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론:
현실주의의 발전과 서사한시
임형택
1. 한시에 있어서 서정시와 서사시
나는 성간(成侃, 1427~1456)ㆍ김시습(金時習, 1435~1493)에서 이건창(李建昌, 1852~1898)ㆍ황현(黃玹, 1855~1910)까지 장시 104/122제(題)【이 총설은 1992년 초판에 붙인 전체의 해설 논문을 전재한 것이다. 작품이 증보되긴 했으나 내용 성격이 달라지지는 않았기 때문에 총설을 다시 쓸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다만 작품의 변수가 총 104편에서 122편으로, 또한 각 부별로도 증가되었기 때문에 수치의 변화를 표시하였다】를 뽑아 책을 엮는다. 한시로서 서사성이 담긴 작품을 채취한 것이다. 책 이름을 ‘이조시대 서사시’라 한다.
우리의 문학사에서 서사한시는, 현실주의의 발전으로 형성된 동시에 현실주의를 풍부하게 한 것이다. 여기 작품들은 우리의 서사문학의 귀중한 성과로, 현실주의 문학의 역사적 근원으로 생각된다.
지금 ‘이조시대 서사시’로 묶어지는 가운데 많은 작품은 처음 발굴 소개되고 있거니와, 비로소 하나의 개념으로 파악하는 만큼 그에 대한 의논이 없을 수 없다. 본격적 연구나 이론의 정립은 후일의 과제로 남겨두지만 우선 시론적 견해를 붙이기로 한다.
서사시라는 용어는 더러 씌어지고 강조되기도 하였으나 공식적으로 합의된 바 없다. 고사시(故事詩)ㆍ담시(譚詩, 이야기시) 혹은 단형서사시로 이름이 붙여지기도 했다. 나는 그 명칭에 대해 천착하고 싶지 않다. 서사시란 말뜻이 내용에 어긋나지 않거니와, 이왕이면 친숙한 말을 채택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또 한자로 씌어진 것이기에 구분하자면 서사한시라 이를 것이다.
한시는 정감을 표현하는 형식으로 의식되었던 만큼 서정시가 주류적 성격을 형성해왔다. 원래 중국의 시가 그랬거니와 우리의 경우 또한 마찬가지다.
정지상(鄭知常)의 「대동강(大同江)」을 들어본다. 이 시를 거론하는 이유는 국어교과서에까지 실려서 누구나 아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雨歇長堤草色多 | 비 개인 강둑에는 풀빛이 파릇파릇 |
送君南浦動悲歌 | 남포서 임 떠나시매 슬픈 노래 퍼지네. |
大同江水何時盡 | 대동강 강물이여 어느 때나 마를거나? |
別淚年年添綠波 | 이별의 눈물 연년이 푸른 물결에 더하는걸. |
대동강가에서 석별(惜別)의 아쉬움에 눈물을 짓는 정경이 시적 상황이다. 임을 작별하는 사람은 서술 주체이며 임과 더불어 시적 주인공인 셈이다. 지금 헤어져야 하는 그네들 앞에는 아마도 무한한 사연이 있을 터이다. 그러나 시는 그것을 이야기로 엮어 진술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다만 “남포서 임 떠나시매 슬픈 노래 퍼지네”라고 자신의 심경 안으로 끌어안았다. 이어서 “대동강 강물이여 어느 때나 마를거나? / 이별의 눈물 연년이 푸른 물결에 더하는 걸[大同江水何時盡 別淚年年添綠波]”로 시상을 반전시켜, 이별의 눈물을 사적인 감상의 차원으로 개별화시키지 않고 있다. 이별의 눈물이 대동강의 수위에 영향을 준다고 할 만큼, 인생의 고해(苦海), 사회의 파란(波瀾)을 질량으로 느끼게 한다.
이 시에 담긴 서정성은 자못 심각하면서 보편적ㆍ사회적 의미를 띤 것이다. 같은 대동강의 이별시이지만 「서경별곡」의 “대동강 넓은 줄 몰라서 배 내어놓느냐? 사공아”라는 몸부림보다 정감이 의미심장하게 형상화되고 있다고 보겠다. 요컨대, 사연이 얽힌 정황은 시인의 정서 속에 흡입되어, 고도의 정제된 언어로 농축된 것이다. 이것이 서정시의 특색이다.
다음에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의 「착빙행(鑿氷行)」이란 작품을 들어본다.
季冬江漢氷始壯 | 늦겨울 한강 흐르는 물 얼음이 꽁꽁 얼어붙는데 |
千人萬人出江上 | 사람들 천이야 만이야 강가로 몰려나온다. |
丁丁斧斤亂相斲 | 땅땅 망치질 도끼질 얼음 짜개는 소리 |
隱隱下侵馮夷國 | 저 아래 물귀신 나라까지 우릉우릉 울려서 들리겠구나. |
斲出層氷似雪山 | 짜개어 포개놓은 얼음 설산을 방불케 하나니 |
積陰凜凜逼人寒 | 쌓여진 한기 오싹오싹 사람의 뼛골에 시리네 |
朝朝背負入凌陰 | 아침마다 얼음짐 등에 지고 빙고 속으로 |
夜夜椎鑿集江心 | 저녁마다 두드리고 짜개고 강 가운데 모여들 있다네. |
晝短夜長夜未休 | 해는 짧고 밤은 긴지라 밤에도 일손을 못 놓으니 |
勞歌相應在中洲 | 노동요 주고받는 소리 모래톱을 떠나질 않네. |
(중략) | |
滿堂歡樂不知暑 | 대청마루 넘치는 환락에 더위도 잊을 지경인데 |
誰言鑿氷此勞苦 | 얼음 저장하는 괴로움 누가 생각해서 말하랴? |
君不見 | 당신들 보지 못했소? |
道傍暍死民 | 길가에 더위먹어 죽어가는 백성들 |
多是江中鑿氷人 | 강에서 얼음 짜개던 사람들 바로 그네들 아닐런가. 『農巖集』 卷之一 |
이 시는 추운 겨울에 한강에서 얼음을 채취하는 고역(苦役)을 테마로 다룬 것이다. 지금 서울의 동빙고동과 서빙고동이란 지명은 그때 채취한 얼음의 저장고가 있던 데서 유래하였다. 위의 시적 화폭에는 수많은 인부들이 나와서 노고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시의 후반에서 더운 여름날 시원한 전각에 앉아 얼음의 감각을 즐기는 정경을 제시한다. 노동하는 사람 따로, 노동의 결과를 향유하는 사람 따로의 사회 모순이 두 화폭으로 대조되고 있다. “길가에 더위 먹어 죽어가는 백성들 / 강에서 얼음 짜개던 사람들 바로 그네들 아닐런가[道傍暍死民 多是江中鑿氷人]”라는 끝맺음으로, 부조리의 예리한 각인을 찍고 있다.
이 「착빙행(鑿氷行)」은 앞의 「대동강(大同江)」과는 달리 인간의 삶의 정황을 드러내면서 사회 모순을 제기했다. 그런데 그 사회 모순은 비록 현실적이긴 하지만 현실 자체로, 객관적으로 제시된 것이라기보다 시인의 비판적 의식 속에서 도출된 것이다. 그리고 위의 시에서 얼음을 채취하는 인간들을 비록 등장은 시켰지만 하나의 개별화된 인간으로, 구체적으로 포착된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꽁꽁 얼어붙은 한강의 얼음판 위에서 고역하는 모습이 화면에 펼쳐지긴 하는데 누구를 만나서 그 누구의 남다른 사연을 들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시는 사회시의 성격을 띠고 있으나 서정시의 범주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이번에는 신광수(申光洙, 1712~1775)의 「채신행(採薪行)」을 보기로 한다. 특별한 작품이라기보다 짧기 때문에 편의상 인용하는 것이다.
貧家女奴兩脚赤 | 가난한 집의 계집종 맨발의 두 다리로 |
上山採薪多白石 | 산에 가서 나무를 하려니 차돌멩이 뽀족뽀족 |
白石傷脚脚見血 | 차돌에 부딪혀 다리에 피가 흐르는데 |
木根入地鎌子折 | 나무뿌리 땅에 박혀 낫이 뎅겅 부러졌다네. |
脚傷見血不足苦 | 다리 다쳐 흐르는 피 괴로워할 겨를이나 있나요. |
但恐鎌折主人怒 | 오직 두려운 건 부러진 낫 주인에게 야단맞을 일이로다. |
日暮戴新一束歸 | 나무 한 단 머리에 이고 해 저물어 돌아오니 |
三合粟飯不䭜飢 | 한 덩이 조밥이야 허기진 뱃속 기별도 안 가는데 |
但見主人怒 | 주인의 야단 잔뜩 맞고 |
出門潛啼悲 | 문밖에 나와서 남몰래 훌쩍인다. |
男子怒一時 | 남자의 성냄은 한때지만 |
女子怒多端 | 여자의 성냄은 열 두 때라네. |
男子猶可女子難 | 샌님의 꾸중은 들을 만해도 마님의 노여움 견디기 어려워라. |
이 시는 가난한 양반댁에서 종노릇을 하는 한 소녀의 삶을 그린 내용이다. 앞의 두 시편에서 살펴본 바와는 다른 두 가지 특징이 여기에 있다.
첫째는 개별화된 인물의 등장이다. 계집종 그리고 샌님과 마님, 이렇게 세 사람이 시폭(詩幅)에 출연하고 있다. 우리는 주인공 소녀의, 하필 가난한 댁에서 종노릇을 하기 때문에 어린 여자 몸으로 산에 가서 땔나무를 해야 하는 특수한 사정을 보며, 또 그녀의 남몰래 훌쩍이는 소리까지 듣는다. 뿐만 아니라, 똑같은 상전이라도 한번 야단을 치고 마는 샌님과 야단이 끝이 없는 마님의 성격 차이까지 드러난다. 인물의 형상을 구체적으로 그려낸 것이다.
둘째는 사건의 진행이다. 주인공 소녀가 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다리를 다치고 낫을 부러뜨린다. 작중에서 사건의 발단인데 귀추가 주목되는 것이다. 소녀는 자기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돌볼 새도 없이 부러진 낫을 걱정한다. 과연 허기진 배를 안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 앞에 떨어진 것은 주인 내외의 호된 야단이었다. 그리하여 주인공이 문밖에 나와서 훌쩍이는 것으로 사건은 종결이 되고 있다. 비록 짧은 편폭(篇幅)이지만 거기에 시작과 끝이 있는 이야기가 담겨진 것이다.
「채신행(採薪行)」은 이처럼 객관적 배경 속에 특정한 인물이 등장하며, 또 그로 인해 사건이 일어나서 마무리되는 서사구조로 짜여 있다. 시인은 무슨 뜻으로 이 시를 썼을까? 문면(文面)에 표명된 바는 없다. 그렇지만 독자들은 누구나 주인공 소녀의 고달픈 처지에 애련의 감정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바로 시인이 의도한 주체사상이다. 이처럼 주체사상이 주관화=서정화되지 않고 현실을 제시하는 가운데 암시되어 있다.
이 「채신행(採薪行)」에 견주어 앞의 「착빙행(鑿氷行)」은 현실 비판의 강도가 오히려 높고 사회성의 표출이 두드러진 편이다. 다만, 「채신행(採薪行)」에서는 구체적 형상을 그려 보여 느낄 수 있게 된다. 「채신행(採薪行)」의 특징적 성격은 지금 서사시로 파악하고 있는 그것이다.
이학규(李學逵, 1770~1835)는 『영남악부(嶺南樂府)』의 서문에서 “그 본사를 서술해서 그 진정을 드러낸다[叙其本事 達其眞情]”고 밝힌 바 있다. 어떤 사건을 서술함으로써 거기 담긴 진실을 표출한다는 뜻이다. 서사시의 특징을 요약한 말이다.
여기서 서사시란 희랍적 서사시(Epic)는 아니다. 영웅 서사시라기보다 차라리 민중 서사시에 속할 것이요, 표현 수법 또한 낭만주의적이라기보다는 현실주의적이다(물론 낭만적 색채를 내포하기도 하지만), 고대적 문학의 전형은 조선왕조 시대에서 형성될 단계도 아니겠는데, 이 서사한시는 요컨대 조선적인 것이다.
대동강(大同江) | 착빙행(鑿氷行) | 채신행(採薪行) |
서정성을 드러냄 | 삶의 정황 드러냄 | 개별화된 인물의 등장 |
고도의 정제된 언어로 표현 | 구체적인 사연은 등장하지 않음 | 사건의 진행 |
현실의 비판 강도 높음, 사회성 표출이 두드러짐 | 구체적 형상을 그려 보여 느낄 수 있음 |
▲ 작자 미상, 「관서명구첩(關西名區帖)」 중 평양 연관정 부분, 18세기, 41.7X59.3cm, 개인 소장
뒤쪽에 보이는 것이 부벽루와 모란봉이다. 모란봉 꼭대기에 보이는 것은 최승대(最勝臺)다.
2. 조선왕조의 체제적 모순의 심화와 서사시의 출현
한시는 “시의 재료로 쓰이지 못할 것이 없다[詩料無所不入]”고 이를 만큼 형식의 포용성이 광활하다. 자연이나 인간사에 대한 감흥은 물론, 기행(紀行), 기사(紀事)로부터 우언과 영사(詠史)ㆍ설리(說理)에 이르기까지 실로 담아내지 않은 것이 없을 지경이었다. 단일 장르라기보다 복합 장르 내지 장르 혼재로 보는 편이 좋을 듯도 싶다. 서사시는 종래 한시의 광역 속에 미분화 상태로 들어있었던 셈이다.
중국의 서사시를 논하는 연구자들은 그 출발을 대개 『시경(詩經)』으로부터 잡고 있다. 『시경』은 시 일반이 그렇듯 연원으로 충분히 인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서사적 지향의 시편들이 실제로 없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중국문학의 서사시 형식은 『시경』에서는 아직 확실하지 못하며 한 대의 악부시에 와서 성립된 것 같다. 예컨대 「고아행(孤兒行)」이나 「공작동남비(孔雀東南飛)」에서 서사적으로 완결된 형식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이 악부시 자체가 민가(民歌)를 채록하였으니 서사시는 민가에서 발생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음 개인 창작시의 단계에서 빼어난 서사시로 우리는 두보(杜甫)의 삼리(三吏: 신안리新安吏, 동관리潼關吏, 석호리石壕吏)ㆍ삼별(三別)【신혼별(新婚別), 수로별(垂老別), 무가별(無家別)】, 백거이(白居易)의 「신악부(新樂府)」 등을 읽을 수 있다. 서사시 역시 ‘시의 위대한 시대’에 최고의 시인들에 의해 씌어진 것이다. 시인의 측면에서 보면 백거이가 「여원구서(與元九書」에서 말한 “노래나 시를 실사에 합치해서 짓는다[歌詩合爲事而作]”는 사실적 창작 정신이 거기에 깔려 있다.
악부에서 성립된 민가 서사시, 그리고 두보와 백거이의 창작 서사시는 곧 서사시의 전형적ㆍ고전적 틀로 되었다. 우리나라의 시인들에게도 그 문학 정신과 함께 시 형식이 고전적인 틀로 받아들여졌음은 물론이다.
우리의 한시사에서 서사시는 이른 시기에 수용이 되었으나 그것이 당대 현실을 담아내는 양식으로 창작하여 작품의 질량을 확장한 것은 이조시대로 와서이다. 최치원(崔致遠, 857~?)의 「강남녀(江南女)」는 최초의 서사한시로 간주할 수 있다. 간소한 대로 서사의 원초적 구조를 갖춘 것이다. 그러나 제목이 뜻하는 바 제재가 중국적인 의경(意境)으로 느껴지는데, 이 땅의 현실과 관련지으려면 우언적인 성격으로 해석해야 된다. 다음에 유망한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동명왕편(東明王篇)」이 있다. 영웅의 활동을 서술한 이 사시(史詩)는 문학사 위에 기념비적이다. 하지만 돌출했던 것인 만큼 양식적 계승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강남녀(江南女)」나 「동명왕편(東明王篇)」은 이조시대의 서사시와는 자체의 성격이 벌써 다른 것이다.
이조시대 서사시는 왕조의 초창기를 지나 체체적 모순이 점차 노정(露呈)되는 단계(15세기 후반~16세기 초반)에서 출현한다. 성간(成侃)ㆍ김시습을 비롯하여 조신(曺伸, 1454~1529)ㆍ이희보(李希輔, 1473~1548)ㆍ송순(宋純, 1493~1583) 등등 여러 시인들에 의해 서사적 시작품이 씌어진 사실은 우연으로 넘길 일이 아니라고 본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종전에는 희소했던 서사시가 하필 이조시대에 활발하게 출현한 이유, 서사시 발전의 역사적 배경은 어디에 있었던가?
지금 제기된 문제로 들어가기에 앞서 고려할 사항이 있다. 이조시대 서사시는 주로 어떤 내용 성격인가 하는 점이다. 대체로 사회 현실과 삶의 과정에서 생겨나는 이런저런 모순 갈등이 포착되고 있는데, 이른바 ‘체제 모순과 삶의 갈등’으로 구분 지은 부류가 전체 104/122편 중에서 무려 59/65편에 이르고 있다. 민족의 대외적 모순이나 남녀의 애정 갈등, 기타 흥미로운 인물 형상을 다룬 경우는 각각 15/19편 정도에 불과하다. ‘체제 모순과 삶의 갈등’의 서사시가 통계상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때 ‘체제모순’이란 ‘민(民)’과 지배체제 사이에서 발생한 것이니, ‘삶의 갈등’은 다름 아닌 ‘민’의 문제다. 요컨대 이조시대 서사시는 주류적 성격이 ‘민’의 문제를 다룬 것이거니와, ‘민’에 대한 문학적 인식이 서사시의 출현으로 연관된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문제는 인민의 현실과 인민의 현실에 대한 인식을 통해서 풀어가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왕조는 ‘민(民)’을 기반으로 성립된 국가였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란 말이 의미하는 대로, 인민의 농업 생산이 국가의 물적 토대였을 뿐 아니라, 민력(民力)을 부역의 방식으로 동원하여 국가의 안위와 관인의 체모를 유지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인식해서 “나라는 ‘민’에 의존한다”고 설파한 학자도 있거니와, 김시습은 “나라는 ‘민’의 나라다[國者民之國]”라고 인민의 정치적 위상을 강조하였다.
봉건 체제 하에서 ‘민’이란 피지배층 일반을 가리키는 개념이므로 농민 또는 인민이나 민중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 특히 국가적 기반으로서의 ‘민’이라고 말할 때 ‘민’은 대체로 양민(良民=良人=常民)에 해당했던 것 같다. 양민이야말로 양역(良役)의 부담을 지던 봉건국가의 공민(公民)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이들 ‘민’에 대한 보호책은 국가적 입장에서도 필요한 사항이다. 국가적 기반을 공고히 하는 데도 제일의 방도가 아니겠는가. 바로 이런 현실적 요망사항을 담은 통치술이 이른바 인정(仁政)이요, 애민(愛民)의 정치학이다. 조선왕조의 국가 이념, 유교는 그 논리를 제공한 것이다.
애민의 정치학에서 인민의 존재는 어디까지나 보호의 대상일 뿐이다. 덧붙이자면, 인민은 실상 수취(收取)의 대상이니, 애민이란 수취의 대상을 보호한다는 뜻이다. ‘민’의 이상적인 존재 형태는 땅에 엎드려 부지런히 농사짓고 고분고분 사역에 응하는 그런 모습이다. 이 모양으로 민생의 안정이 이루어진 위에 국가의 안정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참으로 중세의 이상적 국가상ㆍ사회상이다.
이조 국가는 그의 초창기에 애민의 정치를 어느 정도 추구했다고 본다. 무제한적 수탈을 지양한 취민유도(取民有度)의 원칙을 제도화하려 했던 바, 과전법(科田法)은 그 중요한 부분이다. 그리고 백성을 무지몽매(無知蒙昧)한 상태로 방치하지 않고 가르치고 깨우치려는 노력도 기울여졌던바, 곧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한 뜻이다. 그러나 거기에 결국 해결하기 어려운 모순이 개재되어 있다. 상반되는 이해관계를 적정선에서 조절하기란 원래 지난한 노릇이다.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은 「가흥참(可興站)」이란 시에서 “북쪽 사람들은 호화를 다투는데 남쪽 사람들은 고혈을 짜는 구나[北人鬪豪華, 南人脂血甘]”라고 중앙 관인과 지방 농민 사이의 모순 관계를 극명하게 드러낸 바 있다. 당시의 저급한 생산력으로 지배 계급의 물질적 욕구를 자제시키기는 거의 기대할 수 없거니와, 권력의 부패와 문란으로 ‘인정’이니 ‘애민’이니 하는 말은 공염불로 되고 말았다. 저 훈민정음이 ‘어리석은 백성’들의 의사소통의 수단으로서, 극히 제한적이었던 ‘훈민’의 기능마저 발휘하지 못했던 것은 애민의 정치가 허위화된 사실과 상관관계가 있다고 본다.
인민이 가렴주구(苛斂誅求)로 인해서 삶이 파탄에 이르고 유리방랑하게 되는 정황은 체제의 기본 모순이며, 그 자체가 체제의 중대한 위기다. 이석형(李石亨, 1415~1477)의 「호야가(呼耶歌)」, 김종직(金宗直)의 「낙동요(洛東謠)」에서 부역의 괴로움과 수탈의 무거움, 그리고 지배층의 물질적 향락의 지나침이 심각하게 제시된 한편, 어무적(魚無迹, 연산군 때 시인)의 「유민탄(流民歎)」에서는 춥고 배고픈 유민으로 시선이 돌려지게 된다. 이러한 애민시ㆍ사회시의 일환으로 서사시가 씌어진 것이다.
이들 서사시는 구체적 모순으로 인해 찢기고 병드는 인민의 삶이 서술되는바, 구체적 인물이 등장해서 사건이 진행되는 특징을 갖추고 있다. 가령 어무적의 「유민탄(流民歎)」에서 “창생들의 어려움이여! 흉년에 너희는 먹을 것이 없구나…… 창생들의 괴로움이여! 추위에 너희는 이불도 없구나[蒼生難. 年貧爾無食. 蒼生苦. 天寒爾無衾]”라고 유민들의 어렵고 괴로운 사정이 절실히 드러났지만, 실은 일반적 정황이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성간의 「아부행(餓婦行)」을 보면 떠돌이 신세의 여자가 자기 아기를 길에 버려 호랑이 밥이 되게 만든 기막힌 삶의 사연이 엮어지고 또 송순의 「문개가(聞丐歌」를 보면 한 거지 노인이 재산과 처자를 잃고 유랑하는 괴롭고 쓸쓸한 인생 경로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 밖에, 김시습의 「기농부어(記農夫語」에서는 한 자영농민의 몰락과정을 그 자신의 목소리로 듣게 되며, 성간의 「노인행(老人行」에서는 군역의 임무를 마치고서 늙어빠진 육신을 끌고 고향으로 돌아온 노인을 만나며, 조신(曺伸)의 「제심원(題深院」은 원부(院夫, 원주민)의 특수한 사정을 듣는다.
우리는 여기서 ‘서사시적 상황의 발견’을 지적해두고자 한다. 그것은 첫째, 이조사회의 기본적 모순이 심화된 현상이다. 앞서 이미 역사적으로 언급하고 시적 내용으로 확인한 바다.
둘째는, 이에 인민들 자신이 생존의 마당에 부딪치고 싸우는 과정에서 자기 존재를 발견하게 되는 현상이다.
체제편의 과도한 수탈에 맞서 인민의 살아남기 위한 투쟁의 방도는 이모저모 모색할 수 있었겠으나 첩경은 포망(逋亡)의 길이었다. 체제의 질곡으로부터 이탈한다든지, 거기서 나아가 무장항전(武裝抗戰)을 벌이는 방식이다. 군도 형태의 저항은 뒤의 단계이다. 저 유명한 홍길동ㆍ임꺽정은 바로 그 무렵에 농민저항의 지도자로 떠오른 인물이다.
김시습의 「기농부어(記農夫語)」의 등장인물은 국가기구와 양반계급에게 당했던 부당한 일을 직접 고발하고 있다. 송순의 「문인가곡(聞隣家哭)」의 이웃집 할멈은 집이 파괴되고 남편과 자식이 옥중에 갇혀있다. 물론 폭력적인 가렴주구(苛斂誅求) 때문이다. 작중의 ‘나’는 이 억울한 사실을 나라에 보고해서 선처를 받도록 하겠노라고 말한다. 그러나 할멈은 “이웃집 어르신네 무슨 말씀을, 시방 저를 놀리시나요?[隣家丈人還余侮]”라고 머리를 가로젓는 것이다. 폭력과 불의의 사태를 자신이 실컷 체험함으로써 회의의 감정을 일으킨 것이다. 앞의 「기농부어(記農夫語)」에서 농부는 마지막으로 나라님께 호소해보고자 하였다. 이 할멈은 나라님의 성덕에 무조건 감격하는 ‘어리석은 백성’이 이제는 아니다. 그리고 「문개가(聞丐歌」의 노인은 비록 허리춤에 동냥자루를 찼지만 “그 거지 시름없고 애걸 않고 구걸하는 소리조차 의젓한데[不憂不哀乞語傲]”로 묘사될 만큼 비굴한 인간의 모습은 아니다.
出門揮杖歌復高 | 지팡이 흔들고 문을 나서 노랫소리 다시 높으니 |
白首意氣何軒昂 | 백수노인의 의기는 어찌 저리도 헌앙한가! |
시인은 노인의 이 헌앙(軒昂. 奮起하는 모습)한 태도를 달관으로 이해하고 있으나 역사적으로 전망해보자면 성장하는 민중 현상의 한 모습이라 하겠다.
체제 모순의 심화, 거기에 맞서 생존을 위해 고투하는 인민의 형상은 바로 서사시의 내용이다. 바꾸어 말하면 역사 현실을 반영하기에 적절한 형식으로 서사한시가 선택된 것이다. 당시 서사 장르로 소설은 아직 전기적(傳奇的)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전통적인 시 양식에서 틀을 찾을밖에 없었다. 우리가 그때 역사 현실을 ‘서사시적 상황의 발전’으로 규정한 소이연이다.
여기서 다시 고려할 점은 ‘서사시적 상황의 발전’을 서사시 형식으로 포착했던 인식 주체에 대해서다. 그 인식 주체, 서사한시의 창작 주체는 사대부 시인들이다.
앞서 영웅 서사시로 주목했던 「동명왕편(東明王篇」 또한 사대부 문학의 맹아기의 성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런데 이규보는 우리 문학사에서 ‘민’을 최초로 진지하게 의식했던 시인이기도 하다. 「대농부음(代農夫吟)」 중 1수를 보자
帶雨鋤禾伏畝中 | 비맞으며 기심 매느라 논바닥에 엎드려 있으니 |
形容醜黑豈人容 | 그 형상 오죽할까 사람 꼴 아니로다. |
王孫公子休輕侮 | 왕손 공자 귀하신 분네들 우리를 얕잡아보지 마오 |
富貴豪奢出自儂 | 당신네 누리는 부귀 호사 우리들 손에서 나온 것 아닌가요. |
농부의 거친 외모를 유한적 미감(美感)으로 경멸하지 말라는 주장에서 새로운 미학적 지향을 엿볼 수 있다. 또 “당신네 누리는 부귀 호사 우리들 손에서 나온 것 아닌가요[富貴豪奢出自儂]”라는 외침 가운데 체제 모순에 대한 인식이 선명하다. 사대부다운 애민의식이다. ‘농부를 대신해서 읊음’이란 제목이 그렇듯, 시인은 농민의 열악한 사정을 동정한 나머지 그들을 대변하려는 뜻을 보였던 것이다.
이 같은 시인의식은 이후 전개된 사대부 문학의 내면에 주입된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 말엽에는 애민시의 범주가 신생의 사대부 문학에서 특이한 부분으로 형성되고 있었다. 거기서 빼어난 작품으로 손꼽히는 윤여형(尹汝衡, 14세기 전반기 시인)의 「상율가(橡栗歌)」 같은 경우 구성의 일부로 서사성이 들어와 있다. 그러나 아직은 서사적 지향을 보인 정도다. 서사시의 본격적 출현은 역시 역사의 다음 단계, 조선왕조가 자기모순을 노정한 시대, 서사시적 상황의 발전을 기다려서다.
인간은 본원적으로 자기와 사회, 나아가서 세계의 주인이다. 무릇 인간이라면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주체적으로 살아가며 천하사를 맡을 자격과 임무를 지니고 있다. 다만, 이 본원적 자격과 임무를 역사적으로 특히 각성해서 감당하려는 계급이 있었다. 주체적 계급은 역사단계에 따라 달라져 왔던 것이다. 우리의 경우 고려말 이후 이조사회는 사대부가 주체적 계급으로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사대부 계급의 정치적 실천으로 조선왕조가 건립되었거니와, 치국치민(治國治民)을 자신의 고유한 일로 자임하는 것이 사대부다운 도리였다.
체제적 모순이 확대되고 인민의 삶이 절박해가는 상황에 직면해서 기성의 특권에 안주한 나머지 둔감할 수도 물론 있다. 그것은 이미 사대부의 주체성을 포기한 태도다. 참다운 사대부라면 ‘서사시적 상황의 발전’을 응당 예민하게 느끼고 심각하게 생각해야 옳다.
김시습 같은 작가는 세계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현실을 합리적으로 개조하려는 사상 경향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는 정치권력의 부당성을 끝내 용인하지 않았으며 특히 자영농민층이 영락(零落)하는 사태를 비분하였다. 그래서 스스로 방외인이 되어 고뇌의 생애를 마쳤으니 그에게서 「기농부어(記農夫語」가 씌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3편의 서사시를 남긴 송순은 창작 당시 관인의 신분이었으나 또한 병든 나라를 구하고 창생(蒼生)을 살리려는 ‘구세(救世)의 정신’을 자각하고 있었다. 정약용이 대표적인 사례지만, 중앙 정계로부터 소외된 위치에서 민중 현실에 접근하고 비판적 안목이 날카로워지게 된다. 서사시편은 이런 경우에 가장 많이 씌어졌다.
현실의 모순과 인민의 생활상의 문제를 예민하게 느끼고 심각하게 생각하는 그 자세가 현실주의적이다. ‘서사적 상황의 발전’은 곧 현실주의를 도출한 기반이거니와, 서사시는 현실주의의 발전으로 산생된 것이다.
‘서사시적 상황’은 이조 전기에서 그치지 않고 오히려 후기로 올수록 더욱 더 발전하였다. ‘체제 모순’의 경우 약간은 개량되고 또 변화되는 국면이 없지 않았으나 모순이 모순을 증대하는 악순환이 연속되었다. 이 모순의 현장은 당초 서사시를 출신시킨 곳일 뿐 아니라 뒤에까지 그 소재의 최다 공급처였다. 때문에 이조시대 서사시에서 ‘체제 모순과 삶의 갈등’의 내용 성격이 주류를 점유하게 된 것이다.
한편으로 이조시대에는 주변의 민족국가와 마찰이 심심찮게 있었는데 17세기 전후 두 차례의 대규모 전쟁이 우리 한반도에서 치러졌다. 그리고 19세기로 들어와서 제국주의의 위협이 현저히 가시화되고 있었다. 이런 대외모순과 관련하여 민족의 자주의식이 싹텄던바 ‘국난과 애국의 형상’을 노래 부르게 된 것이다. 다른 한편 여성에 대한 속박은 원래 봉건적 모순의 일부다. 신분제도가 문란해지는 봉건 말기에 남녀의 애정 갈등은 문학의 특징적 제재로 등장하게 되거니와, 여성의 자아는 시대에 반응하는 자태였다. 이에 ‘애정갈등과 여성’이 서사시의 형상으로 그려진 것이다. 그리고 이조후기에 일어난 사회ㆍ경제적 변화는 시정 세태에 반영되게 마련인데 인간의 정신과 활동을 다양하게 만들 수 있었다. ‘예인 및 시정의 모습들’이 서사시 양식에 도입된 것이다.
이와 같이 서사한시는 이조사회의 복잡한 시대 변화와 인간의 구구각색(區區各色)의 삶의 실상을 담아냈던 것이다. 하지만 서사한시의 원줄기는 체제의 기본 모순에서 형성되었던바, 그 원형이 폭넓게 적용된 것으로 보겠다.
3. 서사시의 표현형식
견문의 구성 표출의 방식
한시 중에는 서사시적 부류로 영사시(詠史詩) 및 우언시(寓言詩)가 또 따로 있다. 민족의 역사에서 취재한 영사악부가 이조 후기 문학의 특이한 현상의 하나로 발전하였으며, 우화시는 시인에 따라 선호하는 형식으로 심심찮게 창작되었다. 서술 내용이 영사시의 경우는 당대의 일이 아니고 옛날 옛적이요, 우언시의 경우는 실제 사실이 아니고 가공가탁(架空假托)이라는 점에서 여기서 취급하는 서사시와 각기 성격을 구분 지을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사실적 서사시는 당대의 일,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어떤 사건을 운문으로 구성한 것이다. 이것이 그 제일의 특성이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작품들을 보자. 「도강고가부사(道康瞽家婦詞)」를 비롯하여 「애절양(哀絶陽)」, 삼리(三吏: 용산리龍山吏, 파지리波池吏, 해남리海南吏) 연작 등 시편들은 모두 자신이 강진 유배지에서 직접 목도이문(目睹耳聞)한 사건을 소재로 잡아서 쓴 것이다. 「전간기사(田間紀事)」의 서에서, 흉년이 든 해에 “때때로 눈에 뜨인 바들을 기록하여 엮어서 시가를 만드니[時記所見, 綴爲詩歌]”라고 창작 경위를 밝힌 대로다.
서사시에는 비록 드물기는 하지만 과거사를 내용으로 다룬 작품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이런 경우라도 살펴보면 현재와 어떤 관련의 고리가 있어 창작된 것이다. 예컨대 「송대장군가(宋大將軍歌)」는 고려 때의 사적이지만 시인이 현재에서 채취한 이야기며, 「숭정궁인굴씨비파가(崇禎宮人屈氏琵琶歌)」는 지나간 일화지만 문제의 비파를 당시 발굴한 사건이 창작의 계기가 되었고, 「운암파왜도가(雲巖破倭圖歌)」는 또한 운암파왜도(雲巖破倭圖)라는 그림을 현재 보고서 그 시를 쓴 것이다. 어디까지나 “실사에 의거해서 명제한다[因事命題]”는 취지를 지니고 있다.
요컨대, 여기 서사시들은 목도이문(目睹耳聞)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그 표현 형식상의 문제는 견문을 여하히 구성ㆍ표출해내느냐는 데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실사와 시인을 매개하는 저마다의 과정은 인간 현실이 복잡다단한 만큼 그 사이도 간단할 수 없다. 또한 시인의 분방한 필치는 개성을 찾고 변화를 부리게 마련이다. 각 편의 정치한 분석과 전체의 이론적 정리를 요하는, 실로 만만찮지만 흥미로운 과제가 앞에 제기되어 있다. 우선 서술의 시점과 구성법 및 형상화의 문제에 견해의 일단이나마 언급하고자 한다.
(1) 시점과 서술 방식
시점 문제는 대상을 주관적 정감 속에 용해(溶解)한 형식, 서정시에 있어서는 별로 고려할 까닭이 없다. 당초 소설에서 도출된 이론이다. 그런데 서사시에서 또한 인물과 사건을 조직하다 보면 저절로 시점의 문제가 개입이 된다. 물론 소설의 시점 이론을 이쪽에 비추어볼 수 있겠는데 소설에서보다 따지기 어렵고 모호한 면이 있는 것 같다.
서사시에 있어서 시점이란 서술 주체를 누구로 잡느냐는 문제다. 위에서 거론했던 송순의 「문개가(聞丐歌)」와 김시습의 「기농부어(記農夫語)」 그리고 이희보(李希輔, 1473~1548)의 「전옹가(田翁歌)」를 사례로 들어 비교해보자.
「문개가(聞丐歌)」는 작중에 ‘나’가 문면에 출현해서 주인공 노인과 대화하는 방식으로 엮어가고 있다. 거지 노인이 주인공인데 이 노인의 이야기를 엮어가는 주체는 ‘나’ 즉 시인이다. 반면에 「기농부어(記農夫語)」에서는 작중의 주인공 농부가 자신의 인생 역정을 직접 들려주는 방식이다. 주인공과 서술 주체가 일치하고 있다. 다른 한편 「전옹가(田翁歌)」에 있어서는 “서쪽 동네 할아버지 밤중에 잠 못 이루고 / 기러기 소리에 일어나 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구나[西隣老翁夜不寐, 聞雁起坐中夜泣]”라고 서쪽 동네 할아버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서술 주체는 이 할아버지가 아니다. 객관적 시점인 듯하지만 따지고 보면 시인이 문맥의 이면에 내재되어 있다. 서사시의 서술 시점은 결국 이 세 가지 형태로 구별되는 것 같다.
제1형: 시인과 주인공의 대화적 서술 방식
시인이 서술 주체로 표출되는 점이 특징이다. 김성일의 「모별자(母別子)」나 허균의 「노객부원(老客婦怨)」, 권헌의 「시노비(寺奴婢)」 등등 서사시 작품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취했던 방식이다. 「모별자(母別子)」를 보면 서사적 장면, 즉 모자가 이별하는 현장에 시인이 마침 임석하여 직접 목격하고 주인공과 말을 나누게 된다. 목도 이문의 과정이 작중에 재현된 셈이다. 이는 르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도 보겠다. 그리고 누구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작품화하는 경우 이형보(李馨溥, 1782~?)의 「조령박호행(鳥嶺搏虎行)」나 「금리가(擒螭歌)」처럼 시인은 서술자로 남아 있고 시적 화자로 이야기꾼을 내세우기도 한다.
제2형: 주인공의 고백적 서술의 방법
작중 주인공의 시점으로 서술되는 점이 제1형과 다르다. 주인공 스스로 술회하는 방식이므로, 억울하고 애달픈 사연을 표현하는 데 호소력을 가질 수 있다. 권헌의 「여소미행(女掃米行)」이나 백광훈의 「용강사(龍江詞)」, 신국빈의 「오뇌곡(懊惱曲)」 등의 작품에서 보는 바다. 이 수법을 말하자면 대리 진술이므로, 시인이 하고 싶은 말을 주인공의 소리로 내는 경우도 허다히 있다.
제3형: 객관적 서술의 방식
시인이 서술자로 문면 상에 나서지 않으므로 객관적 서술의 방식을 띠게 된다. 그러나 시인이 서술의 주체로 내재해 있으니 객관과 주관의 사이를 어렵잖게 넘나들 수 있다. 한 작품 내에서도 객관적 시점을 유지하다가 주관적 정감에 견인될 수 있다. 그리고 제재에 따라서도 취하는 방향이 달라지니 신광수의 「채신행(採薪行)」보다 객관적인 반면, 최경창의 「이소부사(李少婦詞)」에서는 애정 갈등을 다루어 주정적 색채가 강화되었다. 조석윤의 「고객행(賈客行)」이나 김만중의 「단천절부시(端川節婦詩)」에서처럼 제재에 대한 체험이 간접적일 경우는 대개 이 수법을 구사하게 되는 것 같다.
이상의 시점에 따른 서술의 세 가지 정식은 그야말로 도식적 파악에 지나지 못한 것이다. 작품의 각각에 들어가면 그대로 들어맞지 않는 면도 간혹 있을 뿐 아니라, 다양한 변이를 보이기도 한다. 특히 고려해야 할 두 가지 사항을 들어둔다.
하나는 서술의 주체를 파악하기 모호한 경우다. 가령 성간의 「노인행(老人行)」은 주인공의 고백적 서술 형태를 취한 작품인데 대화와 지문의 구분이 불분명한 대목이 있다. 그리고 정약용이 「도강고가부사(道康瞽家婦詞)」의 결말 부분을 보면 그 말이 서사적 무대에 둘러섰던 청중들의 소리인 듯싶은데 시인의 진술로 간주해도 무방하다. 이때 모호성은 청중의 소리이자 시인의 생각으로 들리도록 하려는 계산된 의도로 여겨진다.
다른 하나는 서술 시점이 이동 전환되는 경우다. 다시 「도강고가부사(道康瞽家婦詞)」를 보자. 이 작품은 처음에는 시인이 시적 화자로 내재된 객관적 서술의 방식으로 시작된다. 서사적 무대 위에서 “나이 지금 몇인고? 무슨 일에 잡혀가게 되었는가?”라고 말을 물은 것은 시인이 아닌가 심증은 가지만 또한 분명치 않다. 그런데 이 다음부터 슬그머니 서술 주체는 작중 주인공의 어머니로 바뀐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가서 앞에 언급했듯 청중의 소리를 끌어들여 끝맺음을 한다. 그리고 「애절양(哀絶陽)」이나 「승발송행(僧拔松行)」 같은 비교적 단형의 작품에서도 또한 객관적 서술로 진행하다가 후반에 가서 시인이 개입하거나 등장인물과 시인이 대화하는 방식으로 변화를 보이는 것이다.
(2) 서사 구성의 방식
서사시라면 아무래도 서사가 핵심을 이루는 것이다. 인물의 사건을 어떻게 조직해내느냐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서사 구성의 방식은 시점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음이 물론이다.
앞에서 우리는 시점과 관련하여 ‘시인과 주인공의 대화적 서술 방식’을 이조시대 서사시가 취했던 일반적 형태로 파악하였다. 그것은 이조시대 서사시에서 정립된 특이한 방식이다. 시인이 혹은 어디에 있다가 혹은 어디를 가다가 어떤 상황에 접해서 보고 들은 바 사실을 작품화하게 된다. 서사시가 씌어지는 전형적 정황, 다시 말하면 서사시의 창작과정의 정식인 셈이다.
이 경우 시인이 서사적 현장에 접근하는 부분은 작품의 서두를 이루게 되며, 시인이 현장의 인물로부터 전후의 사연을 듣는 내용은 작품의 본장을 구성한다. 그리고 기막히고 딱하고 애절한 사연의 인생을 보고 들을 때 생각과 느낌이 없을 수 없겠는데, 시인의 정회로 자연스럽게 끝맺음을 하게 된다. 이러한 3부 구성법이 서사시의 전형적 형태로 두루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가령 「모별자(母別子)」처럼 서사적 화폭이 먼저 극적으로 제시된 다음, 시인이 그 현장에서 말을 건네고 작중 인물의 답변이 나와서 전체가 4부로 구성되든가 혹은 5부로 확장되는 수도 더러 있다. 반대로 「애절양(哀絶陽)」처럼 전반부의 사건 구조와 후반부의 정회(情懷) 구조로 양분되는 수도 있다. 이들 또한 정형인 3부 구성의 변형태로 간주해도 좋을 듯싶다.
서사 구성에서 시간ㆍ공간의 처리 문제는 응당 함께 검토해보아야 할 안건이다. 사건의 순차적 진행에 시공이 그대로 따라가는 방식이 순리이니 서사의 원칙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들 서사시에서는 그런 순차적 구성을 쓴 작품은 오히려 찾아보기 드문 편이다. 하나의 서사적 화폭 속에 시공이 모아지는 구성법을 으레 채택하고 있다. 과거의 시간에 다른 공간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한 화면 속으로 축약되는 방식이다. 단막극과도 같은 것이다. 시공을 축약한 극화의 수법은 서사의 내용을 보다 밀도 높게 선명하게 제시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이 수법은 원래 서사시가 ‘목도이문(目睹耳聞)의 결과물’이라는 사실과도 관련이 깊다. 즉 전형적인 3부 구성법을 취한 경우 서사는 하나의 장면에서 시작하여 결말이 나기 마련이다. 3부 구성법은 하나의 서사 무대에 시공을 집약하는 방식으로 귀착된 것이다. 그리하여 거기서 개발된 수법이 여러 작품에 두루 전용이 되었다고 본다. 「도강고가부사(道康瞽家婦詞)」라든지 이건창의 「전가추석(田家秋夕)」ㆍ「숙광성진 기선중새신어(宿廣城津 記船中賽神語)」 같은 작품에서 특히 극적 장면 구성으로 빼어난 성과를 거두었다.
서사라고 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서사로만 일관되는 것은 아니다. 서사를 위주로 하면서 거기에 서정이 스며 있을 뿐 아니라, 간혹 논설이 끼어들기도 한다. 서사적 완결을 보인 작품으로부터 서정적 색채가 농후한 작품까지 적잖은 편자를 드러낸다. 앞서 언급했던바 시인이 서술주체로 출현한 상태건 내재적 상태건 진행에 관여하고 있기 때문에 객관으로부터 주관으로 쉽게 왔다 갈 수 있다. 서사 조직에 정회(情懷) 조직이 자연스럽게 접합될 수 있다. 서사적 진행에 어떻게 정회의 요소를 배합하느냐? 이는 작품의 예술적 성취에 하나의 관건이 되는 부분이다.
(3) 형상화의 특징
새삼스런 물음 같지만 하필 서사시를 쓴 이유는 어디 있었을까? 그것은 당대의 실사를 포착하는 데서 출발하고 있다. 사실에 대한 인지, 전달의 기능을 중시한다면 굳이 시 장르를 선택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사실 인식의 기능으로 치면 산문 쪽이 훨씬 적합한 형식이다. 그리고 서사의 디테일을 따진다면 서사시는 소설 장르에 도저히 미치지 못한다.
서사시 중에 같은 내용이 산문 형식으로 씌어진 사례가 더러 있다. 홍성민의 「매어옹행(賣魚翁行)」을 짓고 또 산문으로 「매어옹행답(賣魚翁行答)」을 썼으며, 정약용 또한 「천용자가(天慵子歌)」와 함께 「장천용전(張天慵傳)」을 남겼다. 한 작가가 동일한 체험을 바탕으로 시와 산문의 상이한 형식으로 표출한 경우다. 이건창의 「한구편(韓狗篇)」은 자기 동생이 지은 「한구문(韓狗文)」을 보고서 지은 것이다. 그리고 이광정의 「향랑요(薌娘謠)」와 최성대의 「산유화녀가(山有花女歌)」는 유명한 향랑고사에서 같이 취재한 작품이다. 이광정 자신이 따로 전 장르로 「임열부향랑전(林烈婦薌娘傳)」을 짓기도 했거니와,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인데 또 거듭해서 그 이야기를 시로 쓴 이유는 무엇일까?
허격(許格, 1607~1690)의 「일환가(一環歌)」는 바로 앞에 붙인 서문에서 이미 사실의 전말을 기록해두고 있다. 시는 사실 인식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님은 여기서 단적으로 증명된다. 이건창은 「한구편(韓狗篇)」에서 이르기를 “사가는 기술을 중시하는데 / 새기고 기리는 일 시인에게 달렸노라[史家重紀述, 銘頌在詩人]”고 역사가와 시인의 임무를 변별하고 있다. 사실의 전달, 산문적 ‘기술’은 원래 역사가(산문가로 보아도 좋다)의 영역이다. 반면 시인의 고유한 임무는 운문적 ‘명송(銘頌)’, 즉 ‘새기고 기리는 일’로 규정한다.
季弟從西來 示我韓狗文 | 막내 아우 서도(西道)에서 돌아와 나에게 한구문을 보여준다. |
讀過再三歎 此事誠罕聞 | 읽어가다 두 번 세 번 감탄하니 참으로 듣기 희한한 일이로세. |
이처럼 한씨집 개의 이야기를 희한하고 기특하게 여긴 나머지, 시인의 임무인 ‘새기고 기리는 일’을 소홀히 할 수 없어 이 「한구편(韓狗篇)」을 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터무니없이 예찬해서 소기의 성과를 올릴 수 있겠는가. 모름지기 사실의 구체적 서술이 있어야 실감도 주고 감명도 주게 될 터이다. 「한구편(韓狗篇」은 바로 이 점을 충분히 배려하고 있다. 작품의 제2ㆍ3부는 서사 조직의 부분인바, 한씨집 개의 이야기를 자상한 곡절까지 곁들여 들려주어 인정에 깊이 와 닿고 호소력이 크다.
정약용은 황해도의 곡산부사로 있을 시절에 장천용이란 기인형의 인물을 만나보고 비상히 매력을 느껴 쓴 것이 문제의 「천용자가(天慵子歌)」와 「장천용전(張天慵傳)」이다. 이 두 작품을 읽어보면 동일한 대상을 그려냈음에도 내용 특색이 같지 않음을 느낀다. 「장천용전(張天慵傳)」에서는 그를 처음 대면하는 경위가 상세히 언급된 반면 그의 첫 인상은 간단히 처리하고 있다. 그런데 「천용자가(天慵子歌)」의 그 장면을 보면 이러하다.
天慵子來叩闑 | 천용자 찾아와서 문을 두드려 |
大聲叫我與官逢 | 싸도 좀 만나자고 큰소리로 외쳐댄다. |
直躡曾階入重閤 | 돌계단 뛰어올라 중문 안으로 들어서는데 |
赤脚不襪如野農 | 맨발에 붉은 정강이 들에서 일하다 온 농부 꼴이더라. |
不拜不揖箕踞笑 | 읍도 절도 하지 않고 두 다리 뻗고 앉아 |
但道乞酒語重重 | 거듭거듭 하는 말이란 술 달라는 소리뿐 |
이처럼 그를 대면하게 된 사연은 일체 생략해버리고 대뜸 “천용자 찾아와서 문 두드려”로부터 그가 등장하는 모습과 행동을 묘사해서 인상을 뚜렷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작품의 전반부에서도 주인공의 성격이나 그가 추구하는 예술 세계를 드러내는데 역시 음조와 색채를 강렬하게 때로 과장적 필치까지 구사한다. 그 인물의 형상을 각인하는 데 가장 치중하고 있는 것이다. 다름 아닌 시 본연의 ‘새기고 기리는 일’에 충실한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명송(銘頌)’이란 개념에 포괄될 작품은 실상 그다지 많지 않다. 서사시의 내용은 오히려 분노하고 슬퍼하거나 지탄하고 징험을 삼아야 할 그런 것들이 다수로 생각된다. 이에는 풍자의 개념이 적용되는 것 같다. 원래 시는 ‘미자(美刺)’의 기능으로 존재 의미를 가졌었다. 이 고전적 ‘미자’의 개념에 비추어 ‘명송’은 ‘미(美)’의 범주에 속한다면 풍자는 곧 ‘자(刺)’에 해당한다. 결론적으로 서사시를 쓴 동기는 명송과 풍자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풍자와 명송은 방향은 서로 다르지만 시적 기능의 양면성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명송이건 풍자건 각기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형상의 각인에 치력(致力)하는 것은 서사시 본연의 특성이다. 허격이 쓴 「일환가(一環歌)」는 권력의 주변에서 자행된 농간을 고발한 내용이다. 양민의 여자를 강탈하고 이 범행을 무마하기 위해 갖은 술수를 부려 법도를 문란케 하는 사건의 경과는 앞에 붙인 산문적 기술로 다 밝혀져 있다. 운문적 서술에서는 서사를 기조로 삼고 있으나 그 서사 문맥 속에 풍자적 기세를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남의 귀여운 딸을 빼앗는 것이 사건의 핵심인데, 대감께 바치기 위한 내막이었음이 운문적 서술에서 비로소 폭로된다. 산문의 정태적 기록보다 운문의 율동적인 어조에 의해서보다 충격적이 되고 경종이 울려지게 됨은 물론이다.
형상화는 서사시에서 고유한 수법은 아니다. 다만 모순이 심화하고 어려움이 가중되고 변전하는 현실 속에서 고통을 겪는 민중의 삶과 고상한 기품을 세운 실천의 모습, 이런 현상들을 보고도 못 본 체한다면 인간의 도리가 아니겠거니와, 인지하는 것만으로 그만두어도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다. 사태를 구체적으로 이해시키자면 서사가 필요하며 나아가 깨달음을 얻도록 하는 데는 형상의 각인이 효과적이다. 때문에 서사시는 형상화에 특색이 있게 되는 것이다.
풍자(諷刺) | 명송(銘頌) | |
공통점 | 효과를 높이기 위해 형상의 각인에 치력함. | |
차이점 | 刺 | 美 |
4. 그 현실주의적 성과
서사한시는 조선왕조 사회의 체제적 모순이 심화ㆍ확대되는 과정에서 민중의 삶의 갈등, 고난에 대결하여 떠오른 얼굴들을 운문적 형상으로 각인한 것이다. 이 자체가 현실주의의 발전으로 산생된 것이거니와 내용 형식의 특징 또한 현실주의적이다.
‘목도이문(目睹耳聞)’의 경험은 서사한시의 창작근거가 되었다. 그에 의해 서술방식이나 서사구조의 형태가 결정되었음을 위에서 살펴보았다. 우리는 작중에서 시인이 서술자의 역할을 (시의 문맥에 출현했건 내재해 있건) 담당하는 점을 특히 주목한 바 있다. 시인은 ‘서사시적 상황’ 속으로 몸소 들어간다. 말하자면 현장 체험이다. 거기서 시인은 유민들의 애처로운 호소를 듣기도 하며, 변방 고을에서 벌어진 아전붙이들의 횡포를 보기도 한다. 이 곧 서사시 특유의 현실성ㆍ민중성을 획득한 계기다.
그런데 ‘시인=서술주체’의 구도에서 시인과 작중 주인공 사이에는 간격이 없지 않다. 시인은 작중 주인공과 놓여진 처지가 아무래도 다르다. 농민의 사정을 이해하려는 진심과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주려는 양식을 갖추고 있다. 그렇지만 그 자신이 바로 농민의 위치, ‘민’과 동등한 신분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작중 주인공=서술 주체’의 고백적 서술 방식 역시 농민이 주인공인 경우라도 실은 시인의 대리 진술이다. 요컨대, 서사한시는 ‘민’의 현실에 즉해서 ‘민’을 대변하면서도 ‘민’과의 불가피한 거리로 인해 그 특유의 내용 형식이 고안된 셈이다. 이는 서사한시의 성과이자 한계다.
神言此事非我職 | 영검이 말씀하되 “이 일은 내 소관 아니로다. |
汝雖百拜請無益 | 네가 백번 절하고 빌어도 나는 아무 소용없으니 |
往訴岸上吟詩人 | 차라리 저 언덕 위에 시인에게나 호소해보라. |
採入風謠獻京國 | 시 한 수 지어 풍요에 들어가면 나라님께 바쳐질 수 있으리!” |
이건창의 작품 「숙광성진 기선중새신어(宿廣城津 記船中賽神語)」의 끝맺음 부분이다. 영검은, 사공이 고기가 많이 잡히도록 해달라는 소망이야 들어줄 수 있다. 그러나 가혹한 착취로 아무리 풍어가 든대도 못 살겠으니 부디부디 관의 비리와 불법을 먼저 바로잡아 줍시라는 사공의 기원은 신도 어쩔 도리가 없다. 거기에는 전지전능의 신통력도 통하지 않는다. ‘시인에게나 호소해보라’는 것이다. 신의 힘으로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시인에게도 돌아간다. 다름 아니고 시를 읊으면 그 시편이 풍요로 엮어져서 정부 당국에 받아들여질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고전적인 시의 ‘미자(美刺)’ 기능을 상정한 것이다.
물론 위의 시적 결구에 내포된 의미는 부정부패의 망국적 사태를 개탄한 나머지 나온 역설이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서 서사시를 쓰게 되는 시인의 임무에 대한 각성을 읽을 수 있다. 이학규 또한 「기경기사(己庚紀事」를 쓰면서 “돌아보건대 나는 죄를 짓고 유배된 몸이라 …… 찬 바람에 쓰르라미ㆍ귀뚜라미와 더불어 풀숲 사이에서 슬피우는 것과 다름없다.”고 자못 비장한 말을 덧붙인 바 있다. 답답하고 애달픈 정경을 목도하고 시인의 임무를 포기할 수 없어 시편을 창작해보지만, 그것은 중앙 정부에 보고될 통로가 없기 때문에 쓸데없는 수작일 뿐이라는 뜻이다. 어떻게 보면 새로운 단계의 시인으로 변신하게 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아직은 고전적 시의식을 회복하고 거기에 충실하려는 자세 그것이다. 이건창의 경우 조선왕조의 임종이 눈앞에 박두한 시대였지만, 이 시인은 역시 구체제의 틀속에서 망국적 사태를 해결할 방도를 모색한 셈이다.
서사한시는 이조시대의 한문학 일반이 그렇듯 사대부 문학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여항시인의 작품이 일부 포함되어 있으나 이 역시 사대부 시인의 작품 내용과 성격을 달리하는 것은 아니다. 시인의 본원적 임무를 자각하고 사회현실을 비판적 안목으로 대함으로써 서사한시는 씌어지고 있었다. 그 작품 세계는 시인의 각성된 의식에 의해 포착되고 세련된 필치에 의해 구조된 것이다. 이는 같은 서사장르로서 야담(野談), 즉 한문 단편의 경우와 흥미로운 대조를 보이는 점이다.
18ㆍ19세기 야담의 기록이 폭넓게 이루어졌던바, 그 속에서 높은 예술성을 성취한 한문단편이 형성되었다. 야담과 서사한시는 견문의 작품화라는 측면에서 서로 근친성이 있다. 다만 야담은 근원 사실이 구연(口演)의 중간 경로를 거쳐서 창작된 것이다. 구연의 단계는 구두 창작의 성격을 가진 것으로 야담의 성립에서 필수적 과정이다. 반면에 서사한시는 구연의 단계를 필수로 하지 않는다. 시인이 근원 사실에 바로 접촉하는 방식이 일반적인 것이었다(야담과 같은 창작 경로를 거친 서사한시 작품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홍신유의 몇 편의 작품은 아주 흥미로운 사례다. 서사한시로서는 희소한 예외적인 것이다). 그에 따라 창작의식이나 작자의 구실 또한 서로 차이점을 보인다. 야담은 자각적 창작의식의 소산이라기보다 다분히 들은 바 이야기를 기록화한 형태다. 작가라기보다 기록자라는 표현이 거기에 적합할 듯싶다. 그럼에도 높은 예술성을 어떻게 성취할 수 있었던가. 이 문제에 대해 기왕에 내가 언급한 바 있으므로 인용해본다.
한문단편은 형성 경로에서 일차적으로 구두 창작을 거쳤다는 데 특수성이 있다. 구두 창작의 주체, 이야기꾼은 생활현실인 여항 시정의 부류들이며, 그 창작 과정이 문자 창작과 달리 현장적ㆍ집단적이다. 이야기꾼의 묘(妙)는 ‘물태인정(物態人情)에 곡진섬실(曲盡纖悉)’함에 있다고 하였던바, 이야기를 할 때 아무쪼록 듣는 사람들에게 여실한 감을 주어야만 하였다. ‘여실한 감’은 궁극적으로 생활 체험과 합치할 때 일어나는 것이다. 즉 현실을 호흡하는 많은 사람들의 감각으로 시대의 객관적 진실이 이야기의 진실로 담겨질 수 있었다. 이야기의 진실은 바로 역사적 진실이었던 것이다. 한문단편이 달성한 현실성은 그것을 발생시킨 시대(18세기~19세기 초반) 자체의 활발성으로부터 연유한 것이며, 한문단편의 성공은 현실주의의 역사적 승리로 규정지을 수 있다.
-청구야담(靑邱野談) 해제(解題)
이와 달리 서사한시는 어디까지나 자각적ㆍ의식적인 현실 반영이므로, 시인의 의식과 역량은 작품성과에 결정적인 작용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서사한시의 세계는 ‘서사적 상황의 발전’의 신국면을 포착하는 데 있어서는 예민하지 못했다. 이조 후기의 사회에 있어서 체제 모순이 심화하고 그 가운 데서 발생한 역동적ㆍ진취적 움직임들은, 서사한시의 형식에 담겨지기보다는 야담, 한문단편에 다채롭게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보면 서사한시의 현실주의적 성과는 한문단편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시인의 자각적 의식이 오히려 현실을 직접 호흡하는 서민대중의 감각을 따라가지 못하는 면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조시대 서사시는 사회모순의 핵심을 파고들어 거기서 고뇌하며 살아가는 인간들의 진면목을 뚜렷하게 그려냈다. 그 시인들은 주체적 자세를 견지함으로써 자신의 계급적 속성을 넘어서 보편적 인간애를 구현할 수 있었다. 우리의 근대로 진입하기 이전의 문학사에서 그것이 이룩한 현실주의적 성취는 풍부하고 값진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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