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헌(金尙憲, 1570 선조3~1652 효종 3, 자 叔度, 호 淸陰)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척화(斥和)를 주장하다 파직되었고 1639년 명(明)을 치기 위하여 청(淸)의 출병을 요구할 때에도 반대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심양(瀋陽)에 끌려가 옥고를 치르고 돌아왔다. 그의 시조 ‘가노라 삼각산(三角山)아 다시 보자 한강수(漢江水)야’는 절의를 표방한 작품으로 인구(人口)에 널리 회자되었다.
그의 한시도 대부분 난세에 대한 비분강개와 우국충정으로 점철되어 있다. 후대의 제가들이 청음(淸陰)을 조선의 소무(蘇武)라고 일컬은 것도 여기에서 말미암는다. 그가 심양에 구금되어 있을 때 읊은 「송추일유감(送秋日有感)」은 다음과 같다.
忽忽殊方斷送秋 | 쓸쓸히 낯선 곳에서 가을을 다 보내니 |
一年光景水爭流 | 일년의 세월이 물처럼 흐르네. |
連天敗草西風急 | 하늘에 닿은 시든 풀은 서풍에 급하고 |
羃磧寒雲落日愁 | 모래 사막의 찬 구름 석양에 시름겹네. |
蘇武幾時終返國 | 소무(蘇武)는 그 언제 고향으로 돌아갈까 |
仲宣何處可登樓 | 중선(仲宣)은 어느 곳에서 누각에 오를지. |
騷人烈士無窮恨 | 소인(騷人) 열사(烈士)의 끝없는 한, |
地下傷心亦白頭 | 지하(地下)에서도 마음 아파 또한 백두(白頭)가 되었으리. |
‘연대패초(連大敗草)’와 ‘멱적한설(羃磧寒雪)’, ‘소무(蘇武)’와 ‘중선(仲宣)’ 등은 모두 호지(胡地)에 잡혀가 있는 자신의 처지를 확연하게 보여준 것이거니와 결연히 자신의 절의(節義)를 드러내보인 미련(尾聯)의 작법(作法)은 범상(凡常)한 시인으로서는 바라보기조차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경련(頸聯)에서 소무(蘇武)와 왕찬(王粲, 字 仲宣)의 고사를 빌려 쓰고 있지만, 소무는 한나라 때 흉노에 잡혀가 19년 동안이나 북해(北海)에서 양치기 노릇을 하는 고초를 겪으면서도 끝내 절의를 굽히지 않은 절신(節臣)이고, 왕찬은 삼국시대 초기에 장안에 난리가 나자 형주(荊州) 유표(劉表)에게 몸을 기탁하면서 고향을 그리워하여 「등루부(登樓賦)」를 지은 인물이고 보면, 이 작품에서 작자가 노린 것은 스스로 절의의 선비로서, 또는 강개한 시인으로서의 구실을 함께 다하고 있음을 과시하려 한 것이다.
김상헌(金尙憲)이 심양에서 풀려나 고국으로 돌아온 뒤 화산(花山)에 은거할 때 어느 날 밤 달빛 아래를 배회하면서 지은 「유감(有感)」도 암울했던 지난날의 회한(悔恨)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
南阡北陌夜三更 | 남북의 밭두둑길 밤은 삼경인데 |
望月追風獨自行 | 보름달 가을 바람에 홀로 걷노라. |
天地無情人盡睡 | 천지는 무정하여 사람 모두 잠자건만 |
百年懷抱向誰傾 | 백년 회포 누구에게 기울일까? |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오랑캐에게 짓밟힌 민족의 자긍심, 그 치욕의 한을 씻을 길 없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배회하는 자신의 참담한 심경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인용
'책 > 한시(漢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시사, 목릉성세의 풍요와 화미 - 7. 난중의 명가(이민구) (0) | 2021.12.21 |
---|---|
한시사, 목릉성세의 풍요와 화미 - 7. 난중의 명가(이안눌) (0) | 2021.12.21 |
한시사, 목릉성세의 풍요와 화미 - 7. 난중의 명가(임숙영) (0) | 2021.12.21 |
한시사, 목릉성세의 풍요와 화미 - 7. 난중의 명가(이춘영) (0) | 2021.12.21 |
한시사, 목릉성세의 풍요와 화미 - 7. 난중의 명가(권필) (0) | 2021.1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