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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시대 서사시, 총론 - 2. 조선왕조의 체제적 모순의 심화와 서사시의 출현 본문

한시놀이터/서사한시

이조시대 서사시, 총론 - 2. 조선왕조의 체제적 모순의 심화와 서사시의 출현

건방진방랑자 2021. 8. 7.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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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조선왕조의 체제적 모순의 심화와 서사시의 출현

 

 

한시는 시의 재료로 쓰이지 못할 것이 없다[詩料無所不入]”고 이를 만큼 형식의 포용성이 광활하다. 자연이나 인간사에 대한 감흥은 물론, 기행(紀行), 기사(紀事)로부터 우언과 영사(詠史)ㆍ설리(說理)에 이르기까지 실로 담아내지 않은 것이 없을 지경이었다. 단일 장르라기보다 복합 장르 내지 장르 혼재로 보는 편이 좋을 듯도 싶다. 서사시는 종래 한시의 광역 속에 미분화 상태로 들어있었던 셈이다.

 

중국의 서사시를 논하는 연구자들은 그 출발을 대개 시경(詩經)으로부터 잡고 있다. 시경은 시 일반이 그렇듯 연원으로 충분히 인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서사적 지향의 시편들이 실제로 없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중국문학의 서사시 형식은 시경에서는 아직 확실하지 못하며 한 대의 악부시에 와서 성립된 것 같다. 예컨대 고아행(孤兒行)이나 공작동남비(孔雀東南飛)에서 서사적으로 완결된 형식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이 악부시 자체가 민가(民歌)를 채록하였으니 서사시는 민가에서 발생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음 개인 창작시의 단계에서 빼어난 서사시로 우리는 두보(杜甫)의 삼리(三吏: 신안리新安吏, 동관리潼關吏, 석호리石壕吏)ㆍ삼별(三別)신혼별(新婚別), 수로별(垂老別), 무가별(無家別), 백거이(白居易)신악부(新樂府)등을 읽을 수 있다. 서사시 역시 시의 위대한 시대에 최고의 시인들에 의해 씌어진 것이다. 시인의 측면에서 보면 백거이가 여원구서(與元九書에서 말한 노래나 시를 실사에 합치해서 짓는다[歌詩合爲事而作]”는 사실적 창작 정신이 거기에 깔려 있다.

 

악부에서 성립된 민가 서사시, 그리고 두보와 백거이의 창작 서사시는 곧 서사시의 전형적ㆍ고전적 틀로 되었다. 우리나라의 시인들에게도 그 문학 정신과 함께 시 형식이 고전적인 틀로 받아들여졌음은 물론이다.

 

우리의 한시사에서 서사시는 이른 시기에 수용이 되었으나 그것이 당대 현실을 담아내는 양식으로 창작하여 작품의 질량을 확장한 것은 이조시대로 와서이다. 최치원(崔致遠, 857~?)강남녀(江南女)는 최초의 서사한시로 간주할 수 있다. 간소한 대로 서사의 원초적 구조를 갖춘 것이다. 그러나 제목이 뜻하는 바 제재가 중국적인 의경(意境)으로 느껴지는데, 이 땅의 현실과 관련지으려면 우언적인 성격으로 해석해야 된다. 다음에 유망한 이규보(李奎報, 1168~1241)동명왕편(東明王篇)이 있다. 영웅의 활동을 서술한 이 사시(史詩)는 문학사 위에 기념비적이다. 하지만 돌출했던 것인 만큼 양식적 계승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강남녀(江南女)동명왕편(東明王篇)은 이조시대의 서사시와는 자체의 성격이 벌써 다른 것이다.

 

이조시대 서사시는 왕조의 초창기를 지나 체체적 모순이 점차 노정(露呈)되는 단계(15세기 후반~16세기 초반)에서 출현한다. 성간(成侃)김시습을 비롯하여 조신(曺伸, 1454~1529)ㆍ이희보(李希輔, 1473~1548)송순(宋純, 1493~1583) 등등 여러 시인들에 의해 서사적 시작품이 씌어진 사실은 우연으로 넘길 일이 아니라고 본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종전에는 희소했던 서사시가 하필 이조시대에 활발하게 출현한 이유, 서사시 발전의 역사적 배경은 어디에 있었던가?

 

지금 제기된 문제로 들어가기에 앞서 고려할 사항이 있다. 이조시대 서사시는 주로 어떤 내용 성격인가 하는 점이다. 대체로 사회 현실과 삶의 과정에서 생겨나는 이런저런 모순 갈등이 포착되고 있는데, 이른바 체제 모순과 삶의 갈등으로 구분 지은 부류가 전체 104/122편 중에서 무려 59/65편에 이르고 있다. 민족의 대외적 모순이나 남녀의 애정 갈등, 기타 흥미로운 인물 형상을 다룬 경우는 각각 15/19편 정도에 불과하다. ‘체제 모순과 삶의 갈등의 서사시가 통계상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때 체제모순이란 ()’과 지배체제 사이에서 발생한 것이니, ‘삶의 갈등은 다름 아닌 의 문제다. 요컨대 이조시대 서사시는 주류적 성격이 의 문제를 다룬 것이거니와, ‘에 대한 문학적 인식이 서사시의 출현으로 연관된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문제는 인민의 현실과 인민의 현실에 대한 인식을 통해서 풀어가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왕조는 ()’을 기반으로 성립된 국가였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란 말이 의미하는 대로, 인민의 농업 생산이 국가의 물적 토대였을 뿐 아니라, 민력(民力)을 부역의 방식으로 동원하여 국가의 안위와 관인의 체모를 유지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인식해서 나라는 에 의존한다고 설파한 학자도 있거니와, 김시습은 나라는 의 나라다[國者民之國]”라고 인민의 정치적 위상을 강조하였다.

 

봉건 체제 하에서 이란 피지배층 일반을 가리키는 개념이므로 농민 또는 인민이나 민중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 특히 국가적 기반으로서의 이라고 말할 때 은 대체로 양민(良民=良人=常民)에 해당했던 것 같다. 양민이야말로 양역(良役)의 부담을 지던 봉건국가의 공민(公民)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이들 에 대한 보호책은 국가적 입장에서도 필요한 사항이다. 국가적 기반을 공고히 하는 데도 제일의 방도가 아니겠는가. 바로 이런 현실적 요망사항을 담은 통치술이 이른바 인정(仁政)이요, 애민(愛民)의 정치학이다. 조선왕조의 국가 이념, 유교는 그 논리를 제공한 것이다.

 

애민의 정치학에서 인민의 존재는 어디까지나 보호의 대상일 뿐이다. 덧붙이자면, 인민은 실상 수취(收取)의 대상이니, 애민이란 수취의 대상을 보호한다는 뜻이다. ‘의 이상적인 존재 형태는 땅에 엎드려 부지런히 농사짓고 고분고분 사역에 응하는 그런 모습이다. 이 모양으로 민생의 안정이 이루어진 위에 국가의 안정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참으로 중세의 이상적 국가상ㆍ사회상이다.

 

이조 국가는 그의 초창기에 애민의 정치를 어느 정도 추구했다고 본다. 무제한적 수탈을 지양한 취민유도(取民有度)의 원칙을 제도화하려 했던 바, 과전법(科田法)은 그 중요한 부분이다. 그리고 백성을 무지몽매(無知蒙昧)한 상태로 방치하지 않고 가르치고 깨우치려는 노력도 기울여졌던바,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한 뜻이다. 그러나 거기에 결국 해결하기 어려운 모순이 개재되어 있다. 상반되는 이해관계를 적정선에서 조절하기란 원래 지난한 노릇이다.

 

김종직(金宗直, 1431~1492)가흥참(可興站)이란 시에서 북쪽 사람들은 호화를 다투는데 남쪽 사람들은 고혈을 짜는 구나[北人鬪豪華, 南人脂血甘]”라고 중앙 관인과 지방 농민 사이의 모순 관계를 극명하게 드러낸 바 있다. 당시의 저급한 생산력으로 지배 계급의 물질적 욕구를 자제시키기는 거의 기대할 수 없거니와, 권력의 부패와 문란으로 인정이니 애민이니 하는 말은 공염불로 되고 말았다. 저 훈민정음이 어리석은 백성들의 의사소통의 수단으로서, 극히 제한적이었던 훈민의 기능마저 발휘하지 못했던 것은 애민의 정치가 허위화된 사실과 상관관계가 있다고 본다.

 

인민이 가렴주구(苛斂誅求)로 인해서 삶이 파탄에 이르고 유리방랑하게 되는 정황은 체제의 기본 모순이며, 그 자체가 체제의 중대한 위기다. 이석형(李石亨, 1415~1477)호야가(呼耶歌), 김종직(金宗直)낙동요(洛東謠)에서 부역의 괴로움과 수탈의 무거움, 그리고 지배층의 물질적 향락의 지나침이 심각하게 제시된 한편, 어무적(魚無迹, 연산군 때 시인)유민탄(流民歎)에서는 춥고 배고픈 유민으로 시선이 돌려지게 된다. 이러한 애민시ㆍ사회시의 일환으로 서사시가 씌어진 것이다.

 

이들 서사시는 구체적 모순으로 인해 찢기고 병드는 인민의 삶이 서술되는바, 구체적 인물이 등장해서 사건이 진행되는 특징을 갖추고 있다. 가령 어무적의 유민탄(流民歎)에서 창생들의 어려움이여! 흉년에 너희는 먹을 것이 없구나…… 창생들의 괴로움이여! 추위에 너희는 이불도 없구나[蒼生難. 年貧爾無食. 蒼生苦. 天寒爾無衾]”라고 유민들의 어렵고 괴로운 사정이 절실히 드러났지만, 실은 일반적 정황이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성간의 아부행(餓婦行)을 보면 떠돌이 신세의 여자가 자기 아기를 길에 버려 호랑이 밥이 되게 만든 기막힌 삶의 사연이 엮어지고 또 송순의 문개가(聞丐歌를 보면 한 거지 노인이 재산과 처자를 잃고 유랑하는 괴롭고 쓸쓸한 인생 경로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 밖에, 김시습의 기농부어(記農夫語에서는 한 자영농민의 몰락과정을 그 자신의 목소리로 듣게 되며, 성간의 노인행(老人行에서는 군역의 임무를 마치고서 늙어빠진 육신을 끌고 고향으로 돌아온 노인을 만나며, 조신(曺伸)제심원(題深院은 원부(院夫, 원주민)의 특수한 사정을 듣는다.

 

 

우리는 여기서 서사시적 상황의 발견을 지적해두고자 한다. 그것은 첫째, 이조사회의 기본적 모순이 심화된 현상이다. 앞서 이미 역사적으로 언급하고 시적 내용으로 확인한 바다.

둘째는, 이에 인민들 자신이 생존의 마당에 부딪치고 싸우는 과정에서 자기 존재를 발견하게 되는 현상이다.

 

체제편의 과도한 수탈에 맞서 인민의 살아남기 위한 투쟁의 방도는 이모저모 모색할 수 있었겠으나 첩경은 포망(逋亡)의 길이었다. 체제의 질곡으로부터 이탈한다든지, 거기서 나아가 무장항전(武裝抗戰)을 벌이는 방식이다. 군도 형태의 저항은 뒤의 단계이다. 저 유명한 홍길동임꺽정은 바로 그 무렵에 농민저항의 지도자로 떠오른 인물이다.

 

김시습의 기농부어(記農夫語)의 등장인물은 국가기구와 양반계급에게 당했던 부당한 일을 직접 고발하고 있다. 송순의 문인가곡(聞隣家哭)의 이웃집 할멈은 집이 파괴되고 남편과 자식이 옥중에 갇혀있다. 물론 폭력적인 가렴주구(苛斂誅求) 때문이다. 작중의 는 이 억울한 사실을 나라에 보고해서 선처를 받도록 하겠노라고 말한다. 그러나 할멈은 이웃집 어르신네 무슨 말씀을, 시방 저를 놀리시나요?[隣家丈人還余侮]”라고 머리를 가로젓는 것이다. 폭력과 불의의 사태를 자신이 실컷 체험함으로써 회의의 감정을 일으킨 것이다. 앞의 기농부어(記農夫語)에서 농부는 마지막으로 나라님께 호소해보고자 하였다. 이 할멈은 나라님의 성덕에 무조건 감격하는 어리석은 백성이 이제는 아니다. 그리고 문개가(聞丐歌의 노인은 비록 허리춤에 동냥자루를 찼지만 그 거지 시름없고 애걸 않고 구걸하는 소리조차 의젓한데[不憂不哀乞語傲]”로 묘사될 만큼 비굴한 인간의 모습은 아니다.

 

出門揮杖歌復高 지팡이 흔들고 문을 나서 노랫소리 다시 높으니
白首意氣何軒昂 백수노인의 의기는 어찌 저리도 헌앙한가!

 

시인은 노인의 이 헌앙(軒昂. 奮起하는 모습)한 태도를 달관으로 이해하고 있으나 역사적으로 전망해보자면 성장하는 민중 현상의 한 모습이라 하겠다.

 

체제 모순의 심화, 거기에 맞서 생존을 위해 고투하는 인민의 형상은 바로 서사시의 내용이다. 바꾸어 말하면 역사 현실을 반영하기에 적절한 형식으로 서사한시가 선택된 것이다. 당시 서사 장르로 소설은 아직 전기적(傳奇的)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전통적인 시 양식에서 틀을 찾을밖에 없었다. 우리가 그때 역사 현실을 서사시적 상황의 발전으로 규정한 소이연이다.

 

여기서 다시 고려할 점은 서사시적 상황의 발전을 서사시 형식으로 포착했던 인식 주체에 대해서다. 그 인식 주체, 서사한시의 창작 주체는 사대부 시인들이다.

 

앞서 영웅 서사시로 주목했던 동명왕편(東明王篇또한 사대부 문학의 맹아기의 성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런데 이규보는 우리 문학사에서 을 최초로 진지하게 의식했던 시인이기도 하다. 대농부음(代農夫吟)1수를 보자

 

帶雨鋤禾伏畝中 비맞으며 기심 매느라 논바닥에 엎드려 있으니
形容醜黑豈人容 그 형상 오죽할까 사람 꼴 아니로다.
王孫公子休輕侮 왕손 공자 귀하신 분네들 우리를 얕잡아보지 마오
富貴豪奢出自儂 당신네 누리는 부귀 호사 우리들 손에서 나온 것 아닌가요.

 

농부의 거친 외모를 유한적 미감(美感)으로 경멸하지 말라는 주장에서 새로운 미학적 지향을 엿볼 수 있다. 당신네 누리는 부귀 호사 우리들 손에서 나온 것 아닌가요[富貴豪奢出自儂]”라는 외침 가운데 체제 모순에 대한 인식이 선명하다. 사대부다운 애민의식이다. ‘농부를 대신해서 읊음이란 제목이 그렇듯, 시인은 농민의 열악한 사정을 동정한 나머지 그들을 대변하려는 뜻을 보였던 것이다.

 

이 같은 시인의식은 이후 전개된 사대부 문학의 내면에 주입된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 말엽에는 애민시의 범주가 신생의 사대부 문학에서 특이한 부분으로 형성되고 있었다. 거기서 빼어난 작품으로 손꼽히는 윤여형(尹汝衡, 14세기 전반기 시인)상율가(橡栗歌)같은 경우 구성의 일부로 서사성이 들어와 있다. 그러나 아직은 서사적 지향을 보인 정도다. 서사시의 본격적 출현은 역시 역사의 다음 단계, 조선왕조가 자기모순을 노정한 시대, 서사시적 상황의 발전을 기다려서다.

 

 

인간은 본원적으로 자기와 사회, 나아가서 세계의 주인이다. 무릇 인간이라면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주체적으로 살아가며 천하사를 맡을 자격과 임무를 지니고 있다. 다만, 이 본원적 자격과 임무를 역사적으로 특히 각성해서 감당하려는 계급이 있었다. 주체적 계급은 역사단계에 따라 달라져 왔던 것이다. 우리의 경우 고려말 이후 이조사회는 사대부가 주체적 계급으로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사대부 계급의 정치적 실천으로 조선왕조가 건립되었거니와, 치국치민(治國治民)을 자신의 고유한 일로 자임하는 것이 사대부다운 도리였다.

 

체제적 모순이 확대되고 인민의 삶이 절박해가는 상황에 직면해서 기성의 특권에 안주한 나머지 둔감할 수도 물론 있다. 그것은 이미 사대부의 주체성을 포기한 태도다. 참다운 사대부라면 서사시적 상황의 발전을 응당 예민하게 느끼고 심각하게 생각해야 옳다.

 

김시습 같은 작가는 세계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현실을 합리적으로 개조하려는 사상 경향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는 정치권력의 부당성을 끝내 용인하지 않았으며 특히 자영농민층이 영락(零落)하는 사태를 비분하였다. 그래서 스스로 방외인이 되어 고뇌의 생애를 마쳤으니 그에게서 기농부어(記農夫語가 씌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3편의 서사시를 남긴 송순은 창작 당시 관인의 신분이었으나 또한 병든 나라를 구하고 창생(蒼生)을 살리려는 구세(救世)의 정신을 자각하고 있었다. 정약용이 대표적인 사례지만, 중앙 정계로부터 소외된 위치에서 민중 현실에 접근하고 비판적 안목이 날카로워지게 된다. 서사시편은 이런 경우에 가장 많이 씌어졌다.

 

현실의 모순과 인민의 생활상의 문제를 예민하게 느끼고 심각하게 생각하는 그 자세가 현실주의적이다. ‘서사적 상황의 발전은 곧 현실주의를 도출한 기반이거니와, 서사시는 현실주의의 발전으로 산생된 것이다.

 

서사시적 상황은 이조 전기에서 그치지 않고 오히려 후기로 올수록 더욱 더 발전하였다. ‘체제 모순의 경우 약간은 개량되고 또 변화되는 국면이 없지 않았으나 모순이 모순을 증대하는 악순환이 연속되었다. 이 모순의 현장은 당초 서사시를 출신시킨 곳일 뿐 아니라 뒤에까지 그 소재의 최다 공급처였다. 때문에 이조시대 서사시에서 체제 모순과 삶의 갈등의 내용 성격이 주류를 점유하게 된 것이다.

 

한편으로 이조시대에는 주변의 민족국가와 마찰이 심심찮게 있었는데 17세기 전후 두 차례의 대규모 전쟁이 우리 한반도에서 치러졌다. 그리고 19세기로 들어와서 제국주의의 위협이 현저히 가시화되고 있었다. 이런 대외모순과 관련하여 민족의 자주의식이 싹텄던바 국난과 애국의 형상을 노래 부르게 된 것이다. 다른 한편 여성에 대한 속박은 원래 봉건적 모순의 일부다. 신분제도가 문란해지는 봉건 말기에 남녀의 애정 갈등은 문학의 특징적 제재로 등장하게 되거니와, 여성의 자아는 시대에 반응하는 자태였다. 이에 애정갈등과 여성이 서사시의 형상으로 그려진 것이다. 그리고 이조후기에 일어난 사회ㆍ경제적 변화는 시정 세태에 반영되게 마련인데 인간의 정신과 활동을 다양하게 만들 수 있었다. ‘예인 및 시정의 모습들이 서사시 양식에 도입된 것이다.

 

이와 같이 서사한시는 이조사회의 복잡한 시대 변화와 인간의 구구각색(區區各色)의 삶의 실상을 담아냈던 것이다. 하지만 서사한시의 원줄기는 체제의 기본 모순에서 형성되었던바, 그 원형이 폭넓게 적용된 것으로 보겠다.

 

 

 

 

인용

목차 / 논문

1. 한시에 있어서 서정시와 서사시

2. 조선왕조의 체제적 모순의 심화와 서사시의 출현

3. 서사시의 표현형식

4. 그 현실주의적 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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