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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한시미학, 28. 한시와 현대시, 같고도 다르게 - 5. 낯선 마을의 가을비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미학, 28. 한시와 현대시, 같고도 다르게 - 5. 낯선 마을의 가을비

건방진방랑자 2021. 12. 8.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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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낯선 마을의 가을비

 

 

앞산에 가을비

뒷산에 가을비

낯이 설은 마을에

가을 빗소리

이렇다 할 일 없고

기인 긴 밤

모과차(木瓜茶) 마시면

가을 빗소리

 

 

박용래 시인의 모과차. 일이 없어 긴 밤의 시간이 짓누르면 모과차를 마신다. 잠 안 오는 밤 보글보글 화로에 주전자를 얹어 놓고, 모과차를 끓인다. 훈내 속에 코를 박고 있자니 마음이 따뜻하다. 한 김 식혀 한 모금 머금어 내릴 때, 내 귀에는 문득 가을 빗소리가 들려온다. 앞산과 뒷산에서 갈잎을 툭툭 치는 가을 빗소리. 처음 가본 낯선 마을, 외딴 여관방에서 혼자 누워 밤새 듣던 그 가을 빗소리가 자꾸만 들려온다. 오늘도 그 빗소리 듣자고 모과차를 끓인다.

 

旅館殘燈曉 孤城細雨秋 여관, 가물대는 등불, 새벽 외론 성, 부슬비, 가을.
思君意不盡 千里大江流 그대 생각 가없고 천리에 큰 강물 흐른다.

 

월산대군의 기군실(寄君實)이란 작품이다. 벗에게 부친 시다. 12구는 토막토막 명사로만 이어 놓았다. 서술어 없이도 의미는 행간에 고여 넘친다. 아무도 없는 외로운 성이다. 부슬부슬 가을비는 청승스레 내린다. 외론 여관 가물대는 등불 아래 혼자 앉아 있다. 새벽이다. 벗을 향한 그리움에 밤을 꼬박 새웠다. 가눌 길 없는 그리움의 깊이를 천리를 흘러가는 큰 강물의 흐름에 견주었다.

 

박용래 시인이 이 한시를 읽었느냐 아니냐는 이 경우 그리 중요한 문제가 못 된다. 모과차낯이 설은 마을고성(孤城)’으로, ‘가을비세우추(細雨秋)’로 대응한다. 3구의 사군의부진(思君意不盡)’기인 긴 밤으로 호응한다. 그러나 천리대강류(千里大江流)’모과차 마시면이 맞놓임으로써 두 작품은 같지만 다르고, 다르면서 같게 되었다. 그리움의 매재(媒材)가 다를 뿐 주제와 분위기, 의경 면에서 두 작품은 같다.

 

이렇듯 현대시 몇 수와 한시 몇 수를 나란히 읽었다. 둘이 만나는 방식은 경우마다 다르다. 한시와 현대시의 만남을 한 두 구절의 표현상 유사함으로는 말할 수 없다. 윤곤강이 그의 작품 속에서 숱하게 고려가요를 인용하고 있지만, 그것은 갖다 붙인 것일 뿐 정서적 울림이 없다. 신석초의 바라춤과 다른 점이다. 한시와 현대시도 그렇다. 겉모습의 유사함만 가지고 한시와의 유사성을 말한다면, 그것은 껍데기의 비슷함일 뿐이다.

 

모방에도 차원이 있다. 모동심이(貌同心異)의 모방이 있고, 심동모이(心同貌異)의 모방이 있다. 겉모습만 비슷하고 알맹이는 딴판인 것은 모동심이다. 하급의 모방이다. 겉보기엔 전혀 다른데 알맹이는 같은 것은 심동모이다. 우리가 말하는 모방, 우리에게 의미있는 모방은 심동모이의 모방이다. 심동모이라야 비로소 영향을 운운할 수 있다. 껍데기만으로는 안 된다. 상동구이(尙同求異), 같음을 숭상하되, 다름을 추구한다. 같지만 다르고, 다르기에 같다는 말이다. 과거와 현재는 이렇게 만난다. 한시와 현대시도 그렇다.

 

 

 

 

인용

목차

1. 동서양의 수법 차이

2. 한시와 모더니즘

3. 지훈과 목월의 거리

4. 밤비와 아내 생각

5. 낯선 마을의 가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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