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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미학, 28. 한시와 현대시, 같고도 다르게 - 2. 한시와 모더니즘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미학, 28. 한시와 현대시, 같고도 다르게 - 2. 한시와 모더니즘

건방진방랑자 2021. 12. 8.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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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한시와 모더니즘

 

 

벌목정정(伐木丁丁) 이랬거니 아람도리 큰 솔이 베어짐 직도 하이 골이 울어 메아리 소리 쩌르렁 돌아옴직도 하이 다람쥐도 좇지 않고 멧새도 울지 않아 깊은 산 고요가 차라리 뼈를 저리 우는데 눈과 밤이 종이보다 희고녀! 달도 보름을 기다려 흰 뜻은 한밤 이 골을 걸음이련가? 웃절 중이 여섯 판에 여섯 번 지고 웃고 올라간 뒤 조찰히 늙은 사나이의 남긴 내음새를 줏는가? 시름은 바람도 일지 않는 고요에 심히 흔들리노니 오오 견디련다. 차고 올연히 슬픔도 꿈도 없이 장수산 속 겨울 한밤 내~

 

 

이번에는 정지용의 장수(長壽山) 1읽어본다. 아름드리 큰 솔을 도끼로 찍어내면 쩡쩡 소리를 내며 쓰러질 것만 같다. 메아리 소리도 유난히 크게 들릴 듯한 공간이다. 산은 깊어서 고요하다. 종이보다 흰 눈 위에 보름의 달빛이 환한 밤. 웃절에서 내려온 중과 바둑을 여섯 판이나 내리 두어도 마음속의 허기는 가시지 않는다. 깨끗이 늙은 사내가 남기고 간 냄새를 찾기라도 할 양인지 나는 그새 허전함을 못 이겨 방 안을 서성인다. 뼈에 저릴 듯 고요한 산골짝을 달아 배회하듯이. 알지 못할 시름이 마음 속 깊은 데서 일어나 적막 속에 흔들린다. 그래도 나는 슬픔도 꿈도 잊고 장수산의 겨울 한밤을 오롯이 견뎌내겠다. 묘한 느낌을 주는 시다.

 

벌목정(伐木丁丁)이란 표현은 시경(詩經)』 「벌목(伐木)나온다. 그 시를 보자.

 

伐木丁丁 鳥鳴嚶嚶 쩡쩡 나무 찍으니 새가 앵앵 우는구나.
出自幽谷 遷于喬木 깊은 골을 나와서 높은 나무 옮겨간다.
嚶其鳴矣 求其友聲 앵앵대는 그 울음은 벗의 소리 구함일세.
相彼鳥矣 猶求友聲 저 새를 보게나, 벗의 소리 구하거늘.
矧伊人矣 不求友生 하물며 사람인데 벗을 찾지 않겠는가.
神之聽之 終和且平 신령이 이를 들어 마침내 화평하리.

 

숲에는 쩡쩡 벌목하는 도끼 소리가 울린다. 그 소리에 놀란 새는 우짖는다. 깊은 골짝을 벗어나 높은 나무로 옮겨가는 것은 벗의 화답하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다. 새가 저렇듯 벗을 찾는데 사람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 시는 벗을 몹시 그리워함이 주제다.

 

두보(杜甫)제장씨은거(題張氏隱居)란 작품에도 벌목정정(伐木丁丁)이 나온다.

 

春山無伴獨相求 봄산을 동반 없이 혼자서 찾아가니
伐林丁丁山更幽 쩡쩡 나무 찍는 소리 산이 더욱 그윽하다.
澗道餘寒歷氷雪 시내 길 남은 추위 얼음 눈을 지나서
石門斜日到林丘 석문의 지는 해에 숲 언덕에 다다랐네.
不貪夜識金銀氣 욕심 없어 밤이면 금은 기운 알아보고
遠害朝看麋鹿遊 해 멀리해 아침마다 사슴 노닒 바라본다.
乘興杳然迷出處 흥겨워 아마득히 나갈 곳을 헤매다가
對君疑是泛虛舟 그댈 보니 마치도 빈 배를 띄웠는 듯.

 

혼자 그윽한 봄산 냇가를 따라 장씨의 은거를 찾아간다. 쩡쩡 도끼로 나무 찍는 소리에 산은 더욱 고요해진다. 냇가를 지나 석문을 거쳐 얼음 눈을 밟고 저물녘에야 숲 언덕에 도착했다. 그곳엔 세속 명리를 까맣게 잊고 사는 빈 배처럼 욕심 없는 벗이 있다. 이 시 또한 벗을 향한 그리움을 노래했다.

 

이렇게 보면 정지용의 장수산(長壽山) 1도 같은 맥락으로 읽어야 옳다. 그는 웃절 중과 바둑을 여섯 판이나 두고 헤어졌다. 그런데도 문득 그가 돌아가자마자 못 견디게 그리워서 깊은 밤 달빛을 보며 방 안을 서성이고 있는 중이다. 몸은 방 안에서 그가 남기고 간 냄새를 줍고, 마음은 그를 따라 눈 위에 달빛 고인 산길을 헤맨다. 슬픔도 꿈도 없는 담백한 그리움이다. 벌목정정(伐木丁丁)이란 단어 하나가 정서의 맥놀이를 일으켜 저 시경(詩經)에서부터 당나라 두보(杜甫)를 거쳐 현대의 정지용에까지 이어지는 정서의 다리를 놓았다. 놀랍지 않은가?

 

 

돌에

그늘이 차고,

 

따로 몰리는

소소리 바람.

 

앞섰거니 하야

꼬리 치날리여 세우고,

 

죵죵 다리 깟칠한

()새 걸음거리.

 

여울 지여

수척한 흰 물살,

 

갈갈히

손가락 펴고,

 

멎은 듯

새삼 돋는 빗날

 

붉은 닢 닢

소란히 밟고 간다.

 

 

정지용의 시를 한 수 더 읽어보자. 인용한 작품은 . 168연이다. 의미로 구분하면 두 연을 단위로 한 기승전결의 구조다. 돌에 그늘이 졌다. 소소리바람이 몰려든다. 모두 소나기가 쏟아질 조짐이다. 꼬리를 치날려 세우고 까칠하게 종종걸음을 걷는 것은 할미새다. 꼬리를 치들고 연신 흔들며 물가를 쏘다녀서 오죽하면 할미새 꼬리 방정이란 말까지 있다. 수척하던 흰 물살이 갈갈이 손가락을 편 것은 위쪽에서 비가 내려 물이 불어난 증거다. 잠시 멎는 듯 소강상태를 보이던 빗줄기가 다시금 되살아나 붉은 나뭇잎을 후드득 밟으며 저편으로 건너간다. 상쾌하고 경쾌하다.

 

한시로 치면 7언 절구에 해당한다, 통사 구조를 조금 바꿔 한시의 방식으로 옮겨본다.

 

 

소소리바람 몰려 돌 그늘 서늘한데

종종 다리 꼬리 세운 산새의 걸음걸이.

여울 진 흰 물살은 갈갈이 손을 펴고

붉은 잎 밟고 가는 새삼 돋는 빗낯일세.

 

 

그대로 멋드러진 한 수의 한시다. 12연을 억탁으로 맞춘다면 소소량풍석음한(蕭蕭凉風石陰寒)’쯤 될 테고, 78연은 난답적엽신우각(亂踏赤葉新雨脚)’ 쯤 될 수 있을까?

 

정지용은 해방 직후 해방기념 조선문학가대회 때 자식을 대신 보내 왕유의 한시 한 수를 낭송하게 했다 한다. 선문답 같은 이 장면은 내게 무슨 상징 같이 읽힌다. 그는 녹음애송시(綠陰愛誦詩)에서 시경과 범성대ㆍ왕안석ㆍ사마광의 한시를 애송시로 들고, 끝에 가서 다시 한시 한 수를 들었다. 그 시는 이렇다.

 

榴花映葉未全開 석류꽃 잎에 어울려 봉오리 지고 보니
槐影沈沈雨勢來 느티나무 그늘 침침하니 비 올 듯도 하이.
小院地偏人不到 집 적고 휘진 곳이라 오는 이도 없고야
滿庭鳥跡印蒼苔 삿삿히 밟은 새 발자욱 이끼마다 놓였고녀.

 

번역도 그의 솜씨다. 의 의경과 어지간히 닮아 있다. ‘비 올 듯도 하이삿삿히 밟는 새 발자국은 특히 그렇다. 비가 오려는지 느티나무 그늘이 차다. 사실 1구는 잎에 비친 석류꽃 아직 벌지 않았는데의 뜻이다. ‘봉오리 지고 보니는 오역이다. 석류꽃은 저 비를 맞고야 봉우리를 활짝 피어낼 태세다. 뜨락 이끼에 도장 찍는 새 발자욱은 깟칠한 산새의 종종 걸음을 연상시킨다. 금세라도 느티나무 그늘의 석류 잎을 소란스레 밟고 지나는 빗방울 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정지용의 시에는 이렇듯 한시의 구문과 어법이 또렷이 살아 있다. 9연으로 된 비로봉(毘盧峯)도 끝 연 바람에 아시우다를 위에 붙이고 보면 7언절구의 구문을 벗어나지 않는다. 옥류동(玉流洞)7언율시의 호흡으로 읽어도 큰 차이가 없다. 인동차(忍冬茶)도 비록 5연이되, 시상이 놓인 자리는 의연 7언절구의 호흡이다. 가장 모던한 그의 시가 가장 한시와 닮았다. 재미있는 역설이다.

 

 

 

 

인용

목차

1. 동서양의 수법 차이

2. 한시와 모더니즘

3. 지훈과 목월의 거리

4. 밤비와 아내 생각

5. 낯선 마을의 가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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