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공부하니 조으다~ 여행하니 더 조으다~
요즘 한문 공부하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확실히 2010년에 공부할 때만 해도 여러 문장들은 그저 봐야만 하는, 그래서 소위 아이들이 ‘이런 시인들이 안 태어났으면 우리가 이렇게 많은 것을 공부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라고 말하는 것처럼 나도 여러 글을 쓴 학자들을 버거워했으며 부담스럽게만 느끼고 있었다. 그에 반해 지금은 글 하나하나가 너무도 궁금하고 그 학자들이 왜 그런 글을, 왜 그런 시를 쓰게 됐는지 알고 싶기만 하다.
▲ 2007년 6월의 모습. 그 당시에 보던 책들이 보인다.
아는 사람보단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보단 즐기는 사람이 되자?
2012년 11월엔 가평 펜션에서 단재학교 학부모들과 교사들, 그리고 일본학자 나카지마 히로카즈가 함께 모여 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 당시 표방했던 컨셉은 ‘모인 사람들 저마다 한 권의 책이 되어 교육적 경험을 나눔으로써 고민이나 문제의 해결 방안을 스스로 찾는다’라는 거였다. 모임은 흥미로웠고 경험들은 무척이나 진귀했으며, 『마음을 상품화하는 사회』와 같은 심리주의가 학생 문제의 만능해결책으로 등장한 사회에 그게 얼마나 많은 해악을 끼쳤는지, 그리고 그 너머엔 무엇이 있는지를 고민할 수 있게 해주는 나카지마 선생과의 대화도 신선했고, 그 옆에서 ‘몰아일체형 통역’을 하는 박동섭 교수와의 가슴 떨리는 시간도 즐거웠다, 더할 나위 없던 시간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그 모임에 대해 어떤 기록도 남기지 못했다. 사진도 찍었고, 조금씩 메모를 남기기도 했지만, 그걸 남겨놓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니 좀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그 수많은 내용들을 담아낼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때 1박 2일로 진행되었던 것들은 모두 다 추억의 저편으로 고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메모한 것만이라도, 사진 찍은 것만이라도 남겨뒀었다면 하는 아쉬운 맘이 든다.
▲ 그때의 기록이 하나도 없다는 게 아쉽다.
갑자기 한문 공부가 재밌다는 얘기를 하다가 밑도 끝도 없는 과거의 모임 얘기를 하고 있으니 어리둥절할 것이다. 그러나 그 모임에서 새벽이 되려던 시간에 5분 동안 강의형식(TED처럼)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말했던 내용을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5분이란 시간은 길지 않지만 누군가의 앞에 서서 이야기를 한다는 건 역시나 떨리는 일이었고, 과연 무엇을 말해야 하나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고민하다가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2년 전까지 몇 년 간 한문 공부를 했으니,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맘을 먹었고, 그때 떠오른 문장이 ‘그것을 아는 사람은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것을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논어』「옹야」18)’이었다.
잔뜩 긴장한 채 앞으로 나가 화이트보드에 세로로 원문을 쓰고, 해석을 한 후에 “제가 원하는 공부의 방식도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아는 것, 좋아하는 것을 넘어서 즐기는 단계까지 갈 수 있도록 차근차근 배워가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자연스레 질문이 나오더라. “좋아하는 것과 즐기는 것엔 어떤 차이가 있는 거죠?”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평소에도 그 차이가 명료하게 구분되지가 않아 궁금해 하며 고민했던 내용이기에, 곧 “제가 생각하기론 좋아하는 건 누군가 못하게 하면 하지 않지만, 즐긴다는 건 누군가 못하게 막더라도 하려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 선배가 학생들에게 나눠줄 책갈피를 만들어달라고 해서, 이 문구를 넣어 책갈피를 만들었다.
앎과 좋아함과 즐김은 하나다
그 당시만 해도 위의 구절을 보면서 ‘아는 사람보다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보단 즐기는 사람이 좋다’라는 학문의 단계로 보고 있었기에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하지만 요즘 오랜만에 다시 한문 공부를 하면서 그 재미에 푹 빠져들다 보니, 저 구절은 결코 단계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겠더라.
위의 구절에 대해서 도올 선생님은 “호학好學은 앎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요, 앎이란 정확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치열하게 아는 자만이 그 대상을 좋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치열하고 좋아할 수 있는 자만이 그 대상을 즐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앎과 좋아함과 즐김은 가치관의 서열이 아니라, 오직 치열한 앎이 지향해야 할 상향의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결국 앎과 좋아함과 즐김은 一切인 것이다. -『논어한글역주』, 470~472”라고 말했는데, 이 말이 딱 맞다고 생각한다. 알려는 치열함 속에 그 대상을 좋아하는 마음이 싹트고 그럴 때 그 속으로 빠져들어 즐기게 되니 말이다. 그러니 즐김이란 결국 아는 것과 좋아함과 함께 어우러지며 생겨날 수밖에 없다.
지금 나에게 한문 공부는 알아서 행복하고, 그러다 보니 한문이 그토록 좋아질 수가 없어 기쁘며, 여러 다양한 관점들과 이야기들 속을 헤매며 즐거움을 만끽하는 방법이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은 어느 순간에도 비길 수 없을 정도로 즐거운 시간이라 할 수 있다. 재밌게 알아가고, 신나게 배우고, 욕심 내지 말고 내 속도로 한 걸음씩 걸어가는 즐거운 시간이란 말이다.
▲ 3월 31일에 모악산에 가려다가 덕진공원에 왔다. 올해 이렇게 여행을 자주 다닐 줄 알았는데 웬 걸~
여행은 건빵을 춤추게 한다
하지만 이렇게 의욕이 활활 타오를 때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의욕 때문에 날밤을 새워가며, 한 자라도 더 보려 시간을 쪼개가며 하다가는 얼마 가지 않아 “한문 ぎらい(한문 싫다)”, “한문만 보면 절로 욕이 나오는 건 무슨 이유?”라고 하면서 번아웃될 게 분명하니 말이다. 어찌 보면 지금의 의욕은 모처럼만에 공부를 하는 데서 생긴 것이니, 이런 때일수록 마음은 누그러뜨리고 열심히 하려는 열정은 식히는 게 필요하다. 그래서 3월에 시작할 때만 해도 2주일에 한 번씩 모악산에 가던지, 어딘가를 헤매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생각처럼 잘 되지 않더라. 그때 이후로는 그런 식의 여행은 하지 않고 책 속에 푹 파묻혀 있다. 이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공부를 적당히 해야 하는 걸 알면서도 적당히가 안 된다.
그러던 5월 30일 수요일에 대박 사건이 있었다. 수요일 오후엔 교수님들이 진행하는 스터디가 있는 날이다. 이날은 청주에서 귀한 손님이 찾아와서 나름 오랜만에 한옥마을 부근을 돌아다니며 허겁지겁 스터디에 참여한 때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소화시평』을 공부하던 시간에 교수님은 “다음 주엔 현충일이고, 그 다음 주엔 지방선거일이라, 2주를 빠지게 되겠네요.”라고 말해주셨다. 그 말을 들으니, 수요일마다 왜 이리 여러 일들이 많던지 ‘난 좀 더 진득하게 소화시평을 배우고 싶은데, 우잉~ㅠㅠ’이라는 생각이 들며 아쉽게 느껴지더라. 그런데 그때 교수님은 아주 조심스럽게 “이건 필수사항은 아니고, 너무 부담 갖지 말고 들으세요. 다음 주에 야외에 나가서 시를 함께 공부하는 건 어떨까? 어디 경치 좋은 곳에 가서 시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으면 좋잖아요. 지금 당장은 결정하긴 그럴 테니 반장에게 의견을 말해주세요.”라고 제안하셨다.
▲ 앵두 덕에 오목대에 올라 '대풍가'가 있음을 처음으로 봤다. 오목대는 놀이터 같은 곳이었는데도 몰랐단 말인가^^;;
우와~ 이건 마치 내 맘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 같은 느낌이다. 늘 나다닐 생각을 하던 나에게 주는 최고의 한 마디이자 선물인 셈이니 말이다. 더욱이 누군가는 임용공부를 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것에 신경도 쓰지 말고 놀러 다닐 생각은 추호에 꿈도 꾸지 말고 공부만 해야 한다고 하던데, 김형술 교수님은 전혀 다른 생각이었으니 말이다. 교수님의 지론은 ‘공부는 그저 텍스트만 보는 것으로 한정해선 안 된다’라는 거였다. 그래서 의암 아이들에겐 콘서트장에도 가보고, 상학에 있는 도립미술관에도 가보라고 조언해줬으며, 임용 장수생들에겐 꼭 점심을 먹고 나선 볕을 쬐어야 하니, 그때 덥더라도 산책을 해야 한다고 알려주기도 했다. 나도 이 말에 적극 동의한다. 이와 비슷한 생각으로 2009년에 임용의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국토종단을 할 수 있었던 거고, 그게 지금까지 나를 버티게 하는 자양분이자 단재학교에서 여러 여행을 할 수 있는 밑천이 되었다고 인정하니 말이다.
이런 제안에 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이미 몸은 달아올라 금방이라도 튀어나갈 듯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내가 스스로 여행을 다니며 공부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이런 제안에 고민할 필요도 없이 도장을 쾅쾅 찍으면 된다.
교수님의 제안으로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그리고 전주로 내려와서 두 번째 여행을 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무척이나 감사하고, 엄청 기대된다. 과연 우리는 어디로 가게 될까? 그곳에선 어떤 재밌는 이야기들이 담기게 될까?
▲ 와웅 굿! 우리 정말로 갑니다요~
2. 캠퍼스의 낭만처럼 떠난 여행
5월은 가족의 달이지만, 만물이 싱그러워지는 계절이기도 하다. 그래서 3월엔 소생하는 만물에 동화되어 내 마음도 가눌 길 없이 산들바람따라 하염없이 흔들거리고, 4월엔 어느덧 익숙해진 따스함에 마음도 차분히 가라앉으며, 5월엔 덥지도 춥지도 않은 적당한 기운에 어디로든 떠나고 싶어진다.
▲ 4월엔 전주대에도 곳곳에 봄이 내렸다.
아주 늦게 온, 하지만 적절할 때 찾아온 캠퍼스 낭만
하지만 임용을 다시 시작하고 나선 맘이 바빠져서인지, 홀로 애태워서인지, 시간에 대한 압박 때문인지 어디로 떠나질 못했다. 3월에 임용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엔 2주에 한 번씩은 어디든 가야지라고 맘먹었는데, 정작 그게 한 번의 여행으로 끝나버렸다.
그렇게 몸이 근질근질하던 차였는데 5월 30일 스터디 시간에 교수님은 ‘다음 주엔 공휴일이기도 하니 야외에 나가서 시를 함께 보는 건 어때요?’라는 제안을 하신 것이다. 여태껏 학부생일 때에도 교수님과 야외 수업을 한다는 건 생각도 못해봤고 그런 제안이 있지도 않았다. 대학생이지만 고등학교 4학년이라도 된 듯이 네모반듯한 책상에 정자세로 앉아 뭔지도 모를 한문의 세계를 방황해야 했으니 말이다. 한문을 좋아해서 한문교육과에 온 것이지만, 막상 깊이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한문은 요지부동하는 성채 같은 느낌이었다. 난 서서히 미궁으로 빠져들고 낭패감에 한숨만 푹푹 쉬던 나날들.
하지만 다시 복귀한 학교에선 예전엔 상상도 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우선 교수님 자체가 한문을 대하는 마인드가 달랐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친구처럼 다가가는 것은 물론이고, 덧붙여 한문을 공부하지만 다양한 경험을 해야 한다고 소리 높여 외치니 말이다. 물론 이 말을 학부생 때 들었다면 당연히 콧방귀를 뀌었을 것이다. ‘졸업과 동시에 임용합격’이라 목표를 세워둔 이상 공부 외의 것들은 모두 다 시간 낭비라고만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1학년 때 정말 하고 싶어서 들었던 ‘합창단 동아리’ 활동을 거의 하는 둥 마는 둥 하기까지 했다. 그만큼 어떤 말이 이해되기까진 시간이 필요한 거고,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시기가 도래해야 하는 거겠지.
교수님의 제안은 달콤했다. ‘캠퍼스 낭만’은 TV에서나 가능한, 그래서 현실에선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만 느꼈는데, 교수님의 제안을 듣는 순간 ‘이것이야말로 참 낭만적인 제안이다’는 느낌이 들었으니 말이다. 고민과 갈등 속에 나의 학부생 시절은 뭘 했는지도 모르게 지나가버렸지만, 지금 이 순간 그 당시엔 누리지 못한, 누벼보지 못한 가슴 벅차오르던 삶의 여유, 지금 이 순간이 주는 행복이 물씬 느껴졌다. 이런 상황이니 어찌 교수님의 제안이 반갑지 않을 수 있으랴. 맹자의 말마따나 ‘감히 청하지 않았을 뿐이지, 진실로 원하던 바입니다(不敢請耳, 固所願也)’라는 거다. 역시 난 운빨 하나는 제대로 타고 났다. 아닌가, 인복이 타고난 건가^^
▲ 교수님이 진행하는 스터디가 열렸다. 시기적절했고 여기서 한문의 재미를 느낄 수 있으니 더할 나위 없다.
공부하는 이에겐 여행도 부담이 되고
하지만 변수는 다른 곳에 있었다. 교수님도 되게 신중하면서 섬세한 배려의 말투로 “필수사항은 아니고, 너무 부담 갖지 말고 들으세요.”라고 했듯이, 나에겐 신선하면서도 가슴 뛰게 하는 제안이, 다른 누군가에겐 그렇지도 않을 수 있으니 말이다. 실제로 바로 다음날에 방장이 야유회의 참가여부를 묻는 설문조사를 했는데, 그때 나온 결과가 그걸 여실히 보여줬다. 8명은 불참하겠다고 했고 나를 포함한 4명 만(나머지 3명은 재학생들임)이 참석하겠다고 표시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자율에 의한 결과이니 누굴 나무랄 일도, 문제 삼을 일도 아니지만, ‘이러다 좌초되는 거 아냐?’라는 은근한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거기에 덧붙여 교수님도 이런 결과에 말로는 표현하지 않지만 상처를 입으실 수도 있고 말이다.
▲ 예상은 하긴 했는데, 참석이 저조해서 과연 추진될까, 좌초될까 걱정이 됐다.
어떻게 일이 진행될까 맘을 졸이며 기다리고 있는데 야유회 하루 전날에 방장에게서 카톡이 왔다. “선배님 낼 8시에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모이기로 했습니다.” 우와~ 이거 실화냐^^ 정말로 간다는 것이고, 그저 가까운 데에 기분 내러 가는 정도가 아니라 여행을 떠나는 것이니 말이다. 근데 어디로 간다는 말이 없었기에 물었더니, “저희 부안 내소사로 간데요!!”라는 들뜬 듯한, 벅찬 듯한 뉘앙스가 풀풀 풍기는 카톡이 왔다.
내소사~ 2012년인가 선배와 갔던 곳인데, 별 생각 없이 찾아간 곳은 그저 수많은 절중에 하나를 찾아간 것처럼 별 다른 감흥을 낳지 않았다. 그때도 지금처럼 여행기를 남겼더라면, 그리고 사진을 찍었더라면 조금이나마 추억할 거리가 있었겠지만, 그 모든 게 없으니 흐릿한 그래서 없는 것과 진배없는 과거담일 뿐이다. 그에 비하면 지금은 이런 기록을 남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후회로 늘 사진을 찍고 그 당시를 추억할 거리를 남겨 놓는다는 것이 좋기만 하다.
▲ 내소사 제가 한 번 가보겠습니다.
어떤 여행인지 몰라도, 여행은 즐겁다
8시까지 터미널로 오라고 했기에 집에선 7시가 조금 넘어서 나갔다. 구체적인 일정을 물어보진 않았기 때문에 ‘왜 이렇게 이른 시간에 나오라고 한 걸까?’ 궁금하긴 했다. 절의 마루에 앉아 시도 함께 보고 이야기도 나누는 詩會 성격의 여행인 걸까, 그게 아니면 등산을 하며 호연지기를 기르는 여행인 걸까, 그게 아니면 부안 근방의 명승고적을 탐방하며 한문의 향기를 흠뻑 흡입하는 여행인 걸까? 솔직히 어떤 성격의 여행이든 상관이 없었다. 난 그저 떠날 수 있다는 게 좋았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 어디든 가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게 좋았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지금은 별로 가리는 게 없어졌다. 여행은 나에겐 설렘이니 말이다.
▲ 절로 설레 설레. 정말 오랜만에 여행다운 여행을 간다.
운 좋게도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6번 버스가 바로 왔다. 6번 버스로 말할 것 같으면, 평화동으로 완산동으로 돌고 돌아가는 다른 버스와는 달리 직선으로 곧장 터미널로 향하는 버스다. 그러니 25분 정도면 터미널에 도착할 수 있을 정도다. 터미널에 도착하니 7시 30분이었고 으레 약속시간에 늦는 아이들을 많이 봐온 터라 ‘오늘은 몇 분이 되어야 아이들이 다 모일까?’ 혼자 점쳐보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 야유회에 가기로 한 아이들이 모두 2학년 아이들이다보니, 8시가 되기 전에 모두 모였다. 바로 내 다음엔 동원이란 녀석이 왔고, 곧장 교수님도 오셨다. 그리고 나머지 두 녀석도 50분 정도에 도착하여 다들 시간을 철저히 지키는 기민한 모습을 보여줬다. ‘미생’ 1편에선 김대리가 장그래를 보고 반어적인 표현으로 ‘아주 그냥 요즘 보기 드문 청년이야’라고 비난을 하는데, 이런 경우엔 이 말 그대로 이 아이들에게 칭찬의 의미로 해주고 싶을 정도다.
▲ 아주 보기 드문 청년들로 출발이 정말 좋다.
터미널에서 내소사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는 8시 50분에 딱 한 대가 배차되어 있더라. 그 버스는 김제, 부안, 곰소를 들러 내소사로 가는 버스로 막힐 땐 2시간 30분 정도 걸린다고 하고, 막히지 않을 땐 2시간이면 도착한다고 한다. 그 버스가 아니면 부안까지 가서 시내버스로 내소사에 가야 한다. 교수님은 내소사행 버스를 탈지, 부안행 버스를 탈지 고민하시더라. 그러다가 결국 내소사행 버스를 타기로 결정하셨다.
3. ‘내소사’란 이름이, 역사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버스는 달려간다. 김제평야를 지나서 가는데 진귀한 풍경이 보이더라. 꼭 가을인 것처럼 황금물결이 이는 곳도 있었고, 어느 곳은 이제 막 벼를 심었는지 파릇파릇한 새싹이 보이는 곳도 있었다. 노랗게 익은 곡식과 이제 막 자라는 푸른 여린 새싹의 대비가 아주 절묘했다.
▲ 노란색의 들판이 이채롭다.
김제평야엔 노란구름 피어나고
그래서 교수님께 물어보니, 노랗게 익은 것은 보리라고 말씀해주시더라. 학생 때 이모작을 한다는 얘길 듣긴 했는데, 실질적인 모습을 이제야 보게 된 셈이다. 보리를 키워 이 시기에 수확하고, 그 자리에 다시 벼를 심어 가을에 수확한다. 정몽주가 지은 「중양절에 익양 태수 이용이 새로 지은 명원루에서 쓰다重九日題益陽守李容明遠樓」라는 시에서는 풍년을 ‘노란 구름黃雲’이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누렇게 익은 곡식이 쫙 깔린 벌판이 노란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른 것 같은 느낌을 자아냈기에 그런 표현을 쓴 걸 테다. 한시의 맛은 바로 그와 같은 상상이 가득 담긴 표현을 쓰고 그걸 상상하며 읽을 수 있다는 데에 있다.
黃雲이 쫙 깔린 초여름의 들판을 가르며 내소사로 달린다. 오늘은 그렇게 덥지 않은 날씨긴 해도 가시거리가 그렇게 썩 좋지도 않은 날이다.
▲ 노란색과 녹색이 대조를 이룬다. 6월 6일의 평야.
내소사와 소정방
그때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내소사來蘇寺라는 절의 이름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과 관련이 있다는 얘기.
그렇지 않아도 단재학교에 수습교사로 일하고 있던 때 첫 여행을 기획하게 되었는데, 그때 선택한 장소가 다름 아닌 부여였다. 전주에서 30년 넘도록 살았지만, 타의든 자의든 신라 유적지를 찾아 경주로 떠난 적은 있어도, 백제 유적지를 보러 가봐야겠단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사람은 착각의 동물이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에 대해 너무도 잘 안다고 착각해서 함부로 대하며, 자신이 사는 곳은 너무 익숙하다고 생각해서 별 관심을 안 갖게 마련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뼈저리게 깨닫게 되는 사실은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사람만큼 잘 몰랐던 사람도 없었다는 진실이고, 가장 익숙하다 여겼던 공간만큼 낯선 공간도 없다는 현실이다. 그래서 서울에 자리를 잡자마자 묵은 과제라도 해결하려는 듯이 첫 여행지를 백제 역사의 최후가 알알이 박혀있는 부여로 정하게 된 것이다.
▲ 터만 남은 곳에 가까스로 모양새만 갖췄다.
그 중 부여의 정림사지는 두 가지 점에서 충격을 줬다. 하나는 여태껏 본 적이 없는 그래서 매우 신선했고 더욱 불심을 자극하게 만든 돌부처님의 모습이 그랬고, 다른 하나는 오층석탑에 새겨진 글씨가 그랬다. 지금도 사람들은 어디에 가든 자기의 이름을 남기고 오고 싶어 하듯, 그 당시 사람도 그건 다르지 않았나 보더라. 청나라 황제는 삼전도에서 인조에게 ‘세 번 절하고 머리를 아홉 번 조아리는 예三拜九叩頭’를 받은 후에, 삼전도비를 당당하게 세워놓고 자신들에겐 영광의 역사를 우리에겐 치욕의 역사를 만고에 드러내려했던 것처럼, 역사의 권력자들도 나라를 굴복시키면 그곳에 자신의 명백한 표지를 세워놓았던 것이다. 더욱이 소정방이 악랄했던 것은 별도의 비문을 설치한 게 아니라, 이미 있던 절의 탑에 ‘크나크신 당나라께서 백제국을 평정한 것을 기념하는 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라는 글귀를 마치 낙인찍듯이 새겨 넣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소정방이 ‘내소사’라는 사찰의 이름과 관련이 있다는 얘기였고, 그 말은 곧 내소來蘇라는 말이 ‘소정방이 왔다’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러고 보니 내소사의 원래 이름은 ‘소래사’였는데, 지금은 ‘내소사’로 개칭된 걸 보니 분명히 어떤 이유가 있을 것 같기도 했다.
▲ 大唐平百濟國碑銘이란 글씨가 제대로 보인다.
역사와 야사
물론 여행에서 돌아와 자료를 조사하다 보니 근거가 없는 얘기라는 것을 알게 됐지만, 원래 민간에 퍼진 얘기들, 사료로 남지 못한 얘기들이 때론 더 진실한 얘기일 수도 있다. 하긴 여기선 진실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왜 민간에선 그러한 얘기들이 돌고 돌아 여태까지 사라지지 않고 전해지고 있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다. 거기엔 역사로 함부로 재단할 수 없는 민초들의 바람이 깊게 깃들어 있으니 말이다.
권력은 역사책을 남겨 자신들의 권력이 얼마나 정당한지를 증명하려 하지만, 민초들은 그런 어마어마한 작업을 해낼 수가 없다. 하지만 그들에겐 밟아도 다시 자라나는 생명력이 있고, 바람에 바짝 엎드리지만 언제든 꿋꿋이 일어설 수 있는 저력이 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말과 말로 자신들의 바람을 실어 나르고 그게 언제 어디서든 사라지지 않고 전해질 수 있도록 하는 거다. 그래서 연암과 같은 경우는 20대 초반에 우울증을 앓았고 그래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그는 여행을 하며 여러 민가에 떠돌던 기이한 이야기들을 직접 듣고 기록에 남기기도 했으며, 여러 문인들도 야사野史류의 이야기를 담아 책을 펴내기도 했다.
▲ 정림사의 부처야말로 부처의 정신이 고스란히 드러난 모습 같단 생각이 들었다.
역사가 재밌는 이유
그 중에 가장 흥미로웠던 지점은 ‘왜 하필 소정방이 온 것을 굳이 사찰의 이름으로 생각하려 했을까?’하는 점이었다. 흔히 그렇듯 정복자는 핍박자일 수밖에 없고, 더욱이 백제를 멸망시킨 장본인이니 백제인의 입장에선 당장이라도 씻어내고 싶은 이름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이렇게 생각하려 했던 그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엔 두 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하나는 치욕의 역사일지라도 잊지 않고 기억하여 다시는 이런 치욕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의미일 수도 있다. 신채호 선생님의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처럼 민중들은 아픈 역사조차도 아로새겨 미래를 위한 자양분으로 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다른 하나는 소정방은 단순한 정복자가 아니라, 구원자의 이미지로 비쳤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백제 말기 민초들의 삶은 더욱 시름 깊어졌을 것이다. 최근에 중국역사를 공부하니 은나라엔 紂王이 주지육림의 파티를 벌였으며 충신들의 간언을 듣지 않고 백성들의 착취를 감행하여 주나라 무왕의 쿠데타의 명분이 되었고, 주나라 말기엔 幽王과 厲王이 정치보단 향락에 빠져 종주국인 주나라의 권위는 무너져 내렸다(여기선 논의를 집중하기 위해 ‘승자의 역사로 전대를 극악무도한 역사로 폄하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논외로 하고 이야기를 진행하기로 하자). 그처럼 백제의 말기도 민초들에겐 힘겨운 나날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이쯤 되면 『맹자』에 나오는 것처럼 ‘이 해는 언제나 없어질꼬? 나는 너와 함께 없어지리라(時日害喪? 予及女偕亡)’라는 말이 절로 나오며 권력자를 철천지원수처럼 대하게 되고, 오히려 적국의 수장을 이와 같은 환란에서 구해주는 구원자로 인식하게 된다. 바로 이런 바람이 소래사라는 절의 이름에 투영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래서 역사는 재밌다. 정사로서의 역사와 야사로서의 역사가 길항작용을 하며 무수한 역사적인 이야기들을 만들어내고 그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의 심상을 엿볼 수 있게 해주니 말이다. 내소사라는 절의 이름이 무수한 상상력을 자극해준다.
▲ 쉬는 날이라 사람들이 이미 많더라. 이제 본격적으로 내소사 여행을 떠나보자.
4. 알면 쓸데없는 내소사 지식과 등산론
정확히 두 시간 만에 내소사 정류장에 도착했다. 오늘은 현충일이다 보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절 입구를 거닐고 있더라.
사찰로 들어가는 길은 행복이어라
교수님은 원래 내소사를 둘러보지 않고 바로 관음봉을 오를 생각이었나 보더라. 하지만 막상 절을 보는 순간 맘이 바뀌셨던지, “여기까지 왔으니, 그래도 절은 한 번 둘러보고 올라가도록 합시다.”라고 말씀하셨다.
절로 들어가는 입구는 어느 절이나 좋았던 것 같다. 순천의 강천사로 들어가는 입구의 고즈넉한 분위기도, 지금 이곳 내소사의 입구도 높게 뻗은 나무 사이로 느리게 걷고 있노라면 굳이 다른 게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지금의 이 여유, 그리고 여기서만 느낄 수 있는 적막함이 내 온몸을 훑고 지나가면서, 무에 그리 아등바등했는지 돌아보게 된다. 늘 무언가에 쫓겼고 뒤처질 새라 한 시도 가만히 있질 못했다. 마음 졸이고 긴장해 있었으며, 온갖 불안증에 시달려야 했던 것이다. 나는 목조건물에 대한 전문지식도 없고, 불교에 대한 통찰도 없으며, 절의 규모와 역사에 대한 지식도 없으니, 막상 절에 들어가 건물을 보고 불상을 보는 것보다 이렇게 절로 들어갈 때의 이런 분위기가 훨씬 맘에 든다. 마치 세속과 성속이 이 길을 걸어가며 점차 벗겨지고 한시에나 나오는 말처럼 속세의 티끌은 사라지고 온전한 불성을 지닌 나 자신의 본래면목을 찾아가는 느낌이 드니 말이다.
▲ 절로 들어가는 길은 최고의 길이다. 이 길을 걸을 때면 행복하다.
대웅전 천정엔 문고리가 있다
가는 길에 사찰을 삥 두르고 있는 시내를 ‘조계曹溪’라 부른다는 걸 알게 됐다. 조계종을 통해 그 단어는 알고 있었지만, 그게 세속과 성속을 완벽히 차단하는 시내의 이름이었다는 건 이번에 처음 알았다.
내소사는 백제 때 건립되었고 가장 번성했을 땐 대소래사와 소소래사가 있었지만 그 후 대소래사가 불타고 임란 때 소소래사마저 불타 자취가 사라졌다고 한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절은 인조 때 재창건된 것이란다. 규모가 그렇게 작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 관음봉을 오르면 내소사의 사찰 규모가 한 눈에 들어온다.
특히 대웅전의 수수한 모습은 정말 보기 좋았다. 화려하게 단청을 칠하지 않은 나무 그대로의 질감과 색감이 느껴진다. 조용히 대웅전으로 들어가 보니, 거기엔 ‘내소사영산회괘불탱’이란 그림이 걸려있는데 보물임에도 나에겐 별다른 감흥을 주진 않는다. 원래 아는 게 없으면 보이는 것도 없는 법이다.
그에 반해 나의 이목을 잡아 끈 것은 대웅전 천정에 문고리 같은 게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걸 보고 있으니 대웅전에 있던 보살님이 “저 문고리를 잡으면 극락으로 가는 문이 열려요”라고 말씀해주신다. 기독교에서도 천국은 하늘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불교도 크게 다르진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기독교 경전 중에 『도마복음』에는 ‘천국이 하늘에 있을 것 같으면 새가 먼저 갈 것이요, 물속에 있다면 물고기가 먼저 갈 것인데 천국은 너의 마음속에 있느니라. -『도마복음』42절’라고 이와 같은 상식을 깨는 내용이 당당히 쓰여 있다. 천국이나 극락이 어느 곳에 있느냐의 공간성이 문제가 아니라, 그걸 어떻게 현세에서 구현하고 내세를 준비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 천정에 달린 문고리가 보인다.
종교는 서로 무척 다른 듯하지만, 그래서 서로 이단입네 언성을 높여대지만, 알고 보면 이렇게 서로 통하는 부분들도 많고 함께 공부하다보면 서로의 종교를 이해하게 되는 지점들이 충분히 있다. 그러니 내 종교가 절대 진리라고 생각되거든, 좀 더 타종교에 대해 관용적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진리가 결국 하나라면 어느 것을 통해서든 그 하나의 진리에 닿게 될 테니 말이다.
내소사를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다 둘러봤다. 솔직히 말해서 아는 게 없으니, 제대로 보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그래도 교수님과 함께 온 덕에 ‘조계曹溪’가 속세와 격절되었다는 의미로 사찰 주위에 흐르는 시내를 그렇게 부른다는 것, ‘지장전地藏殿’엔 선조의 명부를 모셔놓고 일정한 때에 합동 제례를 지내며, 그걸 지키는 시왕(10명의 왕)과 나한(2명)이 있다는 것, 그리고 사찰에 걸려있는 나무 모양의 물고기를 ‘목어木魚(건빵을 건빵이라 부르듯, 나무 물고기라 그냥 ‘목어’라 부르는 걸 보고 깜짝 놀람)’라고 부른다는 걸 배웠다. 여기서 더 배워봐야 이미 한계치를 초과해서 금세 사라질 것이기에, 이 정도가 딱 적절하다.
▲ 토속신앙과 불교의 융합을 나타내는 '칠성각'이 보인다.
이따금 가슴이 답답할 때면 오르다
우린 내소사 입구에서 갓길로 빠지는 탐방로로 산을 타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정말 등산을 하게 될 거란 건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저 시회 성격의 모임으로 한시를 함께 읽어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좀 학술적인 분위기의 여행이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산을 탄다고 하니, 설레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2012년부터 13년까지 서울 근처의 산들을 많이도 탔다. 폐쇄된 교실이란 공간에서보다 자연의 너른 공간에서, 의도적인 교육활동보다 비의도적인 환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교육이 이루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당시 아이들은 되게 힘들어했지만, 그럼에도 잘 따라와 줘서 북한산을 등산 경험이 없는 아이들과 함께 오른 것은 물론, 심지어는 지리산까지 6박 7일의 일정으로 종주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만용이 분명했지만 그 당시 우리에겐 ‘불가능’이란 단어는 없었기에 가능했다. 그때의 기록이 다큐멘터리라는 영상과 등산기로 남아 있는 건 그래서 정말 다행이다.
▲ 2013년 11월에 우린 종주를 했다. 그래도 함께 어려움을 극복해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겐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 후로는 학교에서 팀별 외부활동이 사라지면서 등산의 횟수는 자연스레 감소되었다. 그래도 단재학교의 좋은 점은 2주마다 트래킹이란 커리큘럼으로 외부활동을 한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마지막 등산을 한 걸 생각해보면 2016년 6월에 갔던 하남에 있는 검단산이었다. 트래킹은 야외에서 쉬다 오는 성격이었기에 ‘이번에도 그냥 밑에서 편안하게 있다가 가는가 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해에 새롭게 들어온 성민이는 달랐다. 원래 액티브하고 움직이길 좋아하며 운동감각도 좋은 친구라 초봄의 옷차림으로 와서 무지 더울 텐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오히려 내가 한참이나 뒤처져 성민이가 조금 오르다가 기다리고, 조금 오르다가 기다리고를 반복해야만 했다. 성민이 덕에 정말 오랜만에 등산을 했고 결국 정상에 올랐다. 늘 자전거 타며 곁에서만 바라보던 팔당댐을 위에서 내려다보니 느낌이 색다르더라.
그 후로 또 다시 2년이 흘러버렸다. ‘흘러버렸다’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시간이 그처럼 눈 깜빡할 새에 후다닥 흘러 정신을 차렸을 땐 ‘벌써 2년이나 흐른 거야’라는 탄식이 절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아도 전주에 오고 나서 모악산에 늘 가고 싶다는 꿈만 꾸고 있었는데(실제로 3월 30일엔 모악산에 가려 나왔다가 버스편이 만만치가 않아 우연히 덕진공원을 가기도 했다), 이번에 이런 기회로 등산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어찌 설레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등산을 이렇게 남다르게 생각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예전에 임용공부를 할 때 답답할 때면 어디다 그걸 풀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땐 어머니 차를 운전하고 올 때면 습관처럼 모악산에 찾아가 정상을 올라갔다 내려오곤 했으니 말이다. 그땐 그게 발분하는 마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때 그렇게라도 가슴 속에 쌓인 것들을 풀어내지 못했으면 아마 지금의 나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장난처럼 ‘예전에 임용공부할 때 나를 살린 건 등산과 자전거 타기’라고 외치는 것이다.
▲ 올해 1월에 제주에서 서울로 가는 비행기에서 찍은 사진. 모악산과 전주가 보인다.
5. 내소사 관음봉에 오르다
이제 내소사도 둘러봤고 내소사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도 들었으니, 본격적으로 등산을 할 차례다. 그런데 나도 등산을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왔지만 아이들도 몰랐던지, 등산할 차림을 갖추지 않고 왔더라.
▲ 한 걸음, 한 걸음씩 열심히 올라가는 아이들. 대단하다.
초반엔 무척 힘들었지만, 그 힘듦에 비례하여 뿌듯함도 컸다
물론 이 말은 지금의 기성세대들처럼 등산화를 갖추고 값비싼, 그러면서도 천편일률적인 등산복을 갖추어 입어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나처럼 그냥 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등산복을 풀세트로 갖추거나, 낮은 산임에도 히말라야라도 탈 것 같은 배낭을 짊어지고 오르는 것이 좋아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신발은 신축성이 있으면 되고, 옷차림은 올라갈 때나 내려올 때 거치적거리지 않으면 그뿐이다. 산을 목숨 걸고 타는 것도 아니고 기록을 단축하기 위해 타는 것도 아니며, 그저 자기 속도대로 느림과 빠름에 상관없이 이 순간을 즐기며 갈 수 있으면 되니 말이다.
그런데 성재는 얇은 신발에 크로스백을 메고 왔기 때문에 한쪽 어깨가 무지 아플 것은 당연했고, 용주는 살이 거의 없는 몸에 약간 큰 배낭을 메고 가야 하니 힘들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초반에 오르는 길은 경사가 꽤 있는 길이라 몸도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올라야 하는 아이들은 무진장 힘들어하더라. 그래도 대단하다고 느껴졌던 것은 누구 하나 ‘힘들어서 못하겠습니다’라는 말을 하거나 투덜거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 말을 왜 뱉고 싶지 않았겠냐 만은, 그저 꿋꿋이 올라갔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다 하고 말리라’는 의연함이 보였다.
어느 정도 올라가니 서해가 한눈에 보이고 내소사도 한 눈에 들어온다. 그래도 중간 중간 널찍한 바위가 있어 쉬기에는 정말 좋았고 바로 그곳에 앉으면 서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을 수가 있어서 좋았다.
▲ 올라가다가 한번씩 이렇게 바위에 걸터앉아 쉬었다. 이럴 때 맞는 바람이 정말 시원하다.
계획도 없이 불안도 없이 그냥 해보라
그래서 교수님도 “오르면 힘들 줄 뻔히 알지만, 그래도 이렇게 오르는 이유가 아마도 바로 여기에 올라야만 이렇게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인 거 같아.”라고 말씀해주신다.
그러면서 재밌는 일화를 소개해준다. 대학교는 서울에서 다니고 있었지만, 어느 때인가는 친구와 무작정 이곳에 와서 하룻밤을 묵으며 진탕 술을 마셨다고 한다. 그러고 나선 그 다음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 산을 탔다는 것이다. 교수님이 그 말을 할 때, 아무 것도 거리낄 것 없이 자유분방하게 여행을 떠나고 산도 탔던 한때의 추억이, 가슴 뭉클한 그때가 그리운 듯이 보였다.
그러고 보면 정말 그렇게 막무가내로, 또는 그냥 기분이 동하여 아무 계획도 없이 하고 볼 때가 있다. 물론 그때는 그게 훗날 어떤 추억으로 남게 될지, 그리고 어떤 감상을 자아낼지 전혀 모른다. 하지만 지나고 나면 ‘그때~ 참 좋았었지!’하는 감상을 자아내고, 문득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그리움으로 남는다.
나에게도 2011년 1월 15일에 선배와 함께 탔던 내장산이 정말 그랬다. 그땐 폭설이 내려 산엔 온통 눈밭이 펼쳐졌고 발목까지 빠질 정도였고, 산에서 불어오는 겨울의 매서운 칼바람은 에스키모처럼 두꺼운 외투를 입었음에도 옷깃을 파고들었다. 정말 맨 정신으론 할 수 없는 극한의 등산이었는데, 막상 산을 타고 있으니 그렇게까지 못할 정도는 아니란 생각이 들었고, 눈길을 헤쳐 나아가는 맛도 있었으며, 아무도 없는 산을 이렇게 헤매는 재미도 있었다. 신선봉까지는 오르지 않고 내려와 내장사 문 곁에서 점심으로 컵라면과 김밥을 먹었는데 그렇게 꿀맛일 수가 없더라.
▲ 이런 눈길을 헤치며 나갔다. 정말 살아있다는 느낌이 팍팍 들 정도로 겨울 산행 확실히 매력이 있더라.
등산하길 정말 잘했다
11시 46분에 오르기 시작했는데 1시가 넘었을 땐 이미 정점을 찍었고 내리막길이 계속 되고 있다. 점심시간도 훌쩍 지났기에 전망이 좋은 바위의 그늘진 곳에 앉아 점심을 먹기로 했다. 아이들은 모두 터미널 앞에 있는 김밥집에서 김밥을 샀기에 모두 같은 맛 김밥을 먹고 있는 셈이었다. 단재학교 영화팀 아이들과 등산할 때마다 컵라면을 싸가곤 했었는데 오늘도 싸갈까 고민하다가 그냥 과일만 챙겨왔다.
내가 과일을 먹고 있으니, 아이들은 “선배님 저희 김밥 많아요. 이것도 함께 드세요~”라며 챙겨주더라. 재밌지, 내가 챙겨줘도 시원찮을 판에 챙김을 받고 있으니. 그래도 이런 훈훈한 마음들이 좋다.
밥을 먹고 조금 내려가니 계곡이 보이더라. 물이 많이 줄어 아쉽긴 했지만, 그 물은 엄청 차가웠다. 그래서 발을 담그고 계속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그곳에서 교수님은 자리를 펴자고 하더라. 이때를 대비해서 터미널 앞에서 우리는 소주와 약간의 주전부리를 사가지고 온 것이니, 이제 맘껏 즐기기만 하면 된다. 등산을 하며 이런 식으로 술을 마셔본 적은 없었는데, 이렇게 하는 것도 나름 운치가 있더라. 약간 취기가 돌 정도의 술과 간단히 입가심할 수 있을 정도의 먹을거리는 ‘등산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 내가 싸온 과일과 아이들이 사온 김밥. 그래도 맛있었다. 그곳에서 조금 더 내려가 분위기 좋은 계곡을 만났다.
6. 사찰시의 특징과 내소사란 시의 독특함에 빠져
어느 정도 내려오니 계곡이 보였다. 물이 그렇게 많진 않아도 발을 충분히 담그고 있을 만했고, 물이 어찌나 차가운지 발을 계속 담그고 있으면 한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함께 앉을 정도의 평평하고 큰 바위는 없어서 어떻게든 각자 앉았고 주전부리들을 세팅하기 시작했으며, 팩으로 사온 소주를 분배하기 시작했다.
▲ 계곡야유회를 준비하는 손길들.
내소산 계곡에서 시회가 열리다
그리고 더욱 재밌었던 점은 교수님이 한시를 전공한 사람답게 “여기에 왔으니, 내소사에 관련된 시는 한 편 봐야지”라고 했다는 점이다. 지식인들의 이런 식의 고상한 놀이가 때론 싫게도 느껴졌다. 현실의 문제는 더욱 꼬여만 가는데 거기엔 지식인들의 무관심과 이와 같은 지적 유희가 한몫을 하는 면도 분명히 있기에, 마치 책임회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공부를 시작하게 되면서 이런 식의 유희는 해볼 수도 있고, 아니 해볼 만한 것이라 생각하게 됐다. 지식인들이라고 누가 이런 식으로 시를 공부하며 품위 있게 논단 말인가. 누군가는 일반인들이 술을 마시고 노는 것보다 훨씬 더 진탕하게 부어라마셔라 하며, 거기에 룸까지 빌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더럽게 놀기도 하니, 그것에 비하면 차라리 이런 식의 풍류가 천배는 낫다고 생각한다.
▲ 시회를 위해 스마트폰으로 한시를 찾아서 보고 있는 교수님과 아이들.
교수님은 “그렇지 않아도 어제 미리 시를 뽑아 놓으려 했는데, 어제 수업이 늦게 끝나는 바람에 하질 못했어요. 그래서 아까 잠깐 내소사 관련시들을 살펴보니, 다른 시는 고만고만한데 딱 이 시가 좋겠더라고, 이 시는 충분히 함께 보며 이야기를 나눠볼 만한 시이니 이걸 보도록 합시다.”라고 말씀하시며, 단릉 이윤영李胤永(1714~1759)의의 「내소사來蘓寺」라는 시를 ‘고전번역원DB’에서 찾아보도록 했다.
| 名區隨處我行催 | 명승지 가는 곳마다 나의 발길을 재촉하고 |
| 不害人間老草萊 | 인간세상에서 초래로 늙음을 나무라지 않네. |
| 翠嶽將頹龍瀑瀉 | 비취색 언덕이 약간 무너져 내려 용처럼 폭포가 쏟아지고 |
| 春雲欲變蜃樓開 | 봄 구름이 변하여 신기루가 열리려 하는 듯. |
| 壯觀滄海眸雙拭 | 푸른 바다의 장관에 두 눈을 부비고 |
| 悵望靑齊首獨擡 | 청제(山東), 머리 홀로 들려함을 맥없이 바라보네. |
| 十載塵愁輕似羽 | 10년의 티끌과 근심이 깃털처럼 가벼우니 |
| 可憐前夜月明㙜 | 애달프다, 어젯밤 명월대에서의 풍취가 『丹陵遺稿』 |
다시 임용 공부를 시작한 지 3개월 정도밖에 안 된데다가 ‘한시는 어렵다’는 관념까지 더해져 있어, 위의 시를 보는 순간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교수님의 해석을 하나하나 들으면 머릿속에 새겨 넣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그 당시엔 머릿속에 새겨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덧 2주가 흐르고 보니 해석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래서 위의 해석은 최대한 기억들을 짜 맞추고, 단서들을 조합하여 만든 어설픈 해석이다. 다시 교수님과 위의 시를 얘기할 기회가 있으면 그땐 좀 더 완벽한 해석을 써놓아야지. 어쨌든 완벽하진 않아도 전체적인 분위기는 전달될 것이니, 이걸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보도록 하자.
▲ 한시를 함께 얘기하며 각자의 생각을 나눈다. 이런 야유회는 난생 처음인데 정말 좋다.
사찰시의 과장법
교수님은 이 시는 내소사를 그린 다른 시들과는 매우 다르다고 하셨다. 우리야 한시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으니, 그게 보일 턱이 없다. 이럴 땐 한시 연구에 몰두하신 교수님의 어깨에 올라타 그 진면목을 감상하면 된다. 이래서 교학상장이 필요한 거다. 함께 보고 함께 얘기를 나누다 보면 서로가 성장하게 되니 말이다.
왜 여타 다른 시와 이 시가 차별화되는지 교수님은 간단명료하게 설명해주시더라.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무릎을 세게 그것도 한 번이 아닌 여러 번 친 나머지 무릎이 저릿할 정도였다. 그만큼 확 와 닿았고, 묘한 한시의 세계로 저절로 빠져들었다.
지금까지 사찰에 대한 시를 스터디 시간에 여러 편 봤었다. 그러다 보니 사찰에 대한 시를 볼 때마다 공통점이 보이더라. 사찰을 속세와 격절시키기 위해 엄청난 과장법을 쓰는 것이다. 깎아지른 언덕의 위태위태한 곳에, 구름이 가려져 거의 보이지 않는 곳에, 북두칠성을 손으로 잡을 만한 곳에 사찰이 있는 것처럼 묘사하는 것이다. 영화 『전우치』에 나오는 전우치의 사당은 누구도 닿을 수 없는 깎아지른 언덕 위에 덩그러니 혼자 있는데, 마치 사찰시에서 사찰의 위치를 읽고 있노라면 저절로 전우치의 사당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 영화 [전우치]의 사당. 마치 사찰시를 읽다 보면 이런 이미지가 떠오른다.
김지대金之岱의 「유가사에서 짓다題瑜伽寺」라는 시에선 ‘구름 사이로 난 끊어진 돌 비탈 예닐곱 리오, 하늘 끝까지 닿을 듯한 아득한 봉우리는 천만 겹이로구나.雲間絶磴六七里, 天末遙岑千萬峰.’라며 함련頷聯에서 사찰이 들어선 곳의 특징을 얘기하고 있다. 그런데 이 구절을 거짓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구절로 읽고 있으면 마치 엄청나게 높은 산 속의 콕 처박혀 있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평소엔 구름이 가득 껴서 사찰로 올라가는 길조차 보일 듯 말듯하고, 그 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천만 겹의 봉우리만이 아스라이 보인다고 표현했다. 와우~ 이런 곳에 있는 유가사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찾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상상만으로도 엄청난 스케일이 느껴지는데 진짜로 본다면 한 눈에 반해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쉽게도 시에서 묘사된 것과 같은 느낌의 유가사는 없다.
▲ 내소사에 와서 관음봉에 오르고 이 사찰을 얘기한 시를 함께 느껴본다. 그러니 내소사가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내소사를 직접 노래한 시중 가장 유명한 시를 한 번 보도록 하자. 정지상이 지은 「변산 소래사에서 짓다題邊山蘇來寺」라는 시에선 ‘옛길 적막하여 소나무뿌리 얽혀 있고 하늘은 가까워 북두칠성을 멋대로 만질 수 있을 듯하다古徑寂寞縈松根, 天近斗牛聊可捫.’라고 수련首聯에서 쓰고 있다. 1구야 내소사로 들어가는 길의 운치를 제대로 읊은 것이라 이론의 여지가 없겠지만, 2구에선 어찌나 씨게 구라를 쳤던지 놀랄 수밖에 없다. 북두칠성이 만져질 만한 높이라면 적어도 해발 800미터 이상의 산이라야 가능하지 않을까. 지리산 노고단에서 우주가 나에게 임박해 들어오는 경이로움을 경험하긴 했는데, 노고단은 해발 1.500M에 있는 곳이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내소사는 전혀 높은 곳에 있질 않아 시에서처럼 북두칠성은커녕 구름조차 만질 수가 없다. 이런 경우 『타짜』라는 영화에선 “어이~ 고광렬이~ 너는 첫 판부터 장난질이냐!”라는 대사가 나오는데 그걸 정지상에게 해주고 싶을 정도다.
그렇다면 이런 시들과 대조되는 이윤영의 시만의 특징은 무얼까? 그 내용은 다음 후기에 마저 이야기를 하고 이번 여행기를 마무리 짓도록 하겠다.
▲ 특히 정지상의 [소래사]라는 시를 읽으니, 이거 이거 고광렬이에게 하는 말을 내가 하고 싶어진다.
7. 이윤영의 내소사 시가 특별한 이유와 우리의 뒷풀이
사찰을 읊은 시라면 으레 있는 과장법에 대해선 저번 후기에서 살펴봤다. 하긴 여러 한시를 공부하다 보니 굳이 사찰시가 아니더라도 과장을 하는 경우가 숫하게 보이긴 한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동인시화』에선 이런 과장법에 대해 다루며 “이것은 말로 뜻을 해쳐선 안 되는 것으로 다만 뜻에 마땅히 할 뿐이다.是不可以辭害意, 但當意會爾.”라고 결론지으며 내용 전달에 더 탁월했다면 그건 ‘시적 허용’으로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 내소사 좋다. 내소사를 둘러보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지금이 좋다.
이윤영의 「내소사」란 시가 특별한 이유
이처럼 교수님은 사찰시에선 이런 과장법이 허용된다고 말씀해주셨다. 그래서 그런 구라를 씨게 칠수록 사찰의 탈속적인 이미지가 강화된다는 것이다. 그건 달리 말하면 굳이 그 절을 찾아가지 않더라도 누구나 사찰시를 지을 수 있다는 얘기다. 그저 세상과 완벽히 떨어진 사찰의 풍경을 묘사하면 되니 말이다. 그래서 사찰시엔 ‘주지의 인품, 청정공간으로써의 사찰 묘사, 그에 대비되는 속세인으로서의 욕망덩어리인 자신 묘사’가 꼭 들어간다고 알려주셨다.
하지만 『어우야담』에선 금강산에 대해 지은 정사룡의 시를 보면서 “그러나 다만 이 시는 비록 향림사나 정도사에서 지었어도 또한 아름다웠을 것입니다.但此詩, 雖於香林․淨土賦之亦佳.”라고 비꼬며 권근의 시가 제대로 금강산을 묘사한 시라 평가하며 직접 가보고 지은 시의 우수성을 높이 샀다.
| 名區隨處我行催 | 명승지 가는 곳마다 나의 발길을 재촉하고 |
| 不害人間老草萊 | 인간세상에서 초래로 늙음을 나무라지 않네. |
| 翠嶽將頹龍瀑瀉 | 비취색 언덕이 약간 무너져 내려 용처럼 폭포가 쏟아지고 |
| 春雲欲變蜃樓開 | 봄 구름이 변하여 신기루가 열리려 하는 듯. |
| 壯觀滄海眸雙拭 | 푸른 바다의 장관에 두 눈을 부비고 |
| 悵望靑齊首獨擡 | 청제(山東), 머리 홀로 들려함을 맥없이 바라보네. |
| 十載塵愁輕似羽 | 10년의 티끌과 근심이 깃털처럼 가벼우니 |
| 可憐前夜月明㙜 | 애달프다, 어젯밤 명월대에서의 풍취가 『丹陵遺稿』 |
바로 이런 관점으로 이 시를 보면 깜짝 놀라게 된다. 어디에도 사찰이나 주지스님에 대한 묘사가 없을 뿐 아니라, 3구의 직소폭포에 대한 묘사는 정말 폭포를 본 사람만이 쓸 수 있을 정도로 탁월하게 묘사했기 때문이다. 사찰시이지만 사찰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고 우리가 등산하며 봤던 모습들을 아주 핍진하게 묘사하고 있다. 5구에선 서서히 오르며 봤던 서해의 장엄한 모습이, 6구의 청제靑齊란 산동의 다른 표현으로 중국의 주인이 明에서 淸으로 바뀐 것에 대해 지식인으로서 느꼈을 법한 무상함, 절망감이 짙게 배어 있다. 그리고 8구에선 아예 어젯밤 변산을 돌아보며 느꼈던 감상을 ‘애달프다’라는 감상으로 표현하고 있으니, 이 시를 읽는 것만으로도 내소사 부근의 풍경이 그대로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러니 이 시야말로 상상 속의 사찰을 묘사한 여타 시와는 달리 진짜 이곳에 와서 이곳을 온전히 느낀 자만이 쓸 수 있는 시이고, 그렇기 때문에 단릉과 우리는 400년의 세월이 떨어져 있음에도 바로 옆에서 얘기를 나누듯 가깝게 느낄 수 있는 시다. 바로 이와 같은 이유로 교수님은 계곡에서 시회를 열자고 제안하셨나 보다. 바로 이게 한문공부를 하는 즐거움이고, 옛 사람을 친구 삼는 즐거움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서일 거다.
▲ 단릉도 이 광경을 보며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바뀐 시대를 한탄했던 것이다.
내려가기 위해 산에 오른다
1시간 30분 정도 시회를 갖고 다시 하산을 시작했다. 거기서 조금만 더 내려가니 바로 직소폭포가 보이더라. 여기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저 강천산의 폭포 정도를 생각했다. 그런데 여긴 아예 스케일이 다르더라. 정말 깎아지른 언덕에 가운데 부분이 약간 파여 그쪽으로 폭포수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단릉의 시에선 “비취색 언덕이 약간 무너져 내려 용처럼 폭포가 쏟아지고(翠嶽將頹龍瀑瀉)”라고 표현했는데, 직소폭포를 직접 보니 그 시가 더 와 닿더라.
거기서 더 내려가니 둑을 막아놔서 산 한 가운데 호수처럼 물이 고여 있는 곳이 있다. 직소천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데 산 중턱에서 호수를 만나니 감회가 남달랐다.
▲ 직소폭포를 보니 단릉의 시가 더 와 닿는다. 그리고 산 중턱에 물이 고여 있으니 이색적인 느낌이다.
내려오는 길은 무척 수월했고 어느덧 시간은 4시가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여유롭게 내려가 내변산탐방지원센터에 도착했는데 그때 시간은 4시 33분이었다. 부안으로 나가는 시내버스가 있는데 바로 3분 전에 떠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버스는 6시 25분에 있으니,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타야만 했다. 거금이 들어가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택시를 타고 부안으로 28.000원이란 거금을 내고 나왔다.
▲ 우리가 걸었던 경로. 그리고 버스 시간을 알아야 거금을 쓰는 불상사가 안 생긴다.
한문에 대한 열정을 한가득 품게 한 뒷풀이
마지막 직행버스는 7시 38분에 있다고 한다. 아직 2시간 정도의 여유가 충분히 있기에 여기서 뒷풀이를 하기로 했다.
시장상인에게 중국집 중 맛있는 집을 물어보니, 위치를 알려줬다. 그래서 다음 지도를 켜고 그곳을 찾아갔다. 교수님은 공통 메뉴로 팔보채와 잡채를 시켜주셨고 각자 하나씩 자신이 먹을 것을 시켜준 다음에 고량주와 소주까지 원 없이 시켜주셨다. 등산 후에 함께 하는 회식은 뭘 먹어도, 심지어 그냥 맥주 한 잔을 마신다 해도 충분한데, 우린 최고의 음식들로 화려한 뒷풀이를 하고 있는 셈이다.
뒷풀이 자리에서 나눈 주제들도 깊게 생각하고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었다. 간단히 나열해 보자면, ‘실학 VS 성리학’이란 이분법으로 조선시대 학문을 논하는 풍토, ‘예전 방식으로 공부하는 풍토 VS 여러 자료를 참고하며 공부하는 풍토’, 그리고 주희와 성리학을 배격하는 풍토에 대한 반기 등이었다. 맘 같아선 이때 나눈 이야기들도 하나하나 풀어보며 어떤 점들이 문제가 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한문공부를 하고 생각을 정리해야 하는지 기술하고 싶지만, 이미 7편이나 쓴 후기에 덧붙이는 것은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들기에 키워드 정도로만 써놓고 나중에 기회가 될 때 그에 대해 써보기로 하겠다.
▲ 군침 돈다. 음식도 맛있고 이야기는 더욱 맛있다.
재미란, 그저 화려하고 색다르며 값비싼 것에만 있지 않다. 이처럼 소소하고 치열하며 일상적인 평범한 하루 속에도 있을 수 있으니 말이다. 지금은 이때처럼 그저 평범한 일상 속에 의미를 찾고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흥분 속에 색다름을 모색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싶다. 산에 올라 시를 배웠고, 술을 마시며 인생을 알아간다.
▲ 해질녘의 벌판. 오늘 하루 잘 익었구나.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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