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위(申緯, 1769 영조45~1845 헌종11, 자 漢叟, 호 紫霞ㆍ警修堂)는 시(詩)ㆍ서(書)ㆍ화(畵) 삼절(三絶)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1799년에 알성문과(謁聖文科)의 을과(乙科)에 급제하면서 환로에 올랐고, 10여년을 한직(閑職)에 머물다가 1812년에는 서장관 자격으로 연행하여 당대의 대학자로 알려진 청(淸)의 옹방강(翁方綱)을 만나 교유하였다. 이후 병조참판(兵曹參知)ㆍ병조참판(兵曹參判)ㆍ강화부 유수(江華府 留守)ㆍ도승지(都承旨)ㆍ이조참판(吏曹參判)ㆍ호조참판(戶曹參判) 등을 차례로 지냈지만, 몇 차례의 유배와 탄핵을 받는 과정을 겪으면서 순탄하지 않은 일생을 보냈다. 그의 시편은 김택영이 600여수를 정선한 『신자하시집(申紫霞詩集)』이 간행되어 전하고 있다.
그의 문학활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당대의 인물로는 우선 김정희(金正喜)와 옹방강(翁方綱)을 들 수 있다. 김정희(金正喜)는 신위가 청의 사절단으로 떠나기에 앞서 옹방강을 만나보도록 권한 인물이면서 자신도 옹방강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사람이다. 따라서 옹방강이 고증학에 밝은 인물이었다는 사실은 김정희(金正喜)와 신위 모두 고증학의 영향권 안에 있게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신위(申緯)가 시서화에 모두 승(勝)하였다는 사실과 김정희(金正喜)가 고증학에 기초한 ‘추사체(秋史體)’를 창안한 일들이 모두 그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옹방강은 소식(蘇軾)을 존숭하여 즉 그 자신이 소식의 시를 주석한 『소시보주(蘇詩補注)』를 펴내었으며 이 책이 바로 신위가 ‘소식을 기초로 삼고 두보에 들어가다[由蘇入杜]’의 기치를 내세우는 데 준거를 제공하게 된 사실은 주목할 일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건창(李建昌)이 「신자하시초발(申紫霞詩鈔跋)」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데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자하의 시는 처음엔 대체로 우리 집안 참봉군에서 나왔다. 그 후에 중국에 들어가 담계 옹방강(翁方綱)을 감복하여 섬겨 비로소 스스로 소식을 기초로 삼고 두보로 들어갔다.
紫霞之詩, 始蓋出於吾家參奉君. 其後入中國, 服事翁覃谿, 始自命由蘇入杜.
신위(申緯)에게 영향을 준 또다른 국내의 문인으로는 후사가(後四家)를 비롯하여 이광려(李匡呂)를 들 수 있다. 중국 시인의 경우에는 국내의 여느 시인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많은 시인들을 학시(學詩)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김택영(金澤榮)이 「신자하시집서(申紫霞詩集序)」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의 시는 소식을 스승으로 삼고 곁으론 서릉과 왕유와 육유의 사이에 출입하였다.
其詩, 蘇子膽爲師, 旁出入于徐陵王摩詰陸務觀之間
소식(蘇軾) 외에도 서릉(徐陵)ㆍ왕유(王維)ㆍ육유(陸游)의 영향을 받았음을 살필 수 있다. 또 그의 문집에 등장하는 인물을 보면, 황정견(黃庭堅)ㆍ원호문(元好問)ㆍ왕사정(王士禎) 등의 영향도 배제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먼저 후사가가 신위(申緯)에게 영향을 주었던 사실은 「신자하시집서(申紫霞詩集序)」의 “오직 신위만이 직접적으로 이서구 여러 학자들의 자취를 접했고 시서화 삼절로 천하에 이름 났다[惟申公之生, 直接薑山諸家之踵, 以詩書畵三絶, 聞於天下.”라 한 진술에서 증명되거니와 후사가가 이때까지도 천시되던 회화에 두루 관심을 가지면서 시서화일치(詩書畵一致)를 주장했던 사실 자체가 신위(申緯)의 탄생을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데서 일차적인 영향관계를 설정해도 좋을 듯싶다.
이광려(李匡呂)의 경우 앞서 든 이건창(李建昌)의 ‘紫霞之詩, 始蓋出於吾家參奉君’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참봉군(參奉君) 즉 이광려(李匡呂)로부터 크게 영향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김택영(金澤榮)이 「신자하시집서(申紫霞詩集序)」의 또다른 곳에서 “공은 시에 있어서 처음엔 성당을 배웠지만 후엔 고쳐 소동파를 배워 전에 지었던 것들을 모두 버렸다[公於詩, 始學盛唐, 後改學蘇東坡, 悉棄前作]”이라 한 것으로 보아, 신위(申緯)의 초기시는 모두 없어졌다고는 하더라도 일단 이광려(李匡呂)의 당시풍에 크게 경도되었던 사실은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보면 신위(申緯)는 젊은 시절에는 당풍(唐風)을 숭상하다가 김정희(金正喜) 및 옹방강과의 교유 이후 차츰 송풍(宋風)에 경도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른바 신위(申緯)의 ‘유소입두(由蘇入杜)’도 소식(蘇軾)을 거쳐 두보(杜甫)에로 귀착한 것이 아니라, 소식(蘇軾)을 바탕으로 두보(杜甫)를 수용하고 있음을 뜻한다. 옹방강으로 대표되는 당시 청 시단의 ‘유소입두(由蘇入社)’도 당(唐)과 송(宋)을 절충하고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신위(申緯)의 시세계는 그 기조(基調)가 사실적(寫實的)이라는 사실 외에 한마디로 말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하다. 그는 교유관계에 있어서도 신분계층이나 당색(黨色)을 초월하여 광범하게 사람을 사귀고 있어 이것이 묘하게도 그의 시세계와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신위(申緯)는 그렇게 다양한 경향을 보이면서 그토록 많은 시편을 제작하고서도 정작 자신의 시관(詩觀)을 밝히는 마땅한 산문저술을 남기지 않았다. 다만 「신자하시집서(申紫霞詩集序)」에서 김택영(金澤榮)이 진술한 기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염려(豔麗)할 수 있고 소야(疎野)할 수 있으며 변환(變幻)할 수 있고 돈실(敦實)할 수 있으며 졸박(拙樸)할 수 있고 호방(豪放)할 수 있으며 평이(平易)할 수 있고 기험(崎險)할 수 있으며 천만 가지 정상을 마음대로 구사하여 활발하고 생동하지 않음이 없어 눈앞에 가득 펼쳐졌다. 이에 독자에게 눈이 어지럽고 정신이 취하도록 하게 함이 마치 만무(萬舞)가 펼쳐지고 오제(五齊)가 무르익은 듯하니, 광세(曠世)의 특별한 재능을 갖추고 일대(一代)의 지극한 변화를 다하여 마음껏 기량을 떨친 말기의 대가라고 말할 만하니
能豔能野, 能幻能實, 能拙能豪, 能平能險, 千情萬狀, 隨意牢籠, 無不活動, 森在目前. 使讀者目眩神醉, 如萬舞之方張, 五齊之方醲, 可謂具曠世之奇才, 窮一代之極變, 而翩翩乎其衰晩之大家者矣.
이 신위(申緯)의 시세계가 얼마나 다양했던가를 명증하고 있을 뿐이다.
신위(申緯)의 시는 스스로 중체(衆體)를 구비하여 일대(一代)의 극변(極變)을 다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시의 제재를 선택함에 있어서도 그는 시인 자신의 술회를 토로한 것에서부터 타인의 시에 차운한 시, 타인의 시를 의방한 시, 사회를 풍자한 시, 그리고 시를 통해 시인과 시를 논한 시, 민간의 풍속을 그려낸 시 등이 그에 해당한다. 즉 타인의 시를 의방한 것으로는 왕사정의 「추류시(秋柳詩)」를 따라 지은 「후추류시(後秋柳詩)」를 비롯하여, 남옥(南玉)의 오언고시(五言古詩) 「맥풍(貊風)」을 칠언절구(七言絶句)로 개작한 「맥풍십이장(貊風十二章)」 등을 들 수 있고, 사회를 풍자한 시로는 「잡서(雜書)」 50수를 거론할 수 있다. 또 전래의 시조를 7언절구로 한역한 소악부(小樂府) 40수가 있는가 하면, 당시 민간에서 유행하던 배우(倡優)들의 연희를 보고서 지은 「관극절구(觀劇絶句)」 12수가 남아 있고, 시흥(始興)의 자하산장(紫霞山莊)에 머물면서 그곳의 풍속을 읊은 「시흥잡절(始興雜絶)」 20수가 전하는 바, 그의 민간 풍속에 대한 관심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뿐만 아니라 작은 한시사라 할 수 있는 ‘시로 시를 논하다[以詩論詩]’의 「동인논시절구(東人論詩絶句)」 35수는 최치원(崔致遠)으로부터 김상헌(金尙憲)에 이르는 51명의 작품과 특성을 논평한 귀중한 작품이다. 그러나 신위(申緯) 시의 사실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의 「화남우촌유서시(和南雨村柳絮詩)」를 읽어야 한다.
『대동시선에 선발된 것만으로도 「춘일산거(春日山居)」(五絶), 「차운하상낙엽시(次韻荷裳落葉詩」, 「사월팔일원정절구(四月八日園亭絶句)」, 「녹파잡기제사(綠波雜記題辭)」(이상 七絶), 「우게검물원작(雨憩檢勿院作)」, 「박연(朴淵)」(이상 五律), 「전춘(餞春)」, 「임정견한(林亭遣閒)」, 「회양(淮陽)」, 「회녕령(會寧嶺)」, 「옥선동(玉仙洞)」, 「초하견흥(初夏遣興)」, 「고열행(苦熱行)」 二首(이상 七律), 「추우탄(秋雨歎)」(五古) 등 10여편에 이르고 있다. 이 가운데 신위(申緯)의 「춘일산거(春日山居)」는 다음과 같다.
縣市人心惡 山村物性良 | 도시의 인심은 나쁘지만 산촌의 물성은 아름다워라. |
茅柴四三屋 雞犬畫羲皇 | 초가집 서너채 모여 있는 곳, 개도 닭도 모두 태평성대라네. |
변조(變調)로 알려진 자하 시의 한 특징을 보여주는 시편이다. 산 속에 사는 봄날의 정경(情景)을 그렸는데, 도무지 근체시답게 단련한 흔적이 없다. 기구(起句)와 승구(承句)에서 보이는 고졸(古拙)한 대구, 시어로서는 낯선 인심(人心)이나 물성(物性) 등의 구사가 시를 첨신(尖新)하게 만들고 있다. 또한 ‘계견진희황(鷄犬盡羲皇)’의 표현은 매우 희학적이기도 하다. “能豔能野, 能幻能實, 能拙能豪, 能平能險”하여 천정만상(千情萬狀)을 마음대로 그려낼 수 있다는 권능(權能)을 이에서 볼 수 있다.
신위(申緯)의 이 시와는 달리 의활(意豁)한 송시(宋詩)의 진수를 한눈으로 확인케 하는 「서경차정지상운(西京次鄭知常韻)」을 들어본다.
急管催觴離思多 | 빠른 곡조 권하는 잔 떠날 생각 많은데 |
不成沈醉不成歌 | 깊이 취하지도 아니하고 노래도 되지 않네. |
天生江水西流去 | 천생으로 강물은 서쪽으로만 흘러 |
不爲情人東倒波 |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동쪽으로 물길을 돌리지 못하네. |
정지상(鄭知常)의 「송인(送人)」에 차운한 시는 수도 없이 많지만, 그중 가장 빼어난 시편이라 칭송되는 작품이다. 만당풍의 유려한 정지상(鄭知常)의 원시와는 대조적으로, 이 시는 송시(宋詩)의 깊은 듯이 물밑에서 일렁이고 있다. 기구(起句)와 승구(承句)는 빠른 피리 소리가 이별을 재촉하는 상황에 어울리게 시의 호흡 역시 빠르고 격하다. 그러나 전구(轉句)에서는 시상을 반전시키면서 유장한 호흡으로 바뀌고 있으며 이별에는 아랑곳없이 흐르는 물에 원망을 실어 아쉬운 여운을 더하면서 시를 마무리 하고 있다.
자하 신위(申緯)의 또 다른 명편으로 절찬을 받은 박연(朴淵)」을 보기로 한다.
俯棧盤盤下 回看所歷懸 | 잔교를 굽어보며 구불구불 내려와 돌아보니 지나온 길 매달려 있구나. |
巖飛山拔地 溪立瀑垂天 | 바위가 날아 온 듯 산은 땅에서 솟았고 시내가 서있는 듯 폭포는 하늘에 드리웠네. |
空樂自生聽 衆喧遂寂然 | 공중의 음악소리 자생으로 들리는데 뭇 사람 떠드는 소리는 들리지도 않네. |
方知昨宿處 幽絶白雲巓 | 바야흐로 알겠노니 어제밤 자던 곳이 그윽한 곳 흰 구름 걸린 산마루였음을. |
이 작품은 물론 개성에 있는 박연폭포를 보고 읊은 것이다. 자하는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로 널리 알려져 있거니와, 자하의 시는 그림과 같은 정경이 갖추어져 있다. 보통 솜씨로는 그릴 수도 없는 그림을 율문(律文)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함련과 경련에서는 눈으로, 귀로 보고 듣는 경치를 맑고 깨끗하게 그려내고 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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