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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 - 답이생서答李生書 본문

산문놀이터/편지글

허균 - 답이생서答李生書

건방진방랑자 2019. 5. 24.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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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조선의 한시 작가 총평答李生書

 

吾東僻在海隅, 以上文獻邈如.

雖乙支, 眞德之詩, 彙在史家, 不敢信其果出於其手也.

, 孤雲學士始大厥譽. 以今觀之, 文菲以萎; 詩粗以弱.

使在, 亦形其醜, 乃欲使盛唐爭其工耶?

知常, 足窺一斑, 亦晩李中穠麗者. 仁老奎報, 或淸或奇, 陳澕洪侃, 亦腴艶, 而俱不出長公度內耳.

及至益齋倡始, 繼躅, , 爲季葉名家.

逮國初, 三峯陽村, 獨擅其名, 文章至是, 始可稱達. 追琢炳烺, 足曰丕變, 而中興之功, 文靖爲鉅焉.

中間金文簡之緖, 人謂大家. 只恨文竅之透不高.

其後容齋相詩入神, 亦瞠乎其後. 相又力振之, 玆數公, 使生中國, 則詎盡下於二公乎?

當今之業,, 文推崔東皐, 詩推李益之, 俱是千年以來絶調. 而儕類中汝章甚婉亮; 子敏甚淵伉; 此外則不能知也. -惺所覆瓿藁

 

 

해석

吾東僻在海隅, 以上文獻邈如.

우리나라는 궁벽하여 바다 모퉁이에 있어 당나라 이상의 문헌은 까마득하다.

 

雖乙支, 眞德之詩, 彙在史家,

그래서 비록 을지문덕과 진덕여왕의 시가 역사책에 모아져 있으나,

 

不敢信其果出於其手也.

과연 그 손에서 나온 것인지 감히 믿을 수 없다.

 

, 孤雲學士始大厥譽.

羅末에 이르러 최치원이 처음으로 이름을 드날렸다.

 

以今觀之, 文菲以萎; 詩粗以弱.

(그럼에도) 오늘날의 시각으로 본다면 은 너무 고와도 시들었으며, 는 거칠어서 약하다.

 

使在, 亦形其醜,

허혼과 정곡 등 만당의 사이에 넣더라도 역시 뒤떨어짐을 드러내리니,

 

乃欲使盛唐爭其工耶?

盛唐과 그 기교로움을 다투고자 해서야 되겠는가?

 

 

역시 문장이든 시든 시작은 최치원을 빼놓으면 섭섭하다. 함양 상림엔 그가 살아 있다.

 

 

知常, 足窺一斑, 亦晩李中穠麗者.

고려의 정지상이 한 부분에 뛰어난 점이 있었지만, 역시 만당의 아름다운 것 정도였다.

 

仁老奎報, 或淸或奇, 陳澕洪侃, 亦腴艶,

이인로와 이규보는 혹은 맑고 혹은 기이하며 진화와 홍간은 또한 기름지고 고우나,

 

而俱不出長公度內耳.

모두 소동파의 문장에서 벗어나진 않을 뿐이었다.

 

及至益齋倡始, 繼躅,

이제현에 이르러서야 창시하였으며 이곡과 이색의 부자가 계승하였으며

 

, 爲季葉名家.

포은 정몽주과 도은 이숭인과 척약재 김구용이 고려말의 명가가 되었다.

 

 

고려 후기  성리학의 유입과 함께 신진사대부의 반격이 시작된다. 그 기초를 이룬 인물이자, 고문을 전파를 주도한 인물이다.

 

 

逮國初, 三峯陽村, 獨擅其名, 文章至是, 始可稱達.

조선 초기엔 정도전과 권근이 명성을 독차지하여 문장이 이때부터 처음으로 달하였다고 할만하다.

 

追琢炳烺, 足曰丕變, 而中興之功, 文靖爲鉅焉.

조탁하였고 빛이 나서 넉넉히 크게 변했다 할 수 있으나, 중흥시킨 공은 이색이 크다고 해야 한다.

 

中間金文簡之緖, 人謂大家.

중간에 김종직이 정몽주와 권근의 실마리를 얻어, 사람들에게 대가라 일컬어졌지만

 

只恨文竅之透不高.

다만 문장이 매끈하게 이어지는 정도가 높지는 않았다.

 

其後容齋相詩入神, 亦瞠乎其後.

그 후에 정승 이행의 시가 신의 경지에 들었고, 신광한과 정사룡 또한 그 뒤를 똑바로 보아서 이었다.

 

相又力振之, 玆數公, 使生中國,

정승 노수신이 또한 힘으로 문명을 떨쳤으니 이들 중 몇 분이 중국에서 태어났더라도

 

則詎盡下於二公乎?

어찌 강해나 이몽양 두 사람의 밑이라 하겠나?

 

當今之業,, 文推崔東皐, 詩推李益之,

지금의 문장은 최립을 추존하고, 시는 이달을 추존하니(들리는가 허균의 자랑스러워하는 목소리가^^),

 

俱是千年以來絶調.

모두 천년이래의 뛰어난 문사들이었다.

 

而儕類中汝章甚婉亮; 子敏甚淵伉[각주:1];

그리고 나와 같은 무리 중에선 권필의 시가 은근하고 밝으며, 이안눌의 시가 심히 깊숙하고 도도하다.

 

此外則不能知也. -惺所覆瓿藁

이 외엔 내가 알지 못한다. 이만 총총~

 

 

허균의 스승 이달. 서자 출신으로 문명은 높았지만 과거를 볼 수 없었다. 그런 한이 허균의 기구한 삶, 스승의 영향일까?  

 

 

전문

辱惠書 詢以不朽大業 甚盛心也 而僕之譾陋 何足以揚攉萬一乎 然竊怪生之問不及於先秦 漢 唐所所稱大家作者 獨諄諄吾東 是何卑論耶

吾東僻在海隅 唐以上文獻邈如 雖乙支 眞德之詩 彙在史家 不敢信其果出於其手也 及羅季 孤雲學士始大厥譽 以今觀之 文菲以萎 詩粗以弱 使在許 鄭間 亦形其醜 乃欲使盛唐爭其工耶

麗代知常 足窺一斑 亦晩李中穠麗者 仁老 奎報 或淸或奇 陳澕 洪侃 亦腴艶 而俱不出長公度內耳 及至益齋倡始 稼 牧繼躅 圃 陶 惕 爲季葉名家

逮國初 三峯 陽村 獨擅其名 文章至是 始可稱達 追琢炳烺 足曰丕變 而中興之功 文靖爲鉅焉

中間金文簡得圃 陽之緖 人謂大家 只恨文竅之透不高 其後容齋相詩入神 申 鄭亦瞠乎其後 蘇相又力振之 玆數公 使生中國 則詎盡下於康 李二公乎 當今之業 文推崔東皐 詩推李益之 俱是千年以來絶調 而儕類中汝章甚婉亮 子敏甚淵伉 此外則不能知也

文章雖曰小技 無學力無識見無功 不可臻其極 所瑧雖有大小高下 及其妙則一也

我東人不博古 故無學力 不就師 故無識見 不溫習 故無功程 無此三者 而妄自標榜 以爲可軼古人名後世 吾不敢信也

僕十二失嚴訓 母兄憐愛 不加督責 稍長 見有習科業者 從而效之 遂有速化之心 讀六經諸史略遍 已解大義 不肯體認沈潛 豪腸妄膽 一日誦數萬言 口角瀾翻 人以爲聰捷絶倫 僕亦自誇 殊不知問學及文章 初不在於記覽之富也

仲兄自謫還 始敎以古文 文從崖相學 詩從蓀谷學 方知文章之徑在是不在彼 稍欲入門 爲俗累所牽 出旣聯擢巍第 以疏雋少檢擯於世 遂杜門盡其業 于今十有六年

所成就 吾不敢知 雖淸厲深倔 獨造爲宗者 少遜於儕流 而包函蘊蓄 信手拈來 行所當行 止所當止 沛然如巨浸稽天 貝宮蜃闕 或間以蠔山鰻屋 亦不廢其鉅者 比諸數子 頗有寸長 亦未識者之見許否 雖然 若無師友淵源之傳 又安得有此乎 兄姊之文 得於家庭 而先大夫少學於慕齋 齋慕之師成虛白俔 學於其兄侃及金乖崖守溫 二公皆柳泰齋之弟子 柳公是文靖公得意門人

文靖游學上國 翶翔禁林 久在虞道園歐陽圭齋門下 被其奬詡至衣鉢海外傳之語

圭齋江西人 親事文謝諸公 耳熟石湖 誠齋遺訓 而臨川 南豐 六一 山谷四老之烈 尙爾班班 以是學業而傳授于牧老 吾東文事之稍覷源委者 悉由牧老之東還 豈不韙哉

汝章先人學于駱峯 駱峯 容齋之所推奬 而子敏又其曾孫 亦家學以發者 申 李二公 俱得佔畢餘學 而佔畢之父師冶隱 冶隱師陽村兄弟 而牧老又其師也 亦同出於斯

凡爲詩文者畔此而別立門戶者 非妄則僭也

來書稱崔 白二家在唐亦可名家 而恨境狹耳 所云鵝溪 齋峯 則僕未嘗覩其全集焉 敢容喙哉 方赴秋官讞議 當闋呼促 草草奉覆 不盡欲言 容更面旣 不具 -惺所覆瓿稿

 

 

  1. 近日李實之能詩文, 雖似冗雜而氣自昌大, 可謂作家. 然不逮汝章, 多矣. 實之眼高, 不許一世人, 獨稱余及汝章․子敏爲可, 其曰: “許飫, 權枯, 李滯.” 亦至當之論也. 『惺叟詩話』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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