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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한시미학, 28. 한시와 현대시, 같고도 다르게 - 4. 밤비와 아내 생각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미학, 28. 한시와 현대시, 같고도 다르게 - 4. 밤비와 아내 생각

건방진방랑자 2021. 12. 8.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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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밤비와 아내 생각

 

 

가족과 가정의 안온함은 늘 아내의 손길과 함께 떠오른다. 이번에는 밤비 소리를 매개로 아내 생각을 떠올린 현대시와 한시를 엮어 읽어본다.

 

 

새로 바른 창()을 닫고 수수들을 까는 저녁

요 빗소리를 철창(鐵窓)에서 또 듣나니

언제나 등잔불 돋우면서 이런 이약 할까요.

 

 

조운의 시조 아내에게. 일제 때 감옥에 갇혀 지은 작품이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겨울 준비를 한다. 국화 꽃잎과 단풍잎을 넣고 새로 방문을 바르고 창을 바른다. 풀이 마르면서 헤살 먹은 창이 짱짱하게 펴진다. 방 안에 온 가족이 둘러앉아 수숫단을 턴다. 그럴 때마다 좌르르 쏟아져 방바닥을 구르던 수수 알갱이 소리는 마치 오밤중에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 같았다. 시인은 이제 철창에 갇혀 밤비 소리를 듣는다. 처정처정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가 눈만 감으면 추수를 끝낸 어느 날 방 안에서 좌르르 좌르르 수숫단 털던 그날의 따뜻한 기억 속으로 나를 자꾸 끌고 간다. “여보! 우리도 훗날에는 오늘의 내 이 기막힌 심정을 옛이야기 하듯 나눌 날이 있겠지요. 지금은 힘들어도 조금만 참고 견뎌주겠소.” 못 견디게 울컥한 그리움을 라는 한 글자에 농축했다. 이 작품은 실로 당나라 시인 이상은(李商隱)야우기내(夜雨寄內)시의 환골(換骨)이다.

 

君問歸期未有期 올 기약 그댄 묻고, 돌아갈 기약 없어
巴山夜雨漲秋池 파산에 밤비는 가을 못에 넘치누나.
何當共剪西窗燭 언제나 서창 등불 함께 심지 자르며
却話巴山夜雨時 파산 밤비 내리던 때 그때 얘길 해보나.

 

파산 땅 객창에서 한밤중에 가을 빗소리를 들으며 아내에게 부친 시다. 낯선 파산 땅에서 멀리 아내의 편지를 받았다. 그녀는 내게 언제 고향으로 돌아오시겠느냐고 묻는다. 나는 대답할 말이 없다. 가을 빗소리는 천지를 덮을 듯 밤새 그칠 줄 모른다. 못물은 불어 넘쳐흐를 기세다. 이 밤 나는 머리가 셀 듯한 그리움에 철철철 넘쳐흐르는 못물처럼 가눌 길 없는 마음을 부여잡고 지붕을 때리는 밤 빗소리를 듣고 있다.

 

34구는 아내에게 하는 말이다. “여보! 훗날 내가 당신 곁으로 돌아가게 되면, 서창 아래 다정히 앉아 등불 심지를 함께 자르며, 오늘 밤 이 밤 빗소리 듣던 서글픈 심정을 이야기 할 날이 있지 않겠소. 보고 싶구려! 가지 못해 정말 미안하오.”

 

앞의 시조를 지은 조운은 이 시를 알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평소 간절하게 느껴 애송하던 한시 한 수가 철창에서 듣는 빗소리를 타고 흘러 들어와 또 한편의 아름다운 시 한 수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조운의 시조를 하나 더 읽어보자. 여서(女書)를 받고이다.

 

 

너도 밤마다

꿈에

나를 본다 하니

 

오고

가는 길에

만날 법도 하건마는

 

둘이 다 바쁜 마음에

서로 몰라 보는가

바람아 부지 마라

눈보라 치지 마라

 

어여쁜 우리 딸의

어리고 고운 꿈이

 

날 찾아

이 밤을 타고 이백 리를

온단다

 

 

딸의 편지를 받았다. “보고 싶은 아빠. 오늘도 그리워서 꿈길을 가서 아빠를 만났어요. 늘 건강하세요.” “그리운 내 딸아! 아빠도 네가 못 견디게 보고 싶어 꿈길을 자꾸 헤맨단다. 하지만 내 발걸음은 번번이 너를 놓쳐 안타깝구나. 서로 달려가기만 하느라 중간에 길이 어긋났던 게지. 바람아, 눈보라야! 어여쁜 우리 딸의 고운 꿈길에는 행여 얼씬할 생각도 마라. 그 여린 것이 밤마다 2백 리씩 애비 찾아 오가는 길을 아무 방해도 말아주려무나.”

 

相思相見只憑夢 서로 그려 만나볼 길 다만 꿈길뿐이라
儂訪歡時歡訪儂 그대 날 찾아올 젠 나도 그댈 찾는다오.
願使遙遙他夜夢 원컨대 아마득히 다른 밤 꿈속에선
一時同作路中逢 한때에 길을 떠나 길 위에서 만나요.

 

황진이의 한시 상사몽(相思夢)이다. 양주동 선생의 번역으로 더 유명하다. “꿈길 밖에 길이 없어 꿈길로 가니 / 그 님은 나를 찾아 길 떠나셨네 / 이 뒤엘랑 밤마다 어긋나는 꿈 / 같이 떠나 노중(路中)에서 만나를지고

 

두 사람 시의 의경이 맞춘 듯 똑같다. 하지만 임 그려 애타는 정을 담은 원시를 먼 데서 온 딸의 편지를 받고 느끼는 안타까운 부정(父情)으로 환치시킨 데 그의 빼어난 솜씨가 있다. 조운이 현대시조는 이렇듯 한시의 정서에 뿌리박아 참신한 풍격을 일궈낸 것이 많다.

 

 

황진이의 시가 나온 김에 덧붙인다. 윤석중의 동시 낮에 나온 반달3연은 이렇다.

 

 

낮에 나온 반달은 하얀 반달은

해님이 빗다버린 면빗인가요

우리 누나 방아찧고 아픈 팔 쉴 때

흩은 머리 곱게 곱게 빗겨줬으면.

 

 

밤하늘에 뜬 달이 아닌 처연한 낮달이다. 누나가 저녁밥을 지어 주려고 힘들게 방아를 찧고 있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팔이 아파 잠시 방아 찧기를 멈추고 이마에 진 땀을 닦는데 귀밑머리가 헝클어졌다. 우리 예쁜 누나의 흩어진 머리카락을 저 하늘의 옥색 면빗으로 곱게 곱게 정성껏 빗어주고 싶다. 그 마음이 참 곱고 따뜻하다.

 

그런데 이것은 바로 황진이의 영반월(詠半月)에서 가져온 것이다.

 

誰斲崑山玉 裁成織女梳 그 누가 곤륜산 옥을 캐어다 직녀의 얼레빗을 만들었을꼬.
牽牛一去後 謾擲碧空虛 견우님 한 번 떠나 가신 뒤로는 속상해 허공에다 던진거라네.

 

곤륜산 황옥을 깎아 만든 얼레빗으로 직녀는 삼단 같은 머리채를 곱게 빗어 님 앞에 서곤 했다. 그 님이 떠나자 다시 거울 앞에 설 일이 없다. 오늘은 오실까 싶어 빗을 들고 거울 앞에 앉는다. 아득한 마음에 빗을 들어올리던 손에 맥이 탁 풀리면서 아차차 그 빗을 그만 허공에 놓치고 말았다. 직녀가 맥이 풀려 허공에 놓친 그 얼레빗이 지금도 반달로 걸려 있다는 말씀이다.

 

하늘에 걸린 반달을 천상의 존재가 쓰다 버린 빗으로 연상하여 시상을 풀었다. 상상력의 원천이 같다. 한시와 현대시는 이렇게도 만난다.

 

 

 

 

인용

목차

1. 동서양의 수법 차이

2. 한시와 모더니즘

3. 지훈과 목월의 거리

4. 밤비와 아내 생각

5. 낯선 마을의 가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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