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과 문장을 모두 잘했던 간숙공 설규
설간숙공문집서(薛簡肅公文集序)
이 글은 송(宋) 신종(神宗) 희녕(熙寧) 4년(1071) 5월에 지은 것이다. 『설간숙공문집(薛簡肅公文集)』은 설규(薛奎, ?~1034)가 죽은 지 37년에 사자(嗣子)인 중유(仲孺)가 설규가 지은 문(文) 800여 편을 정리하여 만든 것이다. 구양수(歐陽脩)는 설규(薛奎)의 넷째 딸에게 장가들었으니 설규(薛奎)의 사위이다. 간숙(簡肅)은 설규(薛奎)의 시호(諡號)이고, 그의 자(字)는 숙예(叔藝)이며, 강주(絳州) 정평(正平) 사람이다. 송(宋) 태종(太宗) 순화(淳化, 990~994) 연간에 진사(進士)가 되었고, 인종(仁宗) 때에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냈다.
구양수(歐陽脩)
궁달에 따른 문학적 성취의 차이
君子之學, 或施之事業, 或見於文章, 而常患於難兼也. 蓋遭時之士, 功烈顯於朝廷, 名譽光於竹帛. 故其常視文章爲末事, 而又有不暇與不能者焉.
至於失志之人, 窮居隱約, 苦心危慮, 而極於精思, 與其有所感激發憤, 惟無所施於世者, 皆一寓於文辭. 故曰: “窮者之言, 易工也.”
사업과 문장을 모두 갖춘 간숙공
如唐之劉ㆍ柳, 無稱於事業, 而姚ㆍ宋, 不見於文章, 彼四人者, 猶不能兩得, 況其下者乎.
惟簡肅公, 在眞宗時, 以材能爲名臣, 仁宗母后時, 以剛毅正直爲賢輔. 其決大事, 定大議, 嘉謀讜論, 著在國史, 而遺風餘烈, 至今稱於士大夫.
公, 絳州正平人也. 自少以文行推於鄕里, 旣擧進士, 獻其文百軸於有司, 由是, 名動京師. 其平生所爲文, 至八百餘篇, 何其盛哉. 可謂兼於兩得也.
公之事業, 顯矣, 其於文章, 氣質純深而勁正 蓋發於其志, 故如其爲人.
문집이 남게 된 연유
公有子宜孺, 早卒, 無後, 以其弟之子仲孺公期爲後. 公之文旣多, 而往往流散於人間, 公期能力收拾. 蓋自公薨後三十年, 始克類次而集之爲四十卷, 公期可謂能世其家者也. 嗚呼! 公爲有後矣.
해석
궁달에 따른 문학적 성취의 차이
君子之學, 或施之事業, 或見於文章,
군자의 학문은 혹 사업에서 베풀어지고 혹 문장에서 드러나지만
而常患於難兼也.
항상 겸하기 어려운 것이 걱정이다.
蓋遭時之士, 功烈顯於朝廷, 名譽光於竹帛.
대체로 때를 만난 선비는 공렬이 조정에 드러나고 명예가 대나무와 비단에 써진다.
故其常視文章爲末事,
그러므로 항상 문장 보기를 말단의 일로 여기고
而又有不暇與不能者焉.
또한 문장을 지을 겨를이 없는 경우도 있고 지을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至於失志之人, 窮居隱約,
그러나 뜻을 잃은 선비에 이르러선 곤궁하게 살고 은자로 생활하며
苦心危慮, 而極於精思,
고심하며 깊이 사고하여 정밀한 생각에 극진한 것과
與其有所感激發憤, 惟無所施於世者,
느껴 분발하고 화냄을 발설하는 것을 오직 세상에 펴내지 못하는 것은
皆一寓於文辭.
모두 한결같이 문자에 붙였다.
故曰: “窮者之言, 易工也.”
그러므로 “곤궁한 사람의 말이 기교 있기가 쉽다【곤궁한 사람은 문장을 정교하게 짓기가 쉽다는 말로 唐‧宋의 문장가들이 습관적으로 하던 말이다. 歐陽脩의 「梅聖兪詩集序」에 “시가 사람을 곤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곤궁하게 된 뒤라야 훌륭한 시가 나오는 것이다.[非詩之能窮人 殆窮者而後工也]”라고 하였는데, 바로 이 뜻이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업과 문장을 모두 갖춘 간숙공
如唐之劉ㆍ柳, 無稱於事業,
당나라의 유우석(劉禹錫)과 유종원 같은 경우는 사업엔 말해질 만한 게 없고【劉柳는 대문장가인 劉禹錫과 柳宗元을 가리킨다. 柳宗元은 唐 順宗 때 監察御史로 있으면서 兵權을 장악하여 천하를 제압하려고 음모했던 王叔文의 黨에 가담하였다가 그 일이 발각되자 연좌되어 柳州刺史로 좌천되었고 그곳에서 죽었다. ≪舊唐書 권160 柳宗元傳≫】
而姚ㆍ宋, 不見於文章,
요숭(姚崇)과 송경(宋璟) 같은 경우는 문장에 드러난 게 없으니【姚宋은 姚崇과 宋璟을 가리킨다. 唐 玄宗 開元(713~741) 연간에 재상이 되어 開元之治를 이루었으나 문장으로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彼四人者, 猶不能兩得, 況其下者乎.
저 4명도 오히려 두 가지를 얻을 수 없었는데 하물며 기량이 이들보다 낮은 사람은 오죽할까.
惟簡肅公, 在眞宗時, 以材能爲名臣,
오직 간숙공은 숙종이 계실 때에 재주로 이름난 신하가 되었고【薛奎는 宋 眞宗 때에 尙書戶部員外郞, 淮南轉運副使, 三司戶部副使 등을 역임하였다. 『宋史』 권286 「薛奎傳」】
仁宗母后時, 以剛毅正直爲賢輔.
인종의 모후 때엔 강직하고 굳세고 정직함으로 현명한 보좌관이 되었다【仁宗母后時는 仁宗 초에 章獻王后가 垂簾聽政한 것을 말한다. 賢輔가 되었다는 것은 薛奎가 天聖 7년(1029)에 參知政事가 된 것을 말한다.】.
其決大事, 定大議,
큰 일을 결정한 것과 큰 논의를 정한 것과
嘉謀讜論, 著在國史,
아름다운 계책과 곧은 논의가 역사서에 드러나 있고
而遺風餘烈, 至今稱於士大夫.
유풍과 남은 공렬이 지금에 이르러 사대부에게 이야기되고 있다.
公, 絳州正平人也.
공은 강주의 정평 사람이다.
自少以文行推於鄕里, 旣擧進士,
어려서부터 글짓기와 품행으로 마을에서 추천되었고 이미 진사로 급제해서는
獻其文百軸於有司, 由是, 名動京師.
지은 문장 100편을 관리에게 바쳤으니 이 때문에 명성이 수도에서 진동했다.
其平生所爲文, 至八百餘篇, 何其盛哉.
평생에 지은 문장이 800편여 편에 이르니 얼마나 성대한가.
可謂兼於兩得也.
문장과 사업의 두 가지의 소득을 겸하였다고 할 만하다.
公之事業, 顯矣,
공의 사업은 드러났고
其於文章, 氣質純深而勁正
문장에 있어서는 기질이 순박하고 심오하며 굳세고 바르니
蓋發於其志, 故如其爲人.
대개 그 뜻에 드러난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됨과 같다고 하겠다.
문집이 남게 된 연유
公有子宜孺, 早卒,
공의 아들인 의유【「資政殿學士尙書戶部侍郞簡肅薛公墓誌銘」에는 ‘宜孺’가 ‘直儒’로 되어 있다. 『唐宋八大家文抄』 권53】가 있었는데 일찍 죽었고
無後, 以其弟之子仲孺公期爲後.
후사가 없어 아우의 아들인 중유 공기를 후사로 삼았다.
公之文旣多, 而往往流散於人間, 公期能力收拾.
공의 문장이 이미 많지만 이따금 사람들 사이에서 흩어져 유포되었기에 공기는 힘써 수습하였다.
蓋自公薨後三十年,
대체로 공이 돌아가신 지 30년【薛奎가 죽은 연도는 景祐 원년(1034)이고, 이 서문이 지어진 시기는 熙寧 4년(1071) 5월이니, 죽은 연도와 37년 차이 난다.】으로부터
始克類次而集之爲四十卷,
비로소 분류하고 편차(編次)하였고 모아서 40권으로 만들었으니,
公期可謂能世其家者也.
공기는 그 집안에 대를 이었다고 할 만하다.
嗚呼! 公爲有後矣.
아! 공은 후사가 있음이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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