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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조성산, 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 조선 지식인의 어문 인식 경향 - 3. 언문일치 인식의 대두, 1) 언문불일치의 문제 제기 본문

한문놀이터/논문

조성산, 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 조선 지식인의 어문 인식 경향 - 3. 언문일치 인식의 대두, 1) 언문불일치의 문제 제기

건방진방랑자 2019. 11. 30.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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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언문일치(言文一致) 인식의 대두

 

 

1) 언문불일치(言文不一致)의 문제 제기

 

18·19세기 동아시아의 활발한 지식소통과 함께 제기된 언문일치의 문제는 음성언어에 대한 이 시기의 고민과 깊이 연계되어 있었다. 18세기 후반 조선은 청나라로부터 많은 양의 서적들을 들여왔고, 이것은 지식인 사회를 자극했다. 이러한 지적 자극 속에서 다양한 문예사조와 사유들이 생성되었다. 조선의 북학파(北學派)는 이러한 과정 속에서 형성되었다. 그들 이외에도 많은 지식인들은 중국 서적을 탐독하고 중국의 명사들과 교유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지적 네트워크가 국내를 넘어 중국에까지 확산되면서 그들 사이에는 같은 문자를 공유했다는 동문(同文) 의식과 한 시대를 함께 산다는 병세(並世) 의식이 형성되는 상황이었다.이에 대해서는 김영진, 2003, 朝鮮後期 明淸小品 수용과 小品文의 전개양상, 고려대 박사학위논문, 75~85; 정민, 2007 18세기 조선지식인의 발견, 휴머니스트, 32-33면 참조.

 

하지만 그들은 중국인들과 만나는 과정에서 소통의 비효율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문자로서 이루어지는 필담(筆談)’은 그들에게 동문(同文) 의식과 병세(並世) 의식이라는 보편주의적 감성을 줄 수 있었지만, 그와 함께 중국과 조선 사이에 엄연히 존재하는 차이에 대해서도 느끼게 하는 이중적인 계기를 제공했다. 그들은 중국인과 만나는 과정에서 조선의 언문불일치 문제에 대해서 인식하였다.류준필, 2003 구어의 재현과 언문일치 문화과학33, 164. ()과 문()이 불일치하기에 세세한 감성을 곧바로 표현하는 데 어려움이 많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이에 대해서는 박지원의 다음과 같은 말을 참조할 수 있다. 朴趾源, 燕巖集14 別集 熱河日記』 「鵠汀筆談及入皇京 與人筆談 無不犀利 又見所作諸文篇 則皆遜於筆語 然後始知我東作者之異於中國也 中國直以文字爲言 故經史子集皆其口中成語 非其記性別於人也 爲之强作詩文則已失故情 言與文判爲二物故也 故我東作文者 以齟齬易訛之古字 更譯一重 難解之方言 其文旨䵝昧 辭語糊塗 職由是歟 동문 의식과 병세 의식이라는 보편주의 관념이 발달하면 할수록 차이에 대한 자각과 이로 인해 발생하는 불편함도 함께 커졌다. 이는 중국인과 음성언어로서 대면하며 자각하게 된 것이었다. 즉 음성언어에 대한 깊은 자각 없이는 언문일치에 대한 의식도 발생하기 힘든 것이었다.

 

중국 사람들은 음성언어로 말하는 것이 곧 그대로 문장이 되는데 반해서 조선인들은 음성언어와 문자언어가 불일치하므로 불편한 번역의 과정을 거쳐야 하며, 이럴 때 선진 지식의 수용은 그만큼 어려운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하기에 그들은 이점을 개선하고자 하였다. 박제가(朴齊家)는 조선의 언문불일치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제기하였다.

 

 

한어(漢語)는 문자의 근본이다. ()을 곧장 천()이라 부르는 것과 같이, 다시 한 번 거쳐서 언()으로 풀이하는 간격이 없다. 그러므로 사물을 이름하는 데 있어서 더욱 분별하기가 쉽다. 비록 글을 모르는 부녀자나 어린아이도 보통 쓰는 말이 모두 문구(文句)가 되며, (((()도 입에서 말하는 대로 나 온다. 생각건대 중국은 말로 인해서 글자가 나왔고 글자를 찾아서 말을 풀이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외국에서 비록 문학을 숭상하고 독서를 좋아하는 것이 중국과 가깝다고 하더라도 종국에는 간격이 없지 아니한 것은, 언어라는 커다란 꺼풀을 벗어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중국과 매우 가깝고 성음이 대략 같으니 온 나라 사람이 본국 말을 버린다고 해도 불가할 것이 없다. 대저 그러한 연후에야 이()라는 한 글자를 면할 수 있을 것이며 온 동쪽 수천 리 땅이 스스로 하나의 주(((()나라의 풍기(風氣)를 열 것이다. 어찌 크게 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朴齊家, 北學議內篇 漢語

 

 

박제가의 이러한 의식은 그가 중국 문물에 벽()이 있다고 할 정도로 심취했던 것에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洪吉周, 縹礱乙懺14 睡餘演筆 下楚亭癖於北學 하지만 북학의(北學議)에 흐르는 중국의 문물을 적극 받아들여 조선의 현실을 개선해야 한다는 논조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박제가의 이러한 말은 중화주의에 근원한 중세 보편주의적 시각에서 보면 커다란 문제를 야기하는 것은 아니었다. 조선의 풍속을 주(((()나라 수준의 중화 문화로 변모시키고자 하는 것은 중화를 내면화한 조선의 지식인들 대부분이 원칙상 공유하는 목표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박제가의 언급은 조선의 언문불일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방편 속에서 나온 말로 볼 수 있다.언문불일치에 대한 자각은 柳馨遠(1622~1673)에게서도 발견된다. 하지만 시대사조로서 언문불일치에 대한 자각이 폭넓게 자각되는 것은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기라고 할 수 있다. 유형원세종鄕語 사용을 금지하고 漢語 중심의 언문일치를 이룩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고 하면서 華語를 배워 익힐 것을 강조하였다. 磻溪隨錄25 續篇上 言語本國言語文字 旣爲二途 東方諺文 亦有音無義 政事經學以及事物名數 多礙滯難通 至於事大之際 國家機務 徒憑舌人 是豈小事哉 夫人聲之輕重遲疾 風氣 所拘 固有不同者 東方之音 輕淸而淺促 然中國之地 四方之人 亦奚必均齊哉 唯其同其音 而一其語 語之而 無不通 是則天下之人 無有所異也 昔我莊憲大王一新百度 有意於是 旣設承文院 令文官始出身者 必習漢語 吏文 又撰四聲通攷 以卞其音 又令凡百名物 皆稱以漢語 至今尙有傳習者 然日用言語 仍其鄕談 故衆楚一 齊之勢 不能漸變 而終至還廢 今則文官之通漢語者 絶無矣 如欲先王之志 而變夷爲夏 卽民間言語 縱難 一變 凡諸文字 皆從華音 士子所習經書諺解 一以洪武譯音 使之講誦 如此則言語雖異 字音則同也 如未能 然 則京外學校之士 必使本經外 依上式講習 漢語稍待能通 然後陞次 而凡在五品以下官 皆令歲一試講 以升降其資 可也 박지원(朴趾源)과 이희경(李喜經) 또한 박제가와 비슷한 맥락에서 조선의 언문불일치 문제를 제기하였다.

 

 

중국은 글자로 인하여 말을 익히게 되고 우리나라는 말로 인하여 글자를 익히게 된다. 중화와 이적의 구별은 여기에 있다. 그 이유는 곧 말로 인하여 글자를 익히게 되면 말은 말대로 글자는 글 자대로가 되어 가령 天字를 읽을 때 하늘 천’(漢捺天)이라고 하면 이 글자 이외에 다시 일종의 난 해한 언()이 있게 되는 것과 같다. 어린아이가 이미 하늘이 무슨 말인지 모르는데, 또한 어찌 천자(天字)를 알 수 있을 것인가!

中國因字入語 我東因語入字 故華彛之別在此 何則 因語入字則語自語書自書 如讀天字曰漢捺天 是字外更有一重難解之諺 說郛 有鷄林類事 天曰漢捺也 小兒旣不識漢捺爲何語 則又安能知天乎 -朴趾源, 燕巖集40 別集 熱河日記』 「避暑錄

 

 

박지원 또한 박제가처럼 조선의 언과 문이 불일치함으로써 나타나는 불편함에 대해서 인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언문불일치의 불편함을 인지한 박지원은 이어 실상 중국에서는 부인이고 어린 아이 할 것 없이 문자로 말을 삼고 있으므로 비록 눈으로는 丁字도 모르지만 입으로는 봉황 새를 읊조리니 경(((()이 그들에게는 보통 말이다朴趾源, 燕巖集40 別集 熱河日記』 「避暑錄其實中國婦人孺子 皆以文字爲語 故雖目不識丁 而口能吐鳳 經史子集 乃其牙頰間恒談也라고 하면서 중국의 언문일치를 부러워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의 계집종 사례를 들어 중국말이란 그리 어렵지 않다고 하였다.

 

 

내 집에는 일찍이 아주 어리석은 계집종이 있었는데, 마땅히 떡을 얻어야 할 상황인데 다른 음식을 얻으면 이를 기뻐하고 감사하며 말하기를, “파촉(巴蜀) 또한 관중(關中)이지요라고 했다. 이는 본래 항간에 돌아다니는 속담으로 계집종은 본래 파촉과 관중이 어딘지 몰랐고, 단지 이것이 피차(彼此)의 차이가 없는 경우에 해당한다는 것만을 인지했다. 이를 통하여 비로소 중국말이 그렇게 어렵지 않고 반드시 정현(鄭玄)의 집 여종들을 천고(千古)에 없다고 쳐줄 것도 없음을 알 수 있었다.

余家小婢甞至迷當得餠而獲他餌 喜謝曰 巴蜀亦關中 此本紙牌行語 婢本不識巴蜀關中 而但認是爲彼此無異則當矣 始知華語非難 而未必鄭婢擅雅千古也 -朴趾源, 燕巖集40 別集 熱河日記』 「避暑錄

 

 

위에서 정현의 집 여종들을 천고(千古)에 없다고 쳐줄 것도 없을 것이라는 말은 정현의 집 여종들 이 모두 시를 이야기할 수 있었다는 것을 세상에서 미담으로 여겼다는 고사를 의식한 말이다. 박지원은 자신의 계집종이 파촉과 관중이 어딘지 알지 못하지만 이 말을 어떤 상황에서 사용할지는 정확히 아는 것을 보고서 중국말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님을 알았다고 하였다. 이는 천자(天字)하늘이라는 설명을 붙일 필요 없이 천()을 그대로 천()으로 인식하듯이 파촉도 관중이라는 말 또한 어떠한 부가적인 설명 없이 곧장 이해하는 것을 두고 한 말이다. 그럴 때 중국어는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박지원의 이러한 논리를 따라가 보면 박지원 또한 박제가와 꼭 같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조선의 언문불일치 문제를 결국 중국어를 통하여 해결하려는 입장을 가졌 던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이것은 박지원이 박제가의 北學議에 써준 서문에서도 그러한 면을 엿볼 수 있다. 燕巖集7 別集 鍾北小選 北學議序試一開卷 與余日錄 無所齟齬 如出一手 此固所以樂而示余 而余之所欣然讀之三日而不厭者也 噫 此豈徒吾二人者得之於目擊而後然哉 固嘗硏究於雨屋雪簷之下 抵掌於酒爛燈灺之際 而乃一驗之於目爾 要之不可以語人 人固不信矣 不信則固將怒我 怒之性 由偏氣 不信之端 在罪山川박지원은 북학의가 자신들의 오랜 연구와 토론의 결과로 나온 것임을 밝히고 있다. 같은 북학파의 일원이었던 이희경(李喜經) 또한 조선의 언문불일치를 커다란 불편으로 여겼고,李喜經, 雪岫外史1, 41余初入中原 雖婦人女子 出口之言 皆是文也 豈有言與文之異致哉 且其 言也 五音分明 轉起落之際 自有條理 又有兩音雙聲 非但用之於言也 施之u絃鐘鼓 無不吻然諧和 是其 天地正音 自有其音也 我國則不然 言與文各殊 則不可不文有其義 而文之音 又與中國不同 雖有四聲之不混 而一韻之內 字音互異 又無雙聲兩音之文 果未知何世何人創得文音 而有此乖譌也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중국의 음을 배워야 함을 역설하였다.李喜經, 雪岫外史1, 42今若欲學中國丕變風俗 莫如先解華音而餘皆自化矣 그도 박제 가·박지원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밖에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경우에도 김창업(金昌業, 1658~1721)의 말을 빌어서 중국말은 비록 일상적인 대화나 시골사람의 말이라고 하더라도 시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하면서 중국의 언문일치를 부러워하였다.李裕元, 林下筆記35 薜荔新志金老稼齋 燕行 見一店曰 何在窮僻處乎 其主女笑曰 花香蝶自來 華 語 雖常談俚語 不出於文 故無識村女之問( 皆如是 至於官話 尤是文字之解 各省中 福建話不好云 그는 현토(懸吐)하는 것이 한문의 습득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李裕元, 林下筆記34 華東玉糝編; 讀書兼方言我國讀書之法 音義外 又添方言一事 每句讀下 輒以方言收聲 此所謂吐也 是以經傳皆有諺解 其功倍於中國 此所以學業成就者難矣 이는 한문을 중국인처럼 학습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이에 대해서는 柳得恭도 지적하였다. 古芸堂筆記5, 鄕語半華語半, 178讀書亦然 章句之外 別作剩音 謂之吐 兢兢遵守 不敢差誤 似源於薛弘儒候 以方言解經也 在新羅以上 初學經史時 則或可也 今不 必然 이와 비슷한 의식은 이항로(李恒老, 1792~1868)에게서도 보였다. 그는 토음(土音)은 우리의 음이며 언어(言語)는 중국의 음인데 토음을 통하여 언어를 배우고 언어를 통하여 문장(文章)을 배우니 이것이 우리의 문장 습득이 어려운 이유라고 하였다.李恒老, 華西集附錄 5 洪大心錄我國人語 只是土音 不成言語” ; 李恒老, 華西集附錄 6 柳基一錄土音是我國音 言語是中國言 自土音學言語 自言語學文章 故我國人文章甚難 조선의 언문불일치 문제를 해결하고 중국으로부터 효율적으로 선진문물을 수용하기 위한 방편으로 제기된 박제가의 전면적인 한어(漢語) 사용 주장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과 함께 중화를 지향하던 지식인들에게도 다음과 같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었다. 그것은 중국의 현재 음이 과연 하((() 시대의 이상적인 정음(正音)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정음이 아니라면 그것이 구현해 내는 중화문물은 허위가 될 수도 있었다. 박제가 또한 이 문제를 의식해서 중국과 같지 않으면 음이 옛 것이라도 소용이 없다고 했으며, “옛 음의 변화는 음운학자에게 맡기면 된다고 하여 이러한 예민한 문제들을 피해가려고 했다.朴齊家, 北學議內篇 漢語不與中國同 則音雖古而無用 但令文與話 爲一足矣 若夫古音之變 付之一 韻學者之考證 可也 그에게는 일단 이상적인 중화를 구현한다는 명분보다는 부국(富國)이라는 현실적 목적이 좀더 강했다고 할 수 있다.

 

박제가·박지원 등의 언문일치 주장과의 연장선상에서, 한문을 통하여 세계의 보편적인 언어 체계를 구축할 수 있다는 의견도 활발히 제시되었다. 최한기(崔漢綺, 1803~1877)의 경우에는 한문 중심의 세계 문자체계를 구상하였다崔漢綺, 神氣通1 體通 四海文字變通勢將使寡效衆 使散效聚 則西域國同行華夏文字 而音則雖 異 字義宇形同則可以通行 且英華堅夏兩書院專事翻譯 則西國之效華夏易 使華夏變西文難 是非可以彼善乎 此此善乎彼論之也 惟取其同文通行之義也 西方國或有斯意者耶 雖非一年二年之所成 將有俟於後世. 이러한 의식의 연장선상에서 박규수(朴珪壽, 1807~1876)는 서양 사람들이 한문을 습득하고 공부하는 것을 높이 평가하기도 하였다. 그는 서양인들이 말라카와 싱가포르에 각각 영화서원(英華書院)과 견하서원(堅夏書院)을 세우고 논어(論語)효경(孝經)등 유교경전을 수입·번역하고 있는 사실을 들면서 이 세계 어느 곳의 인류이든지 같은 문자를 쓴다면 오랑캐도 중화로 변할 것이라고 하였다.김명호, 2008 환재 박규수 연구, 창비, 391~392. 그들은 한문체계의 확산을 전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18세기 후반 중국어 중심의 언문일치 인식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여성과 아동을 중심으로 언문(諺文)을 문자로서 인식하고자 하는 경향이 조선후기 들어 확산되어 갔지만, 여전히 지식인들은 한문을 중심으로 하는 문자체계를 구상하고 이를 통하여 언문일치의 필요성을 느끼는 경우가 많았다. 중요한 문제는 한문(漢文)이냐, 언문(諺文)이냐가 아니라 비로소 언문일치의 필요성이 적극적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한문이 단순히 문자로서만 사유될 때에는 언문일치의 필요성과 언문불일치의 문제점을 심각하게 인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한문체계에 음성의 문제가 매개되면서 지식인들은 조선의 언문불일치를 지식소통의 커다란 장애로서 느끼게 된 것이다. 그들은 중국에서 중국인들의 음성언어가 바로 문자화되는 과정을 목도하면서 조선의 언문불일치 현실을 적극적으로 자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이러한 한어(漢語)를 통한 언문일치 주장은 앞서 언급했듯이 중세 중화주의적 시각에서 볼 때에는 이해되는 바가 있었다. 중화의 음성을 온전히 구현해 내는 것은 그들이 구상한 중화주의 체계를 이룩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사항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한어(漢語)를 평상시 사용하면서 중국의 원래 음을 따르고자 한 것은 그들이 지향하는 이러한 구상과 밀접한 관련성을 갖는 문제였다. 이 문제는 원칙적으로 많은 지식인이 동의하는 문제였으며, 북학파 지식인들의 경우 좀더 적극적으로 이러한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박제가의 주장이 현실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어(漢語)를 통한 언문일치의 결과가 어떠한 방향으로 나타났는지는 현재로서 짐작할 수 없다. 하지만 설사 이것이 현실화되었다고 하더라도 중국과는 같이 되지 않았을 것임은 자명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음성언어는 본질적으로 균질화·동일화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는 각 지역의 다양한 방언을 가지고 있었던 당대 중국의 언어환경을 보 아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한 점에서 볼 때 아마도 중국과는 구별되는 조선식의 한자음과 언어 구사가 발생하였을 것이다. 조선전기 동국정운(東國正韻)을 통하여 중국과는 다른 조선식 한자음의 표기 체계가 강구되는 것은 이것의 증거가 될 수 있다. 동국정운(東國正韻)이 중국음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조선식의 한자음 체계를 구하고자 한 것은 음성이 갖는 이러한 고유한 특성 때문이었다.이에 대해서는 다음 東國正韻의 서문을 참조할 수 있다. 東國正韻(大提閣 영인본, 3) “夫音非 有異同 人有異同 人非有異同 方有異同 盖以地勢別而風氣殊 風氣殊而呼吸異 東南之齒脣 西北之頰喉是已 遂使文軌雖通 聲音不同焉 矧吾東方表裏山河 自爲一區 風氣已殊於中國 呼吸豈與華音相合歟 然則語音之 所以與中國異者 理之然也 至於文字之音 則宜若與華音相合矣 然其呼吸旋轉之間 輕重翕闢之機 亦必有自 牽於語音者 此其字音之所以亦隨而變也 이처럼 박제가가 음이 중국과 같지 않다면 소용이 없다고 했지만, 현실적으로 온전히 중국과 같이 되기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오히려 당대에 조선의 한자음을 정음(正音)으로 규정하고 새로운 기준으로 설정하고자 하는 움직임까지 이 시기 있었던 것을 보면이 문제에 대해서는 조성산, 앞의 논문, 90~99. 언문일치는 변형된 보편성의 영역으로 나아갈 소지가 다분히 있었다. 중국어를 그대로 우리말로 삼고자 할 때, 불가피하게 중국 어느 시대의 언어와 음성을 이상시하여 구현할 것인가 하는 논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종국에는 중국을 상대화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는 일이었고 어떠한 방식으로 결론이 나든 조선만의 언어 체계라는 변형된 보편성, 즉 새로운 특수성의 영역으로 옮겨갈 소지가 있었다. 여기에 언문일치 문제가 보편성의 강조인 듯 보이지만 다시 특수성의 문제로 귀속되는 이유가 있다. 이후 살펴볼 물명(物名) 유서(類書) 편찬은 이 시기 언문일치 문제의식의 부분적인 결과물이다. 물명 유서의 편찬과 그 결과물들은 음성언어의 문제가 어떻게 특수성의 영역으로 귀결되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인용

목차 / 지도

1. 머리말

2. 음성언어에 대한 관심 증대

1) 명청교체와 음성언어 인식의 계기

2) 음성언어 인식과 조선적인 것

3. 언문일치 인식의 대두

1) 언문불일치의 문제 제기

2) 물명류서의 편찬

4. 백화문학과 방언·향어·속어

1) 백화 문학의 확대

2) 방언·향어·속어의 사용

5.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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