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캠퍼스의 낭만처럼 떠난 여행
5월은 가족의 달이지만, 만물이 싱그러워지는 계절이기도 하다. 그래서 3월엔 소생하는 만물에 동화되어 내 마음도 가눌 길 없이 산들바람따라 하염없이 흔들거리고, 4월엔 어느덧 익숙해진 따스함에 마음도 차분히 가라앉으며, 5월엔 덥지도 춥지도 않은 적당한 기운에 어디로든 떠나고 싶어진다.
▲ 4월엔 전주대에도 곳곳에 봄이 내렸다.
아주 늦게 온, 하지만 적절할 때 찾아온 캠퍼스 낭만
하지만 임용을 다시 시작하고 나선 맘이 바빠져서인지, 홀로 애태워서인지, 시간에 대한 압박 때문인지 어디로 떠나질 못했다. 3월에 임용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엔 2주에 한 번씩은 어디든 가야지라고 맘먹었는데, 정작 그게 한 번의 여행으로 끝나버렸다.
그렇게 몸이 근질근질하던 차였는데 5월 30일 스터디 시간에 교수님은 ‘다음 주엔 공휴일이기도 하니 야외에 나가서 시를 함께 보는 건 어때요?’라는 제안을 하신 것이다. 여태껏 학부생일 때에도 교수님과 야외 수업을 한다는 건 생각도 못해봤고 그런 제안이 있지도 않았다. 대학생이지만 고등학교 4학년이라도 된 듯이 네모반듯한 책상에 정자세로 앉아 뭔지도 모를 한문의 세계를 방황해야 했으니 말이다. 한문을 좋아해서 한문교육과에 온 것이지만, 막상 깊이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한문은 요지부동하는 성채 같은 느낌이었다. 난 서서히 미궁으로 빠져들고 낭패감에 한숨만 푹푹 쉬던 나날들.
하지만 다시 복귀한 학교에선 예전엔 상상도 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우선 교수님 자체가 한문을 대하는 마인드가 달랐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친구처럼 다가가는 것은 물론이고, 덧붙여 한문을 공부하지만 다양한 경험을 해야 한다고 소리 높여 외치니 말이다. 물론 이 말을 학부생 때 들었다면 당연히 콧방귀를 뀌었을 것이다. ‘졸업과 동시에 임용합격’이라 목표를 세워둔 이상 공부 외의 것들은 모두 다 시간 낭비라고만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1학년 때 정말 하고 싶어서 들었던 ‘합창단 동아리’ 활동을 거의 하는 둥 마는 둥 하기까지 했다. 그만큼 어떤 말이 이해되기까진 시간이 필요한 거고,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시기가 도래해야 하는 거겠지.
교수님의 제안은 달콤했다. ‘캠퍼스 낭만’은 TV에서나 가능한, 그래서 현실에선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만 느꼈는데, 교수님의 제안을 듣는 순간 ‘이것이야말로 참 낭만적인 제안이다’는 느낌이 들었으니 말이다. 고민과 갈등 속에 나의 학부생 시절은 뭘 했는지도 모르게 지나가버렸지만, 지금 이 순간 그 당시엔 누리지 못한, 누벼보지 못한 가슴 벅차오르던 삶의 여유, 지금 이 순간이 주는 행복이 물씬 느껴졌다. 이런 상황이니 어찌 교수님의 제안이 반갑지 않을 수 있으랴. 맹자의 말마따나 ‘감히 청하지 않았을 뿐이지, 진실로 원하던 바입니다(不敢請耳, 固所願也)’라는 거다. 역시 난 운빨 하나는 제대로 타고 났다. 아닌가, 인복이 타고난 건가^^
▲ 교수님이 진행하는 스터디가 열렸다. 시기적절했고 여기서 한문의 재미를 느낄 수 있으니 더할 나위 없다.
공부하는 이에겐 여행도 부담이 되고
하지만 변수는 다른 곳에 있었다. 교수님도 되게 신중하면서 섬세한 배려의 말투로 “필수사항은 아니고, 너무 부담 갖지 말고 들으세요.”라고 했듯이, 나에겐 신선하면서도 가슴 뛰게 하는 제안이, 다른 누군가에겐 그렇지도 않을 수 있으니 말이다. 실제로 바로 다음날에 방장이 야유회의 참가여부를 묻는 설문조사를 했는데, 그때 나온 결과가 그걸 여실히 보여줬다. 8명은 불참하겠다고 했고 나를 포함한 4명 만(나머지 3명은 재학생들임)이 참석하겠다고 표시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자율에 의한 결과이니 누굴 나무랄 일도, 문제 삼을 일도 아니지만, ‘이러다 좌초되는 거 아냐?’라는 은근한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거기에 덧붙여 교수님도 이런 결과에 말로는 표현하지 않지만 상처를 입으실 수도 있고 말이다.
▲ 예상은 하긴 했는데, 참석이 저조해서 과연 추진될까, 좌초될까 걱정이 됐다.
어떻게 일이 진행될까 맘을 졸이며 기다리고 있는데 야유회 하루 전날에 방장에게서 카톡이 왔다. “선배님 낼 8시에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모이기로 했습니다.” 우와~ 이거 실화냐^^ 정말로 간다는 것이고, 그저 가까운 데에 기분 내러 가는 정도가 아니라 여행을 떠나는 것이니 말이다. 근데 어디로 간다는 말이 없었기에 물었더니, “저희 부안 내소사로 간데요!!”라는 들뜬 듯한, 벅찬 듯한 뉘앙스가 풀풀 풍기는 카톡이 왔다.
내소사~ 2012년인가 선배와 갔던 곳인데, 별 생각 없이 찾아간 곳은 그저 수많은 절중에 하나를 찾아간 것처럼 별 다른 감흥을 낳지 않았다. 그때도 지금처럼 여행기를 남겼더라면, 그리고 사진을 찍었더라면 조금이나마 추억할 거리가 있었겠지만, 그 모든 게 없으니 흐릿한 그래서 없는 것과 진배없는 과거담일 뿐이다. 그에 비하면 지금은 이런 기록을 남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후회로 늘 사진을 찍고 그 당시를 추억할 거리를 남겨 놓는다는 것이 좋기만 하다.
▲ 내소사 제가 한 번 가보겠습니다.
어떤 여행인지 몰라도, 여행은 즐겁다
8시까지 터미널로 오라고 했기에 집에선 7시가 조금 넘어서 나갔다. 구체적인 일정을 물어보진 않았기 때문에 ‘왜 이렇게 이른 시간에 나오라고 한 걸까?’ 궁금하긴 했다. 절의 마루에 앉아 시도 함께 보고 이야기도 나누는 詩會 성격의 여행인 걸까, 그게 아니면 등산을 하며 호연지기를 기르는 여행인 걸까, 그게 아니면 부안 근방의 명승고적을 탐방하며 한문의 향기를 흠뻑 흡입하는 여행인 걸까? 솔직히 어떤 성격의 여행이든 상관이 없었다. 난 그저 떠날 수 있다는 게 좋았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 어디든 가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게 좋았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지금은 별로 가리는 게 없어졌다. 여행은 나에겐 설렘이니 말이다.
▲ 절로 설레 설레. 정말 오랜만에 여행다운 여행을 간다.
운 좋게도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6번 버스가 바로 왔다. 6번 버스로 말할 것 같으면, 평화동으로 완산동으로 돌고 돌아가는 다른 버스와는 달리 직선으로 곧장 터미널로 향하는 버스다. 그러니 25분 정도면 터미널에 도착할 수 있을 정도다. 터미널에 도착하니 7시 30분이었고 으레 약속시간에 늦는 아이들을 많이 봐온 터라 ‘오늘은 몇 분이 되어야 아이들이 다 모일까?’ 혼자 점쳐보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 야유회에 가기로 한 아이들이 모두 2학년 아이들이다보니, 8시가 되기 전에 모두 모였다. 바로 내 다음엔 동원이란 녀석이 왔고, 곧장 교수님도 오셨다. 그리고 나머지 두 녀석도 50분 정도에 도착하여 다들 시간을 철저히 지키는 기민한 모습을 보여줬다. ‘미생’ 1편에선 김대리가 장그래를 보고 반어적인 표현으로 ‘아주 그냥 요즘 보기 드문 청년이야’라고 비난을 하는데, 이런 경우엔 이 말 그대로 이 아이들에게 칭찬의 의미로 해주고 싶을 정도다.
▲ 아주 보기 드문 청년들로 출발이 정말 좋다.
터미널에서 내소사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는 8시 50분에 딱 한 대가 배차되어 있더라. 그 버스는 김제, 부안, 곰소를 들러 내소사로 가는 버스로 막힐 땐 2시간 30분 정도 걸린다고 하고, 막히지 않을 땐 2시간이면 도착한다고 한다. 그 버스가 아니면 부안까지 가서 시내버스로 내소사에 가야 한다. 교수님은 내소사행 버스를 탈지, 부안행 버스를 탈지 고민하시더라. 그러다가 결국 내소사행 버스를 타기로 결정하셨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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