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앉아
야좌(夜坐)
김상헌(金尙憲)
高樹涼風動 危巢露鵲寒
고수량풍동 위소로작한
月華穿戶碎 山氣入懷寬
월화천호쇄 산기입회관
落落生平志 依依死別顏
락락생평지 의의사별안
一身兼百慮 孤坐到宵殘
일신겸백려 고좌도소잔 『淸陰先生集』 卷之四
해석
高樹涼風動 危巢露鵲寒 | 높은 나무에 찬바람 부니 위태롭던 둥지의 드러난 까치 춥다네. |
月華穿戶碎 山氣入懷寬 | 달빛 빛나 창 뚫고 부셔지고 산기운은 품에 들어와 넉넉해지네. |
落落生平志 依依死別顏 | 평생의 뜻은 지고도 졌으며 사별했던 얼굴 어렴풋하네. |
一身兼百慮 孤坐到宵殘 | 한 몸에 백가지 사려 더했으니 외로이 앉으면 남은 밤 오리.『淸陰先生集』 卷之四 |
해설
천사만려(千思萬慮)로 지새우는 가을밤의 상념(想念)이다.
잎도 이미 져버린 높은 나뭇가지에 서느러운 바람이 설레는 밤, 나목(裸木) 꼭대기에 위태로이 노출되어 있는 둥우리의, 이슬 맞은 까치도 저 바람에 씻기우기 오죽 추우랴 싶다. 일종의 대리감정(代理感情)이다. 이런 살뜰한 동정은, 필경 저 까치나 다름없는 외롭고 쓸쓸한 자신에의 연정(憐情)에서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부귀 영화나 권세의 유무에 상관없이, 지극히 고요한 때, 지극히 그윽한 마음의 눈이 떠지게 되면, 문득 자신이 고독한 존재임을 인식하게 된다. ‘혼자’라는 깨달음! 가신 임도 혼자 갔다. 누구나 종말에는 혼자 가야 하는, 외로운 단독자(單獨者)임을 깨닫게 된다.
한 생애를 살다보면 사랑하는 이와의 사별은 갈수록 늘어나게 마련이다. 부모 처자 친지……, 당해서 못 당할 일 없다는 속담대로, 차마 못 당할 일도 당하며 산다. ‘사노라면 잊힐 날 있으리라.’지만, 세월이 암만 가도 안 잊히는 얼굴 있음에야 어이하리. 눈에 삼삼 귀에 쟁쟁, 차마 잊지 못할, 불시에 떠오르는 얼굴들! 혹은 장면 장면의 생동하는 모습으로, 혹은 한 하늘을 가린 대사된 모습으로.…… 선연히 명멸(明滅)하는 그리운 영상들!
가을 바람 스산히 설레는 잠 아니 오는 달밤을, 이런 죽어간 이들의 모습이나 떠올리며, 온갖 우수에 젖어 밤을 지새우고 있는 작자는, 천성 다정 다감한 정한인(情恨人)임에 틀림없다.
청(淸)의 시인 왕사정(王士禎)은 『어양시화(漁洋詩話)』에서, 청음(淸陰)의 가구(佳句) 몇을 열거하고는 “과연 조선이 시를 아는 나라로다.”하며 탄복했고, 신위는 『논시절구』에서 그 사실을 들어 “나라를 빛냈다.”고 기리었다.
시조 3수가 전하는데, 병자호란 후 척화신(斥和臣)으로 청에 잡혀갈 때에 부른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는 널리 알려진, 그의 애절한 심사의 절조(絶調)이다.
그의 다정 다감은 ‘길가의 무덤’에도 미쳐 있음을, 다음 「로방총(路傍塚)」에서 음미해 보자.
路傍一孤塚 子孫今何處 | 길가에 묵어 있는 외로운 저 한 무덤 자손은 어디 가고 |
惟有雙石人 長年守不去 | 돌사람 한 쌍만이 그 오랜 풍상을 지켜 떠날 줄을 모르는고! |
끝으로, 관계(官界)를 떠나려도 차마 떠나지 못해, 고민하는 심사를 부친 ‘못 떠나는 마음’ 「차현오시권운(次玄悟詩卷韻)」 한 수를 더 옮겨 본다.
到老君恩重 歸田宿計非 | 늙으니 임의 은혜 더욱 무거워 밭이나 갈자던 뜻 어그러지네. |
匡時那有策 遣興亦無詩 | 시세 바를 묘책이라 무엇 있으리? 마음 달래려도 시도 없는 채 |
佳節騰騰過 淸遊歷歷違 | 아름다운 시절은 훌훌이 가고 풍류로운 놀이는 분명 글렀네. |
春來楊柳樹 羨爾自舒眉 | 봄 오는 길목의 실버드나무 스스로 눈썹 펴는 네가 부럽다. |
-손종섭, 『옛 시정을 더듬어』, 정신세계사, 1992년, 399~400쪽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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