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친이 남긴 바둑알의 개수를 기록하며
기기(記棋)
이색(李穡)
先正於他藝, 一不留意, 獨於棋, 粗得其妙, 而當世之能者或見推焉. 然家不留其具也.
予始孤, 自都下還, 鬱邑廢業. 旣練, 整書秩, 因得棋子視之, 其一海介, 質白文黃, 其一石, 而玉潤且黑. 磨礱精巧, 團團如星, 可謂儒有席上珍矣. 然其子僅二百, 以波淘石充之始足.
一日, 孫君見訪曰: “此吾得之釋戒弘者, 令先大夫綵侍之日, 吾兒起所進者也.” 因取而枚數之曰: “始者三百六十裕如也, 今存者何其若是之少乎?” 余觀其意, 似不能不慨然於其懷.
予乃紬繹而思之, 雖蕞爾小物, 亦必有數存乎其間, 君子不可不知也. 泝流而求之, 自弘而上, 成之者誰歟? 傳之者又誰歟? 自弘而孫, 自孫而李, 其亡失者已半之半. 不知過此以往, 傳之何人乎? 漸以散逸而頓失於何人之手乎? 抑不知吾儒者用之乎? 或爲膏梁豪俠之所戲謔者乎?
慨念古今, 細思物理, 能不潸然乎? 圓動方靜之機, 羸形猛勢之論, 不暇及也. 謹記之曰: ‘白子百四十, 黑子百單九.’ 因書二通, 一以與孫君, 使知其棋之所寓; 一以自藏, 志其棋之所自來, 且冀其無或失墜云. 『牧隱文藁』 卷之一
해석
先正於他藝, 一不留意, 獨於棋, 粗得其妙, 而當世之能者或見推焉. 然家不留其具也.
선정(先正)【선정(先正): 선대(先代)의 어진 이 또는 어진 신하를 가리키는 말. [유사어] 선철(先哲). 선현(先賢).】께선 다른 기예에 대해 한 번도 뜻을 두지 않으셨지만 유독 바둑에 대해선 대강 오묘함을 얻었고 당대의 잘 하는 이들도 간혹 추천하곤 했다. 그러나 집엔 바둑의 기구를 남겨두지 않았다.
予始孤, 自都下還, 鬱邑廢業.
내가 막 고아가 되었을 적에 개성으로부터 돌아와 울적해진 채 일을 하지 못했다.
旣練, 整書秩, 因得棋子視之, 其一海介, 質白文黃, 其一石, 而玉潤且黑.
이윽고 연제(練祭)【연제사(練祭祀):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먼저 돌아간 어머니의 소상(小祥)을 한 달 앞당겨 열한 달 만에 지내는 제사.】를 하고서 책장을 정리하다가 바둑돌을 얻어 보니 하나는 바다 조개로 바탕은 희고 무늬는 노랗고 한 바둑돌은 옥 같은 윤기가 나면서 검었다.
磨礱精巧, 團團如星, 可謂儒有席上珍矣.
다듬어지고 갈아진 게 정밀하고 기교로웠으며 둥글둥글함이 별 같으니 유학자이 모인 자리[席上]의 보배라 할 만했다【『예기(禮記)』 유행(儒行)의 “유자는 석상의 진귀한 보배처럼 자신의 덕을 갈고 닦으면서 임금이 불러 주기를 기다린다.[儒有席上之珍以待聘]”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然其子僅二百, 以波淘石充之始足.
그러나 바둑돌이 겨우 200개만 있어 파도로 바둑돌을 씻어 채우고서에 막 채워졌다.
一日, 孫君見訪曰: “此吾得之釋戒弘者, 令先大夫綵侍之日, 吾兒起所進者也.”
하루는 손(孫) 군이 보고 방문하며 “이것은 내가 스님 계홍(戒弘)에 얻어 영공(令公)의 선대부(先大夫)께서 어버이 모시던【채시(綵侍): 초(楚)나라 노래자(老萊子)가 늙으신 부모를 즐겁게 하기 위해 채색이 화려한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며 어리광을 부렸다는 고사를 가리킴. 자식이 부모를 봉양함을 뜻함.】 날에 내 아들 기(起)가 진상한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因取而枚數之曰: “始者三百六十裕如也, 今存者何其若是之少乎?”
곧이어 가져다 그걸 세어보며 “처음엔 360개로 남음이 있는 듯했는데 지금 있는 것이 어째서 이처럼 줄었나요?”라고 말했다.
余觀其意, 似不能不慨然於其懷.
내가 그 뜻을 보니 품음에 서글프지 않음이 없는 듯했었다.
予乃紬繹而思之, 雖蕞爾小物, 亦必有數存乎其間, 君子不可不知也.
나는 이에 실마리를 찾아 생각해보니 비록 하잘 것 없는 작은 물건도 또한 반드시 그 사이에 수명이 있으니 군자는 몰라선 안 된다.
泝流而求之, 自弘而上, 成之者誰歟? 傳之者又誰歟?
흐름을 거슬러 그걸 구해보면 계홍(戒弘)으로부터 윗 사람으로 만든 이는 누구인가? 전해준 이는 또한 누구인가?
自弘而孫, 自孫而李, 其亡失者已半之半.
계홍(戒弘)으로부터 손자에게 손자로부터 이공에게 가며 사라진 것이 이미 반절의 반절이다.
不知過此以往, 傳之何人乎? 漸以散逸而頓失於何人之手乎? 抑不知吾儒者用之乎? 或爲膏梁豪俠之所戲謔者乎?
모르겠지만 이를 지나쳐 가다 어떤 사람에게 전해질 것인가? 점점 흩어져 어떤 사람의 손에 갑자기 잃게 될 것인가? 아니라면 우리 유학자가 그걸 사용하게 될지 모르겠구나? 혹은 높은 가문의 의기 있는 이가 장난 치는 것이 될 것인가?
慨念古今, 細思物理, 能不潸然乎?
예와 지금을 서글프게 생각하면서 사물의 이치를 세세히 살펴보면 눈물이 나지 않을 수 있을까?
圓動方靜之機, 羸形猛勢之論, 不暇及也.
원동방정(圓動方靜)【원동방정(圓動方靜): 모난 바둑판 위에 둥근 바둑돌을 놓아 온갖 변화를 일으킨다는 말이다. 당(唐)나라 장열(張說)이 현종(玄宗) 앞에서 이필(李泌)을 시험하기 위해 ‘방원 동정(方圓動靜)’을 설명하면서, “모난 것은 바둑판과 같고 둥근 것은 바둑돌과 같으며, 움직임은 바둑돌이 살아 있는 것과 같고 고요함은 바둑돌이 죽어 있는 것과 같다.[方若棋局 圓若棋子 動若棋生 精若棋死]”고 하자, 이필이 그 즉시 “모난 것은 의(義)를 행함과 같고 둥근 것은 지(智)를 쓰는 것과 같으며, 움직임은 인재를 초빙하는 것과 같고 고요함은 뜻을 얻음과 같다.”라고 대답하여 기동(奇童)이라는 칭찬을 받았던 고사가 전한다. 『新唐書 卷139 李泌列傳』】의 기미나 리형맹세(羸形猛勢)【이형맹세(羸形猛勢): 형세를 허약하게 보이도록 하여 상대방을 유인했다가 맹렬한 기세를 떨치며 격파한다는 뜻으로, 이른바 ‘위기십결(圍棋十訣)’처럼 바둑을 둘 때의 자세나 기술을 가리키는 말이다.】의 논의는 언급할 겨를이 없다.
謹記之曰: ‘白子百四十, 黑子百單九.’
삼가 ‘흰 바둑돌은 140개이고 흑 바둑돌은 109개이다’라고 기록했다.
因書二通, 一以與孫君, 使知其棋之所寓; 一以自藏, 志其棋之所自來, 且冀其無或失墜云. 『牧隱文藁』 卷之一
두 통을 써서 하나는 손군에게 주어 바둑이 남겨진 곳을 알게 하는 것이고 하나는 스스로 보관하여 바둑이 유래한 바를 기록하여 장차 사라지지 않게 하길 바란다.
인용
'산문놀이터 > 삼국&고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규보 - 신묘십이월일 군신맹고문(辛卯十二月日 君臣盟告文) (0) | 2019.10.03 |
---|---|
이색 - 유사정기(流沙亭記) (0) | 2019.09.25 |
이규보 - 오덕전극암시발미(吳德全戟巖詩跋尾) (0) | 2019.09.25 |
이색 - 설곡시고서(雪谷詩藳序) (0) | 2019.09.22 |
최해 - 송승선지유금강산서送僧禪智遊金剛山序 (0) | 2019.09.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