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장된 유학자의 이상이 거부감을 낳다
금남야인(錦南野人)
정도전(鄭道傳)
유학자란 도대체 뭐하는 사람인가?
儒家者流談隱先生, 居錦南.
一日錦南野人, 有不聞儒名者, 求見先生, 謂從者曰: “吾儕野人, 鄙不遠識. 然吾聞居乎上, 治國政曰: ‘卿大夫’; 居乎下治田,曰: ‘農’; 治器械曰: ‘工’; 治貨賄曰: ‘商賈’. 獨不知有所謂,儒者. 一日吾鄕人, 讙然相傳, 儒者至. 儒者至, 乃夫子也. 不知夫子治何業, 而人謂之儒歟?”
유학자는 학문으로 자연을 꿰뚫는다
從者曰: “抑,所治廣矣. 其學之際天地也, 觀陰陽之變, 五行之布, 日月星辰之照臨, 察山嶽河海之流峙, 草木之榮悴, 以達鬼神之情, 幽明之故.
유학자는 관계의 이치를 다 안다
其明倫理也, 知君臣之有義, 父子之有恩, 夫婦之有別, 長幼朋友之有序有信, 以敬之親之經之序之信之.
역사의 흐름 속에 옳고 그름을 안다
其達於古今也, 自始有文字之初, 以至今日, 世道之升降, 俗尙之美惡, 明君汙辟, 邪臣忠輔, 言語行事之否臧, 禮樂刑政之沿革得失, 賢人君子之出處去就, 無不貫.
불교와 도교의 잘못을 깨우쳤다
其趨向之正也, 知性之本乎天命, 四端ㆍ五典,萬事萬物之理. 無不統其中而非空之謂也; 知道之果於人生日用之常, 包乎天地有形之大, 而非無之謂也. 於是辨佛ㆍ老邪道之害, 以開百世聾瞽之惑, 折時俗功利之說, 以歸夫道誼之正. 其君用之則上安而下庇, 其子弟從之則德崇而業進. 其窮而不遇於時, 則修辭以傳諸後, 其自信之篤也. 寧見非於世俗, 而不負聖人垂敎之意; 寧窮餓其身, 顚躓困厄, 而不犯不義, 以爲是心之羞愧. 此儒者之業, 而夫子之所欲治也.”
유학자를 만나고 싶던 마음이 사라지다
野人曰: “侈哉言也! 其無奈誇乎. 吾聞諸吾鄕之老曰: ‘無其實而有其名, 鬼神惡之; 雖有其實, 自暴於外 則爲人所怒. 故以賢臨人則人不與, 以智矜人則人不助, 是以君子愼之.’ 子從夫子遊, 而其言若是, 夫子可知已. 其不有鬼惡, 必有人怒乎. 嗚呼! 而夫子殆矣. 吾不願見, 懼及也.” 奮袖而去. 『東文選』 卷之一百七
▲ 여기서 묘사된 유학자에 대한 얘기를 듣고 있으면 절로 [호질]의 양반에 대한 범의 정의가 생각난다. 절로 손발이 오그라드는 그래서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해석
유학자란 도대체 뭐하는 사람인가?
儒家者流談隱先生, 居錦南.
유학자의 무리인 담은선생이 금남에 살게 됐다.
一日錦南野人, 有不聞儒名者,
하루는 금남의 촌사람으로 유학자란 명칭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있었는데
求見先生, 謂從者曰:
선생을 뵙고자 하여 시중드는 사람에게 말했다.
“吾儕野人, 鄙不遠識.
“나는 촌사람으로 비루하여 원대한 식견이 없습니다.
然吾聞居乎上, 治國政曰: ‘卿大夫’;
그러나 제가 들으니 윗자리에 있으며 국정을 하는 이를 경대부라하고
居乎下治田,曰: ‘農’;
아랫자리에 있으면서 밭가는 이를 농부라 하며,
治器械曰: ‘工’; 治貨賄曰: ‘商賈’.
기계를 만드는 이를 장인이라 하고, 재물을 다루는 이를 상인이라 한다고 합니다.
獨不知有所謂,儒者.
그런데 유독 이른바 유학자라는 것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一日吾鄕人, 讙然相傳, 儒者至, 儒者至,
하루는 고을사람들이 기뻐하며 서로 전해주길 유학자가 온다, 유학자가 온다고 했으니,
乃夫子也.
그 사람이 바로 담은선생이었습니다.
不知夫子治何業, 而人謂之儒歟?”
알지 못하겠습니다. 부자께선 어떤 일을 하시기에 사람들이 유학자라고 하는 것입니까?”
유학자는 학문으로 자연을 꿰뚫는다
從者曰: “抑,所治廣矣.
시중드는 사람이 말했다. “아! 하시는 것이 광범위합니다.
其學之際天地也, 觀陰陽之變, 五行之布,
학문이 천지에 닿는 것으로는, 음양의 변화와 오행의 포괄됨,
日月星辰之照臨,
해와 달과 별이 비춰오는 것을 관찰하고,
察山嶽河海之流峙, 草木之榮悴,
산악의 솟음과 하해의 흐름, 풀과 나무의 무성하거나 마름을 살펴
以達鬼神之情, 幽明之故.
귀신의 정, 삶과 죽음의 이유를 통달합니다.
유학자는 관계의 이치를 다 안다
其明倫理也, 知君臣之有義, 父子之有恩, 夫婦之有別,
윤리를 밝힘으로는 군신에겐 의가 있고, 부자에겐 은혜가 있으며, 부부에겐 분별이 있고,
長幼朋友之有序有信,
어른과 어린아이에겐 차례가, 벗에겐 믿음이 있다는 것을 알아
以敬之親之經之序之信之.
공경하고 친히 하며 경계 짓고 차례 지으며 믿게 합니다.
역사의 흐름 속에 옳고 그름을 안다
其達於古今也, 自始有文字之初, 以至今日,
고금을 통달하기로는 문자가 생긴 초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世道之升降, 俗尙之美惡,
세도가 성할 것과 쇠한 것, 풍속이 아름답거나 추한 것,
明君汙辟, 邪臣忠輔,
현명한 임금과 더러운 임금, 간사한 신하와 충성스런 신하,
言語行事之否臧, 禮樂刑政之沿革得失,
말과 일에 선한 것과 선하지 않은 것, 예악형정의 연혁과 득실,
賢人君子之出處去就, 無不貫.
현인과 군자의 출처거취를 꿰뚫지 않음이 없습니다.
불교와 도교의 잘못을 깨우쳤다
其趨向之正也, 知性之本乎天命,
나아가는 방향의 바름으로는 성(性)이 천명에 근본하고
四端ㆍ五典,萬事萬物之理.
사단(四端)과 오전(五典)이 모든 일과 모든 사물의 이치가
無不統其中而非空之謂也;
내면에서 통솔되지 않음이 없으니, 불가의 말인 ‘허(虛)’가 아님을 압니다.
知道之具於人生日用之常,
도는 인생과 일상생활의 떳떳함에 갖춰졌고
包乎天地有形之大, 而非無之謂也.
천지의 형체가 있는 것 중 큰 것을 포괄하였으니 도가의 말인 ‘무(無)’가 아님을 압니다.
於是辨佛ㆍ老邪道之害,
이에 불교와 도교, 간사한 도의 해악을 분별하여
以開百世聾瞽之惑,
백대의 귀머거리나 봉사의 미혹됨을 열어주었고,
折時俗功利之說, 以歸夫道誼之正.
시속의 공리를 끊어 도의의 바름으로 돌렸습니다.
其君用之則上安而下庇,
임금이 그를 등용하면 윗사람은 편안해지고 아랫사람은 의지하며
其子弟從之則德崇而業進.
자제가 그를 따르면 덕이 숭상되고 하는 일이 진보됩니다.
其窮而不遇於時, 則修辭以傳諸後, 其自信之篤也.
궁벽하여 때를 만나지 못하면 말을 닦아 후세에 전하니 스스로 믿는 것이 독실해집니다.
寧見非於世俗, 而不負聖人垂敎之意;
차라리 세속에 비난당할지언정 성인이 가르친 뜻을 저버리진 않고,
寧窮餓其身, 顚躓困厄,
차라리 그 몸을 곤궁하게 하고 굶주려 넘어지고 괴로움을 당할지언정
而不犯不義, 以爲是心之羞愧.
불의를 범하여 이 마음에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습니다.
此儒者之業, 而夫子之所欲治也.”
이것이 유학자의 일로 부자께서 다스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유학자를 만나고 싶던 마음이 사라지다
野人曰: “侈哉言也! 其無奈誇乎.
촌사람이 말했다. “사치스럽구나 말이여. 어찌 과장이 없겠습니까.
吾聞諸吾鄕之老曰:
내가 우리 시골 할아범에게 들었습니다.
‘無其實而有其名, 鬼神惡之;
‘실제가 없는데도 이름이 나면 귀신이 그를 미워하고,
雖有其實, 自暴於外 則爲人所怒.
비록 실제가 있더라도 스스로 밖으로 드러내면 사람에게 화를 당한다.
故以賢臨人則人不與,
그러니 어짊으로 남에게 다가가면 사람들이 함께 하지 않고,
以智矜人則人不助, 是以君子愼之.’
지혜로 사람에게 자랑하면 사람들이 돕질 않으니, 이런 이유로 군자는 신중히 해야 한다.’
子從夫子遊, 而其言若是, 夫子可知已.
당신은 부자를 따라 배웠는데도 그 말이 이와 같으니, 부자는 알만 합니다.
其不有鬼惡, 必有人怒乎.
귀신의 미움을 받진 않더라도, 사람의 화냄이 있을 것입니다.
嗚呼! 而夫子殆矣. 吾不願見, 懼及也.”
아! 부자는 위태롭군요. 나는 보길 원하지 않습니다. 재앙이 미칠까 두려우니 말이죠.”
奮袖而去. 『東文選』 卷之一百七
소매를 떨치고 떠나갔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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