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한 명과 아차산에 오른 이유
재익이와 여러 이유로 자취방에서 목요일부터 함께 생활하고 있다. 1주일간 함께 생활하기로 한 데엔, 집에 있으면 생활태도가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환경이 바뀌어야 할 이유
자식을 가르치는 어려움은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였나 보다. 오죽하면 고전인 『맹자』라는 책에도 자식을 가르치는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 있다.
공손추가 “군자는 자식을 가르칠 수 없다고 하는데, 왜 그렇습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맹자는 “형편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르치는 사람은 반드시 바르게 하라고 가르친다. 바르게 하라고 가르쳐도 그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자연히 노여움이 따르게 된다. 그렇게 되면 도리어 부자간의 감정을 상하게 된다. 자식이 속으로 ‘아버지는 나보고 바르게 행동하라고 가르치지만 아버지도 역시 바르게 행동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부자가 다 같이 감정을 상하게 되는 일이기에 나쁘다는 것이다.
公孫丑曰:“君子之不敎子, 何也?” 孟子曰:“勢不行也. 敎者必以正; 以正不行, 繼之以怒; 繼之以怒, 則反夷矣. 夫子敎我以正, 夫子未出於正也. 則是父子相夷也. 父子相夷, 則惡矣.
그러기에 옛날 사람들은 자식을 바꾸어 가르쳤다. 결국 부모가 직접 자기 자식을 가르치지 않았다. 부자 사이에는 잘못한다고 질책해선 안 된다. 잘못한다고 질책하면 서로 멀어지게 된다. 서로 멀어지게 되면 그보다 더 불행한 일이 어디에 있을까.”
古者易子而敎之. 父子之間不責善. 責善則離, 離則不祥莫大焉.” -「離婁章句 上」 18
위의 글에서도 볼 수 있듯이, 부모가 자식을 가르칠 때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바로 '언행일치' 부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식에게 똑바로 하라고 가르치지만 정작 자신은 그렇게 행동하지 못하니 자식은 부모에 대해 불신과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해선 구구한 논의가 필요하지 않다. 담배 피는 어른이 "어디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담배를 피우느냐'라고 질책한다고 상상해보면 바로 이해가 되니 말이다. 그 때 우리는 '그래 내가 잘못했지'라는 생각이 들기보다, '지는 하면서 왜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야'라는 반항심이 먼저 들기 때문이다. 특히 부모와 자식은 일거수일투족을 공유하는 존재이며, 감정의 미묘한 것까지 얽혀 있는 관계다. 그러다 보니 작은 가르침조차도 진심 그대로 전해지기 어렵다.
그래서 예전 사람들은 '자식을 바꾸어 가르친다(易子而敎之)'라는 해법을 내놓은 것이다. 이에 대한 이해는 레비스트로가 이야기한 친족관계에서 찾으면 된다. 일반적으로 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방식을 보면 아버지는 규율을 중시하는 방식으로, 어머니는 무조건적인 포용하는 방식으로 한다. 그런 부모 사이에서 자라는 자식은 무언가 맘을 터놓고 자신의 속내를 드러낼 수 있는 존재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그때 삼촌이랄지, 고모랄지 가깝지만 먼 친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부모는 ‘이게 옳으니 무조건 따르라’라고 말할 때, 삼촌은 ‘그런 게 어딨어. 너의 길을 만들면서 가봐’라고 180도 전혀 다른 말을 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때 아이는 전혀 다른 두 이야기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민하며 자신의 길을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식을 바꾸어 가르친다’는 것도 부모가 주는 삶의 양식과는 전혀 다른 삶의 양식이 있음을 보여줘서 아이가 고민하고 나아갈 수 있게 만들어 준다는 뜻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재익이는 우리 집에 와서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부모님이 전해주는 말과 내가 전해주는 말엔 분명 어떤 차이든 있을 것이고, 그 속에서 재익이는 고민을 하며 자신의 길을 찾아갈 것이다. 내가 삼촌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할 텐데 과연 잘 될지는 지켜볼 일이다.
▲ 1주간 우리 집에 온 지훈이를 민석이가 위로차 방문했을 때, 비빔밥을 먹었다. 그 때의 에피소드를 아이들이 웹툰형식으로 그렸다.
토요일엔 산행을
재익이와 하루 종일을 함께 있어야 하는 토요일과 일요일이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집에서 빈둥대어도 상관없지만, 1주일이란 시간만 함께 지내는 만큼 평상시에 재익이가 하지 못하는 것을 함께 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박물관 탐방, 춘천 여행, 도서관에서 책 읽기, 파주출판단지 탐방과 여러 가지를 제안했고 재익이는 산행을 택했다. 처음 이러한 제안을 할 때만 해도 완강히 거부하며 집에만 있겠다고 뻗댈 줄 알았는데, 의외로 순순히 받아들이더라. 이럴 때 보면 ‘청소년은 어른들의 말에 무조건 반항하는 시기’라는 정의가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괜한 반항은 없다. 그 속엔 어떠한 이유든 숨어 있는 것이다. 결국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소통이라 할 수밖에 없다.
강동구청역에서부터 걸어서 천호대교를 건너 아차산으로 가는 경로를 택했다. 어차피 등산을 하기로 한 이상, 걸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제부턴 사진으로 그 날의 흥취를 함께 보자.
▲ 2월의 마지막 날에 남정네 둘이서 산에 오른다*^^*
▲ 아차산을 지나 용마산으로 가는 길. 재익이는 청바지를 입고 올라감에도 잘 오르더라. 숨겨왔던 기초체력이 있다는 뜻?
▲ 2시간 30분만에 아차산과 용마산 산행을 마쳤다. 힘들어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생각보단 아주 잘 오르고 잘 내려오더라.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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