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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산, 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 조선 지식인의 어문 인식 경향 - 1. 머리말 본문

한문놀이터/논문

조성산, 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 조선 지식인의 어문 인식 경향 - 1. 머리말

건방진방랑자 2019. 11. 30.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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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 조선 지식인의 어문(語文) 인식 경향

 

조 성 산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1. 머리말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은 조선의 지식체계가 많은 변화를 보이던 때였다. 이는 조선의 지적 수요와 함께 사고전서(四庫全書)의 편찬 등 청()나라의 문화사업 수용에도 중요한 원인이 있었다. 조선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변화된 대청의식(對淸意識)을 통하여 청나라의 발전된 문물을 인정하고 수용하고자 하는 의식이 확산되어 갔다. 이에 더하여 서학(西學)을 통한 서양문물의 도입도 조선의 지식체계를 자극하였다. 물론 이를 수용하고자 하는 조선 사상계의 내적 변화를 간과할 수 없다. 이처럼 당시 풍성하게 제기된 지식담론에 대한 문제들은 19세기 중반기까지 사상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본 글은 당시 제기된 여러 문화적 변화들 가운데 음성언어와 그로 인해 야기된 문제들에 대해서 주목하고자 한다.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은 새롭게 음성언어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였고 언문일치(言文一致)에 대한 인식의 강화, 물명류서(物名類書)의 활발한 편찬, 문체(文體)의 변화, 향어(鄕語)와 방언(方言속어(俗語) 사용 등 다양한 문제들이 대두하고 있었다최근 들어 이 시기 언어문자관에 대한 연구들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조선후기 지식인들은 언어, 문자에 접근하는 방식에 있어서 계파별로 차이를 보였던 바, 소론계는 성운학·문자학에 강세를 보였고, 남인계열에서는 어휘 사용 문제에, 경화의 노론계열에서는 인식론적·예술적 감수성을 수반하는 매체로서의 언어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는 연구(김동준, 2007 소론계 학자들의 자국어문 연구활동과 양상」 『민족문학사연구35, 10면 참조), 연암그룹·정약용·홍길주의 언어문자관을 비교한 연구(박수밀. 2007 조선후기 언어 문자관의 토대와 전개」 『한국한문학연구40), 박지원·박제가·홍양호·홍희준·홍경모의 언어문자관을 언문불일치 문제, 華語, 訓民正音 인식과 관련해서 살펴본 연구가 있었다(이군선, 2007 朝鮮 士人言語文字 認識」 『東方漢文學33). 본 연구는 이러한 기존의 연구들을 토대로 당시 일어난 語文 상황의 제반 문제들이 음성언어에 대한 관심과 밀접한 관련성을 갖는 것으로 보고 논의를 전개시키고자 한다.. 이러한 일련의 변화들은 각각 별개의 문제로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음성언어에 대한 관심이라는 측면에서 상호 연관성을 가지고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본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기 조선에서 이루어진 음성언어의 문제들을 다루어보고자 한다.

 

음성언어는 문자언어와 상호 보조적이며, 그러한 점에서 음성언어와 문자언어 어느 것이 우월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플라톤 이래로 표의문자를 비판하고 표음문자가 로고스에 가장 적합한 매체라는 특권을 부여해 온 서구 형이상학의 음성중심주의경향을 지적하였다(이에 대해서는 자크 데리 다(김성도 옮김), 1996 그라마톨로지, 민음사 ; 자크 데리다(김웅권 옮김), 2004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동문선 참조).. 음성언어와 문자언어는 각각의 기능을 나누어 가지고 있는 것이다. 본 글이 음성언어의 문제에 주목하고자 하는 이유 또한 음성언어의 우월성을 논하는 데 있지는 않다. 본 글은 한문이라는 상징과 기호의 문자언어 세계에 가변적인 음성이 인식되면서 어떠한 결과물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는지에 초점을 두고자 한다물론 漢文은 표의적인 성격을 가지는 동시에 표음적인 언어이기도 하다. 諺文 또한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 본 글은 이러한 점을 충분히 염두에 두면서, 한문과 언문이 상대적으로 어떠한 성격을 더욱 가지고 있는가에 주목하고자 했다. 그러한 점에서 한문을 표의적으로, 언문을 표음적으로 규정하고 논의를 전개하였다. 이는 그 언어의 성격을 상대적인 관점에서 규정하는 것이다.. 특히 이점은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에서 중요하게 인식되어야 한다. 주류 정치와 문화가 모두 한자라는 문자언어 체계 속에서 발전되어 온 점을 생각해 보면朴齊家의 다음과 같은 말은 이러한 모습을 잘 보여준다. 貞蕤閣集2 六書策臣聞書者與道俱生者也 道無形無體則書以視之 道無方所則書以導之 道無言語則書以達之 故世無離水之魚 亦無離書之道矣, 음성언어에 대한 자각과 인식은 한문체계 변화의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었다이 문제와 관련해서 서구의 형이상학에서 음성이 로고스의 일차적 담지체였다고 한다면 중국에서는 문자가 그러한 역할을 담당했고, 그런 점에서 청말 지식인의 음성중심주의는 문자에 담겨있는 로고스의 해체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는 언급(백지운, 2005 근대 중국 언어운동의 스펙트럼」 『역사비평70, 354)“18세기 일본 국학자의 음성중심주의에는 중국의 문화 지배에 대한 정치적인 투쟁이나 武家 체제에 대한 부르주아적인 비판이 함의되어 있다는 주장(가라타니 고진(이경훈 옮김), 2002 에크리튀르와 내셔널리즘 유머로서의 유물론, 문화과학사, 74)은 동아시아에서 있었던 음성중심주의 경향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고 하겠다..

 

음성언어는 발생적으로 볼 때 문자언어보다 먼저 존재하는 것으로서 문자언어로 구현되지 않는 더 내면적인 소통을 가능케 하는 중요한 도구임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같은 문자 언어로 구성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재현되는 음성언어에 따라 문자의 어감은 확연히 달라질 수 있다. 음성언어가 가요(歌謠) 등을 통하여 지식보다는 감정(感情)을 전달하는 데 주로 활용되었던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음성언어가 단지 감정의 소통 문제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었다. 음성언어가 갖는 일차적인 소통의 문제는 방언(方言)의 경우에서도 보이듯이 그 음성언어를 공유하는 공동체의 긴밀도를 높여주는 역할도 할 수 있었다. 음성언어가 갖는 세세한 어감들을 이해하면서 상호 소통과 이해를 통하여 하나의 음성언어 공동체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그 점에서 음성언어는 공동체 형성과도 긴밀한 관련성을 갖는다음성언어는 근대 내셔널리즘의 형성과 밀접한 관련성을 갖는 것이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가라타니 고진(이경훈 옮김), 앞의 논문을 참조할 수 있다..

 

이러한 음성언어에 대한 문제가 18세기 후반 이후 본격적으로 조선에 제기되는 것은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본 글은 당시 제기된 언문일치(言文一致)와 물명류서(物名類書)의 편찬, 문체(文體)의 변화와 방언(方言향어(鄕語속어(俗語) 사용 문제들을 차례로 검토하면서 이것이 당시 증대된 음성언어에 대한 관심과 어떠한 방식으로 관계하였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 과정을 통하여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 음성 언어의 문제가 어떻게 조선에 제기되고 이후 한문 중심의 지식체계와 어떠한 형태로 관계하였는지를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19세기 중화체계의 붕괴와 새로운 질서의 모색과정에서 조선의 지식인들이 처할 수밖에 없었던 언어적 상황들이 좀더 선명히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언어가 지식과 정보의 수용에 일차적으로 중요한 매개라는 점을 상기해 볼 때, 당시의 언어적 상황에 대한 고찰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인용

목차 / 지도

1. 머리말

2. 음성언어에 대한 관심 증대

1) 명청교체와 음성언어 인식의 계기

2) 음성언어 인식과 조선적인 것

3. 언문일치 인식의 대두

1) 언문불일치의 문제 제기

2) 물명류서의 편찬

4. 백화문학과 방언·향어·속어

1) 백화 문학의 확대

2) 방언·향어·속어의 사용

5.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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