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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목차 1. 떠난 후에야 빈자리가 보인다 봄에서 여름으로, 그리고 또 봄으로 떠난 후에야 빈자리의 큼을 안다 2. 그가 우리에게 남긴 것 한 사람이 죽음을 대하는 갖가지 자세 헐뜯으려는 현 권력의 공격 실패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닌 현재의 부단한 싸움 3. 미안한 마음에 조문행렬에 참여하다 맘은 원이로되 행동은 굼뜨니 끝없는 조문 행렬은 미안함의 표시다 4. 영결식과 노제 참여기 그가 공공의 적이 된 이유는 인간의 이중성 때문이다 폴리스라인, 안전=통제 영결식 현장의 열기 의지를 이어나가려는 사람들 인용 여행기
4. 영결식과 노제 참여기 오늘은 영결식이 있는 날이다. 6시 45분 차를 타기 위해 5시 반에 일어났다. 차가 많이 막힐 것만 같아서 15분 차를 탈까도 생각했었는데 몸이 너무 고될 거 같아서 그냥 이 차를 타기로 한 것이다. 내 예상과는 달리 버스는 밀리지 않았다. TV에선 계속해서 발인식 장면과 영구차 이동 장면을 중계하고 있었다. 그를 떠나보내기 싫은 사람들은 영구차가 봉하마을 입구를 지날 때 노란색 비행기를 접어서 영구차에 날리기도 하고 차를 부둥켜안고 울기도 했다. 그 장면들은 보면서 내 마음도 그네들과 다르지 않다는 걸 느꼈다. 왜 그가 재임 중일 땐 모두 그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했던 걸까? 물론 그의 정책 중 맘에 안 드는 부분이 있기도 했지만 꼭 그 이유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 긴 행..
3. 미안한 마음에 조문행렬에 참여하다 지난 토요일에 도보여행을 끝마치면서 전혀 믿기지 않는 소식을 듣고 일요일엔 서울에 온 김에 조문을 하러 대한문에 찾아갔다가 사람들도 너무 많고 경찰이 여기 통제를 하는 바람에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그냥 돌아왔다. 어차피 전주에서도 분향소는 있으니 거기서 해도 된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물론 그건 합리화였고 핑계의 일종이었다. 애도하려는 마음보다 현재 하고 싶은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으니 말이다. ▲ 노무현(1946년 9월 1일 ~ 2009년 5월 23일) 맘은 원이로되 행동은 굼뜨니 그렇게 25일 월요일에 전주행 버스를 타고 내려왔다. 한 달을 넘게 했던 여행이 끝났기에 마무리 짓고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마음먹은 순간부터 노무현 전 대통..
2. 그가 우리에게 남긴 것 그가 스스로 몸을 던져 죽음을 택했다고 했을 때, 웬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이 돌아다니냐고 되묻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먼지털이식 수사로 도덕성에 타격을 입은 그는 여느 때처럼 정면 승부를 하지 않고 스스로 몸을 던졌다. ▲ 끊이지 않는 발걸음. 무엇을 위해 이들은 그의 죽음을 기리려 하는 걸까? 한 사람이 죽음을 대하는 갖가지 자세 그런 소식을 듣고 두려웠던 것은 거대 언론들의 횡포였다. ‘얼마나 구린 게 많았으면 자살까지 했을까(한 언론은 그의 죽음을 ‘서거’가 부당하다며, ‘사거’라고 표현하기도 했다)?’라고 비아냥거릴 것만 같고 걔 중에 어떤 사람들은 ‘무책임하다’라거나 ‘잘 죽었다’라는 말로 온갖 비방을 퍼부을 것만 같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 후 상황은 ..
1. 떠난 후에야 빈자리가 보인다 벚꽃 잎이 흩날리고 있다. 이 사진은 여행을 떠나기 전에 스크랩한 것이다. 어느새 봄이 오는가 싶었는데 지금은 점차 무더워지는 것이 느껴지며 여름이 오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 벚꽃이 만개했다. 하지만 곧 질 것이고, 이런 장사진은 떠날 것이다. 몰려듦과 떠남, 하지만 내년에 다시 이런 장사진을 이룰 것이다. 봄에서 여름으로, 그리고 또 봄으로 시간은 그렇게 흘러간다. 그건 곧 우리의 인생도 흐르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리라. 노 전대통령은 ‘삶과 죽음은 인생의 한 조각生死如一’이라고 말했듯이 여름이 온다고 봄이 완전히 죽는 건 아니다. 언어습관 상 봄과 여름은 전혀 다른 것처럼 인식될 뿐이지 실상은 두 계절이 아니라 하나의 자연스런 흐름일 뿐이다. 그렇게 변해가는 과..
목차 1. 갑작스레 벌교에 가다 도보여행 그리고 1년 후 벌교에 가기까지 전라선을 따라 가며 일본이 남긴 아픔을 곱씹다 순천, 편안한 분위기가 나던 도시 2. 벌교를 거닐면, 소설은 현실이 된다 태백산맥의 인물들이 활약한 벌교역과 시장 벌교에서 태백산맥의 발자취를 따라 가다 실재하는 염상구의 무대, 청년단 사무실을 발견하다 벌교를 볼 수 있던, 김사용 영감의 고택 일제의 그늘이 담긴, 소화다리 소화네 집과 정하섭의 집을 보다 3. 문학관을 둘러보면, 태백산맥은 현실이 된다 태백산맥의 이적성 시비와 고뇌의 시간 태백산맥 문학관의 숨겨진 건축미 문학관에서 본 10권의 소설을 쓸 수 있는 비결 벌교엔 『태백산맥』이 살아 숨쉰다 인용 여행기
3. 문학관을 둘러보면, 태백산맥은 현실이 된다 문학관 전면 벽에 쓰인 ‘문학은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인간에게 기여해야 한다.’라는 조정래 씨의 글귀가 눈길을 끈다. 그에게 있어 문학이 어떤 것인지 이 한 마디 말로 잘 알 수 있다. 누군가에게 문학은 여가이거나 돈벌이 수단일 테다. 하지만 조정래 씨는 거기서 더 한 걸음 나아가 어떤 사명감까지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런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정치 세력의 회유와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마무리 지을 수 있었던 거겠지. 태백산맥엔 이적성 시비가 잇달았다. 그래서 『아리랑』ㆍ『한강』을 쓸 때 집필하는 시간보다 검찰에서 증언하는 시간이 더 많을 정도였다고 한다. ▲ 문학관에 쓰여 있는 글귀가 눈길을 끈다. 태백산맥의 이적성 시비와 고뇌의 시간 그런 ..
2. 벌교를 거닐면, 소설은 현실이 된다 순천에서 벌교까지는 기차로 22분 걸린다. 바로 옆 동네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다. 지도상으로 봤을 땐 큰 도시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막상 진트재를 지나 중도방죽의 철다리를 지나면서 벌교를 둘러보니 아주 작고 아담한 곳이더라. 왜 큰 도시로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그건 아마도 소설에선 보성에 소속된 읍이면서도 오히려 보성보다 더 번화한 곳이라 이야기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 벌교역은 아담해서 좋다. 태백산맥의 인물들이 활약한 벌교역과 시장 이제 본격적으로 벌교를 돌아다녀 본다. 벌교는 ‘꼬막’으로 유명하고 전라도에서 욕이 쎈 곳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나에겐 그저 『태백산맥』의 무대이면서, 이념전쟁이 치열하게 펼쳐졌던 장소로 남아 있다. 벌교역은 예전의 그 모..
1. 갑작스레 벌교에 가다 2009년 4월에 국토종단을 시작하여 한 달간 걸어서 5월에 도보여행을 마쳤다. 한 달이란 시간의 의미는 그 어느 때의 1년이란 시간보다도 의미가 있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그 시간은 온전히 나만을 위한 시간이었고 세상과 한 걸음 더 가까워지는 시간이었으니까. 걸을 때마다 몸은 고되지만 생기는 넘치는 아이러니가 계속 되었다. 그로인해 알게 된 건 세상은 그리 삭막하지도 팍팍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어딘가 알게 모르게 도움의 손길은 계속 되었고 그 도움으로 인해 난 한걸음 더 나갈 수 있었으니까. 그 벅찬 감동과 열정은 1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생생하다. ▲ 2009년에 한 달동안 목포에서 고성 전망대까지 걸어갔다. 도보여행 그리고 1년 후 그 후 1년이 지났다. 작년엔 4월..
차가운 형무소 안의 따뜻한 사람 목차 1. 들어가는 말: 과거를 ‘오래된 미래’로 만드는 방법볼거리는 많지만, 억지 비감을 강요하다차가운 콘크리트 건물 안에 어떻게 따뜻한 인간미를 채워 넣을 것인가 2. 서대문 형무소와 독립 선언조금은 특이한 강화도조약 제1조서대문 형무소가 보여주는 조선 독립의 민낯 3. 의주로에 경성감옥이 만들어진 이유서대문 형무소는 왜 의주로에 만들어졌나? 4. 서대문 형무소와 남영동 1985 서대문 형무소보단 『남영동 1985』『남영동 1985』보단 서대문 형무소 5. 서대문형무소에서 만난 리영희 선생님 상위 10%를 위한 나라상위 10%를 위한 나라에서 살아남기‘낙오자’라는 화두 받아들이기 6. 닫는 글: 역사를 기억으로 남게 하는 법정체성은 무엇으로 보장되는가?역사가 추억으로 ..
6. 닫는 글: 역사를 기억으로 남게 하는 법 시간은 분명히 흐른다. 그러고 보면 지금 이 순간도 눈 깜빡하는 사이에 과거가 되어 있다. 그렇다면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과연 같은 사람이라고 누가 보장할 수 있을까? 정체성은 무엇으로 보장되는가? 단재학교에서 벌써 4년째 만나고 있는 학생이 있다. 같이 생활을 하다 보니 달라진 모습이 눈에 띄지 않았다. 하지만 작년 여름방학 때 2주 정도 보지 않다가 갑자기 보니 달라진 얼굴이 보였다. 과거의 사진과 지금 사진을 비교해서 보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학생을 과연 같은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이런 경우 그 사람의 행동방식이나 생각은 그대로이기에 같은 사람이라 해야 하는 것일까? ▲ 예전엔 귀엽던 아이가 지금은 잘 생긴 청소년이 되..
5. 서대문형무소에서 만난 리영희 선생님 12옥사를 천천히 둘러봤다. 평소에 관심 있던 분들이 많았기에 하나하나 곱씹듯이 둘러본 것이다. 상위 10%를 위한 나라 그러던 중 한 사람의 인터뷰 내용이 나의 두 눈을 붙잡아 두었다. 바로 리영희 선생님의 인터뷰 글이었는데, 그건 어쩌면 지금과 같은 ‘삼포시대’, ‘청년실업 100만명 시대’에 울림을 주는 말이었다. 리영희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 네가 실업자인 건 자유의 대가니까 혜택이야. 넌 야생마 같은 아이잖니? 스스로 항상 잉여인간이고 청년백수라고만 생각했는데 야생마가 되니 어쩐지 신이 난다.똑같이 청년 실업에 잉여인간이라는 기분으로 괴로워할 젊은이들에게 뭔가 충고해주실 말씀이 없냐고 여쭙자 계속 사양하시다가 괴테 이야기를 꺼내셨다.- 괴테도 말이야. ..
4. 서대문 형무소와 남영동 1985 차가운 건물을 안내도에 따라 걷는다. 형무소는 역사가 박제된 공간이다. 분명 그곳에서 여러 감상을 느끼는 게 정상일 테지만, 박물관 자체가 그렇듯 그냥 휙 보고서 지나치니 어떠한 감상도 어리지 않는다. ▲ 차가운 건물, 그리고 박제된 역사. 그 안에 사람의 온기를 넣지 않으면 그건 그냥 '나와 상관 없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서대문 형무소보단 『남영동 1985』 지하에 재현된 고문하는 광경이나 고문 도구들은 ‘아플 것 같다’는 피상적인 느낌만 주었을 뿐, 그다지 크게 와 닿지 않았다. 그건 오히려 그만큼 지금 사람들이 영상이 주는 시각(청각)적인 충격에 익숙해졌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누군 그러더라 영상으로 본 베이징 자금성의 위용은 어마어마한데, 막상 현장에서 ..
3. 의주로에 경성감옥이 만들어진 이유 그렇다면 일본은 형무소를 왜 한양으로 들어서는 의주로의 초입길에 만든 것일까? ▲ 서대문 형무소가 만들어질 당시의 모습. 서대문 형무소는 왜 의주로에 만들어졌나? 일본은 청나라를 향해 시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청나라의 사신이 들어오던 길목에 버젓이 감옥을 만들어 놓고 “청나라 너희들 이젠 조선에 대해서 감 놔라 배 놔라 하지마!”라고 무언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보고 있으니, 연암이 쓴 『열하일기(熱河日記)』 「황교문답(黃敎問答)」에서 황제가 왜 열하로 피서를 떠났는지 밝힌 대목과 정조의 능행(陵幸) 장면이 떠올랐다. 연암은 삼종형(三從兄)을 따라 황제 고희연의 축하사절단 자격으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몇날 며칠을 고생한 끝에 북경에 도착했지만, 황..
2. 서대문 형무소와 독립 선언 서대문형무소는 중국 사신들이 한양으로 들어오던 길목인 의주로(義州路)에 설치된 감옥이다. 영은문(迎恩門, 황제의 은혜를 영접하는 문)이 헐리고 독립문이 세워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독립은 진정한 독립이 아니었다. 우리에게 중화세계로부터의 독립선언은 일본의 강압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그건 일본의 의도가 숨겨있음을 알 수 있다. ▲ 의주로는 조선시대에 주요 간선 도로 중 하나였다. 특히 중국 사신이 오던 길로 그들을 맞이하는 영은문이 있었고 모화관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조금은 특이한 강화도조약 제1조 조선은 1876년에 최초의 근대조약을 맺는다. 지금 각 국가와 FTA를 체결하는 것처럼 조선은 주권을 가진 나라로 다른 나라와 동등한(?) 입장에서 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그게..
1. 들어가는 말: 과거를 ‘오래된 미래’로 만드는 방법 서대문 형무소는 꼭 한 번 가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건 애국심 때문에도, 순국선열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도 아니다. 어디까지나 역사가 어떤 현재적인 관점으로 서술되어 있으며, 그걸 우린 어떻게 기억하고 계승해야 하는지 보기 위해서다. ▲ 단재학교 학생들이 카자흐스탄에 가게 되면서 학생 한 명과 오게 됐다. 볼거리는 많지만, 억지 비감을 강요하다 이미 재작년에 서대문 형무소에 방문했으니, 이번에 방문한 것까지 하면 두 번째 방문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지난번엔 그다지 감흥은 없었는데 이번엔 훨씬 많은 것들이 느껴졌다. 그때나 지금이나 시설이 크게 달라진 것은 없지만, 하나하나 곱씹듯이 보게 되니 그와 같은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관람방향을 따라..
목차 1. 공부하니 조으다~ 여행하니 더 조으다~ 아는 사람보단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보단 즐기는 사람이 되자? 앎과 좋아함과 즐김은 하나다 여행은 건빵을 춤추게 한다 2. 캠퍼스의 낭만처럼 떠난 여행 아주 늦게 온, 하지만 적절할 때 찾아온 캠퍼스 낭만 공부하는 이에겐 여행도 부담이 되고 어떤 여행인지 몰라도, 여행은 즐겁다 3. ‘내소사’란 이름이, 역사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김제평야엔 노란구름 피어나고 내소사와 소정방 역사와 야사 역사가 재밌는 이유 4. 알면 쓸데없는 내소사 지식과 등산론 사찰로 들어가는 길은 행복이어라 대웅전 천정엔 문고리가 있다 이따금 가슴이 답답할 때면 오르다 5. 내소사 관음봉에 오르다 초반엔 무척 힘들었지만, 그 힘듦에 비례하여 뿌듯함도 컸다 계획도 없이 불안도 없..
7. 이윤영의 내소사 시가 특별한 이유와 우리의 뒷풀이 사찰을 읊은 시라면 으레 있는 과장법에 대해선 저번 후기에서 살펴봤다. 하긴 여러 한시를 공부하다 보니 굳이 사찰시가 아니더라도 과장을 하는 경우가 숫하게 보이긴 한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동인시화』에선 이런 과장법에 대해 다루며 “이것은 말로 뜻을 해쳐선 안 되는 것으로 다만 뜻에 마땅히 할 뿐이다.是不可以辭害意, 但當意會爾.”라고 결론지으며 내용 전달에 더 탁월했다면 그건 ‘시적 허용’으로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 내소사 좋다. 내소사를 둘러보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지금이 좋다. 이윤영의 「내소사」란 시가 특별한 이유 이처럼 교수님은 사찰시에선 이런 과장법이 허용된다고 말씀해주셨다. 그래서 그런 구라를 씨게 칠수록 사찰의..
6. 사찰시의 특징과 내소사란 시의 독특함에 빠져 어느 정도 내려오니 계곡이 보였다. 물이 그렇게 많진 않아도 발을 충분히 담그고 있을 만했고, 물이 어찌나 차가운지 발을 계속 담그고 있으면 한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함께 앉을 정도의 평평하고 큰 바위는 없어서 어떻게든 각자 앉았고 주전부리들을 세팅하기 시작했으며, 팩으로 사온 소주를 분배하기 시작했다. ▲ 계곡야유회를 준비하는 손길들. 내소산 계곡에서 시회가 열리다 그리고 더욱 재밌었던 점은 교수님이 한시를 전공한 사람답게 “여기에 왔으니, 내소사에 관련된 시는 한 편 봐야지”라고 했다는 점이다. 지식인들의 이런 식의 고상한 놀이가 때론 싫게도 느껴졌다. 현실의 문제는 더욱 꼬여만 가는데 거기엔 지식인들의 무관심과 이와 같은 지적 유희가 한몫을 하는 면..
5. 내소사 관음봉에 오르다 이제 내소사도 둘러봤고 내소사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도 들었으니, 본격적으로 등산을 할 차례다. 그런데 나도 등산을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왔지만 아이들도 몰랐던지, 등산할 차림을 갖추지 않고 왔더라. ▲ 한 걸음, 한 걸음씩 열심히 올라가는 아이들. 대단하다. 초반엔 무척 힘들었지만, 그 힘듦에 비례하여 뿌듯함도 컸다 물론 이 말은 지금의 기성세대들처럼 등산화를 갖추고 값비싼, 그러면서도 천편일률적인 등산복을 갖추어 입어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나처럼 그냥 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등산복을 풀세트로 갖추거나, 낮은 산임에도 히말라야라도 탈 것 같은 배낭을 짊어지고 오르는 것이 좋아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신발은 신축성이 있으면 되고, 옷차림은 올라갈 때나 내려올 때 거치적거리지 ..
4. 알면 쓸데없는 내소사 지식과 등산론 정확히 두 시간 만에 내소사 정류장에 도착했다. 오늘은 현충일이다 보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절 입구를 거닐고 있더라. 사찰로 들어가는 길은 행복이어라 교수님은 원래 내소사를 둘러보지 않고 바로 관음봉을 오를 생각이었나 보더라. 하지만 막상 절을 보는 순간 맘이 바뀌셨던지, “여기까지 왔으니, 그래도 절은 한 번 둘러보고 올라가도록 합시다.”라고 말씀하셨다. 절로 들어가는 입구는 어느 절이나 좋았던 것 같다. 순천의 강천사로 들어가는 입구의 고즈넉한 분위기도, 지금 이곳 내소사의 입구도 높게 뻗은 나무 사이로 느리게 걷고 있노라면 굳이 다른 게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지금의 이 여유, 그리고 여기서만 느낄 수 있는 적막함이 내 온몸을 훑고 지나가면서, 무에 그리 아..
3. ‘내소사’란 이름이, 역사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버스는 달려간다. 김제평야를 지나서 가는데 진귀한 풍경이 보이더라. 꼭 가을인 것처럼 황금물결이 이는 곳도 있었고, 어느 곳은 이제 막 벼를 심었는지 파릇파릇한 새싹이 보이는 곳도 있었다. 노랗게 익은 곡식과 이제 막 자라는 푸른 여린 새싹의 대비가 아주 절묘했다. ▲ 노란색의 들판이 이채롭다. 김제평야엔 노란구름 피어나고 그래서 교수님께 물어보니, 노랗게 익은 것은 보리라고 말씀해주시더라. 학생 때 이모작을 한다는 얘길 듣긴 했는데, 실질적인 모습을 이제야 보게 된 셈이다. 보리를 키워 이 시기에 수확하고, 그 자리에 다시 벼를 심어 가을에 수확한다. 정몽주가 지은 「중양절에 익양 태수 이용이 새로 지은 명원루에서 쓰다重九日題益陽守李容明遠樓」라는 시에..
2. 캠퍼스의 낭만처럼 떠난 여행 5월은 가족의 달이지만, 만물이 싱그러워지는 계절이기도 하다. 그래서 3월엔 소생하는 만물에 동화되어 내 마음도 가눌 길 없이 산들바람따라 하염없이 흔들거리고, 4월엔 어느덧 익숙해진 따스함에 마음도 차분히 가라앉으며, 5월엔 덥지도 춥지도 않은 적당한 기운에 어디로든 떠나고 싶어진다. ▲ 4월엔 전주대에도 곳곳에 봄이 내렸다. 아주 늦게 온, 하지만 적절할 때 찾아온 캠퍼스 낭만 하지만 임용을 다시 시작하고 나선 맘이 바빠져서인지, 홀로 애태워서인지, 시간에 대한 압박 때문인지 어디로 떠나질 못했다. 3월에 임용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엔 2주에 한 번씩은 어디든 가야지라고 맘먹었는데, 정작 그게 한 번의 여행으로 끝나버렸다. 그렇게 몸이 근질근질하던 차였는데 5월 ..
1. 공부하니 조으다~ 여행하니 더 조으다~ 요즘 한문 공부하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확실히 2010년에 공부할 때만 해도 여러 문장들은 그저 봐야만 하는, 그래서 소위 아이들이 ‘이런 시인들이 안 태어났으면 우리가 이렇게 많은 것을 공부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라고 말하는 것처럼 나도 여러 글을 쓴 학자들을 버거워했으며 부담스럽게만 느끼고 있었다. 그에 반해 지금은 글 하나하나가 너무도 궁금하고 그 학자들이 왜 그런 글을, 왜 그런 시를 쓰게 됐는지 알고 싶기만 하다. ▲ 2007년 6월의 모습. 그 당시에 보던 책들이 보인다. 아는 사람보단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보단 즐기는 사람이 되자? 2012년 11월엔 가평 펜션에서 단재학교 학부모들과 교사들, 그리고 일본학자 나카지마 히로카즈가 함께 ..
지리산 종주기 목차 13.11.11(월) 화엄사 ⇒ 노고단 불안을 품은 동지들 화엄사에서의 점심공양 우린 노고단에 오르다 우린 노고단에 올랐다 13.11.12(화) 노고단 ⇒ 연하천 입산시간 지정제와 비박금지 등산하며 공부한다 편함 뒤에 있는 불편함 13.11.13(수) 연하천 ⇒ 세석 기암괴석을 헤치고 가다 자극적인 맛과 자극적인 인간 위기상황에서 드러난 역량 갑작스런 상황에서의 저력 13.11.14(목) 세석 ⇒ 장터목 궁하해야 통한다 여유롭던 하루 제석봉의 횡사목 첫 천왕봉 등반과 저녁만찬 13.11.15(금) 장터목 ⇒ 털보농원 새벽 천왕봉 등반기 세 번째 천왕봉 등반기 천왕봉이 알려준 지혜 막힐 때 새 길이 열린다 두 가지 광경 지리산 종주를 마치며 인용 지도 여행기
21. 5박 6일 간의 지리산 종주를 마치다 ▲ 다섯째 날 경로: 장터목 대피소~ 천왕봉 ~ 장터목 대피소 ~ 중산리 탐방안내소 12시에 시작된 하산길이 4시 4분이 되어서야 마무리 되었다. 드디어 지리산을 헤맨 지 5일 만에 지리산에서 내려올 수 있었고 애초 계획보다 하루 일찍 하산하게 된 것이다. 선발대는 무려 1시간 30분이나 우리를 기다려야만 했다. 7명의 사람과 7개의 배낭을 싣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길에 본 지리산의 단풍은 정말로 멋있었다. 마치 월요일에 화엄사에 가던 길이 떠올랐다. 그건 마치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이 길이 데자뷰처럼 느껴졌다. 아득한 시간들이 지나 끝냈다는 자부심을 느끼며 걷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처음은 끝과 맞닿아 있다. 끝을 걸으며 처음을 떠올리고 처음을 시작하며..
20. 하산하는 길에 마주한 두 가지 광경 ▲ 다섯째 날 경로: 장터목 대피소~ 천왕봉 ~ 장터목 대피소 ~ 중산리 탐방안내소 주원이는 무릎이 아파서 힘들긴 해도 자신의 페이스에 맞게 적당히 쉬어가며 꾸준히 내려갔다. 그래서 중산리 탐방로까지 내려가는 동안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주원이의 저력은 그와 같은 꾸준함에 있다고 생각한다. 내리막을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현세와 지민이었다. 내려가는 내내 많이 힘들어 했기 때문이다. 천왕봉에서 중산리까지의 구간은 급경사 구간이어서 무거운 배낭까지 메고 내려가면 무릎에 부담이 많이 된다. 자칫 잘못하면 발을 접지를 뿐만 아니라, 무릎 관절에도 부담을 안겨줄 수 있는 정도였다. 그래서 내려갈 때는 더욱 더 허벅지에 힘을 주고 긴장하며 내려가야만 한다. 우리..
19. 원래의 길이 막히면 다른 길이 열린다 ▲ 다섯째 날 경로: 장터목 대피소~ 천왕봉 ~ 장터목 대피소 ~ 중산리 탐방안내소 원랜 천왕봉에서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치밭목 대피소에 가서 점심 겸 저녁을 먹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 닥친 것이다. 계획이 변경되다 천왕봉 근처에 다다르자 건호가 부리나케 오더니, 심각한 투로 “올라오는 길에 등산객에게 물어보니, 치밭목 대피소는 난방을 해주지 않는대요. 그래서 거기서 자는 건 엄청 힘들거래요. 그럴 바에야 치밭목에서 묵지 말고 아예 털보농원까지 가서 쉬는 게 어때요?”라고 말하는 거였다. 그 말인 즉은, 이틀에 걸려서 끝날 여행을 하루 만에 마무리하자는 것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끝난다면 환영할 일이지만, 우선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아이들이 ..
18. 천왕봉이 알려준 지혜 ▲ 다섯째 날 경로: 장터목 대피소~ 천왕봉 ~ 장터목 대피소 ~ 중산리 탐방안내소 어제 본 천왕봉은 가을의 운치를 한껏 품은 곳이었다. 가을산에 오르는 이유는 단풍의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서서히 잎사귀를 떨어뜨리며 겨울을 준비하는 ‘처연한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어서이기도 하다. 인간이 갖지 못한 ‘버려야 할 때, 놓을 줄 아는 마음’을 그곳에서 볼 수 있으니 말이다. 더욱이 오랜만에 본 천왕봉의 모습은 경이로웠다. 사방이 확 트여 수묵화에서나 볼 법한 능선을 그대로 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지리산에 한 번 와서 세 번 천왕봉에 오르다 그에 반해 오늘 새벽에 본 천왕봉은 쓸쓸하면서도 고지대 산악들이 지닌 풍미를 담은 곳이었다. 높다는 건 쓸쓸한 것이다. ..
17. 세 번째 천왕봉 등반기1 ▲ 다섯째 날 경로: 장터목 대피소~ 천왕봉 ~ 장터목 대피소 ~ 중산리 탐방안내소 8시까지 퇴실하라고 했지만, 우린 새벽 산행을 마치고 8시가 약간 넘어서 도착했다. 그래도 1호실은 개방되는 곳이기에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 축하하는 의미로 나는 사이다를 민석이는 초코파이를 사서 약소한 파티를 했다. 5일차 일정을 시작하다 대피소에 도착해선 민석이가 함께 올라간 사람들을 위해 사이다를 사줬다. 무려 1.500원이나 하지만 아낌없이 함께 한 사람들에게 베푼 것이다. 그때 먹은 사이다는 지금껏 먹은 어떤 음료보다도 맛있었고 새벽 산행을 더 의미 깊게 만들어줬다. 아침은 간단하게 먹고 점심은 치밭목 대피소에 도착하여 먹기로 했다. 이제 세 번째 천왕봉 등산을 하려 한다. ‘..
16. 새벽 천왕봉 등반기 ▲ 다섯째 날 경로: 장터목 대피소~ 천왕봉 ~ 장터목 대피소 ~ 중산리 탐방안내소 2층 다락방에서 자니, 시끄럽거나 부스럭거리지 않아 편하게 잘 수 있었다. 하지만 맘 놓고 푹 잘 수는 없었다. 새벽산행을 해야 하는데, ‘과연 눈이 얼마나 왔을지? 그럼에도 올라가도 되는지?’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6시 50분 정도에 일출이 시작된다고 하기에, 우린 4시 30분에 일어나 준비를 했다. 건호와 승빈이는 일어났는데, 민석이는 어제와는 달리 가기 싫다고 하더라. 모두 다 챙기고 밖에 나온 시각은 5시 10분이었다. 눈은 그쳤지만, 꽤 많은 눈이 쌓여 있었다. 건호는 아이젠이 없었고 승빈이는 장갑이 없었다. 그래서 모든 물품을 챙겨올 수 있도록 들여보냈다. 몇 분 후에 건호가 나오..
15. 첫 천왕봉 등반과 생각지 못한 저녁만찬 ▲ 넷째 날 경로: 세석 대피소 ~ 장터목 대피소~ 천왕봉 ~ 장터목 대피소 천왕봉에 오르는 길 중에, 추억 속에 있던 평탄한 길은 온데간데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힘든 길만 있었다. 화엄사에서 노고단으로 올랐던 길은 여기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던 것이다. 하지만 어찌 보면 그런 난이도 높은 등산로가 천왕봉을 더욱 각별한 의미로 느껴지게 만들었을 것이다. 지민이는 바위를 타고 오를 자신이 없어 오르지 못했고, 주원이는 무릎 통증 때문에 오르지 못했다. ▲ 쉬고 싶을 텐데도 열심히 올라가는 아이들. 종주 중 처음으로 천왕봉에 오르다 천왕봉은 정상만 삐죽 솟아 있는 느낌이다. 바위를 타고 오르다 보면 넓이가 얼마 되지 않는 곳에 도착한다. 그곳에 ‘지리산 천왕봉 19..
14. 제석봉의 횡사목 ▲ 넷째 날 경로: 세석 대피소 ~ 장터목 대피소~ 천왕봉 ~ 장터목 대피소 조금 쉰 후에, 배낭은 대피소에 두고 맨몸으로 천왕봉에 올랐다. 1.7㎞로 1시간 30분이 걸린다고 한다. 배낭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몸은 가벼웠지만, 천왕봉으로 가는 길은 보통이 아니었다. 연하천에서 벽소령으로 갈 때 바위에 설치된 밧줄을 잡고 올라가야 한다고 소리를 쳤었는데, 천왕봉으로 가는 길은 북한산 백운대에 오르는 것처럼 경사도 심했고 밧줄과 안전봉이 없으면 오르기 힘들 정도였다. 2000년도에 대학교 동아리에서 당일치기로 천왕봉에 올랐는데, 그 땐 대피소까지 올라가는 길만 힘들었을 뿐, 천왕봉까지 가는 길은 평범했다는 기억이 어렴풋하게 남아있다. 그래서 편하게 갈 줄만 알았는데, 현실은 기억이 얼..
13. 지리산 종주 중 가장 여유롭던 하루 ▲ 넷째 날 경로: 세석 대피소 ~ 장터목 대피소~ 천왕봉 ~ 장터목 대피소 초기에 계획을 짤 땐, 세석에서 이틀 밤을 보내는 거였다. 원래대로 했다면, 오늘은 청학동까지 내려갔다가 올라오는 일정을 진행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부터 산불예방 때문에 세석대피소가 예약을 받지 않아 계획을 변경해야 했다. 그래서 세석 바로 옆에 있는 장터목 대피소에 예약하게 된 것이다. ▲ 어떻게 할 건지 계획을 다시 상의하는 아이들. 삼신봉에 갔다 올까? 천왕봉에 미리 오를까? 세석에서 장터목 대피소까지는 3.4㎞ 밖에 되지 않으며 2시간 정도의 시간이면 갈 수 있다. 그건 곧 오전 중에 오늘 여행이 끝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 날은 날씨가 변수였다. 지리산에 오기 전부터..
12. 궁하면 통하게 되는 이유 ▲ 넷째 날 경로: 세석 대피소 ~ 장터목 대피소~ 천왕봉 ~ 장터목 대피소 지리산 프로젝트가 6박 7일의 일정으로 시작되었으니, 어느덧 절반이 지났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은 ‘시작=반’이라는 공식으로 나타낼 수 있고 그건 곧 반은 시작이라는 말로 재해석할 수도 있다. 그렇게 재해석할 수 있다면 반절 정도가 지나 해이해진 마음을 다잡자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지금부턴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이 여행을 정리하며 나머지 일정을 진행할 것이다. 궁즉통의 참 뜻 지금도 전날 밤에 걱정이 앞서서 잠을 이루지 못하던 때와 노고단에 오르며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걱정하던 때를 잊지 못한다. 닥치지 않은 미래는 늘 두려운 법인데, 그 땐 겁에 잔뜩 질려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11.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발휘되는 저력과 대담함 ▲ 셋째 날 경로: 연하천 대피소 ~ 세석 대피소 세석에 도착하기 전에 어떤 봉우리에서 해가 저무는 모습을 봤다. 이렇게 자세하게 그러면서도 자세히 본 적은 처음이다. 서서히 해가 산 사이로 사라진다. 산 주변엔 노을이 짙게 어리기 시작하여 무척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 장엄한 광경을 우린 넋을 놓고 바라보며 산에 오르길 잘 했다는 생각을 했다. ▲ 선명하게 보이던 해넘이의 광경. 장엄함의 극치다. 현세의 포기하지 않는 저력 현세는 그제 노고단에 오를 땐 아예 땅바닥에 누울 정도로 힘겨워했고, 어제 연하천에 도착할 땐 그나마 뒤처지진 않았지만 많이 힘들어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함께 갔던 건호는 “거의 쓰러지기 일보직전에 도착했다.”고 말할 정도였..
10. 사람의 역량은 위기상황에서 드러난다 ▲ 셋째 날 경로: 연하천 대피소 ~ 세석 대피소 7명이서 몰려다니다 보니, 시간을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 서로의 체력이 현격하게 차이나기 때문이다. 오전팀과 오후팀이 나뉘어져 코펠과 연료, 그리고 버너를 번갈아 들고서 이동한다. 6명이 모두 출발하는 것을 보고 나도 걸어가기 시작했다. ▲ 밥을 먹고 다시 산행을 시작했다. 산이 우리를 키운다 몇 분이나 걸어왔을까? 갑자기 건호가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두리번거린다. 그러고 나서 “코펠 챙겨온 사람?”이라고 묻는다. 그 물음에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 때 우리 뒤에 오시던 분들이 “벽소령 앞 의자에 검은색 코펠이 놓여 있던 데요.”라는 중요한 정보를 알려주신다. 그 순간 ‘과연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9. 자극적인 맛과 자극적인 인간 ▲ 셋째 날 경로: 연하천 대피소 ~ 세석 대피소 벽소령 대피소에선 물을 구할 수 없다고 해서 물을 떠왔는데, 계단을 따라 밑으로 내려가면 쉽게 물을 구할 수 있었다. ▲ 벽소령 대피소에 잘 도착했다. 기암괴석을 지나서 오는 경험은 진귀한 경험이었다. 한 번의 자극은 삶의 활력소가 되지만 매번의 자극은 삶을 죽인다 잘못된 정보 때문에 배낭이 조금 더 무거웠지만, 그래도 물을 쉽게 구할 수 있으니 그걸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점심은 ‘소고기 비빔밥’을 먹기로 했다. 3일 동안 카레, 비빔밥, 육개장 등 주구장창 MSG가 든 음식만 먹다 보니, 배는 부르지만 더부룩하고 뭔가 불쾌감 같은 게 느껴진다. 그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영화팀 모두 윗입술이 갈라질 정도로 텄다. 사람의 ..
8. 기암괴석을 헤치고 벽소령 대피소로 가는 길 ▲ 셋째 날 경로: 연하천 대피소 ~ 세석 대피소 셋째 날이 밝았다. 오늘은 연하천에서 출발하여 벽소령에서 점심을 먹고 세석까지 가는 일정이다. 연하천에서 벽소령까지 3.6㎞이고 벽소령에서 세석까지 6.3㎞이니, 총 9.9㎞를 가면 된다. 일반적으로 5시간 30분이 걸린다고 한다. 연하천 대피소가 특이한 부분 연하천 대피소는 노고단 대피소에 비하면 건물 크기도 작고 자는 공간도 좁은 편이다. 하지만 남녀 숙소가 분리되어 있는 점은 맘에 든다. 연하천 대피소만 특별하게 모포가 아닌 침낭을 대여해 준다. 그리고 바닥의 한기를 막을 깔판은 2.000원을 내고 주문해야 한다. 그러니 겨울에 침낭을 챙기지 않고 지리산 종주를 하려면, 각 대피소 당 4.000원(모포..
7. 나의 편함 뒤엔 누군가의 불편함이 있다 ▲ 둘째 날 경로: 노고단 대피소 ~ 연하천 대피소 능선을 따라 가다보니 남쪽 능선을 따라갈 땐 따스한 햇살이 몸을 녹여주기에 걸을 만 했지만, 북쪽 능선을 따라갈 땐 음지인데다 바람까지 세차게 불어 무지 추웠다. 계속 가다보면, 양지와 음지를 번갈아 지나가게 된다. 드디어 삼도봉에 도착했다. 이 봉우리를 기점으로 삼도(전남, 전북, 경남)가 나눠진다. 경계는 인간이 나눈 인위적인 선이지만, 때론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져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게도 된다. 12월 31일과 1월 1일의 경계, 나라와 나라의 국경, 남과 북의 접경지 등이 모두 인위적인 구분이지만 사람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경계들이고 또한 그 의미를 부여하려 무진 애쓰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우..
6. 우린 등산하며 공부한다 ▲ 둘째 날 경로: 노고단 대피소 ~ 연하천 대피소 노고단도 어찌 보면 누군가에겐 목적인 산일 수도 있지만 우린 종주가 목표기 때문에 그곳에서 오랜 시간을 보낼 여유는 없었다. 그래서 잠시 둘러보고 바로 출발했던 것이다. 재밌게도 여기엔 ‘지리산 종주시점’이라는 안내문이 큼지막한 글씨로 쓰여 있더라. 이 말마따나 어제 화엄사에서 노고단까지 오른 것은 워밍업이었고 지금부터 본격적인 시작이다. ▲ 지리산 종주시점, 우리의 종주도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힘들 때, 하나가 된다 건호는 노고단 대피소에서 연하천 대피소로 가는 길에 밥을 해먹을 수 있는 곳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것만 믿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냥 길을 나섰는데, 등산객에게 물어보니 물이 나오는 곳이 없다고 말해준다. ..
5. 지리산 입산시간 지정제와 비박금지 ▲ 둘째 날 경로: 노고단 대피소 ~ 연하천 대피소 자는 듯, 마는 듯 했다. 몸은 피곤했지만, 잠자리도 낯설고 사람들이 따닥따닥 붙어 자야 하니 이래저래 신경이 쓰인 탓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바스락바스락 짐을 챙기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난다. 새벽 4시부터 등산을 할 수 있다고 하니, 짧은 일정으로 지리산을 종주하러 온 사람들은 새벽부터 부산히 움직이는 것이다. ‘새벽별을 벗 삼아 산을 타는 기분은 어떨까? 두려움이 몰려옴과 동시에 황홀한 느낌도 있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다시 눈을 감았다. ▲ 서서히 아침이 오고 있는 노고단 대피소의 풍경. 어젯밤의 그 맹추위도 떠오르는 햇살에 자취를 감췄다. 입산 시간 지정제와 비박금지 예전엔 등산 장비를 챙겨서 자신..
4. 열정으로 우린 노고단에 올랐다 ▲ 첫째 날 경로: 남부사무소 정류소 ~ 노고단 대피소 도착하자마자 아이들은 취사장으로 갔고 난 안내소에 가서 자리 배정을 받았다. 소등 시간은 9시고 새벽 4시부터 등산을 할 수 있으며 8시까지 퇴실해야 한단다. 9시에 소등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는 건 이곳은 숙박하기 위한 곳이 아닌, 등산하기 위해 잠시 몸을 누이는 곳이란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피소에서 묵다보면 절로 산 사람이 되는 느낌이 든다. 솔직히 처음에 지리산 종주를 계획했을 땐 당연히 텐트를 가지고 비박을 할 생각을 했었다. 그렇게 해야 뭔가 제대로 종주를 하는 느낌도 들었기 때문인데, 그리 하지 못한 이유는 다음 후기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보도록 하겠다. 노고단 대피소에 처음으로 오다 모포를 ..
3. 함께 걷기에 우린 노고단에 올 수 있었다 ▲ 첫째 날 경로: 남부사무소 정류소 ~ 노고단 대피소 산행을 시작한 시간은 12시 30분이 지났을 때였다. 화엄사에서 노고단까지는 4㎞로 보통 사람들은 4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우리들은 능숙한 산악인이 아니기에 시간이 더 많이 걸리겠지만, 그래도 6시 안에는 도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 본격적인 등반은 시작되었다. 짐이 한 가득이지만 한 걸음씩 걷는 아이들. 순조롭지 않은 등산의 시작 이번 산행을 시작하면서 계속 ‘6시까지 도착해야 한다’는 걸 염두에 두고 있었다. 물론 이미 대피소 예약은 했기 때문에 좀 늦는다고 전화를 하면 그 뿐이지만, 6시 이후엔 비예약자들에게 방이 배정되며 출입문에서 들어오는 찬바람을 맞으며 잘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시간은..
2. 지리산의 가을정취와 화엄사에서의 점심공양 ▲ 첫째 날 경로: 남부사무소 정류소 ~ 노고단 대피소 화엄사 입구 정류장에서 내려 배낭을 메고 올라간다. 오늘부터 날씨가 추워진다는 예보가 있어서 아이들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왔다. 가을 속을 거닐 때, 사람은 풍요로워진다 하지만 현세와 지민이는 장갑을 준비하지 못했고, 건호는 목요일에 비가 온다던데 우의를 준비하지 못했다. 정류장 근처 상점에서 살까 했지만, 막상 그런 물품을 살만한 가게도 없었다. 이젠 대피소 밖에 믿을 곳이 없다. 화엄사로 가는 길은 가을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가을의 싱그러움은 단풍을 통해 그 면면을 드러낸다. 단풍은 사람을 감성적이게 만든다. 이성적인 사고가 세상을 분절하여 인식하게 하며 사람을 예리하게 파헤쳐 요소요소를 분석하게..
1. 불안을 품은 동지들이여 ▲ 첫째 날 경로: 남부사무소 정류소 ~ 노고단 대피소 아침 6시 30분에 남부터미널에서 구례로 떠나는 버스를 타기로 했다. 지난 10월에 부산영화제를 갈 때 7시 30분 버스를 타려했는데, 늦은 학생들 때문에 차를 놓친 경험이 있었다. 개인의 작은 실수가 단체에겐 엄청난 피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 그 때에 비하면 무려 한 시간이나 일찍 출발하는 것이고 그러려면 새벽부터 부산을 떨어야 하지만, 늦을 거라는 걱정은 거의 하지 않았다. ▲ 새벽 길을 나서서 간다. 첫 전철을 타기 위해. 종주를 위해. 불안을 맘속에 간직한 동지들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배낭을 최종적으로 점검하고 아침밥을 먹고 길을 나섰다. 해가 뜨기 전의 새벽 거리의 운치는 이루 말로..
카자흐스탄 여행기 목차 여는 글 카자흐스탄 여행과 공감능력 1주차(알마티 한국어교육원) 13.06.14(금) 경계를 넘어서다비행기를 타고 알마티로알마티의 한국어 교육원 13.06.15(토) 정신승리란?도로 인프라와 서구중심주의긴장의 미학 13.06.16(일) 카자흐스탄의 택시고려인, 존경받는 민족이 되다카자흐스탄의 음식 13.06.17(월) 6월에 함박눈을 맞다알마티의 콕토베맛있는 걸 왜 먹질 못하니 13.06.18(화) 수수하게 밋밋하게전통과의 연결점인 유르타알마티 시내 돌아보기 13.06.19(수) - 아스타나로의 기차여행 알마티에서 아스타나로21시간을 달리는 기차 13.06.20(목) - 아스타나 둘러보기 새 수도에 그린 꿈바이테렉과 카자흐스탄의 꿈자본의 중심지로 우뚝 서다한국문화원을 둘러보다이슬람..
81. 22일간의 여행, 68일간의 기록 끝으로 이 여행기를 시작부터 끝까지 읽어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나 또한 68일 동안 여행기를 정리하느라 힘들었지만, 이걸 읽어준 사람들도 분량이 만만치 않아 똑같이 힘들었을 거라는 걸 안다. 카자흐스탄 여행기를 마쳤다 나에게 이 여행기는 하나의 도전이었다. 특별한 의미의 도전이 아닌, 여는 글을 쓸 때 가졌던 열정을 마지막까지 이어갈 수 있느냐 하는 도전 말이다. 그래서 여행기를 쓰는 내내 엄청 부담이 되었다. 자기 만족도에 부합되는 글을 쓰려다 보니, 때론 의욕은 과한데 글은 써지지 않아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았다. 그래서 솔직히 여름방학 내내 이 여행기를 신경 쓰느라 다른 것을 거의 신경 쓰지 못했다. 어쨌든 그렇게 마음의 짐이었던 이 여행기..
80. 나를 아는 모든 이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그런 사회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전태일의 유서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전태일의 삶 자체가 극도로 ‘나’만을 중시하던 시대에 ‘우리’를 회복하고자 했으며, ‘성공신화’를 좇던 시대에 ‘실패의 아름다움’을 알려주고자 했기 때문이다. ▲ 평화시장에 있는 전태일상. 누군가의 희생으로 이룩한 경제발전 한국전쟁으로 초토화된 후, 극도의 이기주의와 기회주의가 판을 치던 때에 노동자들도 소외당하며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평화시장의 봉재공장에서 일하던 시다와 미싱사 보조 등은 사회의 약자로 자기 몸을 서서히 죽여가면서 돈을 벌고 있었다. 공장이라 봐야 몇 평 되지 않는 공간에 널빤지로 위, 아래 공간을 나누어 허리를 숙여야만 들어갈 수..
79. 모두 슬픈데 어떻게 나만 기쁠까 개인이 피폐해지면 공동체가 불안정해지며 결국 사회 전체가 붕괴된다. 이젠 밑도 끝도 모르는 지옥으로 치닫는 이와 같은 현실을 반성하고 우리가 잃어버린 가치들을 되찾아야 한다. 적어도 50년 전만해도 ‘나만 잘 산다’는 말은 통용되지 않았고, 지금도 자본이 미처 이르지 못한 사회엔 그와 같은 사회 형태가 남아 있으니 말이다. 인해질 때, 내가 살고 세상이 살만한 곳이 된다 아래에 나와 있는 예는 하나의 예에 불과하지만, 이러한 유형무형의 삶들은 여전히 볼 수 있다. 우리 또한 이러한 마음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 것이다. 짐짓 ‘그런 마음은 불필요하다’고 자기 최면을 걸고 있는 게 아닐까. 아프리카 부족에 대해 연구 중이던 어느 인류학자가 한 부족 어린이들을 모아 놓고 ..
78. 극단적 경쟁의식이 불인한 존재로 만든다 불인한 사람이 어떻게 성공하는지는 영화 『명왕성』을 통해 볼 수 있다. ▲ 교육의 문제를 전직 교사였던 감독이 흥미진진하게 다뤘다. 교육의 이름으로 괴물을 만들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자막을 통해 나오는 자살한 초등 6학년의 편지는 공부란 미명으로 사람이 어떻게 병들어 가는지 제대로 보여준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함부로 입 밖에 내지 못한 우리네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이 편지를 보자. 죽고 싶을 때가 많다. 어른인 아빠는 이틀 동안 20시간 일하고 28시간 쉬는데, 어린이인 나는 27시간 30분 공부하고 20시간 30분 쉰다. 왜 어른보다 어린이가 자유시간이 적은지 이해할 수 없다. 물고기가 되고 싶다. 잘 되라는 이유로 다음 세대에게 막중한 짐..
77. 진도기록판과 경쟁의식 한국으로 돌아온 지 일주일이란 시간이 지났다. 지금은 학생들과 함께 각자의 여행기를 쓰는 작업을 하고 있다. 아이들이 쓴 후기를 읽으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아직도 카자흐스탄에 있는 것처럼 모든 기억이 생생하고 그 때의 감흥은 그대로다. ▲ 때론 성적으로, 때론 실적으로, 떄론 재산으로 비교한다. 워드작업의 효율적인 진행을 위해 등장한 진도기록판 하지만 이젠 좀 더 냉정하게 카자흐스탄 여행기의 여는 글에서 썼던 ‘자기 자신을 돌아봤나? 인한 존재가 되었나?’라는 것을 짚어볼 차례다. 아이들마다 여행을 하는 동안 틈틈이 기록을 남겼고 그걸 워드작업하고 있다. 기록한 것은 많은데, 그걸 워드 작업할 수 있는 시간은 제한되어 있다는 게 문제다. 그래서 하루 종일 워드작업을 하여 학..
76. 안녕! 카자흐스탄 오전에는 이견호 원장님과의 면담이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큰 도움을 주셨다. 미흡한 부분들이 있었지만, 어쨌든 잘 끝날 수 있도록 성심성의껏 도와주셨기에 감사하는 마음을 전했다. ▲ 교육원은 우리의 홈그라운드였다. 그리고 이견호 원장님이 세심하게 챙겨주셔서 활동하기 편했다. 그 나라에 가선 그 나라의 시선으로 그 나라를 보라 원장님은 단재 친구들의 뽀로통한 자세에 대해 말씀하셨다. 다른 나라에 왔으면 그 나라의 문화나 상황을 이해하려 해야지, 한국적인 시선으로 깎아내리거나 조롱거리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말에 백번 동의했고 ‘카자흐스탄에 도착한 첫 날에 원장님의 「카자흐스탄 문화와 우리의 자세(가제)」라는 주제로 강의를 들었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너무도..
75.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 목요일 저녁에 열기 가득했던 평가회를 마치고 카자흐스탄에서의 마지막 밤이니만큼 잘 사람은 자고 놀 사람은 놀 수 있도록 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설마 이렇게 말한다고 아이들이 밤을 새겠어?’하는 의구심이 있었다. 공통된 주제나 서로의 의견이 상충되는 얘깃거리가 없으면 밤을 새며 이야기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물론 ‘마피아’ 같은 게임을 하며 밤새 놀 수도 있지만, 게임은 많은 사람이 함께 해야 재밌는데 피곤해하는 아이들도 있어서 장시간동안 게임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적당히 얘기하다가 2~3시쯤 모두 자겠거니 하는 생각을 하며 내 방으로 들어갔다. 세상에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다니 방엔 큰 창문이 있고 그 창문으론 ‘아바이Абай 도로’를 내다 볼 수 ..
74. 3주 카작 여행 평가회: 좋았던 점과 고려할 점 좋았던 점 1 – 21시간 걸려 아스타나에 간 여행 기차 여행에 대해서는 이구동성으로 ‘좋았다. 그래서 다음에도 꼭 하자!’고 외쳤다. 21시간동안 같은 공간에서 같은 것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처음엔 심심하면 어쩌나, 힘들면 어쩌나 걱정하긴 했는데, 시설이 좋았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재미있어서 그럴 틈이 없었다. 그런 즐거웠던 기억들이 지금과 같은 아우성을 만들었을 것이다. 다음번엔 동서횡단 열차를 타고 카자흐스탄의 서쪽으로 가보자는 의견도 나왔다. 무려 72시간이 걸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21시간도 아닌 72시간은 어떨지 기대 반, 걱정 반이다. ▲ 침대 칸에서 잠을 자며 아스타나로 가던 여행은 정말 최고였다. 좋았던 점 2 ..
73. 3주 카작 여행 평가회: 미비점 평가회는 곧 이야기 나눔이다 미비 ① 3주 동안 한 가정에서 생활하며 일정을 진행했으면 좋겠음 ② 러시아 & 카작어 고민(실제로 카자흐스탄에선 러시아를 주로 씀) ③ 사막여행: 가는 시간에 비해 머무는 시간이 적음(담배 피는 기사) ④ 홈스테이 학생의 자세한 상황 알려줄 것(가족관계, 성격, 개의 여부) 좋음 ① 기차여행 ② 홈스테이를 통해 사는 모습의 비슷한 점을 알게 됨. 고려 ① 봉사활동 계획(태권도, 레일아트, 한글교사) ② 이문화(농경-유목, 러시아 중심-미국 중심, 다민족-단일민족, 너른 벌판-좁은 토지)에 대한 이해 평가회 시간은 교육원에 도착하자마자 시작하였다. 당연히 마음이 가벼웠다. 원래 어떤 일이든 마무리 지을 땐 마음이 너그러워지는 법이다. 오..
72. 알마티 체험기: 삼겹살과 뜨랄레이부스 LG 거리 근처에서 쇼핑을 하고 저녁은 삼겹살을 먹으러 갔다. 카자흐스탄의 삼겹살이 맛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카자흐스탄은 이슬람 국가로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하지만 외국인들을 위해 돼지고기가 유통된다), 잔뜩 기대하고 갔다. ▲ 오랜만에 다시 LG거리에 왔다. 카자흐스탄에서 먹는 삼겹살 단재학교 학생들의 식성이 오죽 좋던가. 여행 갈 때마다 우린 저녁이면 고기를 구워 먹는다. 그때마다 아이들은 못 먹은 귀신이라도 붙은 듯이 한 명이 1근의 고기를 먹어치우는 광경을 쉽지 않게 목격할 수가 있었다. 그러니 이곳에서도 더욱이 돼지고기를 3주 만에 먹으니 적어도 20인분가량 먹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맘을 단단히 먹고 간 것이다. 그런데 재밌게도 아이들은 1...
71. 알마티 체험기: 지하철 4시간을 달려 교육원에 도착했다. 익숙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니 만감이 교차한다. 그래도 무엇보다 3주간의 일정이 잘 끝나고 있다는 생각에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홈타운 알마티 입성 교육원엔 상명대 학생들이 머물고 있었다. 그들은 자원봉사를 와서 교육원생들을 대상으로 여러 프로그램을 진행했다고 한다. 2주전에 우리가 묵었던 숙소에 들어가니, 각종 밑반찬들과 조리도구, 봉사 때 필요한 준비물들이 어지럽게 널부러져 있었다. 오늘 저녁에 이들은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들이 갈 때까지 우리가 교육원에서 자리를 비워줘야 했다. 애초의 계획은 오늘은 교육원에서 쉬고, 내일 학생들과 함께 쇼핑을 다닐 예정이었는데, 이런 이유 때문에 오늘 쇼핑을 하고 내일 쉬기로 했다. ..
70. 나아감과 멈춤의 조화에 대해 오늘은 알마티에 가는 날이다. 알마티를 떠나서 탈디쿠르간과 우슈토베를 돌아다니며 다양한 경험을 한 지 벌써 2주가 흘렀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 돌아간다는 것 다시 알마티의 교육원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마치 한국에 돌아가는 것 같이 기분마저 든다. 그만큼 어느새 알마티 한국교육원은 우리에게 ‘홈타운’ 같은 곳이 되었다는 얘기인 것이다. 1주일간 머물렀을 뿐인데도 정이 듬뿍 들어 언제 돌아가도 우릴 반겨줄 거란 기대가 있기 때문이겠지. 더욱이 교육원엔 여전히 교육생들이 있다. 우리가 교육원에 있을 때 교육원생들과 단재학교 여학생들이 엄청 친해졌다. 밤마다 모여 수다도 떨고 놀기도 하며 지냈기 때문이다. 그 학생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니, 더 빨리 알마티로 돌..
69. 단일민족설을 넘어 우슈토베에 온 지 4일째 되는 날이다. 우슈토베는 고려인들의 초기 정착지로 그들의 숨결이 살아있는 곳이며 그들의 후손이 여전히 살고 있는 곳으로 우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공간이다. 한국으로부터 수천 킬로미터가 떨어진 중앙아시아의 한 나라에 선조들의 아픈 역사가 있다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가슴 아팠다. 하지만 우슈토베만 그러한 시각으로 봐서는 안 된다. 우슈토베가 있는 카자흐스탄, 거기서 범위를 더 넓혀 중앙아시아 지역까지 한민족韓民族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니 말이다. ▲ 한국과 카자흐스탄은 꽤나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럼에도 공통점을 많이 지니고 있다. 한민족과 바이칼 일본과 한국의 역사적인 연관성만큼이나 중앙아시아와 한국의 역사적인 연관성도 깊다고 할 수 있다. 한민족의 시원..
68. 잃을 때, 얻는다 이런 식으로 전개될 것을 안다면, 교환이 아닌 증여의 경제를 되찾을 필요가 있다. 설거지는 증여에 포함된다. 더 많은 양의 설거지를 하면 할수록 오히려 좋다.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통해 ‘노동주체’를 되찾고,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도 ‘당당한 주제’로 설 수 있기 때문이다. 증여로서의 설거지 설거지를 하면 내 마음에도 뿌듯한 마음이 생기며, 다른 사람에게도 따뜻한 기운을 퍼뜨린다. 그게 바로 증여 경제의 핵심이다. 증여는 ‘얼마의 가치인지?’를 따지지 않는다. 내가 유형ㆍ무형으로 준 것들은 돌고 돌아 나에게 돌아오게 되어 있다. 좋은 기운을 주면 좋은 기운이 돌아오고, 나쁜 기운을 주면 나쁜 기운이 돌아온다. 그렇기 때문에 증여로서의 설거지는 나 자신이 쌓은 선업善業인 것이..
67. 손해 본다는 마음의 기저 설거지를 남들보다 하나라도 더 하는 것을 손해라고 생각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있는 학생을 보고 있으니 만감이 교차한다. 이건 단순히 손해와 이익의 관점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닐뿐더러, 오전에 봉사활동을 했다시피 그 순간만큼은 전체를 위해 봉사했다는 관점으로 보아도 되기 때문이다. 증여와 교환 하지만 손해라는 것이 자본주의가 남긴 상흔傷痕임을 안다면, 그 상흔을 낫게 하기 위한 노력도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자본주의는 사적 소유에 기초하고 있다. 즉, 신분적 차별이 사라진 대신, 소유가 곧 인격이자 정체성이 되어 버린 시대다. 그런 점에서 자본주의란 ‘사적 소유와 자아’가 그대로 ‘혼연일체’를 이루는 체제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소유의 핵심이 바로..
66. 설거지와 손해 본다는 심리 우슈토베에 온 첫 날엔 재미교포 학생들이 우리의 설거지를 도맡아 해줬다. 어제 점심을 먹고 재미교포 학생들이 간 후엔 단재학생들이 설거지를 나눠서 해야만 했다. 다섯 번 식사 때 설거지를 해야 하기에, 각 식사 당 두 명씩 설거지를 하면 됐다. 우리 그릇만 설거지 하면 되기에 많은 양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소비주체에게 설거지란? 하지만 문제는 점심 식사 시간에 일어났다. 설거지양이 대폭 늘었기 때문이다. 색종이 접기와 그림 그리기에 참여한 아이들이 점심을 먹었으며, 국까지 나왔다. 난 푸짐한 반찬과 국까지 만들어주신 정성에 감탄하고 있었는데, 설거지를 해야 하는 B학생은 아이들 것까지 해야 한다며 짜증을 내고 있었고 거기다 국까지 따라주자 “국그릇까지”라며 땅바닥이 ..
65. 우슈토베에서 자원봉사를 하다 오전엔 자원봉사 프로그램이 짜여져 있어 현지 학생들과 색종이 접기와 그림 그리기를 했다. 현지 학생 이래봐야 10명도 되지 않는다. 그래서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간과한 게 있었다.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선 단재학교 학생들에게 색종이 접는 법을 연습시키고 무얼 그릴지 미리 회의를 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어제 저녁에 아이들끼리 오해를 풀 수 있도록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것도 좋지만, 전체 회의를 하여 무엇을 만들고 그릴지 정하고 연습시켰어야 했는데, 그 땐 그런 생각을 못했다. 아마도 ‘색종이 접기는 아이들이 다할 줄 알 테니, 각자에게 맡겨줘도 잘 할 것이다. 그리고 그림 그리기는 혜린이 특기이니 어련히 알아서 할 것이다.’라는 ‘케세라세라’..
64. 치열하되 여유롭게 그렇다면 치열함이 아닌 기운을 보전하거나 양생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했다. 그게 바로 치열함의 반대면에 있는 ‘여유’였던 것이다. 그건 곧 ‘자연스런 흐름에 몸을 맡긴다’는 말이기도 하다. ▲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다. 그 부드럽지만 지속적인 힘이 관건이다. 힘과 치열함만으로 할 수 없는 것들 운동을 해본 사람은 안다. 무식하게 힘만 써서는 할 수 있다는 게 없다는 것을. 고등학교 체육시간에 쇠공 던지기를 했었는데, 난 힘만 믿고 던졌지만 발 앞에서 쿵하고 떨어졌다. 그런데 다른 학생들은 나보다 힘이 약한데도 멀리까지 던진 것이다. 그땐 운동신경이 없어서 그렇다고 날 탓했지만, 지금은 알 것 같다. 그건 운동신경 문제가 아니라, 흐름을 타지 않고 힘으로 흐름을 끊으려 했던 게 문..
63. 넘어진 자리에서만 일어설 수 있다 카자흐스탄 여행은 굴심쌤이 없었으면 크나큰 난관에 부딪혔을 것이다. 계획에 따라 활동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계획을 만들며 활동해야 했다. 아마도 우리들만 갔다면, 대부분의 일정에서 차질이 생겼을 것이고,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갈등의 골만 깊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굴심쌤은 선생님들과 일정을 잘 조율하였고 카작 현지 아이들과 단재친구들의 소통 창구 역할까지 했다. 부담이 훨씬 커질 수도 있었는데, 굴심쌤이 있어서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 통역을 해주고 계신 굴심쌤.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다. 맘 같지 않기에 여행은 우릴 키운다 여기에 덧붙여 학생들도 내 맘 같지 않았다. 물론 학생들 입장에서 보면, ‘건빵쌤도 너무 맘대로 해요’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
62. 집중의 본래면목 우슈토베에서 마지막 일정이 있는 날이다. 내일은 아침만 먹고 알마티로 떠나기 때문에, 우슈토베에서 오롯이 하루를 보내는 마지막 날인 것이다. 카자흐스탄 여행이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아쉬운 마음 저편에 빨리 한국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교차하고 있다. 집중이 곧 나다 우슈토베에서 이틀 동안 있었지만, 이곳은 한국의 외진 시골 같은 느낌이다. 자본이 미처 이르지 못한, 그래서 과거를 그대로 간직한 곳처럼 느껴졌다. 어제 보았던 밤하늘은 ‘늘 있지만 볼 수 없던 것들’에 대한 감각을 일깨워줬다. 앞만 보고 달려왔거나, 모든 것들을 수단으로 대하며 살아온 사람은 중요한 것들을 놓치며 살아왔을 가능성이 크다. 놓친다는 건, 어찌 보면 정말 ‘놓치게 된다’는 말이 아니라, 그만큼 ‘덜 신경 ..
61. 조삼모사에 대한 오해 내 방에 돌아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이들의 대화에 관심을 끊은 건 아니었다. 내용을 알고 싶다기보다, 갑자기 분위기가 싸늘해지진 않는지 멀찍이 지켜보는 것이다. 한동안 언제 싸웠나 싶게 그 나이 또래 아이들처럼 웃고 떠드는 소리가 내 방까지 들렸다. 마무리 짓지 못한 이야기 그렇게 1시간 30분정도 흘렀다. 그 때부터 분위기는 급반전되기 시작했다. 서로의 이해가 상충되는 상황에 부딪히면서 심각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A학생은 자신이 피해를 받은 만큼의 보상을 원했다. 에버랜드 자유이용권과 음식을 사주길 바란 것이다. 물질적인 보상을 바라는 순간, 이 문제는 감정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법적인 문제가 되어 버린다. 그러려면 무얼 얼마만큼 잘못했는지 수치화해야 하며, 그만큼 보상..
60. 대화 속에 우리들은 자란다 지순옥 할머니를 통해 고려인들이 블라디보스톡에서 우슈토베로 강제이주하게 된 과정, 그리고 우슈토베에서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지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자랑스런 대한민국을 만들고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는 데엔 우리 선조들의 피와 땀이 세계 곳곳에 이렇게 흩뿌려져 있기 때문이다. 감사하고도 또 죄송하기만 하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틀이 아닌, ‘우리 모두 어리숙하다’는 틀로 사건이 끊이지 않는 단재친구들. 물론 이건 비아냥이 아니다. 삶의 배경이 다르고, 욕망이 다른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여 활동을 하다 보니 언제든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만약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건 억압된 사회이거나 죽은 사회일 것이..
59. 고려인, 지순옥 할머니 下 할머니의 성함은 지순옥으로 연세는 92세라고 했다. 1937년에 원동遠東(머나먼 동쪽)의 쁘리모르스키끄라이Приморский край에 살고 계셨단다. 남자들은 강제이주 전에 이미 잡혀갔기 때문에, 이 당시엔 엄마와 같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있었는데 갑자기 집으로 가라는 교사의 지시가 있었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영문도 모른 채 엄마와 기차를 탔다고 한다. ▲ 카자흐스탄에 오기 전까지는 고려인에 대한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 이곳에서 직접 만나고 나선 그 무지에 깜짝 놀랐다. 설국열차를 방불케하는 생존의 현장 기차는 화물칸으로 120명가량의 사람이 탔는데, 자신의 엄마는 열흘 정도 먹을 것을 가지고 탄 반면, 아무 것도 없이 탄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58. 고려인, 지순옥 할머니 上 오후에는 고려인 초기 정착자 중에 유일하게 살아계신 분이 있다고 해서 찾아뵈었다.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수요집회에서 김복동 할머니를 뵐 때마다 느껴지던 감정이 지순옥 할머니를 뵈었을 때에도 느껴졌다. 가슴이 아려왔다. 위안부 문제도 그렇지만, 고려인의 이야기도 우리의 아픈 과거임과 동시에 현재 진행형인 역사임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더라. ▲ 1000회가 넘게 평화롭게 진행되고 있는 수요집회(출처- 경향신문) 너만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 하지만 나와 아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는 팩트fact라기보다 픽션fiction이며, 현재의 이야기이기보다 ‘과거에 그랬더라’라는 옛날이야기에 가까웠다. 그런 이유 때문에 어제 초기 정착지 근처의 무덤을 둘러보며, 누군..
57. 기독교인에게 배운 진정성 관계를 맺고 끊으며, 어떤 일에 열정적으로 하거나 하지 않거나 하는 일련의 일들이 삶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경우에 관계를 맺고 끊을 것인지, 어떤 일에 열정적으로 하며 어떤 일에 대충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어떤 경우’와 ‘어떤 일’에 대한 자신의 판단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판단 기준이 있으려면, 진정성 있게 삶을 대하고 있느냐가 핵심인 것이다. ▲ 재미교포 친구들의 발표회를 보러 온 아이들. 기독교는 고려인에게 힘을 주다 여긴 감리교 연합회 소속의 교회다. 종교가 때론 사람에게 힘이 될 수 있다. 더욱이 고려인들은 이국의 땅에서 서로 의지하며 온갖 핍박과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왔다. 그런 그들에게 필요한 건, 위로였다. 그래서 ..
56. 한국과는 다른 카자흐스탄 집의 특징 우슈토베에서의 둘째 날이 밝았다. 여긴 종교시설이다보니, 카자흐스탄 여행을 온 게 아니라 선교여행을 온 것 같은 착각도 들더라. 하룻밤만 묵는 곳이었고 꽤 낡은 시설이었지만 맘에 들었다. 전통 가옥까지는 아니어도 한국과는 다른 가옥형태이기에 카자흐스탄에 온 기분을 만끽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홈스테이를 했거나 카자흐스탄 집을 여러 곳 들러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카자흐스탄 집의 특징을 제대로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세 곳을 옮겨 다니며, 여러 집을 들러본 결과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이 있었다. 그게 한국의 집과는 다른 부분이었기 때문에 더 눈에 띄었던 것이다. 지금부터 카자흐스탄 집의 특징을 살펴보도록 하자. ▲ 전통가옥에서 그래도 포근하게 잤다. 신발을 어..
55. 너의 불행이 나에겐 안도감이 아니길 그 다음으로 간 곳은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내린 역인 우슈토베역이었다. 역주변엔 많은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지만, 1937년 당시엔 허허벌판에 가까웠다고 했다. 우슈토베역, 너의 아픔이 나의 안도가 아니길 지금 우리가 보는 이 역이, 고려인들이 당시에 보았던 역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역사적인 현장에 서있는 것만으로도 막막함과 서글픔이 밀려오더라. ‘이 곳에서 어떻게 살아가라는 말이냐?’라는 울분 이 터져 나온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들의 참상은 ‘과거의 일’일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뉴스에서 이야기를 듣듯, 남의 일처럼 들렸을 지도 모른다. ‘용산참사’가 났을 때,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는 ‘남의 일’처럼 들렸고 ‘그들의 일’처럼 들려 ‘안 됐다..
54. 강제 이주와 고려인 고려인들은 러시아 연해주沿海州지방에 있는 항만도시인 블라디보스톡에 모여 살았다. 그런데 스탈린이 고려인들을 강제이주 시킨 것이다. 왜 고려인을 강제이주 시켰는지에 대해 두 가지의 의견이 있다고 한다. ▲ 바슈토베의 초기 정착지. 이곳에 남은 치열한 흔적들. 스탈린이 고려인을 강제 이주한 까닭 그 하나의 카자흐스탄 민족은 유목민으로 양을 키우며 양고기나 먹고 살던 때라, 정착민인 고려인을 보내 불모지를 초원으로 개간하기 위해 보냈다는 것이다. 이 의견이 성립되려면 소련 사람에게 ‘고려인은 농경에 능한 민족’이란 관념이 있어야 하고, 선진 농법을 전파하고 싶었다면 최소한의 살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고 보냈어야 한다. 그런데 죽던 말던 상관없다는 듯이 그냥 보내버리기에만 급급했던 ..
53. 난 조선인이요, 난 고려인이다 밥을 먹고 본격적으로 고려인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행을 떠났다. ▲ 고려인들의 초기 정착지에 가는 길. 고려인은 배신자? 아스타나에서 알마티로 기차를 타고 돌아오면서, 같이 갔던 교육원 선생님에게 전혀 뜻밖의 말을 들었다. 한 분은 기르기스스탄에서 태어났고, 다른 한 분은 카자흐스탄에서 태어난 고려인이다. 고려인이 한국에 들어가 공부를 하려 하거나, 취업을 하려 하면 한국의 나이 드신 분들이 “배신자!”라며 공격한다는 것이다. 민족의 수난을 함께 겪어낸 동포이며 동변상련을 함께 해온 동지로 생각하여 반길 거라 짐작했는데, 반기긴 커녕 욕을 한다고 하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걸 보고 있으니, 임난 당시 인조가 병자호란을 피해 남한산성으로 내빼고 항복한 후에 조선 땅에..
52. 총각김치와 노자 탈디쿠르간에서 1시간여를 달려 우슈토베ushtobe에 도착했다. 버스에 타고 이동할 때만 해도 우슈토베에 있는 고려인이 운영하는 여관에 아이들과 함께 머물며 우슈토베에서 고려인 발자취를 따라가며 카자흐스탄의 마지막 1주일을 보내는 줄만 알고 있었다. ▲ 우슈토베엔 고려인의 아픈 역사가 담겨 있다. 다른 장소, 새로운 인연 그런데 그곳은 단순한 숙박시설이 아니라, 종교시설이었다. 감리회 소속 선교사님이 세운 교회로 우리가 도착했을 땐 재미교포 학생들이 여름성경학교에 와서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 하루는 교회에 마련된 숙소가 아닌, 차로 10분 정도 떨어진 별채에서 자야 한단다. 별채는 민가를 개조한 곳이어서 아늑한 느낌이 났다. 이런 건물을 러시아식 건물이라고 할 수 있는지..
51. 삶의 여정을 쏙 빼닮은 카자흐스탄 여행 그 말을 듣고 나니, 마음이 절로 누그러지더라. 그래서 두 가지만 부탁했다. 첫째는 계획을 세우고 진행하다보면 일정이 바뀌는 건 다반사니, 바뀔 때는 당연히 먼저 알려줬으면 좋겠다는 거였다. 둘째는 다음에 한국에 오게 될 학생은 카작어를 할 수 있어야 하며, 좀 더 바란다면 한국어를 하거나 한국에 관심이 있는 학생이 왔으면 좋겠다는 거였다. ▲ 탈디쿠르간의 석양녘 관람차. 관건은 ‘다시 만나고 싶으냐?’ 하는 것 그랬더니 디아나 선생님은 현실적인 어려움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작년에 한국에 갔던 학생 외에 홈스테이를 구하며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이다. 유복有福한 아이들은 한국에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으며, 한국에 관심이 있는 경우엔 돈이 없어서 홈스테이를 신청..
50. 헤어지는 날에 볼멘소리를 하다 8시까지 학교에 가야했기에 6시 30분에 일어나 준비했다. 이제 이곳과도 영영 안녕이다. 저번 주 토요일에 알마티에서 이곳으로 왔으니 10일 동안 지내고 떠나는 날인 것이다. 7시 30분에 로비에서 굴심쌤과 이향이를 만나기로 했기 때문에, 준비하고 나갔는데 이향이가 아직 일어나지 않았더라. 20분 정도 기다렸다가 학교에 가니, 디아나 선생님과 아이노르 선생님이 계셔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 저번 주에 와서 일주일동안 잘 지내다가 가는 나자르바예프 대통령 학교 전경. 핑계로 가득한 일정 변경에 대한 답변 일정이 수시로 바뀌는데도 아무런 상의를 하지 않았다는 것과 발렌티나와 알마트가 집을 비우는데도 아무런 얘기와 대책도 없었다는 것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하려 했다. ..
49. 나는 얼마큼 적으냐 수영장에선 왜 꼭 상의를 탈의해야 하는 것일까? 여전히 의문이다. 작년 망원수영장에서도 그러더니,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상의를 입고 놀고 있으면 안내요원이 와서 상의를 벗으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맨몸을 드러내고 싶지 않으니, 눈을 피해가며 상의를 입은 채 놀 수밖에. ▲ 아이들이 수영장에서 노는 동안 나도 셀카질^^ 우리의 분노는 약한 고리를 향한다 그런데 그 때 안전요원은 아니고, 의사 까운 비슷한 옷을 입은 중년의 러시아 여성분이 오시더니 한 학생에게 뭐라고 말씀을 하시는 거였다. 아마도 ‘상의를 입은 채 놀면 안 된다’는 말이었을 것이다. 처음에 정중하게 대답했으면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 텐데, 그 학생은 눈을 붉히며 아니꼽다는 투로 받아쳤다. 어차피 서로의 언어가 통하지..
48. 놀다 보면 누구나 다 친구가 된다 모든 학생이 모였기에 수영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향이는 주사를 맞고 와서 물에 들어갈 순 없었지만 공짜티켓으로 입장할 수는 있었다. 그래서 들어갈 거냐고 물었는데 처음엔 들어갈 것처럼 표를 받더니, 조금 지나서는 들어가지 않겠다고 말을 했다. 그래서 굴심쌤과 씨티플러스에 가서 구경도 하고 쉴 수 있도록 했다. 국적 불문, 우린 친구 아이가~ 여긴 특이하게 ‘상의를 탈의하지 않으면 수영장에서 놀 수 없다’는 규칙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아이들은 상의를 탈의하길 싫어한다는 것이고, 그러다 보니 상의를 탈의하지 않은 채 놀다가 안전요원에게 여러 번 주의를 받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주원이와 혜린이는 물에 들어가지 않았다. 주원이는 아예 수영복으로 갈아입지 않았으며, ..
47. 탈디쿠르간 마지막 일정, 우린 사람이기에 좌충우돌한다 탈디쿠르간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오늘 일정은 아쿠아 파크에 가서 수영만 하면 된다. 특별한 것이 없기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다. 그렇지만 디아나 선생님에게 상의도 없이 일정을 바꾸는 것에 대해, 발렌티나와 알마트가 떠났음에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더욱이 오늘만 해도 디아나 선생님과 아이노르 선생님과 10시에 만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그런데 10시가 되도록 아무 연락이 없다가, 기어코 약속이 취소되었으며 1시에 아쿠아파크 입구로 오면 된다는 연락이 온 것이다. 공동의 합의나 이해가 아닌, 자기 멋대로 하는 상황이 계속 반복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은 꼭 이 문제를 얘기하여 다음에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46. 카자흐스탄, 사막여행: 노래하는 사막 바르한 남자 아이들은 뛰어서 사구를 올랐다. 찌는 듯한 더위, 그리고 그 열기를 머금은 모래의 뜨거움, 거기다가 다리가 푹푹 빠져 오르기 쉽지 않은 현실까지 바르한은 ‘돈키호테의 풍차’ 같은 느낌이었다. ▲ 민석이의 나를 따르라. 그래 너를 따라 올라볼까. 느린 빠름 나도 맹렬하게 돌진했다. 최선을 다해 손까지 사용해서 올랐지만 1/6도 채 오르지 못하고 진이 빠지고 말았다. 사구를 오르는 게 이렇게 힘이 많이 드는 일인지 미처 알지 못했다가 제대로 큰 코 다쳤다. 그러니 ‘여기서 물러설 것인가, 아니면 끝까지 오를 것인가?’라는 고민이 따를 수밖에. 조금 올라갔다 싶으면, 모래가 밀려서 다시 조금 내려오고, 그래서 오르려고 조금 움직이면 다시 밀려 내려와 처..
45. 카자흐스탄, 사막여행: 멀리서만 봐선 안 되는 이유 대자연의 위용에 한껏 압도됐다. 인간의 손길이 닿을 수 없어 ‘국립공원’이란 이름으로 유지되고 방치되는 곳, 그렇기 때문에 이곳은 진심으론 인간 외의 생물들에겐 낙원 같은 곳이었고 태초의 풍광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었다. 에게. 겨우 이거야 국립공원 입구에서 바르한이라는 사막까지 한 시간정도만 달리면 나온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우리는 조금만 더 달리면 고비사막이나 사하라사막 같은 장엄하고도 절로 압도하게 되는 비주얼을 직접 목도하게 될 거란 기대를 잔뜩 하며 유심히 지켜보게 됐다. 그런데 한 시간이 넘게 달렸는데도 천연자연이 풍경만 눈앞에 펼쳐져 있을 뿐 모래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더라. 아마 우리가 산에 오를 때마다 “얼마나 더 가야 정상이예..
44. 그대여, 자연과 감응할 수 있나? 신고를 마친 후엔 관리인 한 명이 우리 차에 동승했다. 우리를 안내함과 동시에 감시하기 위해서다. 조금 더 달리면, 쇠줄로 자동차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아놨다. 그곳을 관리하는 사람이 나와 우리의 신원을 확인하고 나서야 자동차가 들어갈 수 있도록 쇠줄을 풀어준다. 바로 거기서부터 알틴에멜 국립공원이 시작되는 것이다. ▲ 광활하다. 지평선이 저 멀리. 자연을 위한 공원 ‘왜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관리를 하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자연스레 들었다. 그건 꼭 뭔가 엄청난 것이 있어서 이렇게 관리해야만 한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비포장 길을 달리고 또 달린다. 차는 수시로 덜커덩거리며 광활한 벌판 속으로 들어간다. 그곳의 광경은 절대 그곳이 아니면 볼 수 없..
43. 카자흐스탄의 사막 찾아가는 길 오늘은 새벽부터 바빴다. 원랜 1박 2일로 예정되었던 여행이 당일치기로 바뀌면서 시간이 빠듯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벽 5시 45분에 모이기로 했다. 나는 4시 30분에 일어나, 아침밥 대용으로 군대에서 먹었던 뽀글이 라면을 먹었다. 연중이가 진라면을 줬기 때문에 가능한 얘기다. 카자흐스탄에서 한국 라면으로 뽀글이를 해먹고 있으니, 꼭 한국에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 이른 아침이지만 그 시간만큼은 오로지 나를 위한 시간처럼 달콤했다. 카자흐스탄에 올 때만해도 세 번의 캠프(알마티에서 1번, 탈디쿠르간에서 2번)가 계획되어 있었다. 그래서 캠프를 대비할 겸, 모기약을 많이 사온 것이다. 하지만 이러저러한 이유들로 계획이 변경되어 한 번도 하지 않게 되..
42. 카자흐스탄 발표회, 찝찝함에서 짜릿함으로 연극 연습을 2번 마쳤을 때, 다시 연습을 한다고 했기에 모두 자리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무용 선생님이 오더니, 전통옷이 왔다며 갈아입으라는 것이다. ▲ 발표회를 위해 전통복장으로 갈아 입었는데 내가 입은 건 귀족풍의 옷이다. 리허설 없는 발표회 전통옷으로 갈아입고선 학생들과 삼삼오오 모여 한참이나 사진을 찍었다. 카자흐스탄 전통옷을 입었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고, 이걸 입고 보니 정말 카자흐스탄에 왔다는 게 실감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더니 갑자기 강당으로 내려가라는 것이다. 그 땐 ‘드디어 리허설을 하려나 보다’라는 생각을 했고, 시간이 11시 50분 정도가 되어, ‘곧 있음 점심시간인데 좀 급하긴 하네’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강당..
41. 카자흐스탄 발표회, 기대에서 찝찝함으로 오늘은 아기다리고 고기다리던(?) 발표회를 하는 날이다. 발표회가 앞당겨진 데다 연습해야 할 양은 늘었기에 죽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그래도 오후 4시에 발표회를 하니 그 때까지 맹렬히 연습한다면, 흡족하진 않아도 불만은 없는 발표회가 될 것이다. ▲ 발표회를 위해 카자흐스탄 전통복장으로 입은 우리들. 들쭉날쭉하는 일정 저번 주 토요일에 탈디쿠르간에 도착하여 일정을 진행할 때부터 계획표와 다르게 가고 있었다. 토요일부터 tekeli에서 캠핑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하루짜리 여행으로 바뀐 것이다. 그래서 아이노르 선생님과 점심을 먹으며 일정 조율을 했던 것이다. 어디까지나 계획을 세워 놓은 것은 가안假案이어서 실제로 진행하다보면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40. 카자흐스탄 밤거리에서 외면했던 나를 만나다 노래하는 시간이 끝나고 이향, 승빈, 혜린, 연중, 민석과 대통령 학교 친구들과 볼링장에 갔다. 카자흐스탄 볼링장에 가다 나머지 친구들은 노래를 부를 때 집에 갔기 때문에 같이 갈 수 없었다. 미리 일정을 알려줬으면 다 함께 볼링장에 갈 수 있었을 텐데, 닥쳐서야 볼링장에 간다고 하니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볼링장까지 가는 길은 꽤 멀었다. 이곳에도 볼링장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욱 신기하게도 대부분의 단재친구들이 볼링을 처음 쳐본다고 하더라. 그래서 처음에는 골로 빠지는 경우가 많았지만, 역시 운동이란 하면 할수록 익숙해지고 감이 잡히는 맛이 있다. 민석이도 서서히 감을 잡으며 스트레이트를 칠 때도 있었다. ▲ 처음 볼링을 쳐보는..
39. 안 함과 못함 오후엔 노래하는 시간이 있었다. 노래방 기기로 노래 부르는 것이 아니라, 유투브의 가라오케 모드로 노래를 부를 수 있게 한 것이다. 이때 대통령 학교 학생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마이크를 잡고 신나게 노래를 불렀다. 이런 식으로 노래 부르는 것에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아이음을 얼핏 봤을 땐 부끄러움이 많은 학생 같았는데, 실컷 노래를 부르고 방방 뛰면서 제대로 놀 줄 아는 아이더라. 단재친구들 중에 연중과 혜린, 그리고 승빈이만 아이들과 함께 노래 불렀다. 노래 울렁증인가, 같이 하고 싶지 않음인가? 노래하는 시간이 다가오자, 남학생들은 이미 자기들끼리 합의가 끝났는지 부리나케 자리를 피했다. 강당의 맨 뒷좌석에 가서 앉은 것이다. 그나마 아예 강당을 빠져 나가지 않았..
38. 한바탕 웃게 만들려 글을 베끼듯 발표회 하루 전이다. 특히 전통춤 공연 연습에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다. 어깨만 덩실거리고 발목을 자연스럽게 교차하며 리듬을 탄다는 게 말이나 쉽지,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들 연습하는 것만 보고 있을 순 없었다. 하더라도 같이 하여 어색하고 뻣뻣한 몸동작을 함께 보며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정을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여러 번 무용 선생님은 나에게 같이 할 것을 권유했지만, 연습은 같이 하되 발표회 땐 사진을 찍기 위해 빠지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오늘 일이 터지고 말았다. 자신의 파트너로 내가 춰야한다고 공표했기 때문이다. 도저히 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덕에 내가 무대 전면에 서야만 했다. ▲ 카자흐스탄 정통 춤을 나도 함께 추게 되었다. 그것도..
37. 주위엔 보이지 않는 수많은 벽이 있다 어느덧 카자흐스탄 일정이 중반을 넘어가고 있다. 카자흐스탄에 올 때만해도 ‘3주란 긴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하는 걱정을 했었는데, 막상 이곳에서 하루 이틀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중반이 지나고 있다. 무언가 나날이 할 게 있기 때문에 시간은 정신없이 흘러간다. ▲ 이 날 저녁은 대관람차가 보이는 운치 좋은 곳에서 양꼬치를 먹었다. 정말 맛있더라. 외국어의 필요성 해외에 나간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외국어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느낀단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 한국에 들어오면, 순식간에 사라지고 마니 문제다. 나 또한 그런 생각이 절실히 들었다. 카작인들은 러시아어와 카작어를 함께 쓰며 이야기를 한다. 솔직히 어떤 말이 카작어인지, 어떤 말이 러시아어인..
36. 땀나지 않는 선에서 최선을 다하다 오늘은 본격적으로 금요일에 있을 발표회 때 할 것들을 연습했다. 전통춤의 동작을 하나하나 맞추기 시작했고 카자흐스탄어로 된 연극 대본을 리딩했으며, 새로운 카자흐스탄 노래도 배웠다. 원래 계획상으론 다음 주 월요일 오후 4시에 발표회를 하고 우슈토베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그래서 충분히 연습할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여유 있게 연습한 것이다. 하지만 월요일 아침에 출발하는 걸로 바뀌면서 발표회 일정도 금요일 오후 4시로 앞당겨졌다. 무려 3일이나 앞당겨지다 보니, 마음이 급해질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우리들도 상황에 떠밀리듯 정신없이 연습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과연 이 짧은 시간에 춤, 연극, 노래를 모두 다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시간은 한참이나 부족한데, 너무..
35. 춤을 찾아와야 하는 이유 옛적부터 내려오던 ‘춤=저속’, ‘춤추는 사람=쌍 것’이라는 편견이 고스란히 내 머릿속에 들어와 있었고 그로 인해 춤을 춰볼 생각도, 리듬을 타며 온 몸에 흐르는 열정을 발산할 생각도 여태껏 해보지 못했다. ▲ 카자흐스탄 전통춤을 배우는 아이들. 가진 것을 빼앗겨도 무감각한 사회 왜 이런 현실을 지금까지 잘도 수긍해왔으면서 갑자기 마음이 아프다고 하는 걸까? 인간은 세상을 향해 표현하고 표출하는 존재다. 태어나자마자 아이가 ‘울음’으로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킨다. 이때의 울음은 기혈이 열린다는 의미도 있지만, 세상과 소통을 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표현은 현실 세계에 던져진 존재인 이상, 당연히 해야만 하는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고, 살아가..
34. 몸치는 춤이 고프다 어젠 학교 탐방을 하고 탈디쿠르간을 알아보는 일정이었다면, 오늘은 정식적인 대통령 학교를 체험하는 일정이다. 카자흐스탄으로 여행을 떠나기 전 대통령학교에서 보내온 일정표는 다양한 내용들로 꽉 차 있었다. 테니스와 농구 등의 스포츠도 하고, 연극도 하며, 전통춤과 카작어도 배우며 다양한 문화 활동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많은 것을 어떻게 하게 될지 기대가 되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알마티에서와는 달리, 여기선 내가 신경 쓸 것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담당자가 있기에 난 한 발짝 물러서서 아이들이 잘 참여할 수 있도록 돕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아침에 편안한 마음으로 일어났다. 아 참! 어제 저녁 11시에 A 아버님에게 전화가 왔다. A가 광견병 주사를 ..
33. 대통령 학교엔 한국어 교실이 있다 대통령학교 시설 학교 시설은 한국의 최근에 지어진 학교시설처럼 좋았다. 각 교실에 컴퓨터가 설치되어 e-learning을 진행할 수 있는 것은 기본이고 과학ㆍ수학 영재학교답게 과학실엔 다양한 과학실험을 할 수 있는 장비들이 있었으며 심신의 조화로운 발달을 위한 체육시설과 두 군데의 수영장이 완비되어 있었다. 그뿐인가? 이 학교의 양호실은 병원을 방불케 했다. 한국의 양호실이 치료가 목적이 아닌 응급처치를 하거나 쉴 수 있는 곳이라 한다면, 이 곳 양호실은 치료도 하고 예방도 하는 그런 곳이라 할 수 있다. 각 과별로 나누어져 있어 세부적인 진료가 가능했으며, 치과에는 전문적인 치료를 할 수 있는 장비까지 있었으니 말이다. 대통령 학교 학생들은 적어도 아픈 것에 대..
32. 나자르바예프 대통령학교를 방문하다 저번 여행기에서도 밝혔다시피 책 속에만 갇혀선 안 되면 다채로운 삶 속에 몸을 맡긴 채 삶의 현장을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는 단단한 마음이 필요하다. ▲ 대통령 영재학교의 로고다. 여기서는 영어로 수업이 진행된다고 한다. 여행이란 경험의 장 속에 그런 의미에서 이번 여행은 ‘잡색의 삶’ 속에 들어가 보는 기회이다. 이런 기회를 통해 공동의 경험을 함으로 아이들이 어떤 방향으로 성장하게 될지 기대가 된다. 책을 통해 여태껏 쌓은 앎의 단서들을 현실 세계에서 풀어낼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경험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백색의 앎’이 ‘잡색의 삶’과 공명하며 책이 곧 나이며, 내가 곧 책書自我 我自書인 경지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른다고 사람은 성장하지 않는다..
31. 책을 떠나 세상을 살고, 사람을 만나다 탈디쿠르간에서의 정식적인 첫 날이다. 어젠 공휴일이고 야외 활동을 한 것이니, 워밍업을 한 셈이다. 워밍업치고 좀 빡센 워밍업이었지만, 그 때문에 대통령학교 학생들과 친해졌고 단재친구들의 색다른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오히려 빡센 일정이었기에, 그런 속내를 볼 수 있었던 것이리라. ▲ 어제의 광활한 대지를 걸었던 체험은 정말 많은 걸 느끼게 해줬다. 백색의 앎이 아닌 잡색의 삶으로 이런 이유 때문에라도 나는 야외활동을 좋아한다. 아무리 책상에 앉아서 세상을 파헤친 글을 읽고, 이상을 그리며 삶을 비판할지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피상적인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말과 행동이 따로 놀 수밖에 없다. 아아, 골방에 갇혀 천하를 꿈꾼들 무슨 소용 있으랴. 현실..
30. 왜 하는지 모르는 일을 묵묵히 하는 아이들 날은 뜨거운 편인데, 습도가 높지 않아 땀은 나지 않더라. 조금 오르니, 탈디쿠르간의 전경이 보인다. 그리고 저 멀리 만년설도 있다. ▲ 자연 속으로 한 걸음 더 깊숙하게. 중턱의 제방과 정상에서의 전설 그 근처에 제방이 눈에 띄었다. ‘왜 산 중턱에 이런 제방을 설치했을까?’ 의아스러웠는데, 예전에 산에 있는 호수가 범람하여 이 일대가 물에 잠긴 적이 있다는 얘길 해주시더라. 그래서 그 때 이런 제방을 만든 거란다. ▲ 산 중턱에 설치된 제방. 정상에 오르니 알마라산 부럽지 않은 광경이 펼쳐지더라. 여긴 자연이 만들어놓은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서 좋다. 그루터기에 앉아 교수님이 전해주는 옛날이야기를 들었다. 흔히 알고 있는 ‘콩쥐팥쥐류의 설화담’..
29. 문명은 기왓조각과 똥부스러기에 있다 나자르바예프 대통령 학교의 첫 일정이 진행되는 날이다. 오늘은 테킬리tekeli라는 곳에 가기로 되어 있다. 원랜 1박 2일의 야영으로 계획되어 있었는데 일정이 바뀌어 어제는 홈스테이에서 적응할 겸 푹 쉬고, 오늘 산을 오르게 된 것이다. 학교에 도착하니, 아이들은 이야기꽃이 만발했더라. 누군 인터넷을 맘껏 쓸 수 있게 해줬다면서 오랜만에 컴퓨터를 하는 기분에 대해 이야기하고, 누군 말이 하나도 안 통해 죽는 줄 알았는데 사촌 누나가 와서 영어로라도 대화가 되어 다행이라고 이야기하고, 누군 저녁 식사를 성대히 차려줘서 엄청 호강했다고 이야기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가 봇물 터지듯 나오니 도떼기시장이 따로 없을 정도였다. 이향이는 어제 발렌티나 집에서 개에 물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