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그 현실주의적 성과②
서사한시는 이조시대의 한문학 일반이 그렇듯 사대부 문학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여항시인의 작품이 일부 포함되어 있으나 이 역시 사대부 시인의 작품 내용과 성격을 달리하는 것은 아니다. 시인의 본원적 임무를 자각하고 사회현실을 비판적 안목으로 대함으로써 서사한시는 씌어지고 있었다. 그 작품 세계는 시인의 각성된 의식에 의해 포착되고 세련된 필치에 의해 구조된 것이다. 이는 같은 서사장르로서 야담(野談), 즉 한문 단편의 경우와 흥미로운 대조를 보이는 점이다.
18ㆍ19세기 야담의 기록이 폭넓게 이루어졌던바, 그 속에서 높은 예술성을 성취한 한문단편이 형성되었다. 야담과 서사한시는 견문의 작품화라는 측면에서 서로 근친성이 있다. 다만 야담은 근원 사실이 구연(口演)의 중간 경로를 거쳐서 창작된 것이다. 구연의 단계는 구두 창작의 성격을 가진 것으로 야담의 성립에서 필수적 과정이다. 반면에 서사한시는 구연의 단계를 필수로 하지 않는다. 시인이 근원 사실에 바로 접촉하는 방식이 일반적인 것이었다(야담과 같은 창작 경로를 거친 서사한시 작품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홍신유의 몇 편의 작품은 아주 흥미로운 사례다. 서사한시로서는 희소한 예외적인 것이다). 그에 따라 창작의식이나 작자의 구실 또한 서로 차이점을 보인다. 야담은 자각적 창작의식의 소산이라기보다 다분히 들은 바 이야기를 기록화한 형태다. 작가라기보다 기록자라는 표현이 거기에 적합할 듯싶다. 그럼에도 높은 예술성을 어떻게 성취할 수 있었던가. 이 문제에 대해 기왕에 내가 언급한 바 있으므로 인용해본다.
한문단편은 형성 경로에서 일차적으로 구두 창작을 거쳤다는 데 특수성이 있다. 구두 창작의 주체, 이야기꾼은 생활현실인 여항 시정의 부류들이며, 그 창작 과정이 문자 창작과 달리 현장적ㆍ집단적이다. 이야기꾼의 묘(妙)는 ‘물태인정(物態人情)에 곡진섬실(曲盡纖悉)’함에 있다고 하였던바, 이야기를 할 때 아무쪼록 듣는 사람들에게 여실한 감을 주어야만 하였다. ‘여실한 감’은 궁극적으로 생활 체험과 합치할 때 일어나는 것이다. 즉 현실을 호흡하는 많은 사람들의 감각으로 시대의 객관적 진실이 이야기의 진실로 담겨질 수 있었다. 이야기의 진실은 바로 역사적 진실이었던 것이다. 한문단편이 달성한 현실성은 그것을 발생시킨 시대(18세기~19세기 초반) 자체의 활발성으로부터 연유한 것이며, 한문단편의 성공은 현실주의의 역사적 승리로 규정지을 수 있다.
-청구야담(靑邱野談) 해제(解題)
이와 달리 서사한시는 어디까지나 자각적ㆍ의식적인 현실 반영이므로, 시인의 의식과 역량은 작품성과에 결정적인 작용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서사한시의 세계는 ‘서사적 상황의 발전’의 신국면을 포착하는 데 있어서는 예민하지 못했다. 이조 후기의 사회에 있어서 체제 모순이 심화하고 그 가운데서 발생한 역동적ㆍ진취적 움직임들은, 서사한시의 형식에 담겨지기보다는 야담, 한문단편에 다채롭게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보면 서사한시의 현실주의적 성과는 한문단편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시인의 자각적 의식이 오히려 현실을 직접 호흡하는 서민대중의 감각을 따라가지 못하는 면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조시대 서사시는 사회모순의 핵심을 파고들어 거기서 고뇌하며 살아가는 인간들의 진면목을 뚜렷하게 그려냈다. 그 시인들은 주체적 자세를 견지함으로써 자신의 계급적 속성을 넘어서 보편적 인간애를 구현할 수 있었다. 우리의 근대로 진입하기 이전의 문학사에서 그것이 이룩한 현실주의적 성취는 풍부하고 값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