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소단(騷壇)이 ‘모의(模擬)’를 배척하고 창신(創新)을 선호하여 개성적인 시세계를 강조했던 당시의 분위기를 고려한다면, 추사(秋史)와 자하(紫霞) 역시 선인(先人)의 시세계와는 다르게 새로운 경지를 열어보여야 할 임무가 그들에게 주어져 있었다 해도 좋을 것이다. 추사(秋史)의 경우, 실제로 ‘법고(法古)’보다는 ‘창신(創新)’에보다 관심을 보인 연암(燕巖) 및 후사가(後四家)와는 다르게 법고(法古)와 창신(創新)의 균형을 중시하였으므로, 후사가(後四家)가 주장한 창신(創新)에의 일방적 경도현상이 가져올 문제점을 예상하고 있었다.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의 시를 평한 내용 가운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옛 것을 배우지 않고 마음대로 법도를 버리는 것은 자기만을 말하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 만약 훌륭한 모범을 얻어보고 또 나아감에 정도가 있다면 그 하늘이 내려준 품성으로 어찌 여기에서 그치고 말았겠는가?
於不學古而緣情棄道者, 殆似自道也. 若使得見善本, 又就有道, 以其天品, 豈局於是而已也? 「書圓嶠筆訣後」, 『阮堂先生全集』 권6下
선본(善本)을 통해 학고(學古)한 바탕 위에서라야 자득(自得)한 경지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는 입장을 쉽게 간취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은 무조건적인 창신을 경계하고 선인의 다양한 경지를 맛보아 마침내 자가(自家)를 이루어야 한다는 논의로 귀결된다. 추사는 학시(學詩)의 모범으로 도연명(陶淵明)ㆍ왕유(王維)ㆍ두보(杜甫), 백거이(白居易)ㆍ소식(蘇軾)ㆍ황정견(黃庭堅)ㆍ육유(陸游)ㆍ원호문(元好問)ㆍ우집(虞集)ㆍ왕사정(王士禎)ㆍ주이존(朱彛尊)을 차례로 들고 있는 바, 이러한 태도는 바로 신위(申緯)의 유소입두(由蘇入杜)와 맥을 같이 한다. 추사 시에서 소재의 다양화 경향도 이미 후사가의 죽지사(竹枝詞)에서 그 싹을 틔웠거니와 추사는 시의 대상을 삶의 주변에서 골고루 취택함으로써 시세계의 다양화를 꾀하였다. 소재의 다양화는 이런 점에서 표현의 사실성과 긴밀히 연결된다. 주위의 사물을 빌어 관념적이거나 감정적인 흥취(興趣)를 담아내는 방법보다는 대상 자체의 특징과 속성을 중요시할 때, 시는 사실적인 경향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