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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조성산, 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 조선 지식인의 어문 인식 경향 - 2. 음성언어에 대한 관심 증대, 1) 명청교체와 음성언어 인식의 계기 본문

한문놀이터/논문

조성산, 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 조선 지식인의 어문 인식 경향 - 2. 음성언어에 대한 관심 증대, 1) 명청교체와 음성언어 인식의 계기

건방진방랑자 2019. 11. 30.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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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음성언어(音聲言語)에 대한 관심 증대

 

 

1) 명청교체(明淸交替)와 음성언어(音聲言語) 인식의 계기

 

조선후기 음성언어에 대한 문제는 우선 청구영언(靑丘永言)(1728)이나 해동가요(海東歌謠)(1755)의 편찬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조선 고유의 노래와 가요에 대한 관심과 깊은 관련성을 가졌다.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이 여항(閭巷) 촌부의 노래가 사대부의 문자보다 더욱 진실하다고 하고,金萬重(洪寅杓 옮김), 1987 西浦漫筆, 일지사, 388. “今我國詩文 捨其言而學他國之言 設令十分相似 只 是鸚鵡之人言 咿啞而相和者 雖曰鄙俚 若論眞贋 則固不可與學士大夫所謂詩賦者 同日而論 유득공(柳得恭, 1749~1807) 이 여항(閭巷)의 이어(俚語)가 사대부의 글보다 자신의 性情을 솔직히 표현할 수 있다고 한 것은柳得恭, 高芸堂筆記』 「東人之歌其或出於士大夫之口者 援引前事 剽襲古詩 反不如街童巷婦之純以俚語 道其性情之爲可喜”(김윤조, 2007 「『고운당필기연구」 『大東漢文學26, 399면에서 재인용) 한문이 모두 포섭해내지 못하는 음성언어, 즉 구어의 영역을 정확히 지적해낸 것이었다.이러한 김만중의 입장에 대해서는 강명관, 2008 「『서포만필의 민족어 문학론 비판」 『漢文學報18 참조할 수 있다. 한문으로 모두 담아낼 수 없는 조선의 고유한 정서들을 담아낼 수 있는 가요에 대한 관심은 음성언어가 이 시기 기능하고 있었던 지점들을 잘 보여준다金天澤, 靑丘永言(아세아문화사 영인본, 2) “我東人所作歌曲 專用方言 間雜文字 率以諺書 傳行於世 蓋方言之用 在其國俗 不得不然也 其歌曲雖不能與中國樂譜比 亦有可觀而可聽者 中國之所謂歌卽古 樂府 曁新聲被之u絃者俱是也 我國則發之藩音 協以文語 此雖與中國異而若其情境咸載宮商諧和 使人詠歎滛佚手舞足蹈則其歸一也.

 

이러한 가요의 존재는 문어로서의 한문체계와는 다른 위치에서 그것과 병존하고 있었던 조선 고유의 음성언어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었다.이러한 공존적 상황에 대해서는 임형택, 2007 소설에서 근대어문의 실현경로-동아시아 보편문어에서 민족어문으로 이행하기까지」 『大東文化硏究58, 13~14면 참조. 지역 음성언어의 존재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느 정도 통시대적이며 보편적인 것이었다.여기에 다음과 같은 洪萬宗(1643~1725)의 말을 참조할 수 있다. 洪萬宗, 洪萬宗全集(太學社 영인본, 92), “我東人 所作歌曲 專用方言 間雜文字 率以諺書 傳行於世 盖方言之用 在其國俗 不得不然也 자신의 고유 언어가 아닌 한문이나 라틴어와 같은 보편언어를 글쓰기의 주요 표현수단으로 삼을 경우 자연히 세세한 감정의 영역을 원만히 표현할 수 있는 지역 음성언어가 필요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지역 음성언어와 보편언어는 각기 별개의 영역에서 기능을 하고 있었다. 주로 지역 음성언어가 가요의 형태로 구현되면서 그것을 공유하는 공동체의 세세한 감정들을 담아냈다면 보편언어는 학문과 예술·외교의 영역을 맡았다.18, 19세기 언문소설이 널리 퍼지나 이것 역시 소설이라는 장르 속에서 이루어졌고, 언문은 학문의 영 역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이것은 언문과 한문 사이의 경계가 공고하였음을 보여준다. 또한 다음과 같은 趙在三(1808~1866)의 말도 언문과 한문의 구별을 잘 말해주는 자료이다. 趙在三(강민구 옮김), 2008 감국역 송남잡지3, 文房類 234盖各自國書以便日用矣 惟書同文者經史而已 조선에서도 언문(諺文)의 향유층이 주로 여성과 아동이었던 데 비해서 한문은 지식인 남성들에 의해서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이러한 양층언어체계(diglossia)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양층언어체계(diglossia)는 한 시대, 한 사회에 공존하는 두 언어가 동등한 지위를 갖지 않고 차별적인 지위로서 존재함을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박순함, 1997 兩層言語構造(Diglossia) 연구의 略史」 『사회 언어학51; Nida, Eugene A(송태효 옮김), 2002 언어간 의사소통의 사회언어학, 고려대 출판부, 47~48면 참조. 이러한 양자의 균형이 근대 한글 중심의 언문일치 운동이 있기 전까지 비교적 공고하게 유지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물론 18세기 들어 언문(諺文)의 사용이 확대되면서 여성과 아동의 공식적인 문자로서 그 위상이 상승하고 일반 서민층에서도 언문으로서 한문 체계를 아우르려는 모습조차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이에 대해서는 이종묵, 2007 조선시대 여성과 아동의 한시 향유와 이중언어체계(Diaglosia)」 『震檀學報104 참조. 이는 언문이라는 한문에 대비되는 의미에서의 음성언어가 확대되어 가는 구체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본 글은 언문에 주목하기보다는 한문체계 속에서 이루어진 음성언어의 문제를 주로 다루고자 한다. 그 이유는 한문이라는 가장 보수적인 영역에서조차 음성언어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들을 살펴보는 것이 이 시기 음성언어의 확대를 살피는 데 더욱 유효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조선후기 한문체계에서 음성언어 인식을 논하는 데에는 우선 명청교체(明淸交替)로부터 야기된 특수한 정치·사상적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음성에 대한 관심은 明淸交替 이후뿐만 아니라 조선전기 사회에서도 이루어졌다(음성에 대한 관심과 훈민정음 창제에 관련한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는 정다함, 2009 麗末鮮初의 동아시아 질서와 朝鮮에서의 漢語, 漢吏文, 訓民正音」 『韓國史學報36 참조할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조선후기라는 특정한 시기 에만 일어난 현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다양한 시기에 일어난 문화현상이었다. 이러한 음성중심 주의 경향은 근대뿐만 아니라 고대사회에서도 보이며, 이것은 제국으로부터 국가가 자립하는 과정과 깊이 관련 맺고 그러한 점에서 정치적인 동기를 갖는다고 보는 견해에 대해서는 가라타니 고진(이경훈 옮김), 앞의 논문 ; 가라타니 고진(송태욱 옮김), 2003 일본 정신의 기원, 이매진, 12~30면 참조. 명청교체 이후 중화의 정체성 논의는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그 가운데 오랑캐의 음성언어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중화의 음성언어를 찾기 위한 노력은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당대 지식인들에게 있어서 중화문화의 구현과 음성의 문제는 무척 긴밀한 연관성을 가졌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중화문화가 주변에 펼쳐 나간 것이 수천 년이었지만 주변 지역이 여전히 외이지풍(外夷之風)을 벗어버리지 못한 것은 그 성음(聲音)이 중화와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 바 있었다.朴趾源, 燕巖集15 別集 熱河日記 銅蘭涉筆原始秘書言 高麗之學 始於箕子 日本之學 始於徐福 安南之學 始於漢立郡縣而置刺史 被之以中國之文學 後至五代末 節度使吳昌文方盛 自中國流衍外夷 數千年 間 其文皆不免於夷狄之風 窘竭鄙陋 不足以續聖敎者 蓋其聲音不同 其奇妙幽玄之理 非筆舌之可傳 故不相合 此可謂切論 叶音之妙 故柳眉菴號能知音 而其諺解毛詩 不從叶音 詩多絶韻 이러한 인식을 통해서 볼 때, 그들에게 중화문화의 구현과 음성의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 관련성을 가졌던 것인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나라 고증학자들은 성음(聲音)의 문제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고염무(顧炎武, 1613~1682), 강영(江永, 1681~1762), 대진(戴震, 1723~1777), 단옥재(段玉裁, 1735~1815) 등으로 대표되는 청대 음운학자들은 한결같이 고음운(古音韻) 연구를 중시하였다.이들에 대해서는 濮之珍(김현철 외 옮김), 1997 중국언어학사, 신아사, 432~569면 참조. 그들이 고음학 연구에 집중하게 된 데에는 고염무에게서 보이듯이 명청교체로 야기된 중화의 정체성 규명 문제가 깊이 게재되어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청대 고증학이 경전의 텍스트 비평을 통해서 宋學을 비판하고 고대 유학의 본원을 밝히고자 했던 노력 들은 異端에 손상되지 않은 순수한 중화의 모습을 복원하고자 하는 목적과 깊은 연관을 갖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벤저민 앨먼(양휘웅 옮김), 2004 성리학에서 고증학으로, 예문서원, 89~103; Kai-wing Chow, 1994 The Rise of Confucian Ritualism in Late Imperial China, Stanford University Press, pp.69~70, pp.184~186 참조. 이와 관련해서 顧炎武古音 연구도 중화의 순수한 모습을 상정해 보려는 노력과 관련이 깊다. 다음과 같은 말을 이러한 측면을 잘 보여준다. 顧亭林詩文集(中華書局, 1959)2 音學五書序炎武潛心有年 旣得廣韻之書 乃始發寤於中而旁通其說 於是據唐人以正宋人之失 据古經以正沈氏唐人之失 而三代以上之音 部分秩如 至賾而不可亂이러한 고염무의 입장에 대해서는 코모리 요이치(정선태 옮김), 2003 일본어의 근대, 소명출판, 40~41면 참조.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 1730~1801)로 대표되는 일본의 국학자(國學者)들 또한 성음(聲音)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일본의 고유한 성음을 찾기 위하여 노력하였다.本居宣長과 관련해서는 이창종, 1996 本居宣長日本優越主義言語認識에 관한 硏究」 『일본학보 37 ; 조관자, 2001 가라고코로(漢意)를 배제한 공동선(共同善)의 안과 밖」 『日本思想3 ; 김태호, 2003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와 민족주의」 『日本思想5 참조. 그 과정에서 일본의 고유한 가요(歌謠) 연구에 집중하는 모습도 보였다.

 

조선의 음운학자들의 경우에는 일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조선의 한자음[東音]이 갖는 중화적 성격에 주목하였고 이에 대해서 상당한 자부심을 가졌다.이에 대해서는 조성산, 2009 조선후기 소론계의 東音 인식과 訓民正音 연구」 『韓國史學報36, 90~99면 참조. 그들의 주장을 보면 중국은 오랑캐의 침입을 받는 과정에서 삼대(三代)로부터 이어온 중화의 성음을 잃어버렸고, 따라서 현재 중국 음은 상당히 오염되어 버렸다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조선의 한자음은 기자(箕子) 이래의 고대 중화음을 상당 부분 보존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조선의 고유한 한자음이 결국 다른 어느 나라의 한 자음보다 더욱 중화적이며, 그러한 이유 때문에 조선이 가장 중화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조선이 상고적(上古的) 중화(中華)를 가장 온전히 보존하고 있다는 주장은 중국·일본과는 구별되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중화적 정체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러한 조선, 중국, 일본의 음성 문제에 대한 관심은 음성이 그들의 정체성 규정 문제와 얼마나 긴밀하게 관련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한자를 문자로서만이 아니라 음성을 통하여 사유하면서 정확한 중화의 음을 인지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강하게 생겨났다. 물론 여기에는 중국의 고음(古音)을 따르는가, 아니면 중국의 현재음(現在音)을 따르는가 하는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양자 모두 한자의 소리를 중시여기고 이를 배우고자 한 점은 공통되었다. 고음이든 현재음이든 중화의 한자음을 그대로 따르고자 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이러한 태도는 중화주의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중화의 음성까지 온전히 닮고자 했다는 점에서 중화의 한문체계를 존중하고 완결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의미와 함께 그동안 기호와 상징으로서 주로 인식되던 한자에 음성의 의미가 적극 부여되는 것은 모순되게도 한문체계의 균열을 야기하는 단서가 될 수도 있었다. 한자는 기본적으로 표의문 자로서 자신의 고유한 기능을 담당했지 표음언어의 체계는 아니었다.한자가 갖는 표의문자로서의 역할과 기능에 대해서는 이보경, 2003 근대어의 탄생, 12 연세대학교 출 판부, 12면 참조. 이와 함께 한자가 고대 중국의 통치질서 확립 과정에서 어떻게 기여하였는가에 대해 서는 다음 글을 참조할 수 있다. 마크 에드워드 루이스(최정섭 옮김), 2006 고대 중국의 글과 권위(Writing and Authority in Early China), 미토. 이러한 견해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에서 도움을 받았다. 하영삼, 2006 系列 漢子群字源을 통해 본 中國文字中心象徵體系중어중문학 38, 4. 그런데 여기에 음성언어 의 의미가 강하게 부여되는 것은 결국 한문체계가 고유하게 가지고 있었던 원래의 기능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음성언어는 본질적으로 통일적이고 보편적인 것보다는 특수하고 지역적인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가라타니 고진(송태욱 옮김), 2003 앞의 책, 18 중세시대에서 음성언어는 지역의 편차로 인해 통일되 기가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다. 음을 같게 하는 것은 성인(聖人)이 천자(天子)의 지위에 있어도 불가능하다는 당대인들의 인식은 이를 잘 보여준다.柳得恭, 古芸堂筆記5, 東音勝華音(아세아문화사 영인본, 203) “劉元卿賢奕篇曰 書之同文 有天下者 力能同之 同音 雖聖人在天子之位 勢亦有所不能也 음성언어가 시대적 변화와 지역적 차이 없이 동일한 모습으로 존재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와 같이 현실적으로 균일화할 수 없는 음성을 가지고 한 문체계를 사유하는 과정에서 기존 한문체계의 변화하지 않는 절대적 이미지가 사라져가고 한문 체계를 상대화·객관화하여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될 수 있었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코모리 요이치(정선태 옮김), 앞의 책, 27면 참조.

 

사실 중국은 상호 소통이 어려운 방언의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최영애, 1998 중국어란 무엇인가, 통나무, 68~69. ()나라 때 양웅(揚雄, B.C.53~A.D.18)에 의해서 방언(方言)이라는 책이 나올 정도로 중국은 당시부터 지역 방언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었다. 따라서 집권층이 하나의 국가로서 통치하기 위해서는 문자언어가 중요한 기능을 할 수밖에 있었다. 문자는 그 무엇보다 효율적인 통치의 도구가 될 수 있었다.이보경, 앞의 책, 12. 이 당시 이러한 중국의 방언 현황에 대해서 많은 언급들이 등장하였던 것은 음성언어 인식과 관련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은 조선의 다른 풍속은 중국과 비슷하여 소중화(小中華)라고 불리지만 유독 조선의 언어는 이풍(夷風)을 면하지 못하였다고 하자 중국인 손유의(孫有義)가 위로하듯 중국 또 한 동서남북의 말이 같지 않다는 사실을 전하였고,湛軒書外集 7 燕記 孫蓉洲 余曰 弊邦慕尙中國 衣冠文物 彷彿華制 自古中國或見稱以小中華 惟言語 尙不免夷風爲可愧 蓉洲曰 久仰貴邦人物俊雅 風俗醇厚 不減中華 至于土音 又何害焉 且以中國言之 東西南北 語亦不類 而朝廷取士用人 亦幷不以此而別 이희경(李喜經, 1745~1805) 또한 중국학자 이정원(李鼎元)의 말을 빌어 조선뿐만 아니라 광동(廣東), 운남(雲南) 등의 언어도 서로 같지 않음을 언급하기도 하였다.李喜經, 雪岫外史1, (아세아문화사 영인본, 46) “余嘗与李墨莊談話難其言語之相殊 李曰非獨貴邦言 語相殊 今廣東雲南省言語亦殊 不可解云 이해응(李海應, 1775~1825)은 자신의 연행록 계산기정(山紀程)에서 중국 방언은 각 지방마다 같지 않고 중국 음도 집마다 다르고 사람마다 같지 않다李海應, 薊山紀程5 言語中國方言 各自不同 華音亦多訛謬 如家字去字 數音並行 家異而人不同 此類不可勝記 欲學華語者 不可將何適從矣고 하였다. 이러한 그들의 언급을 볼 때, 그들이 음성의 문제를 통해서 중국어의 비균질성을 사유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인용

목차 / 지도

1. 머리말

2. 음성언어에 대한 관심 증대

1) 명청교체와 음성언어 인식의 계기

2) 음성언어 인식과 조선적인 것

3. 언문일치 인식의 대두

1) 언문불일치의 문제 제기

2) 물명류서의 편찬

4. 백화문학과 방언·향어·속어

1) 백화 문학의 확대

2) 방언·향어·속어의 사용

5.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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