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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한시미학, 28. 한시와 현대시, 같고도 다르게 - 3. 지훈과 목월의 거리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미학, 28. 한시와 현대시, 같고도 다르게 - 3. 지훈과 목월의 거리

건방진방랑자 2021. 12. 8.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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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지훈과 목월의 거리

 

 

차운 산 바위 위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 리.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조지훈의 완화삼(玩花衫)이다. ‘완화삼은 글자 그대로 풀면 꽃을 구경하는 적삼이다. 꽃구경하는 나그네란 뜻이다. 시 속에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에서 따왔다. 완화삼의 첫 연, “차운 산 바위 위에 하늘은 멀어는 두목(杜牧)산행(山行)1, ‘비탈진 바위 길에 찬 산 멀리 오르는데[遠上寒山石徑斜]’를 단번에 떠올린다. 다만 시의 감정이 다소 과잉되어 한시의 말하기 방식과 멀어졌다. ‘차운’, ‘구슬피’, ‘울음 운다’, ‘다정하고 한 많음’, ‘병인 양하여’, ‘고요히’, ‘흔들리고등이 그것이다. ‘저녁노을이여’, ‘꽃은 지리라’, ‘흔들리며 가노니의 개방형, 영탄형의 발화로 시상은 응축되고 수렴되는 대신 확산되어 흩어진다. 이 시를 받고 박목월은 나그네로 화답했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대상에 접근하는 두 시인의 태도는 사뭇 다르다. 오히려 목월의 시가 완연한 한시풍이다. 똑 떨어지는 명사로 맺은 매 연의 종결과, 75조의 규칙적인 가락이 살려내는 리듬은 농축된 시상을 맺어준다. ‘외줄기외로움저녁놀그리움을 말할 뿐,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양 하여라고 직접 설명하지 않았다. ‘타는것은 시인의 마음이 아니라 저녁놀이다. 외로운 것은 나그네가 아니라 남도 삼백리길이다.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로 젖어들지 않는다. 길이 칠백 리에서 삼백 리로 줄었는데도, 끌리는 여운의 길이는 몇 배 더 길다.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은 배경으로만 깔리는데,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노을이여는 그 영탄적 발성으로 나그네의 젖은 소매를 물들인다.

 

 

한시도 지을 줄 알았고 예스러운 표현을 즐겨 쓴 조지훈의 시보다, 박목월의 시가 한시의 기맥에 더 닿아 있다. 사실 청록파 세 사람 중에 한시의 정서에 가장 밀착되어 있는 시인은 단연 박목월이다. 윤사월이나 산도화는 조촐한 왕유(王維) 풍의 5언절구에 가깝다.

 

 

흰 달빛

자하문(紫霞門)

 

달안개

물소리

 

대웅전(大雄殿)

큰 보살

 

바람 소리

솔 소리

 

범영루(泛影樓)

뜬 그림자

 

흐는히

젖는데

 

흰 달빛

자하문

 

바람소리

물소리

 

 

박목월의 불국사. 작품 전체는 흐는히 젖는데를 제외하고 모두 명사구만이다. 달빛 어린 자하문은 안개에 잠겨 물소리만 들린다. 대웅전 큰 보살상을 솔바람이 휘돌아 나간다. 범영루 뜬 그림자는 달빛에 젖고, 자하문엔 온통 바람 소리 물소리뿐이다. 시인은 다른 한 마디 보태지 않는다. 보여줄 따름이다. 그런데도 안개 낀 달밤, 불국사의 몽환적 분위기 속에서 바람소리 물소리가 풍경으로 되살아난다. 마법 같다.

 

원나라 때 시인 마치원(馬致遠)의 사() 추사(秋思)와 견줘 읽어보자.

 

枯藤老樹昏鴉 앙상한 등나무, 늙은 나무, 저물녘 까마귀
小橋流水人家 작은 다리, 흐르는 물, 사람 사는 집.
古道西風瘦馬 옛 길, 가을 바람, 비쩍 마른 말.
夕陽西下 석양은 지고
斷腸人在天涯 애끊는 사람은 하늘 가에.

 

역시 서술어는 내려오고뿐이다. 나머지는 토막토막 명사만 잇대었다. 황혼 무렵이다. 마른 등나무 늙은 나무 등걸에 까마귀가 내려앉아 운다. 작은 다리 아래로 물이 졸졸 흘러간다. 물길 따라 눈길 주니 멀리 인가가 보인다. 갈바람에 옛길엔 먼지만 날린다. 긴 여행에 피골이 상접한 말, 그 위에 앉아 길을 묻는 나그네. 해자 져서 그는 이제 묵어갈 곳을 찾는다. 고개 돌려 고향 쪽 하늘을 보면 애끓으며 자신의 안위를 걱정할 아내 모습이 떠오른다. 풀면 이렇듯 진진한 사연인데 시인은 끝까지 말을 아껴 여백을 넓혔다.

 

두 작품 모두 서술어 없이 명사들 저희끼리 포개져 놓였다. 박목월의 시가 갖는 한시와의 천연성은 좀 더 깊이 있게 다뤄볼 필요가 있다.

 

 

 

 

인용

목차

1. 동서양의 수법 차이

2. 한시와 모더니즘

3. 지훈과 목월의 거리

4. 밤비와 아내 생각

5. 낯선 마을의 가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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