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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단어는 세상을 이해하게 하는 하나의 안경이다. 하지만 그 안경은 색안경이어서 제대로 된 세상이 아닌 왜곡된 세상을 보게 한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빨간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면 세상은 온통 빨갛게 덧칠되어 보인다. 하지만 그 안경을 낀 사람에겐 그렇게만 보이니, 어느 순간엔 ‘세상은 원래 빨갛다’라고 인식하게 되고 그때 “세상은 노래”, “세상은 검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알지도 못하는 것들이 유언비어를 퍼뜨린다’며 노발대발하게 된다. ▲ 단어로 세상을 인식한다는 것은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과 같다. 한계 짓는 게 무에 문제요 이것이야말로 대단히 심각한 문제다. 단어의 힘에 짓눌려 ‘빨간 세상’만을 믿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롤랑 바르트는 무지를 “지식이 꽉 차서 더 이상 들어갈 것..
제비꽃님이 김영민 선생의 말을 인용하며 던진 ‘틀이 바뀌면 꼴이 바뀐다’는 말이 시작점이 되어 변화에 대한 열망으로 이어졌고, 별나들이님이 그 얘길 받아 ‘안 하던 짓을 하면 죽는다’는 말을 새롭게 해석하면서 변화를 위한 행동을 촉구했다. ▲ 트루먼은 안 하던 짓을 했기 때문에,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안 하던 짓을 해야 삶의 지도가 바뀐다 그렇지 않아도 반복되는 일상과 어느덧 익숙해진 학교생활에 변화를 주고 싶었기에, 번개를 기다리다 마침내 내리친 번개를 흡수한 피뢰침처럼 그 말은 나에게 번개와도 같이 깊이 흡수되었다. ▲ 장례식장이 들어서려 하니, 반대 현수막이 여기저기 걸렸다. 장례식장은 혐오시설이라 인식하기 때문이다. 별나들이님은 ‘안 하던 짓을 하면 죽는다’에서..
3년 만에 불쑥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아무렇지 않게 찾아왔지만 어화둥님과 별나들이님, 풍경님은 늘 보아오던 사람처럼 반갑게 맞이해주더라. 그러고 보면 ‘민들레 읽기 모임’이란 한창 때엔 수요일마다 모여 이야기를 나누던 모임에서, 지금은 그렇게 알게 된 사람들이 오랜 친구를 만나 자연스럽게 썰을 풀 듯 편안하게 모이는 모임으로 바뀌었다. 실제로 이날도 나뿐만 아니라 오랜만에 얼굴을 내비치는 앵두님이나 석혜영님 같은 분들이 있다 보니, 그간 살아온 이야기를 묻고 들으며 이야기는 시작됐다. 그래서 저녁 8시에 시작된 이야기는 새벽 4시가 넘도록 끊임없이 이어졌던 것이고, 흘러가는 시간이 야속한지 “피곤해서 잠이 오긴 하는데 그래도 잠은 자기 싫으네요”라는 말이 여기저기 나오기도 했던 것이다. ▲ 우리의..
열 명의 인원이 어화둥님 집에 모였다. 친숙한 어화둥님, 별나들이님, 제비꽃님, 세 가지 손님, 안녕님과 처음 뵙는 풍경님, 앵두님, 석혜영님, 온자님까지 둘러앉았다. 거기에 집주인인 영민이(어화둥님 둘째 아들)를 포함해 아이들까지 함께 모이니, 이건 70년대에 텔레비전이 마을에 한 대만 있던 시절에 남녀노소할 것 없이 함께 모여 ‘전설의 고향’을 보는 것만 같은 화기애애한 느낌이 들더라. ▲ 예전엔 티비가 많지 않으니, 마을 사람들이 함께 둘러 앉아 티비를 보던 때도 있었나 보다. [화려한 휴가]의 한 장면. 『민들레』를 만나, 인연이 되다 ‘민들레 읽기’ 모임에 참여하게 된 건 순전히 단재학교에서 근무하게 되어서다. 단재학교에선 격월마다 발행하는 『민들레』 잡지를 구독하며, 제도권 학교에 매몰된 교육..
문제: 안젤리나 졸리, 헬로키티, 쵸코파이의 공통점은? 여백이 있는 공간 문제부터 들이미는 뻔뻔한 후기를 보면서 깜짝 놀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건 심심풀이땅콩 같은 것이니 놀라지 마시라. 답이 무엇인지 짐작은 되시나. 답은 ‘1974년생’이다. 이런 문제는 답을 알고 나면 허무해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 문제 또한 그렇다. 그렇다면 다음 문제는 어떨까? 문제: 콩나물, 날으는 그네, 크랙, 삐삐, 어화둥, 제비꽃, 건빵, 민혁, 민유의 공통점은? 이 문제를 처음 본 사람은 이게 무슨 ‘잡동사니’들을 모아놓은 건가, 의아할 것이다. 답도 ,아리송하겠지. 이것이야말로 ‘대략난감’이다. 하지만 그 대략난감 속에 정답이 있다. 이들은 『81호』 읽기 모임에 나온 사람들의 닉네임이니 말이다. 이날은 과천모..
누군가 이런 질문을 한다. “어떤 날씨를 좋아 하세요?” 뭐 ‘도를 아십니까?’ 이런 류의 황당한 질문만 아니면 환영하는 편이지만 날씨를 물어보는 것도 ‘도를 아십니까?’라는 질문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날씨든 다 좋아요!”라고 솔직하게 말하면, 이야기 흐름이 깨지기 때문이다. 의도가 있는 질문엔, 의도에 맞는 대답을 해줄 필요가 있다. ▲ 처음으로 민들레 모임에 왔다. 어떨지 기대 반 걱정 반. 빨간 장미가 떠오르던 날에 그런데 『민들레』 58호 읽기 모임 후기를 쓴다면서, 뜬금없이 ‘날씨이야기’를 하고 있냐고 궁금해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모임에 와본 사람은 ‘날씨이야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것이다. 오늘이 바로 ‘비 오는 수요일’이었기 때문이다. 바람이 심하게 ..
가을 따라 간 당신, 봄 따라 오시라 이자겸의 난으로 개성은 풍비박산이 났고 그에 따라 고려의 국운을 걱정하던 사람들이 천도 운동을 벌이게 된다. 묘청과 정지상의 무리들은 서경인 평양으로 천도하자고 말했고, 개성에서 완벽한 세력들을 구축한 김부식을 위시한 권문세족은 반대를 했다. ▲ 묘청은 수도 이전을 하고 독자적인 고려의 연호를 쓰자는 제안을 한다. 김부식과 정지상의 재밌는 일화 하지만 맘대로 되지 않자, 묘청은 반란(1135)을 일으켰고, 총사령관 김부식에 의해 제압당했다. 그리고 함께 가담했다는 근거 없는 혐의를 씌워 개성에 있던 정지상을 붙잡았고 목숨을 앗아 갔다. 당연히 현실의 승자는 김부식이었지만, 민중들은 승자의 편만을 들진 않았다. 수많은 민담을 통해 정지상을 되살려냈고, 김부식은 정지상의..
그대를 보내는 눈물 때문에 대동강이 마르질 않네 시는 나에게 고통이었고 피하고 싶은 것이었으며, 여전히 맞닥뜨리기 싫은 그 무엇이었다. 고등학생 때 언젠가 시를 쓰라는 과제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난 도무지 펜을 들어 쓸 수가 없었다. 시란 늘 분석해야 하고 정답이란 게 정해져 있으며, 중의성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 내내 시는 문제를 풀기 위해서만 배웠지, 한 번도 내 삶에서 편안하게 느껴본 적이 없으니 당연했다. 마치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듯 시는 객관적인 잣대로 분석하고, 의미를 무작정 찾아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 시란 늘 이렇게 공부해야 하는 줄 알았다. 그러니 시도 아무나 쓸 수 없는 거라 당연히 생각하게 됐다. 늘 벽과 같던, 맘 떠난 여인 같던 시..
20글자로 전한 협박 아닌 협박 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신묘한 꾀는 천문을 꿰뚫었고 묘한 헤아림은 지리에 능통했네. 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 싸움에 이긴 공이 이미 높으니 만족할 줄 알면 멈추시라. 『東文選』 을지문덕의 「여수장우중문與隋將于仲文」은 어떤 한문학사책을 펼쳐보든 제일 먼저 언급되는 시다. 그만큼 가장 이른 시기에 나온 작품치고는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나 대구의 구성 등이 절묘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오죽했으면, 허균은 “비록 을지문덕과 진덕여왕의 시가 역사책에 모아져 있으나, 과연 그 손에서 나온 것인지 감히 믿을 수 없다.(『성소부부고』)”라고 했을 정도였을까. 대화의 달인, 을지문덕의 대화술 예전에 이 시를 배웠을 때 1, 2句가 대구로 되어 있다는 부분을 크게 강조했던 기억이 난다. 을지문덕..
기녀가 부르는 스승의 ‘사미인곡’을 듣고 감정에 사무친 이안눌 (龍山月夜 聞歌姬唱故寅城鄭相公思美人曲 率爾口占 示趙持世昆季) 권필에 대한 얘기를 할 때 말했던 것처럼, 시를 평가할 때 권필과 이안눌은 곧잘 비교대상이 되곤 했다. 아마도 송강이란 같은 스승 밑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인 데다가, 돌아가신 스승을 느꺼워하며 시를 지었기 때문에 비교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허균을 위시한 주위 사람들의 평판에 오르내릴 정도였다면, 둘 사이는 매우 돈독했으리란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권필과 이안눌의 지음 같은 관계 권필은 「宮柳詩」 로 인해 곤장을 맞게 됐고, 어찌나 심하게 맞았던지 귀양을 가던 도중에 죽었다는 얘기는 권필에 대해 얘기했던 그대로다. 권필로서도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고 참 가슴 아픈 얘기지만, ..
스승 정철의 ‘將進酒辭’를 듣고서 마음 아파한 권필 (過松江墓有感) 권필을 생각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게 당연히 「宮柳詩」다. 광해군의 외척인 柳希奮이 국정을 농단하는 것을 보며 권필은 시를 지었다. 宮柳靑靑花亂飛 궁궐의 버드나무 하늘하늘 어지러이 날리니 滿城冠蓋媚春暉 온 도성 내의 고관대작들이 임금님의 은혜라 아첨하는 구나. 朝家共賀升平樂 조정에선 태평성세의 즐거움이라 함께 치하하나, 誰遣危言出布衣 누가 지조 있는 말을 포의에게서 나오게 했나? 『石洲集』 시가 사람을 죽이게 할 수도 있다 1구에 나오는 ‘柳’를 보며 사람들은 모두 임숙영을 생각했지만, 임숙영 자신은 그건 중전을 가리킨다고 말했고, 광해군도 이에 크게 화를 내며 신문을 하게 된다. 이때 권필은 “임숙영이 과거 시험 중 대책에서 미친 말..
권필權韠의 ‘궁유시宮柳詩’와 시화詩禍 宮柳靑靑花亂飛 궁궐의 버드나무 하늘하늘 어지러이 날리니 滿城冠蓋媚春暉 온 도성 내의 고관대작들이 임금님의 은혜라 아첨하는 구나. 朝家共賀升平樂 조정에선 태평성세의 즐거움이라 함께 치하하나, 誰遣危言出布衣 누가 지조 있는 말을 포의에게서 나오게 했나? 『石洲集』 이미 이 시에 대한 내용은 이안눌이 쓴 「용산의 달밤에 기녀가 故 인성 정철의 사미인곡을 부르는 걸 듣고 바로 읊어 조지세 형제에게 준 시龍山月夜 聞歌姬唱故寅城鄭相公思美人曲 率爾口占 示趙持世昆季」의 감상 부분에서 짧게 다룬 적이 있다. 하지만 그 부분에선 잠시 언급만 했기에, 이번엔 시가 재앙이 된다는 ‘詩禍’를 중심으로 다뤄보기로 하자. 거침없는 기상과 우락부락한 풍채를 지닌 권필 우선 권필이 어떤 사람인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