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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산, 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 조선 지식인의 어문 인식 경향 - 4. 백화문학과 방언·향어·속어, 본문

한문놀이터/논문

조성산, 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 조선 지식인의 어문 인식 경향 - 4. 백화문학과 방언·향어·속어,

건방진방랑자 2019. 11. 30.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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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방언(方言)ㆍ향어(鄕語)ㆍ속어(俗語)의 사용

 

이 시기에는 문체의 문제와 함께 조선의 방언(方言향어(鄕語속어(俗語)에 대한 관심도 함께 표출되고 있었다. 속담(俗談) 등 일상의 음성언어적 표현들을 한역화하려 노력하고 이에 대해서 새롭게 관심 갖는 것은 이 시기 특징적인 경향 가운데 하나였다. 이덕무(李德懋, 1741~1793)열상방언(洌上方言)을 통하여 고유한 속담들을 한역화하였다.李德懋, 靑莊館全書62 冽上方言 정약용(丁若鏞) 또한 속담을 한역하여 이담속찬(耳談續簒)을 지었다.丁若鏞, 與猶堂全書第一集 雜纂集 24 耳談續纂王氏耳談者 古今鄙諺之萃也 經史所著 頗有脫漏 今復收錄 石泉申承旨綽亦以十餘語採而助之 因念星翁百諺 卽吾東鄙諺韻 今取可韻者韻之 因又 收其脫漏 先仲氏在玆山海中 亦以數十語寄之 今會通爲編 名之曰耳談續纂 嘉慶庚辰春 鐵馬山樵書 홍길주(洪吉周)우리나라 속담에도 글 속에 넣을 만한 것이 아주 많은데, 이를 쓰는 사람이 없다洪吉周, 沆瀣丙函5 叢秘紀 一 睡餘演筆 上東諺可入文章者甚多 而無用之者고 하면서 사람을 쉽게 깨우치는 데 있어서는 속담이 옛 글보다 낫다고까지 인식하였다.洪吉周, 沆瀣丙函5 叢秘紀 一 睡餘演筆 上縛線針腰 驅牛鼠穴 余嘗取用於雜著術中 此等說 古人 書中非不具有 而悟人之易 諺勝於古書 유한준(兪漢雋, 1732~1811)은 시정(市井)에 산재해 있는 언()이 지극히 비야(卑野)한 듯하지만 신묘하고 사물을 핍진히 잘 묘사하고 있다고 극찬하면서 언기(諺記)를 지었다.兪漢雋, 自著27 諺記東方之諺衆矣 散在街衢閭巷之口 至俚也而神未嘗不流 至野也而機未嘗不動 逼理玅切事情 配道常依物則 托微之君子不能捨也 余乃采其辭 具著于篇 名曰諺記

 

또한 동언(東諺)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인식하려는 경향도 이 시기 생겨났다. 홍길주(洪吉周)는 동언(東諺)에 관심을 가져 동언소초(東諺少鈔)라는 자료집을 남겼다. 홍길주가 생각하기에 어떤 나라에서든 반드시 고유한 언()이 존재하고, 이는 자신의 나라로부터 본다면 비리(鄙俚)하지만 다른 나라에서 보면 기이(奇異)하고 고아(高雅)할 수 있는 것이었다. 중국 언어 또한 꼼꼼히 따져 보면 항상 변화해왔고, 그러한 점에서 각 시대에는 각각의 언()이 존재했다고 하였다. 결국 변화하지 않는 절대적인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조선의 언() 또한 비리(鄙俚)하다고 말할 근거는 없다는 주장이었다.洪吉周, 孰遂念15擧業念界諺鄙俚又多轉訛 博識者病之 然國必有諺 自其國視之則鄙俚 自異 邦視之則奇雅 且承用旣久 烏得無轉訛 中國言語亦多轉訛者 如伯叔爲兄弟之序 而后世沿伯父叔父之稱 遂 稱父曰伯曰叔 此類纂多 嘗謂古人無文字俗言之別 秦漢時言語稱謂 必非唐虞殷周之舊 則此亦秦漢時俗諺也 秦漢人皆用之於文章 推而上之 夏殷之以我爲台 時已然 其亦夏殷之俗諺也 唐虞之以事爲采 必不自虔戱時已然 其亦唐虞之俗諺也 乃典謨誥訓用之 而不以爲俚 그는 동언소초(東諺少鈔)에서 임금, 서라벌, 미리, 사나이, 아우 등의 동언이 갖는 의미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서유본(徐有本, 1762~1822)은반(殷盤)주고(周誥)의 난해한 구절들은 사실 당대의 방언(方言)이었다고 하면서, 방언 사용의 이유를 효유지속(曉諭之速)’풍동지광(風動之廣)’에서 찾았다.徐有本, 『』左蘇山人文集 3 上答仲父明臯公書先儒謂殷盤周誥聲牙難解之句 皆是當時方言 夫殷庚之 衆戚周公之詔庶頑大庭播脩之辭 雜以方言 而不以爲嫌者 欲其曉諭之速 而風動之廣也 愚謂儒家之有語錄 亦猶盤誥之用方言也 又何可少之哉 이는 방언이 갖는 표현의 적확성과 이 해의 효율성에 주목한 언급임과 동시에 방언의 균등성을 말하는 것이었다. 서경의 구절이 당 대의 방언이라는 주장은 방언의 의미를 새롭게 규정해 줄 수 있는 것으로서 앞서 홍길주가 모든 시대와 모든 지방에는 각각의 언()이 존재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서명응(徐命膺, 1716~787)방언유석(方言類釋)(1778)의 서문에서 중국의 말도 향어(鄕語)로서 규정하면서 청나라, 몽고, 일본의 말과 같은 지위에서 다루었다徐命膺, 方言類釋(홍문각 영인본, 7) 方言類釋序上之二年 戊戌旣撰奎章韻瑞 復命臣率舌官洪命 福等 博采漢淸蒙倭之方言 今時所用者 分門彙類以我國諺文釋之 且附以中州鄕語 名曰方言類釋. 이것은 방언에 대한 당대의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방언에 대한 변화된 인식은 이옥의 다음 글에서도 잘 나타나있다. 그는 삼난(三難)에서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데 조선의 향명(鄕名)이 한문(漢文)보다 더욱 효율적이라면 이를 쓰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아아! 가령 그 물건을 이름하는 경우 모두 석(), 등경(燈檠), (), ()라고 한 것처럼 반드시 그 물건에 합당하다면 나 또한 내 의견을 버리고 남의 의견을 따를 것이며, 반드시 향명(鄕名)을 억지로 전하여 힘써 이기고자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푸른 깃을 가리켜 비취(翡翠)라 하고, 슬픈 울음소리를 듣고 두견새라 하는 것과 같은 데 이르러서는 내가 비록 솜씨가 둔하고 혀가 어눌하여 언문시(諺文詩)를 짓는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법유(法油)를 사고 청포(靑泡)를 먹고자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어찌하여 향명(鄕名)을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皆如席也燈也筆也紙也之必當其物 則吾亦當舍已 而從人不必强傳鄕名若務勝者 然而至若指碧羽而爲翠 聽哀鳴而爲鵑 則吾雖手鈍舌訥 至作諺文之詩 必不有買法油而靑泡也矣 吾如之何 其不爲鄕名也

 

탄식할 만한 것은 창힐(蒼頡)이나 주황(朱皇)이 이미 일찍이 우리를 위하여 따로 문자를 만들지 않았고, 단군과 기자도 또한 일찍이 글자로써 말을 가르친 적이 없었다. 그러니 수다한 향음(鄕音) 가운데 혹 문자로서 이름하지 않은 것들이 있었는데, 문자로 이름할 수 있을 만한 것을 내가 무엇이 두려워 이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내가 반드시 향명(鄕名)을 쓰게 된 이유이다. 내 어찌 향암(鄕闇)스러워서이겠는가? 내 어찌 괴팍해서이겠는가? 또한 내가 어찌 참람되서이겠는가? 그대가 이미 나를 참람되다고 했다면 나는 청컨대 참람함을 피하지 않고 큰 소리로 말하겠다.

所可歎者 蒼帝朱皇旣不曾爲我而別造書焉 檀仙箕王亦未嘗以書而早敎語焉 則剌剌鄕音或有文字之所未名者 而以其可以名者 則吾何畏而不爲是哉 此吾之所以必以鄕名也哉 吾旣鄕闇也哉 吾豈詭也哉 吾旣僣也哉 子旣謂我以僣焉 則吾請不避僣而大談矣 -李鈺, 藝林雜佩』 「俚諺引 三難

 

 

이옥은 가장 적확한 표현을 쓰기 위해서 향명(鄕名)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 있고, 이를 위해서 향명(鄕名)을 자연스럽게 쓸 수 있다는 논리를 폈다. 이러한 의식은 중국 고전의 문구만을 고아한 표현으로 알아온 기존 인식과는 커다란 대조를 이루는 것이었다. 이 시기에는 조선 고유의 의성어와 향토적인 말들이 시어 속에 활발히 사용되는 모습이 등장하였다. 정약용이 시() 속에서 방언과 향토적인 의성어 등을 시어에 도입함으로써 한시의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던가,인권환, 1986 韓國民俗學史, 열화당, 27; 진재교, 2001 이조 후기 한시의 사회사, 소명출판, 428. 기속시(紀俗詩)에 토속적 시어와 전고가 상당 부분 사용되고 있었던 데에서 이러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김명순, 1996. 朝鮮後期 紀俗詩 硏究, 경북대 박사학위논문, 119~155.

 

이처럼 향어와 방언이 한문체계 속에 들어가는 것은 한문체계로 포섭되는 것인 동시에 향어와 방언의 위상이 그만큼 상승하여 간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앞서 홍길주의 말처럼 동언(東諺)을 비리하게 여길 근거가 없게 된 것이다. 이는 앞서 살펴보았듯이 물명 유서의 편찬 과정에서 오히려 조선 고유의 언어들이 재발견되고, 한문체계 속에 포섭하기 어려운 조선의 고유한 언어들이 인식되는 과정과도 흡사하다. 한문체계의 확대가 모순되게도 중국식 한문체계로 포섭되지 않는 조선의 고유한 영역들을 발견하게 만드는 것으로 연결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하여 한문과 조선 고유의 음성언어들이 착종되었고, 조선식의 한문이라는 특수성이 점차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것은 중국 한문체계의 층층들 또한 사실은 각 시대의 방언인 언()이라는 음성언어에 기반하고 있었다는 인식 속에서 나름의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었다.

 

요컨대, 기존 한문표현의 문제를 새로운 문체로 극복하려고 하는 성향, 속어와 방언을 수용하고 잘못된 용례를 바로잡아 한문 사용의 효율성을 제고하려는 경향 등은 모두 음성언어에 대한 문제와 깊은 관련성을 가졌다. 한문을 좀더 구어적으로 만들고 조선의 방언과 향어, 속어를 적극 한문체계 속에 이입하고자 하는 시도들은 한문체계의 성격 변화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만들어진 사회적 관계들도 변화시킬 수 있었다. 그러한 점에서 이러한 현상은 이제 한문 사용이 점차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지점으로 나아가고 있었음을 말해주었다.

 

 

 

 

인용

목차 / 지도

1. 머리말

2. 음성언어에 대한 관심 증대

1) 명청교체와 음성언어 인식의 계기

2) 음성언어 인식과 조선적인 것

3. 언문일치 인식의 대두

1) 언문불일치의 문제 제기

2) 물명류서의 편찬

4. 백화문학과 방언·향어·속어

1) 백화 문학의 확대

2) 방언·향어·속어의 사용

5.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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