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伯姉贈貞夫人朴氏墓誌銘 (6)
건빵이랑 놀자
5. 시간에 따라 변하는 내 모습과 같은 연암의 글들 이제 전체 글을 마무리 하면서 연암 뒷 세대의 고문가인 홍길주洪吉周(1786-1841)가 『연암집』을 읽고 느낀 소감을 피력한 글 한편을 읽어 보기로 하자. 원제목은 「독연암집讀燕巖集」이다.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 빗고 상투를 짜고, 이마에 건巾을 앉히고는 거울을 가져다가 비춰보아 그 기울거나 잘못된 것을 단정히 하는 것은 사람마다 꼭 같이 그렇게 하는 바이다. 내가 성인이 되어 건을 쓸 때, 눈썹 위로 손가락 두 개를 얹어, 이것으로 가늠하매 거울에 비춰 볼 필요가 없었다. 이로부터 혹 열흘이나 한달을 거울을 보지 않았으므로, 젊었을 때 내 얼굴은 이제 이미 잊고 말았다. 晨鼂起盥頮, 施髮織虎, 坐巾于額, 取鏡以炤, 端其欹邪, 人人之所同然. 余..
4. 미묘한 감정을 글과 시로 풀어내는 마술사 연암의 처남이자 벗이었던 이재성李在誠은 이 묘지명을 읽고 다음과 같은 평문을 남겼다. 마음의 정리에 따르는 것이야 말로 지극한 예라 할 것이요, 의경을 묘사함이 참 문장이 된다. 글에 어찌 정해진 법식이 있으랴! 이 작품은 옛 사람의 글로 읽으면 마땅히 다른 말이 없을 것이나, 지금 사람의 글로 읽는다면 의심이 없을 수 없으리라. 원컨대 보자기에 싸서 비밀로 간직할진저. 緣情爲至禮, 寫境爲眞文. 文何嘗有定法哉? 此篇以古人之文讀之, 則當無異辭, 而以今人之文讀之故, 不能無疑, 願秘之巾衍. 장의葬儀 절차를 성대히 함이 지극한 예가 아니다. 망자를 떠나보내는 곡진한 마음이 담길 때 그것이 지극한 예가 된다. 있지도 않았던 일을 만들어 적고, 상투적 치레로 가득한 글..
3. 묘지명의 관습을 깨어 생명력과 감동을 얻다 필자는 이 글을 강독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눈자위가 촉촉해 짐을 느끼곤 한다. 지난 번 강의에서는 연신 눈물을 훔치다 못해 흐느끼는 한 학생 때문에 강의실 전체가 우울해지고 말았다. 학생들에게는 반드시 감상문을 요구하였다. 다음은 그 중의 몇 대목을 추린 것이다. “오히려 절제된 문장에 누이를 잃은 슬픔이 절절히 배어있는 듯하다. 몇 백년을 뛰어넘어 글로써 지금 사람의 마음을 흔들 수 있다면 가히 대단한 문장가라 아니할 수 없다.” “무능한 매형에 대한 원망, 어린 조카들에 대한 연민, 행복했던 어린 시절이 이제는 더 이상 돌아올 수 없음을 깨닫는 아쉬움, 이런 감정들이 너무도 진하게 문장 전체에 녹아들어 있어 누님을 애도하는 박지원의 마음을 더욱 절절하게..
2. 누이 시집가던 날의 추억과 아련히 겹치는 현재 아아! 누님이 시집가던 날 새벽 화장하던 것이 어제 일만 같구나. 나는 그때 막 여덟 살이었다. 장난치며 누워 발을 동동 구르며 새 신랑의 말투를 흉내 내어 말을 더듬거리며 점잖을 빼니, 누님은 그만 부끄러워 빗을 떨구어 내 이마를 맞추었다. 나는 성나 울면서 먹으로 분에 뒤섞고, 침으로 거울을 더럽혔다. 그러자 누님은 옥오리ㆍ금벌 따위의 패물을 꺼내 내게 뇌물로 주면서 울음을 그치게 했었다. 지금에 스물 여덟 해 전의 일이다. 嗟乎! 姊氏新嫁曉粧, 如昨日. 余時方八歲. 嬌臥馬𩥇, 效婿語, 口吃鄭重, 姊氏羞, 墮梳觸額. 余怒啼, 以墨和粉, 以唾漫鏡. 姊氏出玉鴨金蜂, 賂我止啼. 至今二十八年矣. 그런데도 연암은 그 비통함을 말하는 대신, 전혀 엉뚱하게도 누..
1. 16살에 시집간 누이가 고생만 하다 43살에 죽다 유인孺人의 이름은 아무이니, 반남 박씨이다. 그 동생 지원趾源 중미仲美는 묘지명을 쓴다. 유인은 열 여섯에 덕수德水 이택모李宅模 백규伯揆에게 시집가서 딸 하나 아들 둘이 있었는데, 신묘년 9월 1일에 세상을 뜨니 얻은 해가 마흔 셋이었다. 지아비의 선산이 아곡鵝谷인지라, 장차 서향의 언덕에 장사 지내려 한다. 孺人諱某, 潘南朴氏. 其弟趾源仲美誌之曰 : 孺人十六歸德水李宅模伯揆, 有一女二男, 辛卯九月一日歿, 得年四十三. 夫之先山曰鵝谷, 將葬于庚坐之兆. 죽은 누님을 그리며 지은 묘지명이다. 번역만으로는 원문의 곡진한 느낌을 십분 전할 수 없는 아쉬움이 있지만, 이것만으로도 애잔하고 가슴 뭉클한 한편의 명문이다. 연암과 죽은 누님과는 여덟 살의 터울이 있었..
한문공부가 이렇게 힘들 줄이야 2018년 3월 15일에 임고반에 입성했고 오늘은 5월 8일이니 어느덧 두 달 정도의 시간이 지난 셈이다. 두 달 사이에 참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기에 오늘은 그 변화과정을 기록하고 앞으로의 계획을 밝혀보도록 하겠다. ▲ 임고반에 입성하던 날 하늘에선 축하의 비가 내렸다. 헤맸고 심적 부담으로 맘만 무겁던 3월 한 달째가 되었던 4월 17일엔 “그러니 막상 다시 공부를 하겠다고 앉아 있으니 좀이 쑤시고, 임용을 관둔 이후 한문문장을 진득하게 본 일이 없으니 이해되지 않는 것투성이로 집중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마냥 좋을 줄 알았는데, 역시나 현실의 중압감, 미래의 불투명함은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가 않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뭐 이 글엔 ‘한문문장’을 운운했지만 실제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