유감(過介峴金公碩舊居 有感) (0) | 2019.07.20 |
이덕무 - 향랑시 병서(香娘詩 幷序) (0) | 2019.07.20 |
향랑시 병서(香娘詩 幷序) - 4. 산유화(山有花) 곡을 남기고 강물에 투신하여 죽다 (0) | 2019.07.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