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한시와 현대시, 같고도 다르게
1. 동서양의 수법 차이
조지훈은 「또 하나의 시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낮은 소리 가만히 그리웠냐 물어보니, 금비녀 매만지며 고개만 까닥까닥[低聲暗問相思否, 手整金𨥁少點頭].’ 여기에 동양의 수법이 있다. 서양의 시인은 이렇게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도 당신을 사랑했어요, 한 시도 잊을 수 없어요 하고 빨간 입술을 내밀었을 것이다. 어느 것이 낫다는 것은 별문제로 하고라도 표현 방법에서도 동양의 수법은 신비롭다.
이 동양의 수법이란 곧 한시의 수법이다. 직접 말하지 않는다. 다 보여주지 않는다. 입상진의(立象盡意), 이미지를 세워 할 말을 대신한다. 현대시도 한 가지다. 현대시와 한시는 여러 모로 참 닮았다.
한시와 현대시의 관련을 찾는 가장 쉽고 분명한 방법은 표현의 유사로 논하는 것이다. 김상용의 「남으로 창을 내겠소」를 함께 감상한다.
남으로 창을 내겠소
밭이 한참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1934년 『문장』지에 발표한 작품이다. 남쪽으로 창을 낸 집에서 고작 한참갈이의 작은 뙈기밭에 강냉이를 심고, 괭이와 호미로 파고 갈며 살고픈 소박한 바람을 노래했다. 구름이 언덕 너머의 세계로 나를 꼬여도 그 유혹에는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새들의 노랫소리는 기대하지 않은 선물이다.
3연의 “왜 사냐건 웃지요”가 이 시의 압권이다. 이백(李白)의 「산중문답(山中問答)」의 1ㆍ2구에서 “‘날더러 무슨 일로 산에 사냐 묻길래, 웃고 대답 아니해도 마음 절로 한가롭다[問余何事棲碧山, 笑而不答心自閑]’고 노래했다. 이백이 한자로 14자나 들여 한 말을 그는 한글 단 7자로 표현했다. 놀라운 압축능력이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밋하다. 3연이 시 속에 자리 잡는 순간 이백의 「산중문답(山中問答)」이 같이 들어온다. 이 좋은 도시를 떠나 왜 굳이 그런 곳에서 살려 하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그저 웃겠다고 했다. 그는 도회의 찌든 삶 속에서 구름이 언덕을 넘어가고 강냉이가 땀과 함께 익어가는 건강한 삶을 소망했다. 이 시가 수록된 시집이 『망향』인 것으로 보아, 시 속의 꿈은 말 그대로 희망사항에 그치고 말았던 듯하다.
왜 산에 사느냐고 묻는데, 딱히 할 말이 없어 그저 웃고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전혀 답답하지 않고 오히려 더 여유롭다. 복사꽃이 물위로 떠가는 것을 보니 인간 세상이 아닌 무릉도원이 바로 여기가 아니겠느냐고 했다.
이수복의 「봄비」를 읽는다.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오것다”에서 정지상(鄭知常) 「송인(送人)」의 “비 개인 긴 둑에 풀빛 고운데[雨歇長堤草色多]”를 떠올리는 것은 무척이나 자연스럽다. 그렇다고 우연히 같게 된 한 구절 때문에 작품 전체를 영향 관계로 설명하는 것은 왠지 개운치 않다. 표현의 유사성만으로는 상호 영향관계를 입증하기 어렵다.
2. 한시와 모더니즘
벌목정정(伐木丁丁) 이랬거니 아람도리 큰 솔이 베어짐 직도 하이 골이 울어 메아리 소리 쩌르렁 돌아옴직도 하이 다람쥐도 좇지 않고 멧새도 울지 않아 깊은 산 고요가 차라리 뼈를 저리 우는데 눈과 밤이 종이보다 희고녀! 달도 보름을 기다려 흰 뜻은 한밤 이 골을 걸음이련가? 웃절 중이 여섯 판에 여섯 번 지고 웃고 올라간 뒤 조찰히 늙은 사나이의 남긴 내음새를 줏는가? 시름은 바람도 일지 않는 고요에 심히 흔들리노니 오오 견디련다. 차고 올연히 슬픔도 꿈도 없이 장수산 속 겨울 한밤 내~
이번에는 정지용의 「장수산(長壽山) 1」을 읽어본다. 아름드리 큰 솔을 도끼로 찍어내면 쩡쩡 소리를 내며 쓰러질 것만 같다. 메아리 소리도 유난히 크게 들릴 듯한 공간이다. 산은 깊어서 고요하다. 종이보다 흰 눈 위에 보름의 달빛이 환한 밤. 웃절에서 내려온 중과 바둑을 여섯 판이나 내리 두어도 마음속의 허기는 가시지 않는다. 깨끗이 늙은 사내가 남기고 간 냄새를 찾기라도 할 양인지 나는 그새 허전함을 못 이겨 방 안을 서성인다. 뼈에 저릴 듯 고요한 산골짝을 달아 배회하듯이. 알지 못할 시름이 마음 속 깊은 데서 일어나 적막 속에 흔들린다. 그래도 나는 슬픔도 꿈도 잊고 장수산의 겨울 한밤을 오롯이 견뎌내겠다. 묘한 느낌을 주는 시다.
벌목정정(伐木丁丁)이란 표현은 『시경(詩經)』 「벌목(伐木)」에 나온다. 그 시를 보자.
伐木丁丁 鳥鳴嚶嚶 | 쩡쩡 나무 찍으니 새가 앵앵 우는구나. |
出自幽谷 遷于喬木 | 깊은 골을 나와서 높은 나무 옮겨간다. |
嚶其鳴矣 求其友聲 | 앵앵대는 그 울음은 벗의 소리 구함일세. |
相彼鳥矣 猶求友聲 | 저 새를 보게나, 벗의 소리 구하거늘. |
矧伊人矣 不求友生 | 하물며 사람인데 벗을 찾지 않겠는가. |
神之聽之 終和且平 | 신령이 이를 들어 마침내 화평하리. |
숲에는 쩡쩡 벌목하는 도끼 소리가 울린다. 그 소리에 놀란 새는 우짖는다. 깊은 골짝을 벗어나 높은 나무로 옮겨가는 것은 벗의 화답하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다. 새가 저렇듯 벗을 찾는데 사람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 시는 벗을 몹시 그리워함이 주제다.
두보(杜甫)의 「제장씨은거(題張氏隱居)」란 작품에도 벌목정정(伐木丁丁)이 나온다.
春山無伴獨相求 | 봄산을 동반 없이 혼자서 찾아가니 |
伐林丁丁山更幽 | 쩡쩡 나무 찍는 소리 산이 더욱 그윽하다. |
澗道餘寒歷氷雪 | 시내 길 남은 추위 얼음 눈을 지나서 |
石門斜日到林丘 | 석문의 지는 해에 숲 언덕에 다다랐네. |
不貪夜識金銀氣 | 욕심 없어 밤이면 금은 기운 알아보고 |
遠害朝看麋鹿遊 | 해 멀리해 아침마다 사슴 노닒 바라본다. |
乘興杳然迷出處 | 흥겨워 아마득히 나갈 곳을 헤매다가 |
對君疑是泛虛舟 | 그댈 보니 마치도 빈 배를 띄웠는 듯. |
혼자 그윽한 봄산 냇가를 따라 장씨의 은거를 찾아간다. 쩡쩡 도끼로 나무 찍는 소리에 산은 더욱 고요해진다. 냇가를 지나 석문을 거쳐 얼음 눈을 밟고 저물녘에야 숲 언덕에 도착했다. 그곳엔 세속 명리를 까맣게 잊고 사는 빈 배처럼 욕심 없는 벗이 있다. 이 시 또한 벗을 향한 그리움을 노래했다.
이렇게 보면 정지용의 「장수산(長壽山) 1」도 같은 맥락으로 읽어야 옳다. 그는 웃절 중과 바둑을 여섯 판이나 두고 헤어졌다. 그런데도 문득 그가 돌아가자마자 못 견디게 그리워서 깊은 밤 달빛을 보며 방 안을 서성이고 있는 중이다. 몸은 방 안에서 그가 남기고 간 냄새를 줍고, 마음은 그를 따라 눈 위에 달빛 고인 산길을 헤맨다. 슬픔도 꿈도 없는 담백한 그리움이다. 벌목정정(伐木丁丁)이란 단어 하나가 정서의 맥놀이를 일으켜 저 『시경(詩經)』에서부터 당나라 두보(杜甫)를 거쳐 현대의 정지용에까지 이어지는 정서의 다리를 놓았다. 놀랍지 않은가?
돌에
그늘이 차고,
따로 몰리는
소소리 바람.
앞섰거니 하야
꼬리 치날리여 세우고,
죵죵 다리 깟칠한
산(山)새 걸음거리.
여울 지여
수척한 흰 물살,
갈갈히
손가락 펴고,
멎은 듯
새삼 돋는 빗날
붉은 닢 닢
소란히 밟고 간다.
정지용의 시를 한 수 더 읽어보자. 인용한 작품은 「비」다. 16행 8연이다. 의미로 구분하면 두 연을 단위로 한 기승전결의 구조다. 돌에 그늘이 졌다. 소소리바람이 몰려든다. 모두 소나기가 쏟아질 조짐이다. 꼬리를 치날려 세우고 까칠하게 종종걸음을 걷는 것은 할미새다. 꼬리를 치들고 연신 흔들며 물가를 쏘다녀서 오죽하면 ‘할미새 꼬리 방정’이란 말까지 있다. 수척하던 흰 물살이 갈갈이 손가락을 편 것은 위쪽에서 비가 내려 물이 불어난 증거다. 잠시 멎는 듯 소강상태를 보이던 빗줄기가 다시금 되살아나 붉은 나뭇잎을 후드득 밟으며 저편으로 건너간다. 상쾌하고 경쾌하다.
한시로 치면 7언 절구에 해당한다, 통사 구조를 조금 바꿔 한시의 방식으로 옮겨본다.
소소리바람 몰려 돌 그늘 서늘한데
종종 다리 꼬리 세운 산새의 걸음걸이.
여울 진 흰 물살은 갈갈이 손을 펴고
붉은 잎 밟고 가는 새삼 돋는 빗낯일세.
그대로 멋드러진 한 수의 한시다. 1ㆍ2연을 억탁으로 맞춘다면 ‘소소량풍석음한(蕭蕭凉風石陰寒)’쯤 될 테고, 7ㆍ8연은 ‘난답적엽신우각(亂踏赤葉新雨脚)’ 쯤 될 수 있을까?
정지용은 해방 직후 해방기념 조선문학가대회 때 자식을 대신 보내 왕유의 한시 한 수를 낭송하게 했다 한다. 선문답 같은 이 장면은 내게 무슨 상징 같이 읽힌다. 그는 「녹음애송시(綠陰愛誦詩)」에서 『시경』과 범성대ㆍ왕안석ㆍ사마광의 한시를 애송시로 들고, 끝에 가서 다시 한시 한 수를 들었다. 그 시는 이렇다.
榴花映葉未全開 | 석류꽃 잎에 어울려 봉오리 지고 보니 |
槐影沈沈雨勢來 | 느티나무 그늘 침침하니 비 올 듯도 하이. |
小院地偏人不到 | 집 적고 휘진 곳이라 오는 이도 없고야 |
滿庭鳥跡印蒼苔 | 삿삿히 밟은 새 발자욱 이끼마다 놓였고녀. |
번역도 그의 솜씨다. 위 「비」의 의경과 어지간히 닮아 있다. ‘비 올 듯도 하이’나 ‘삿삿히 밟는 새 발자국’은 특히 그렇다. 비가 오려는지 느티나무 그늘이 차다. 사실 1구는 “잎에 비친 석류꽃 아직 벌지 않았는데”의 뜻이다. ‘봉오리 지고 보니’는 오역이다. 석류꽃은 저 비를 맞고야 봉우리를 활짝 피어낼 태세다. 뜨락 이끼에 도장 찍는 새 발자욱은 깟칠한 산새의 종종 걸음을 연상시킨다. 금세라도 느티나무 그늘의 석류 잎을 소란스레 밟고 지나는 빗방울 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정지용의 시에는 이렇듯 한시의 구문과 어법이 또렷이 살아 있다. 9연으로 된 「비로봉(毘盧峯)」도 끝 연 ‘바람에 아시우다’를 위에 붙이고 보면 7언절구의 구문을 벗어나지 않는다. 「옥류동(玉流洞)」은 7언율시의 호흡으로 읽어도 큰 차이가 없다. 「인동차(忍冬茶)」도 비록 5연이되, 시상이 놓인 자리는 의연 7언절구의 호흡이다. 가장 모던한 그의 시가 가장 한시와 닮았다. 재미있는 역설이다.
3. 지훈과 목월의 거리
차운 산 바위 위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 리.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조지훈의 「완화삼(玩花衫)」이다. ‘완화삼’은 글자 그대로 풀면 ‘꽃을 구경하는 적삼’이다. 꽃구경하는 나그네란 뜻이다. 시 속에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에서 따왔다. 「완화삼」의 첫 연, “차운 산 바위 위에 하늘은 멀어”는 두목(杜牧)의 「산행(山行)」 1구, ‘비탈진 바위 길에 찬 산 멀리 오르는데[遠上寒山石徑斜]’를 단번에 떠올린다. 다만 시의 감정이 다소 과잉되어 한시의 말하기 방식과 멀어졌다. ‘차운’, ‘구슬피’, ‘울음 운다’, ‘다정하고 한 많음’, ‘병인 양하여’, ‘고요히’, ‘흔들리고’ 등이 그것이다. ‘저녁노을이여’, ‘꽃은 지리라’, ‘흔들리며 가노니’의 개방형, 영탄형의 발화로 시상은 응축되고 수렴되는 대신 확산되어 흩어진다. 이 시를 받고 박목월은 「나그네」로 화답했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대상에 접근하는 두 시인의 태도는 사뭇 다르다. 오히려 목월의 시가 완연한 한시풍이다. 똑 떨어지는 명사로 맺은 매 연의 종결과, 7ㆍ5조의 규칙적인 가락이 살려내는 리듬은 농축된 시상을 맺어준다. ‘외줄기’로 ‘외로움’을 ‘저녁놀’로 ‘그리움’을 말할 뿐,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양 하여’라고 직접 설명하지 않았다. ‘타는’ 것은 시인의 마음이 아니라 ‘저녁놀’이다. 외로운 것은 나그네가 아니라 ‘남도 삼백리’ 길이다.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로 젖어들지 않는다. 길이 ‘칠백 리’에서 ‘삼백 리’로 줄었는데도, 끌리는 여운의 길이는 몇 배 더 길다.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은 배경으로만 깔리는데,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노을이여’는 그 영탄적 발성으로 ‘나그네의 젖은 소매’를 물들인다.
한시도 지을 줄 알았고 예스러운 표현을 즐겨 쓴 조지훈의 시보다, 박목월의 시가 한시의 기맥에 더 닿아 있다. 사실 청록파 세 사람 중에 한시의 정서에 가장 밀착되어 있는 시인은 단연 박목월이다. 「윤사월」이나 「산도화」는 조촐한 왕유(王維) 풍의 5언절구에 가깝다.
흰 달빛
자하문(紫霞門)
달안개
물소리
대웅전(大雄殿)
큰 보살
바람 소리
솔 소리
범영루(泛影樓)
뜬 그림자
흐는히
젖는데
흰 달빛
자하문
바람소리
물소리
박목월의 「불국사」다. 작품 전체는 ‘흐는히 젖는데’를 제외하고 모두 명사구만이다. 달빛 어린 자하문은 안개에 잠겨 물소리만 들린다. 대웅전 큰 보살상을 솔바람이 휘돌아 나간다. 범영루 뜬 그림자는 달빛에 젖고, 자하문엔 온통 바람 소리 물소리뿐이다. 시인은 다른 한 마디 보태지 않는다. 보여줄 따름이다. 그런데도 안개 낀 달밤, 불국사의 몽환적 분위기 속에서 바람소리 물소리가 풍경으로 되살아난다. 마법 같다.
원나라 때 시인 마치원(馬致遠)의 사(詞) 「추사(秋思)」와 견줘 읽어보자.
枯藤老樹昏鴉 | 앙상한 등나무, 늙은 나무, 저물녘 까마귀 |
小橋流水人家 | 작은 다리, 흐르는 물, 사람 사는 집. |
古道西風瘦馬 | 옛 길, 가을 바람, 비쩍 마른 말. |
夕陽西下 | 석양은 지고 |
斷腸人在天涯 | 애끊는 사람은 하늘 가에. |
역시 서술어는 ‘내려오고’뿐이다. 나머지는 토막토막 명사만 잇대었다. 황혼 무렵이다. 마른 등나무 늙은 나무 등걸에 까마귀가 내려앉아 운다. 작은 다리 아래로 물이 졸졸 흘러간다. 물길 따라 눈길 주니 멀리 인가가 보인다. 갈바람에 옛길엔 먼지만 날린다. 긴 여행에 피골이 상접한 말, 그 위에 앉아 길을 묻는 나그네. 해자 져서 그는 이제 묵어갈 곳을 찾는다. 고개 돌려 고향 쪽 하늘을 보면 애끓으며 자신의 안위를 걱정할 아내 모습이 떠오른다. 풀면 이렇듯 진진한 사연인데 시인은 끝까지 말을 아껴 여백을 넓혔다.
두 작품 모두 서술어 없이 명사들 저희끼리 포개져 놓였다. 박목월의 시가 갖는 한시와의 천연성은 좀 더 깊이 있게 다뤄볼 필요가 있다.
4. 밤비와 아내 생각
가족과 가정의 안온함은 늘 아내의 손길과 함께 떠오른다. 이번에는 밤비 소리를 매개로 아내 생각을 떠올린 현대시와 한시를 엮어 읽어본다.
새로 바른 창(窓)을 닫고 수수들을 까는 저녁
요 빗소리를 철창(鐵窓)에서 또 듣나니
언제나 등잔불 돋우면서 이런 이약 할까요.
조운의 시조 「아내에게」다. 일제 때 감옥에 갇혀 지은 작품이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겨울 준비를 한다. 국화 꽃잎과 단풍잎을 넣고 새로 방문을 바르고 창을 바른다. 풀이 마르면서 헤살 먹은 창이 짱짱하게 펴진다. 방 안에 온 가족이 둘러앉아 수숫단을 턴다. 그럴 때마다 좌르르 쏟아져 방바닥을 구르던 수수 알갱이 소리는 마치 오밤중에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 같았다. 시인은 이제 철창에 갇혀 밤비 소리를 듣는다. 처정처정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가 눈만 감으면 추수를 끝낸 어느 날 방 안에서 좌르르 좌르르 수숫단 털던 그날의 따뜻한 기억 속으로 나를 자꾸 끌고 간다. “여보! 우리도 훗날에는 오늘의 내 이 기막힌 심정을 옛이야기 하듯 나눌 날이 있겠지요. 지금은 힘들어도 조금만 참고 견뎌주겠소.” 못 견디게 울컥한 그리움을 ‘또’라는 한 글자에 농축했다. 이 작품은 실로 당나라 시인 이상은(李商隱)의 「야우기내(夜雨寄內)」 시의 환골(換骨)이다.
君問歸期未有期 | 올 기약 그댄 묻고, 돌아갈 기약 없어 |
巴山夜雨漲秋池 | 파산에 밤비는 가을 못에 넘치누나. |
何當共剪西窗燭 | 언제나 서창 등불 함께 심지 자르며 |
却話巴山夜雨時 | 파산 밤비 내리던 때 그때 얘길 해보나. |
파산 땅 객창에서 한밤중에 가을 빗소리를 들으며 아내에게 부친 시다. 낯선 파산 땅에서 멀리 아내의 편지를 받았다. 그녀는 내게 언제 고향으로 돌아오시겠느냐고 묻는다. 나는 대답할 말이 없다. 가을 빗소리는 천지를 덮을 듯 밤새 그칠 줄 모른다. 못물은 불어 넘쳐흐를 기세다. 이 밤 나는 머리가 셀 듯한 그리움에 철철철 넘쳐흐르는 못물처럼 가눌 길 없는 마음을 부여잡고 지붕을 때리는 밤 빗소리를 듣고 있다.
3ㆍ4구는 아내에게 하는 말이다. “여보! 훗날 내가 당신 곁으로 돌아가게 되면, 서창 아래 다정히 앉아 등불 심지를 함께 자르며, 오늘 밤 이 밤 빗소리 듣던 서글픈 심정을 이야기 할 날이 있지 않겠소. 보고 싶구려! 가지 못해 정말 미안하오.”
앞의 시조를 지은 조운은 이 시를 알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평소 간절하게 느껴 애송하던 한시 한 수가 철창에서 듣는 빗소리를 타고 흘러 들어와 또 한편의 아름다운 시 한 수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조운의 시조를 하나 더 읽어보자. 「여서(女書)를 받고」이다.
너도 밤마다
꿈에
나를 본다 하니
오고
가는 길에
만날 법도 하건마는
둘이 다 바쁜 마음에
서로 몰라 보는가
바람아 부지 마라
눈보라 치지 마라
어여쁜 우리 딸의
어리고 고운 꿈이
날 찾아
이 밤을 타고 이백 리를
온단다
딸의 편지를 받았다. “보고 싶은 아빠. 오늘도 그리워서 꿈길을 가서 아빠를 만났어요. 늘 건강하세요.” “그리운 내 딸아! 아빠도 네가 못 견디게 보고 싶어 꿈길을 자꾸 헤맨단다. 하지만 내 발걸음은 번번이 너를 놓쳐 안타깝구나. 서로 달려가기만 하느라 중간에 길이 어긋났던 게지. 바람아, 눈보라야! 어여쁜 우리 딸의 고운 꿈길에는 행여 얼씬할 생각도 마라. 그 여린 것이 밤마다 2백 리씩 애비 찾아 오가는 길을 아무 방해도 말아주려무나.”
相思相見只憑夢 | 서로 그려 만나볼 길 다만 꿈길뿐이라 |
儂訪歡時歡訪儂 | 그대 날 찾아올 젠 나도 그댈 찾는다오. |
願使遙遙他夜夢 | 원컨대 아마득히 다른 밤 꿈속에선 |
一時同作路中逢 | 한때에 길을 떠나 길 위에서 만나요. |
황진이의 한시 「상사몽(相思夢)」이다. 양주동 선생의 번역으로 더 유명하다. “꿈길 밖에 길이 없어 꿈길로 가니 / 그 님은 나를 찾아 길 떠나셨네 / 이 뒤엘랑 밤마다 어긋나는 꿈 / 같이 떠나 노중(路中)에서 만나를지고”
두 사람 시의 의경이 맞춘 듯 똑같다. 하지만 임 그려 애타는 정을 담은 원시를 먼 데서 온 딸의 편지를 받고 느끼는 안타까운 부정(父情)으로 환치시킨 데 그의 빼어난 솜씨가 있다. 조운이 현대시조는 이렇듯 한시의 정서에 뿌리박아 참신한 풍격을 일궈낸 것이 많다.
황진이의 시가 나온 김에 덧붙인다. 윤석중의 동시 「낮에 나온 반달」 3연은 이렇다.
낮에 나온 반달은 하얀 반달은
해님이 빗다버린 면빗인가요
우리 누나 방아찧고 아픈 팔 쉴 때
흩은 머리 곱게 곱게 빗겨줬으면.
밤하늘에 뜬 달이 아닌 처연한 낮달이다. 누나가 저녁밥을 지어 주려고 힘들게 방아를 찧고 있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팔이 아파 잠시 방아 찧기를 멈추고 이마에 진 땀을 닦는데 귀밑머리가 헝클어졌다. 우리 예쁜 누나의 흩어진 머리카락을 저 하늘의 옥색 면빗으로 곱게 곱게 정성껏 빗어주고 싶다. 그 마음이 참 곱고 따뜻하다.
그런데 이것은 바로 황진이의 「영반월(詠半月)」에서 가져온 것이다.
誰斲崑山玉 裁成織女梳 | 그 누가 곤륜산 옥을 캐어다 직녀의 얼레빗을 만들었을꼬. |
牽牛一去後 謾擲碧空虛 | 견우님 한 번 떠나 가신 뒤로는 속상해 허공에다 던진거라네. |
곤륜산 황옥을 깎아 만든 얼레빗으로 직녀는 삼단 같은 머리채를 곱게 빗어 님 앞에 서곤 했다. 그 님이 떠나자 다시 거울 앞에 설 일이 없다. 오늘은 오실까 싶어 빗을 들고 거울 앞에 앉는다. 아득한 마음에 빗을 들어올리던 손에 맥이 탁 풀리면서 아차차 그 빗을 그만 허공에 놓치고 말았다. 직녀가 맥이 풀려 허공에 놓친 그 얼레빗이 지금도 반달로 걸려 있다는 말씀이다.
하늘에 걸린 반달을 천상의 존재가 쓰다 버린 빗으로 연상하여 시상을 풀었다. 상상력의 원천이 같다. 한시와 현대시는 이렇게도 만난다.
5. 낯선 마을의 가을비
앞산에 가을비
뒷산에 가을비
낯이 설은 마을에
가을 빗소리
이렇다 할 일 없고
기인 긴 밤
모과차(木瓜茶) 마시면
가을 빗소리
박용래 시인의 「모과차」다. 일이 없어 긴 밤의 시간이 짓누르면 모과차를 마신다. 잠 안 오는 밤 보글보글 화로에 주전자를 얹어 놓고, 모과차를 끓인다. 훈내 속에 코를 박고 있자니 마음이 따뜻하다. 한 김 식혀 한 모금 머금어 내릴 때, 내 귀에는 문득 가을 빗소리가 들려온다. 앞산과 뒷산에서 갈잎을 툭툭 치는 가을 빗소리. 처음 가본 낯선 마을, 외딴 여관방에서 혼자 누워 밤새 듣던 그 가을 빗소리가 자꾸만 들려온다. 오늘도 그 빗소리 듣자고 모과차를 끓인다.
旅館殘燈曉 孤城細雨秋 | 여관, 가물대는 등불, 새벽 외론 성, 부슬비, 가을. |
思君意不盡 千里大江流 | 그대 생각 가없고 천리에 큰 강물 흐른다. |
월산대군의 「기군실(寄君實)」이란 작품이다. 벗에게 부친 시다. 1ㆍ2구는 토막토막 명사로만 이어 놓았다. 서술어 없이도 의미는 행간에 고여 넘친다. 아무도 없는 외로운 성이다. 부슬부슬 가을비는 청승스레 내린다. 외론 여관 가물대는 등불 아래 혼자 앉아 있다. 새벽이다. 벗을 향한 그리움에 밤을 꼬박 새웠다. 가눌 길 없는 그리움의 깊이를 천리를 흘러가는 큰 강물의 흐름에 견주었다.
박용래 시인이 이 한시를 읽었느냐 아니냐는 이 경우 그리 중요한 문제가 못 된다. 「모과차」의 ‘낯이 설은 마을’이 ‘고성(孤城)’으로, ‘가을비’는 ‘세우추(細雨秋)’로 대응한다. 3구의 ‘사군의부진(思君意不盡)’은 ‘기인 긴 밤’으로 호응한다. 그러나 ‘천리대강류(千里大江流)’에 ‘모과차 마시면’이 맞놓임으로써 두 작품은 같지만 다르고, 다르면서 같게 되었다. 그리움의 매재(媒材)가 다를 뿐 주제와 분위기, 의경 면에서 두 작품은 같다.
이렇듯 현대시 몇 수와 한시 몇 수를 나란히 읽었다. 둘이 만나는 방식은 경우마다 다르다. 한시와 현대시의 만남을 한 두 구절의 표현상 유사함으로는 말할 수 없다. 윤곤강이 그의 작품 속에서 숱하게 고려가요를 인용하고 있지만, 그것은 갖다 붙인 것일 뿐 정서적 울림이 없다. 신석초의 「바라춤」과 다른 점이다. 한시와 현대시도 그렇다. 겉모습의 유사함만 가지고 한시와의 유사성을 말한다면, 그것은 껍데기의 비슷함일 뿐이다.
모방에도 차원이 있다. 모동심이(貌同心異)의 모방이 있고, 심동모이(心同貌異)의 모방이 있다. 겉모습만 비슷하고 알맹이는 딴판인 것은 모동심이다. 하급의 모방이다. 겉보기엔 전혀 다른데 알맹이는 같은 것은 심동모이다. 우리가 말하는 모방, 우리에게 의미있는 모방은 심동모이의 모방이다. 심동모이라야 비로소 영향을 운운할 수 있다. 껍데기만으로는 안 된다. 상동구이(尙同求異), 같음을 숭상하되, 다름을 추구한다. 같지만 다르고, 다르기에 같다는 말이다. 과거와 현재는 이렇게 만난다. 한시와 현대시도 그렇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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