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조선왕조의 체제적 모순의 심화와 서사시의 출현④
인간은 본원적으로 자기와 사회, 나아가서 세계의 주인이다. 무릇 인간이라면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주체적으로 살아가며 천하사를 맡을 자격과 임무를 지니고 있다. 다만, 이 본원적 자격과 임무를 역사적으로 특히 각성해서 감당하려는 계급이 있었다. 주체적 계급은 역사단계에 따라 달라져 왔던 것이다. 우리의 경우 고려말 이후 이조사회는 사대부가 주체적 계급으로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사대부 계급의 정치적 실천으로 조선왕조가 건립되었거니와, 치국치민(治國治民)을 자신의 고유한 일로 자임하는 것이 사대부다운 도리였다.
체제적 모순이 확대되고 인민의 삶이 절박해가는 상황에 직면해서 기성의 특권에 안주한 나머지 둔감할 수도 물론 있다. 그것은 이미 사대부의 주체성을 포기한 태도다. 참다운 사대부라면 ‘서사시적 상황의 발전’을 응당 예민하게 느끼고 심각하게 생각해야 옳다.
김시습 같은 작가는 세계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현실을 합리적으로 개조하려는 사상 경향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는 정치권력의 부당성을 끝내 용인하지 않았으며 특히 자영농민층이 영락(零落)하는 사태를 비분하였다. 그래서 스스로 방외인이 되어 고뇌의 생애를 마쳤으니 그에게서 「기농부어(記農夫語」가 씌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3편의 서사시를 남긴 송순은 창작 당시 관인의 신분이었으나 또한 병든 나라를 구하고 창생(蒼生)을 살리려는 ‘구세(救世)의 정신’을 자각하고 있었다. 정약용이 대표적인 사례지만, 중앙 정계로부터 소외된 위치에서 민중 현실에 접근하고 비판적 안목이 날카로워지게 된다. 서사시편은 이런 경우에 가장 많이 씌어졌다.
현실의 모순과 인민의 생활상의 문제를 예민하게 느끼고 심각하게 생각하는 그 자세가 현실주의적이다. ‘서사적 상황의 발전’은 곧 현실주의를 도출한 기반이거니와, 서사시는 현실주의의 발전으로 산생된 것이다.
‘서사시적 상황’은 이조 전기에서 그치지 않고 오히려 후기로 올수록 더욱 더 발전하였다. ‘체제 모순’의 경우 약간은 개량되고 또 변화되는 국면이 없지 않았으나 모순이 모순을 증대하는 악순환이 연속되었다. 이 모순의 현장은 당초 서사시를 출신시킨 곳일 뿐 아니라 뒤에까지 그 소재의 최다 공급처였다. 때문에 이조시대 서사시에서 ‘체제 모순과 삶의 갈등’의 내용 성격이 주류를 점유하게 된 것이다.
한편으로 이조시대에는 주변의 민족국가와 마찰이 심심찮게 있었는데 17세기 전후 두 차례의 대규모 전쟁이 우리 한반도에서 치러졌다. 그리고 19세기로 들어와서 제국주의의 위협이 현저히 가시화되고 있었다. 이런 대외모순과 관련하여 민족의 자주의식이 싹텄던바 ‘국난과 애국의 형상’을 노래 부르게 된 것이다. 다른 한편 여성에 대한 속박은 원래 봉건적 모순의 일부다. 신분제도가 문란해지는 봉건 말기에 남녀의 애정 갈등은 문학의 특징적 제재로 등장하게 되거니와, 여성의 자아는 시대에 반응하는 자태였다. 이에 ‘애정갈등과 여성’이 서사시의 형상으로 그려진 것이다. 그리고 이조후기에 일어난 사회ㆍ경제적 변화는 시정 세태에 반영되게 마련인데 인간의 정신과 활동을 다양하게 만들 수 있었다. ‘예인 및 시정의 모습들’이 서사시 양식에 도입된 것이다.
이와 같이 서사한시는 이조사회의 복잡한 시대 변화와 인간의 구구각색(區區各色)의 삶의 실상을 담아냈던 것이다. 하지만 서사한시의 원줄기는 체제의 기본 모순에서 형성되었던바, 그 원형이 폭넓게 적용된 것으로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