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한 최북 칠칠의 이야기
최칠칠전(崔七七傳)
남공철(南公轍)
최칠칠에 대한 기본 정보
崔北七七者, 世不知其族系貫縣. 破名爲字, 行于時. 工畵眇一目, 嘗帶靉靆半, 臨帖摹本.
술을 좋아한 최북의 일화들
嗜酒喜出遊. 入九龍淵, 樂之甚, 飮劇醉, 或哭或笑. 已又叫號曰: “天下名人崔北, 當死於天下名山.” 遂翻身躍至淵, 旁有救者, 得不墮. 舁至山下盤石, 氣喘喘臥, 忽起劃然長嘯, 響動林木間, 棲鶻皆磔磔飛去.
七七飮酒, 常一日五六升. 市中諸沽兒携壺至, 七七輒傾其家書卷紙幣, 盡與取之. 貲益窘, 遂客遊西京ㆍ萊府賣畵, 二府人持綾綃, 踵門者相續.
최북의 예술관
人有求爲山水, 畵山不畵水. 人怪詰之, 七七擲筆起曰: “唉, 紙以外皆水也.”
畵得意而得錢少, 則七七輒怒罵, 裂其幅不留; 或不得意而過輸其直, 則呵呵笑, 拳其人, 還負出門, 復指而笑, 彼竪子不知價, 於是, 自號毫生子.
칠칠의 타협할 줄 모르는 성미
七七性亢傲不循人. 一日與西平公子圍碁賭百金, 七七方勝, 而西平請易一子. 七七遽散黑白, 斂手坐曰: “碁本於戲, 若易不已, 則終歲不能了一局矣.” 後不復與西平碁.
嘗至貴人家, 閽者嫌擧姓名, 入告崔直長至. 七七怒曰: “胡不稱政丞而稱直長?” 閽者曰: “何時爲政丞?” 七七曰: “吾何時爲直長耶? 若欲借啣而顯稱我. 則豈可捨政丞而稱直長耶?” 不見主人而歸.
최북의 실력
七七畵日傳於世, 世稱崔山水. 然尤善花卉翎毛怪石枯木, 狂草戲作, 翛然超筆墨家意匠.
남공철과 최북의 인연
始余因李佃識七七. 嘗與七七遇山房, 剪燭寫澹墨竹數幅. 七七爲余言國家置水軍幾萬人, 將以備倭, 倭固習水戰, 而我俗不習水戰. 倭至而我不應, 則彼自渰死爾. 何苦三南赤子騷擾爲!” 復取酒打話, 窻至曙. 世以七七爲酒客爲畵史, 甚者目以狂生. 然其言時有妙悟實用者類此.
李佃言七七好讀『西廂記』ㆍ『水滸傳』諸書, 爲詩亦奇古可諷, 而秘不出云. 七七死於京師旅邸, 不記其年壽幾何. 『金陵集』 卷之十三
해석
최칠칠에 대한 기본 정보
崔北七七者, 世不知其族系貫縣.
칠칠 최북(1712~1786)은 세상에 가계와 관향(貫鄕)이 알려지지 않았다.
破名爲字, 行于時.
이름을 파자하여 자로 삼고서 그때에 다녔다.
工畵眇一目, 嘗帶靉靆半, 臨帖摹本.
그림을 잘 그렸지만 한쪽 눈이 흐릿하여 항상 돋보기를 휴대하고서 화첩(畫帖)을 임모(臨摹)했다.
술을 좋아한 최북의 일화들
嗜酒喜出遊.
술을 즐기고 나가 노닐길 좋아했다.
入九龍淵, 樂之甚,
구용연에 들어가선 매우 즐거운 나머지
飮劇醉, 或哭或笑.
술을 엄청 마시더니 간혹 곡을 하고 간혹 웃기도 했다.
已又叫號曰: “天下名人崔北,
이윽고 또한 절규하며 “천하의 명인인 최북은
當死於天下名山.”
마땅히 천하의 명산에서 죽으리라.”고 말하고선,
遂翻身躍至淵,
마침내 몸을 뒤집은 채 달려가 구용연에 이르렀지만
旁有救者, 得不墮.
곁에 구해주는 사람이 있어 떨어지진 않았다.
舁至山下盤石, 氣喘喘臥,
사람에게 들려져 산 아래 평평한 바위에 이르러서야 헐떡이며 누워 있다가,
忽起劃然長嘯,
갑자기 일어나 쪼개듯 길게 휘파람을 부니
響動林木間, 棲鶻皆磔磔飛去.
수풀 사이에서 진동이 울려 자고 있던 매가 모두 까악까악대며 날아갔다.
七七飮酒, 常一日五六升.
칠칠은 술을 마시되 항상 하루에 5~6되나 마셨다.
市中諸沽兒携壺至,
저자의 모든 술병을 파는 아이들이 오면
七七輒傾其家書卷紙幣, 盡與取之.
칠칠은 문득 집의 책과 종이, 폐백을 탕진하며 모두 사버렸다.
貲益窘, 遂客遊西京ㆍ萊府賣畵,
그래서 재산은 더욱 곤궁해져 마침내 서경과 동래로 노닐며 그림을 파니
二府人持綾綃, 踵門者相續.
두 지역의 사람이 비단을 가지고 방문하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다.
최북의 예술관
人有求爲山水, 畵山不畵水.
어떤 사람이 산수화를 그려 달라 했는데 최북은 산만 그리고 물은 그리질 않았다.
人怪詰之, 七七擲筆起曰:
사람이 그를 힐난하자 최북은 붓을 던지고 일어나 말했다.
“唉, 紙以外皆水也.”
“이 사람아! 종이의 밖이 모두 물일세.”
畵得意而得錢少,
그림이 의도대로 그려졌는데 돈이 적으면
則七七輒怒罵, 裂其幅不留;
최북은 문득 화를 내며 화폭을 찢어 남겨 두질 않았다.
或不得意而過輸其直,
간혹 의도대로 되지 않았는데 값을 지나치게 가져오면
則呵呵笑, 拳其人, 還負出門,
허허 웃고선 그 사람을 밀치며 도로 짊어지고 문으로 나가려다가
復指而笑, 彼竪子不知價,
다시 가리켜 웃으며, “저 애송이가 값어치를 알지 못하는 구나.”라고 말했으니
於是, 自號毫生子.
이 때문에 ‘호생자’라 자호하기도 했다.
칠칠의 타협할 줄 모르는 성미
七七性亢傲不循人.
칠칠은 성격이 강인하고 오만하여 사람들이 따르질 않았다.
一日與西平公子圍碁賭百金,
하루는 서평군 이요(李橈)와 100냥의 금을 걸고 바둑을 두는데
七七方勝, 而西平請易一子.
칠칠이 곧 이기려 하자, 서평군이 한 알을 바꾸길 청했다.
七七遽散黑白, 斂手坐曰:
칠칠은 갑자기 흑백 돌을 흩어버리고서 손을 정돈하고 말했다.
“碁本於戲, 若易不已,
“바둑은 본래 놀이거리인데 만약 바둑돌 바꾸길 멈추질 않는다면
則終歲不能了一局矣.”
삶이 마치도록 한 판도 끝낼 수 없을 것이오.”
後不復與西平碁.
후에 다시는 서평군과 바둑을 두지 않았다.
嘗至貴人家, 閽者嫌擧姓名,
일찍이 부잣집에 이르니 문지기가 성명을 거론하길 꺼리며
入告崔直長至.
들어가 “최직장이 왔습니다.”라고 알렸다.
七七怒曰: “胡不稱政丞而稱直長?”
칠칠이가 “어째서 정승이라 말하지 않고 직장이라 말했는가?”라고 화를 냈다.
閽者曰: “何時爲政丞?”
그러자 문지기가 “언제 정승이 되셨습니까?”라고 물었고
七七曰: “吾何時爲直長耶?
칠칠이 말했다. “내가 언제 직장이 되었던가?
若欲借啣而顯稱我.
만약 직함을 빌려주어 나를 드러내어 일컬으려 했다면
則豈可捨政丞而稱直長耶?”
어찌 정승을 버리고 직장이라 일컫는단 말인가?”
不見主人而歸.
그러고선 주인을 보지 않고 돌아갔다.
최북의 실력
七七畵日傳於世, 世稱崔山水.
칠칠의 그림이 날로 세상에 전해져 세상에선 ‘최산수’라 일컬어졌다.
然尤善花卉翎毛怪石枯木,
그러나 더욱 꽃, 짐승, 괴석, 고목을 잘 그렸고
狂草戲作, 翛然超筆墨家意匠.
미친 듯 써내간 초서의 빠르기가 작가들의 솜씨를 뛰어넘었다.
남공철과 최북의 인연
始余因李佃識七七.
처음에 나(南公轍,1760~1840)는 이단전(李亶佃, 1755~1790) 때문에 칠칠을 알게 됐다.
嘗與七七遇山房, 剪燭寫澹墨竹數幅.
일찍이 칠칠과 산방에서 만나 촛불을 자르며 담묵으로 대나무 여러 폭을 그리기도 했었다.
七七爲余言國家置水軍幾萬人, 將以備倭,
칠칠은 나에게 말했었다. “나라에서 수군 몇 만 명을 두어 장차 왜적을 대비하겠다고 하는데,
倭固習水戰, 而我俗不習水戰.
왜적은 본래 해전에 능숙하지만 우리나라는 풍속 상 해전에 능숙하질 못합니다.
倭至而我不應, 則彼自渰死爾.
왜적이 와도 우리가 싸우질 않으면 저들은 스스로 물에 빠져 죽을 뿐입니다.
何苦三南赤子騷擾爲!”
어찌하여 삼남(三南: 전라ㆍ경상ㆍ충청)의 헐벗은 백성을 괴롭혀 소란스럽게 하십니까!”
復取酒打話, 窻至曙.
다시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새에 창은 밝아오고 있었다.
世以七七爲酒客爲畵史,
세인들은 칠칠이를 주정뱅이라느니, 그림쟁이라느니 말하며
甚者目以狂生.
심한 사람은 미친놈이라고까지 지목한다.
然其言時有妙悟實用者類此.
그러나 그 말이 때때로 오묘하기도 하고 실용적이기도 한 것이 이와 같다.
李佃言七七好讀『西廂記』ㆍ『水滸傳』諸書,
이단전은 말했었다. “최칠칠은 『서상기』와 『수호전』 등 여러 책을 읽었으며,
爲詩亦奇古可諷, 而秘不出云.
시를 지은 것 또한 기이하고 예스러워 읊을 만한데도 감춰두고 내놓질 않는다.”
七七死於京師旅邸, 不記其年壽幾何. 『金陵集』 卷之十三
칠칠은 한양의 여관에서 죽었는데 나이가 몇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 손가락에 먹을 묻혀 그린 게.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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