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음성언어(音聲言語) 인식과 ‘조선적인 것’
이 시기 한문체계 속에서 음성의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 시도들은 다양한 영역으로 확대되었 다. 한문체계에서 음성적 측면에 대한 당대인들에 대한 관심은 광범위하게 포착된다.【한시에서의 민요취향의 대두도 이러한 문제와 깊은 관련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동환, 1978 「조선후기 한시에 있어서 민요취향의 대두」 『한국한문학연구』 3 참조.】 예컨대, 이희경(李喜經)은 『시경(詩經)』 삼 백 편은 모두 음(音)을 가져 악(樂)이 될 수 있었다고 하면서 후세 시에서는 악(樂)이 탈각되면서 시도(詩道)가 없어졌다고 탄식하였다.【李喜經, 『雪岫外史』 권1, 43면 “詩之爲道 皆爲樂章 故三百篇皆可以被之音而爲樂 自漢以下 所賦之詩 或徒爲詩 未必皆協於樂 樂府則別以爲樂而作 但李太白七言古詩 皆爲樂而作 故名之曰樂府 杜詩則未必爲樂 然 則後世之詩 樂判作二道 而詩道亡矣”】 『시경(詩經)』을 단순히 의미만을 추론하는 텍스트가 아닌 음성의 측면에서 바라본 것이다. 유득공(柳得恭)은 숙부인 유금(柳琴, 1741~178 )의 묘지명에, 유금이 중국에 다녀온 후 가(歌)와 행(行)의 성운(聲韻)에 사성(四聲)을 번갈아 쓰는 묘미를 알았다고 하면서 지금 사람들이 이를 차츰 알아듣고서는 다시는 이전처럼 비루하게 되지 않았다고 하였다.【柳得恭, 『泠齋集』 권6 「叔父幾何先生墓誌銘」 “始東詩人專攻近軆 不甚爲七言歌行 或爲之而聲韻不諧 訖未自覺也 公游燕中 與綿州李調元深相交而歸 … 調元乾隆進士 翰林轉吏部員外郞 以文章鳴世 尋棄官歸成都 聲伎自娛 天下高之 友人李德懋及同志數輩踵入燕 因吏部之弟中書舍人鼎元 以游乎吏部之友 當世鴻儒紀昀祝德麟翁方綱潘庭筠鐵保諸人之間 與之揚扢風雅 始得歌行韻四聲迭用之妙 今之人稍稍聞而爲之”】 또한 그는 후세에 길 이 남고 싶다면 시를 지을 것이 아니라 노래를 짓는 것이 나으며, 중국어를 조금 이해하게 되면 칠언절구를 짓는 데 크게 유익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노걸대(老乞大)』·『박통사(朴通事)』 등 중국어 학습서를 공부할 것과 중국에 다녀올 것을 권하였다.【柳得恭, 『高芸堂筆記』 「詩以六經三史爲根本」 “君欲爲可傳之道 勿作詩而作歌可也 我東人元不易爲詩 略 解華語 有極妙處 大有益於七絶 然則傳奇又不可不看 老乞大朴通事 又不可不讀 中國又不可不一二番往來” (김윤조, 앞의 논문(2007), 396~397면에서 재인용)】 이희경의 경우에도 중국 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국 음을 모르기 때문에 범기(犯忌)하는 것이 많아도 스스로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李喜經, 『雪岫外史』 권1, 44면 “我國則不識華音 故多皆犯忌 而不自知也”】 이러한 그들의 언급은 음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박제가(朴齊家, 1750~1805)의 다음과 같은 말은 음성언어에 대한 자각과 관심이 어떠한 모습으로 당시 지식인들에게 나타났으며,【박제가의 소리와 글자를 일치시키려는 주장에 대해서는 박수밀, 2007 『18세기 지식인의 생각과 글쓰기 전략』, 태학사, 255~263면의 연구에서 논의된 바 있다. 본 글은 박제가가 글자보다는 소리의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강조하고자 했다는 점을 더욱 부각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시정여항(市井閭巷)의 이언(俚言)에 대한 발견이 어떠한 방식으로 가능하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정(情)은 성(聲)이 아니면 도달하지 못한다. 성(聲)은 자(字)가 아니면 행해지지 못한다. 세 가지 것이 하나로 합쳐져서 시(詩)가 된다. 비록 그렇지만 자(字)는 각각 그 뜻을 가지고 있지만 성(聲)은 아직 반드시 언(言)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이에 시의 도는 오직 자(字)에 속해 있어 성(聲)은 나날이 이에서 벗어난다. 대저 자(字)와 성(聲)이 분리됨은 마치 물고기가 물에서 분리됨과 같고 자식이 어미에게서 벗어남과 같다. 나는 그 생취(生趣)가 나날이 마르고 천지의 이치가 사라질까 두렵다. 대저 고시(古詩) 삼백 편은 또한 오히려 글자가 있으되 그 올바른 성(聲)을 얻을 수는 없다.
情非聲不達 聲非字不行 三者合於一而爲詩 雖然字各有其義 而聲未必成言 於是乎詩之道 專屬之字 而聲日離矣 夫字之離聲 猶魚之離水 而子之離母也 吾恐其生趣日枯 而天地之理息矣 夫古詩三百篇 亦猶有其字 而不得其聲者矣
삼가 생각건대, 옛날에는 언(言)이 나오고서 자(字)가 이루어졌던 까닭에 그 조어허사(助語虛辭)는 모두 곡진(曲盡)한 맛이 있었다. 지금 그 예악형정(禮樂刑政)의 기구와 조수초목(鳥獸草木)의 이름은 모두 이미 파괴되고 흩어져 다시 고증할 수 없다. 비록 가령 지금 사람으로 하여금 삼대(三代)의 선비와 갑자기 서로 만나게 한다면 그 국속(國俗)의 제도와 방음(方音)의 차이는 만이(蠻夷)가 중국(中國)에 들어간 것 정도뿐만이 아닐 것이다.
竊意古者言出而字成 故其助語虛詞 皆能委曲有味 今其禮樂刑政之器 鳥獸草木之名 皆已破壞渙散 不可復攷 雖使今之人 與三代之士卒然而相遇 則其國俗之別 方音之殊 不啻若蠻夷之入於中國矣
그런데도 오히려 또한 절절하게 그 말을 외우고 감탄하여, “이는 진정한 관저(關雎)이요 진정한 아송(雅頌)이다.”라고 말한다. 나는 이는 단지 금인(今人)의 자음(字音)일 뿐 옛날의 원성(原聲)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저 지금의 이른바 ‘무격(巫覡)의 가사(歌詞)’나 ‘창우(倡優)의 웃음’과 ‘시정여항(市井閭巷)의 리언(俚言)’은 또한 사람들을 감발(感發)·징창(懲創)시키기에 족하다. 아마도 오히려 고시(古詩)의 유의(遺意)가 있어서인가! 그러나 붓을 들어 번역하면 언(言)은 같지 않음이 없겠지만 삭연(索然)히 그 정(情)을 얻지 못하는 것은 성(聲)과 자(字)가 길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而猶且切切然誦其言而咨嗟而詠歎之曰 此眞關雎也眞雅頌也 吾以爲此特今人之字音 非古之原聲也 夫今之所謂巫覡之歌詞倡優之笑罵 與夫市井閭巷之邇言 亦足以感發焉懲創焉已矣 庶幾猶有古詩之遺意歟 然而執筆而譯之 言無不似也 索然而不得其情者 聲與字殊途也 -朴齊家, 『貞蕤閣文集』 권1 「柳惠風詩集序」
박제가는 정(情)은 음성이 아니면 도달하지 못하며 음성은 글자가 아니면 행해지지 못한다고 하였다. 음성과 글자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인 것이다. 그는 고시(古詩) 삼백 편은 글자가 있지만 올바른 소리를 얻을 수 없다고 하였다. 『시경(詩經)』은 그것을 만들어내었던 사람들의 음성언어로 읽을 때 그것의 깊은 맛을 음미할 수 있는데 지금은 그것이 불가능함을 지적한 것이다. 단순히 그 것의 내용과 의미만을 번역하는 데에만 그치면 『시경(詩經)』의 의미, 즉 문자를 넘어서 있는 음성으로 구현될 때에만 느낄 수 있는 깊은 의미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자각은 시정여항(市井閭巷)의 이언(俚言)과 같은 조선의 음성언어가 갖는 가치를 새롭게 사유할 수 있는 단서를 마련해 주었다. 박제가는 무당의 가사나 광대의 웃음, 시정여항의 이언은 또한 사람들을 감발(感發)시키기에 족하니, 이것은 여기에 아마도 ‘고시(古詩)의 유의(遺意)’가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하였다. 고시의 유의란 옛날에 시경 이 사람들을 감발시켰던 그것을 의미한다.
박제가는 이어 무당들의 가사나 배우들의 웃음, 시정여항의 속된 말을 문자로서 번역해 버리면 그 정(情)을 얻지 못하니 이는 음성과 글자가 길을 달리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한문을 음성으로서 사유하고자 하는 노력이 조선의 고유한 음성언어를 새롭게 인식하는 문제와도 연결될 수 있었던 것이다. 중국 경전이 당대 중국의 음성언어로서 구현되어야 하듯이 우리의 노래는 우리의 음성언어로서 구현되어야 했다.【이러한 문제의식은 김만중의 경우와도 연결되어 있다. 김만중은 天竺의 예를 들어 천축의 讚佛詞는 천 축의 음으로 읽혀져야 그 아름다움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金萬重(홍인표 옮김), 앞의 책, 388면). 이를 통해 볼 때 자국 음성언어의 가치 발견은 중국어를 포함해서 외부의 언어를 음성적 측면에서 사유하지 못한다면 나오기 어려운 것이었다.】 박제가는 음성은 글자 밖에 있고 그러한 의미에서 ‘상달(上達)’이라고 규정하였다.【朴齊家, 『貞蕤閣文集』 권1 柳惠風詩集序 “文出乎字而聲成於字外 故曰字者下學 而聲者上達”】 글자를 넘어서 있는 음성의 복합적 의미를 표현한 말이다. 그는 음성과 글자의 관련성에 대하여 깊이 사유하면서 사물의 진정한 의미를 구현하는 데 음성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말하고자 하였다. 박제가는 유득공이 자(字)와 성(聲)을 두루 겸비했다고 칭찬하였다.【朴齊家, 『貞蕤閣文集』 권1 「柳惠風詩集序」 “吾友柳惠風之爲詩也 可謂兼至而備美者矣 乃能因字於古而通 聲於今 其形於中而動於外者 若樹出花而鳥自鳴也 不自知其所以然 則聲與字之殊 又不足論矣”】 박제가와 유득공 은 중국어뿐만 아니라 만주어, 몽고어, 일본어 등에 능통했고 방언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김윤조, 2007 「『高芸堂筆記』 연구」 『大東漢文學』 27, 201~205면 참조.】 이러한 그들의 학문 관심은 그들이 가졌던 어문 인식의 일단을 잘 보여준다.
이처럼 한문체계의 음성언어에 대한 인식은 조선의 고유한 음성언어에 대한 자각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앞서 김만중, 유득공뿐만 아니라 성해응(成海應, 1760~1839)도 정철(鄭澈, 1536~1593)의 「사미인곡(思美人曲)」을 한문으로 번역한 일을 소개하면서 동인(東人)의 가곡(歌曲)을 방음(方音)으로 읽을 때에는 처완감상(悽惋感傷)의 뜻이 분명해지지만 한문으로 번역해버리면 삭막(索漠)해져서 사람들을 감동시키기 어려워진다고 지적하였다.【成海應, 『硏經齋全集』 권1 「思美人曲解」 “鄭松江竄江界作此詞 盖寓戀君之心也 淸陰金先生愛誦之 朝夕輒歌咏 其家兒童亦皆傳誦 坯窩金公以詞賦體譯之 有楚辭九章之音 余又因之以雜歌謠體翻之 然東人歌曲 素無腔調 若和方音讀之 得其悽惋感傷之意 雖婦人孺子 亦能解其旨意 若翻以雅語則殊覺索漠 不能動人”】 이와 같은 음성언어에 대한 인식은 당대 많은 지식인들에 의해서 제기된 『시경(詩經)』의 국풍(國風)이 담고 있던 이념과도 긴밀한 관련성을 갖는다. 이것은 음성언어가 강조된, 곧 여항(閭巷)의 고유한 속어(俗語)를 채록한 것이라는 점에서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시조와 위항시를 긍정하고자 한 인물들은 『시경(詩經)』의 국풍이 당대의 민속가요임을 근거로 들면서 자신들의 작업이 갖는 정당성을 강조하였다.【김흥규, 1982 『朝鮮後期 詩經論과 詩意識』,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187~188면.】 이는 음성언어 문제가 조선의 고유성, 풍토성의 문제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음을 보여준다. 유득공은 “국풍(國風)은 후세의 가요(歌謠)나 사곡(詞曲)과 같아서 반드시 독서(讀書)를 한 뒤에야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柳得恭, 『高芸堂筆記』 「詩以六經三史爲根本」 “其十三國風 多出於民間 此如後世之歌謠詞曲 不必讀書而 後可能也”(김윤조, 2007 「『고운당필기』 연구」 『大東漢文學』 26, 396~397면에서 재인용)】 그러하기에 국풍은 학문적인 보편성보다는 지역정서를 담아낸 풍토성을 강하게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결론적으로 음성언어의 자각과 관심은 풍토성, 고유성으로 대표되는 특수성의 문제와 깊은 관련성을 갖는 것이었다.
인용
1. 머리말
2. 음성언어에 대한 관심 증대
3. 언문일치 인식의 대두
1) 언문불일치의 문제 제기
2) 물명류서의 편찬
4. 백화문학과 방언·향어·속어
1) 백화 문학의 확대
2) 방언·향어·속어의 사용
5.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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