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내소사’란 이름이, 역사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버스는 달려간다. 김제평야를 지나서 가는데 진귀한 풍경이 보이더라. 꼭 가을인 것처럼 황금물결이 이는 곳도 있었고, 어느 곳은 이제 막 벼를 심었는지 파릇파릇한 새싹이 보이는 곳도 있었다. 노랗게 익은 곡식과 이제 막 자라는 푸른 여린 새싹의 대비가 아주 절묘했다.
▲ 노란색의 들판이 이채롭다.
김제평야엔 노란구름 피어나고
그래서 교수님께 물어보니, 노랗게 익은 것은 보리라고 말씀해주시더라. 학생 때 이모작을 한다는 얘길 듣긴 했는데, 실질적인 모습을 이제야 보게 된 셈이다. 보리를 키워 이 시기에 수확하고, 그 자리에 다시 벼를 심어 가을에 수확한다. 정몽주가 지은 「중양절에 익양 태수 이용이 새로 지은 명원루에서 쓰다重九日題益陽守李容明遠樓」라는 시에서는 풍년을 ‘노란 구름黃雲’이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누렇게 익은 곡식이 쫙 깔린 벌판이 노란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른 것 같은 느낌을 자아냈기에 그런 표현을 쓴 걸 테다. 한시의 맛은 바로 그와 같은 상상이 가득 담긴 표현을 쓰고 그걸 상상하며 읽을 수 있다는 데에 있다.
黃雲이 쫙 깔린 초여름의 들판을 가르며 내소사로 달린다. 오늘은 그렇게 덥지 않은 날씨긴 해도 가시거리가 그렇게 썩 좋지도 않은 날이다.
▲ 노란색과 녹색이 대조를 이룬다. 6월 6일의 평야.
내소사와 소정방
그때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내소사來蘇寺라는 절의 이름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과 관련이 있다는 얘기.
그렇지 않아도 단재학교에 수습교사로 일하고 있던 때 첫 여행을 기획하게 되었는데, 그때 선택한 장소가 다름 아닌 부여였다. 전주에서 30년 넘도록 살았지만, 타의든 자의든 신라 유적지를 찾아 경주로 떠난 적은 있어도, 백제 유적지를 보러 가봐야겠단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사람은 착각의 동물이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에 대해 너무도 잘 안다고 착각해서 함부로 대하며, 자신이 사는 곳은 너무 익숙하다고 생각해서 별 관심을 안 갖게 마련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뼈저리게 깨닫게 되는 사실은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사람만큼 잘 몰랐던 사람도 없었다는 진실이고, 가장 익숙하다 여겼던 공간만큼 낯선 공간도 없다는 현실이다. 그래서 서울에 자리를 잡자마자 묵은 과제라도 해결하려는 듯이 첫 여행지를 백제 역사의 최후가 알알이 박혀있는 부여로 정하게 된 것이다.
▲ 터만 남은 곳에 가까스로 모양새만 갖췄다.
그 중 부여의 정림사지는 두 가지 점에서 충격을 줬다. 하나는 여태껏 본 적이 없는 그래서 매우 신선했고 더욱 불심을 자극하게 만든 돌부처님의 모습이 그랬고, 다른 하나는 오층석탑에 새겨진 글씨가 그랬다. 지금도 사람들은 어디에 가든 자기의 이름을 남기고 오고 싶어 하듯, 그 당시 사람도 그건 다르지 않았나 보더라. 청나라 황제는 삼전도에서 인조에게 ‘세 번 절하고 머리를 아홉 번 조아리는 예三拜九叩頭’를 받은 후에, 삼전도비를 당당하게 세워놓고 자신들에겐 영광의 역사를 우리에겐 치욕의 역사를 만고에 드러내려했던 것처럼, 역사의 권력자들도 나라를 굴복시키면 그곳에 자신의 명백한 표지를 세워놓았던 것이다. 더욱이 소정방이 악랄했던 것은 별도의 비문을 설치한 게 아니라, 이미 있던 절의 탑에 ‘크나크신 당나라께서 백제국을 평정한 것을 기념하는 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라는 글귀를 마치 낙인찍듯이 새겨 넣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소정방이 ‘내소사’라는 사찰의 이름과 관련이 있다는 얘기였고, 그 말은 곧 내소來蘇라는 말이 ‘소정방이 왔다’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러고 보니 내소사의 원래 이름은 ‘소래사’였는데, 지금은 ‘내소사’로 개칭된 걸 보니 분명히 어떤 이유가 있을 것 같기도 했다.
▲ 大唐平百濟國碑銘이란 글씨가 제대로 보인다.
역사와 야사
물론 여행에서 돌아와 자료를 조사하다 보니 근거가 없는 얘기라는 것을 알게 됐지만, 원래 민간에 퍼진 얘기들, 사료로 남지 못한 얘기들이 때론 더 진실한 얘기일 수도 있다. 하긴 여기선 진실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왜 민간에선 그러한 얘기들이 돌고 돌아 여태까지 사라지지 않고 전해지고 있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다. 거기엔 역사로 함부로 재단할 수 없는 민초들의 바람이 깊게 깃들어 있으니 말이다.
권력은 역사책을 남겨 자신들의 권력이 얼마나 정당한지를 증명하려 하지만, 민초들은 그런 어마어마한 작업을 해낼 수가 없다. 하지만 그들에겐 밟아도 다시 자라나는 생명력이 있고, 바람에 바짝 엎드리지만 언제든 꿋꿋이 일어설 수 있는 저력이 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말과 말로 자신들의 바람을 실어 나르고 그게 언제 어디서든 사라지지 않고 전해질 수 있도록 하는 거다. 그래서 연암과 같은 경우는 20대 초반에 우울증을 앓았고 그래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그는 여행을 하며 여러 민가에 떠돌던 기이한 이야기들을 직접 듣고 기록에 남기기도 했으며, 여러 문인들도 야사野史류의 이야기를 담아 책을 펴내기도 했다.
▲ 정림사의 부처야말로 부처의 정신이 고스란히 드러난 모습 같단 생각이 들었다.
역사가 재밌는 이유
그 중에 가장 흥미로웠던 지점은 ‘왜 하필 소정방이 온 것을 굳이 사찰의 이름으로 생각하려 했을까?’하는 점이었다. 흔히 그렇듯 정복자는 핍박자일 수밖에 없고, 더욱이 백제를 멸망시킨 장본인이니 백제인의 입장에선 당장이라도 씻어내고 싶은 이름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이렇게 생각하려 했던 그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엔 두 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하나는 치욕의 역사일지라도 잊지 않고 기억하여 다시는 이런 치욕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의미일 수도 있다. 신채호 선생님의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처럼 민중들은 아픈 역사조차도 아로새겨 미래를 위한 자양분으로 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다른 하나는 소정방은 단순한 정복자가 아니라, 구원자의 이미지로 비쳤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백제 말기 민초들의 삶은 더욱 시름 깊어졌을 것이다. 최근에 중국역사를 공부하니 은나라엔 紂王이 주지육림의 파티를 벌였으며 충신들의 간언을 듣지 않고 백성들의 착취를 감행하여 주나라 무왕의 쿠데타의 명분이 되었고, 주나라 말기엔 幽王과 厲王이 정치보단 향락에 빠져 종주국인 주나라의 권위는 무너져 내렸다(여기선 논의를 집중하기 위해 ‘승자의 역사로 전대를 극악무도한 역사로 폄하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논외로 하고 이야기를 진행하기로 하자). 그처럼 백제의 말기도 민초들에겐 힘겨운 나날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이쯤 되면 『맹자』에 나오는 것처럼 ‘이 해는 언제나 없어질꼬? 나는 너와 함께 없어지리라(時日害喪? 予及女偕亡)’라는 말이 절로 나오며 권력자를 철천지원수처럼 대하게 되고, 오히려 적국의 수장을 이와 같은 환란에서 구해주는 구원자로 인식하게 된다. 바로 이런 바람이 소래사라는 절의 이름에 투영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래서 역사는 재밌다. 정사로서의 역사와 야사로서의 역사가 길항작용을 하며 무수한 역사적인 이야기들을 만들어내고 그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의 심상을 엿볼 수 있게 해주니 말이다. 내소사라는 절의 이름이 무수한 상상력을 자극해준다.
▲ 쉬는 날이라 사람들이 이미 많더라. 이제 본격적으로 내소사 여행을 떠나보자.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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