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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복음한글역주, 제4장 - 첫째와 꼴찌 본문

고전/성경

도마복음한글역주, 제4장 - 첫째와 꼴찌

건방진방랑자 2023. 3. 19.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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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째와 꼴찌

어린이는 도덕적 순결의 상징 아닌 웅혼한 원초성

 

 

큐복음서나 공관복음서의 공통자료들은 이미 기독론이나 종말론의 필터를 거치지 않은 것이 거의 없다. 큐에서 도마로 거슬러 올라가 볼 때만이 우리는 비로소 거대하고 웅혼한 역사적 예수의 실상을 접하게 된다. 그것은 동·서가 회통된 원초적 혼돈이었다.

 

 

4

1예수께서 가라사대, “나이 먹은 어른이 칠일 갓난 작은 아이에게 삶의 자리에 관해 묻는 것을 주저치 아니한다면, 그 사람은 생명의 길을 걸을 것이다.

2첫찌의 많은 자들이 꼴찌가 될 것이요,

3또 하나된 자가 될 것이니라.”

1Jesus said, “The man old in days will not hesitate to ask a small child seven days old about the place of life, and that person will live.

2For many of the first will be last,

3and will become a single one.”

 

 

누가복음 10에는 어린 아이에 관한 이야기가 다른 맥락에서 전개되고 있다. 큐복음서에 속하는데, 마태보다는 누가 텍스트가 더 오리지날에 가깝다.

 

 

이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이들과 또 이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하시더라. (10:21~22, 032).

 

 

여기서 이미 우리는 도마복음자료가 큐복음서자료로 변형되어간 과정을 엿볼 수 있다. 도마에서는, 어린 아이가 자각적 추구의 대상이며 나의 존재의 측면으로서 나타난다. 추구(seeking)와 발견(finding)의 실존적 결단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어린 아이는 존재의 웅혼한 원초성의 기저이다.

 

큐복음서는 바울이 어린이를 무지함과 유치함과 분열된 어두운 상태로 비하하는 것(고전 3:1, 13:11~12)과는 달리, 도마의 갓난 아이의 긍정적 이미지를 계승하였다. 어린 아이를 지혜와 슬기보다도 상위의 개념으로 파악한 것이다. 그러나 어린이가 언급된 맥락은 이미 하나님의 일방적 계시의 대상일 뿐이다. 하나님의 일방적 계시를 수용할 수 있는 순결함정도의 의미맥락인 것이다. 이러한 큐복음서의 맥락은 22절의 아버지가 아들을 안다.’ 그리고 아들과 아들이 선택하여 계시를 받은 자들만이 아버지를 안다고 하는 호상적 앎으로 연결되고 있다. 어린이의 순결함이 결국 초월적 아버지에 대한 앎의 바탕이 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 이미 초대교회의 가치를 대변하는 기독론적 변형이 일어났다는 것을 간파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안다’(기노스케이, ginōskei)라고 하는 것은 그노시스, 영지주의의 영향이라는 것 또한 간과할 수 없다.

 

마가자료에 속하는 또 하나의 파편을 살펴보자! 마가를 변형시킨 마태의 텍스트를 인용하겠다.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라”(마태 18:1~5, cf. 9:33~37, 9:46~48).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이라는 표현 속에서 우리는 도마의 원형의 자취를 읽을 수 있다. ‘돌이킨다는 표현 속에 어떤 원초성으로의 복귀, 상향이라는 역방향이 암시되어 있다. 그러나 마가(누가)에서는 제자들끼리 누가 더 위대하냐 식의 유치한 분별심의 경쟁을 하는 전체 맥락이 전제되어 있다. 그리고 마태에서는 천국입장이라는 초대교회의 종말론ㆍ재림사상의 맥락이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어린 아이의 이미지가 자기를 낮춤이라는 겸손과 복종의 도덕적 가치로 전락되었다. 지금도 대부분의 신학도들이 이 구절을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이상적인 어린이의 덕성의 맥락에서만 해석하고 있다. 순결(innocence), 무구(purity), 무조건적 신앙(unconditioned faith), 겸손(humility), 사회적 지위에 대한 무관심(unconcern for social status) 이러한 도덕적 개념이 어린이의 이미지와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도마의 내면적, 원초적, 본질적 웅혼함의 맥락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자잘한 도덕관념들이 메우고 있는 것이다. 어린 아이를 영접함이 곧 나를 영접함이라는 예수의 메시지는 교조화된 기독론의 전제가 없이는 생겨날 수 없는 말이다. 그리고 어린 아이가 너무 외재화되어 있다.

 

도마복음의 본장은 1절의 갓난 아이,’ ‘삶의 자리,’ ‘생명의 길이라는 메시지를 대전제로 깔면서 2절의 첫찌꼴찌의 논의를 통하여 3절의 하나된 자에서 클라이막스에 오르는 장쾌한 논리적 구조를 과시하고 있다. 그런데 첫째와 꼴찌의 논의는 큐복음서에도 이미 언급되어 있다.

 

 

지금 꼴찌된 자들이 첫째가 되고, 지금 첫째 된 자들이 꼴찌가 되리라.(265, p 20:16, 13:30).

 

 

그런데 여기서는 분명 꼴찌가 나쁜 것이고 첫째가 좋은 것이라는 가치판단이 전제되어 있다. 현세에서는 별볼일없는, 꼴찌된 자가 천국에서는 첫째가 될 수 있고, 현세에서 잘나가고 부귀권세를 누리는, 첫째된 자가 천국에서는 오히려 꼴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메시지가 현세적 가치의 전도와 천국의 실존적 의미를 결합시키는 메타포로서 사용될 때는 탁월한 표현이 되지만, 예수의 재림이나 최후의 심판이라는 역사적 시점을 기준으로 하여 전후상황을 말한 것으로 해석하면 치졸하기 그지없는 메시지가 되어버리고 만다. 최후의 심판 전까지는 별볼일없는 꼴찌로 살아도, 예수만 잘 믿으면 최후의 심판 후에는 첫째가 될 수 있다는 종말론적 신앙이 이 구절을 해석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도마복음에서는 맥락상 첫째라고 하는 것이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어른의 무리요, 죽음의 무리요, 하향의 무리다. 오히려 꼴찌가 되는 것이 갓난 아이쪽으로 가깝게 가는 것이요, 생명의 무리요, 상향의 무리다. 첫째의 모두(all of the first)가 꼴찌가 되는 것이 아니요, 첫째의 일부만 선택되어 꼴찌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첫찌의 많은 자들(many of the first)’이라는 표현에 우리는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런데 이것과 동일한 표현이 그 의미 맥락은 같지 않지만, 마태 19:30마가 10:31에도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꼴찌를 가치적으로 긍정하는 맥락이 마가 9:35에도 나타나고 있다: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꼴찌가 되어야 하며

 

도마복음 콥트어 텍스트에는 첫째가 꼴찌가 된다는 말만 있고, 꼴찌가 첫째가 된다는 말은 없다. 그러나 옥시린쿠스사본에는 후자가 병기되어 있다: “첫째의 많은 자들이 꼴찌가 될 것이요, 꼴찌가 첫째가 될 것이다. 그리고 결국 같은 하나가 될 것이다(For many of the first will be last, and the last first and will become one and the same).” 희랍어 텍스트는,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된다는 것이, 결국은 첫째와 꼴찌가 하나로 융합되는 것임을 말해준다. 모든 분별이 사라져버린 웅혼한 원초성을 지칭하는 것이다.

 

콥트어 사본의 하나된 자(a single one)’나 희랍어 사본의 같은 하나(one and the seme)’는 결국 어른과 아이, 죽음과 생명, 첫째와 꼴찌의 융합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자웅동체의 원초성(androgynous primordiality)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결국 상향의 동경을 가지고 하향의 길을 걸어간다. 아이에게 물어가면서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생명의 발랄함을 지니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상향과 하향, 아이와 어른, 생명과 죽음이 결국 하나의 혼돈(Chaos)이라는 것을 도마복음의 예수는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가다라(Gadara)알렉산더대왕 사후 프톨레미왕조 군사기지로 개발되어 셀레우코스왕조 지배하에 번성하였다. BC 30년 옥타비아누스는 이곳을 헤롯 대왕에게 귀속시켰다. 예수시대에는 로마제국 시리아령에 속한 자치폴리스였다. 내가 걷고 있는 길을 예수가 걸었다. 예수는 갈릴리 시골사람이 아니라 이러한 최첨단 문명을 흡수한 방랑하는 카리스마(wandering charismatics)였다.

예수시대를 알 수 있는 자료가 신약성서 밖에 없을까? 20세기 신학의 놀라운 발전은 신약성서 이외로 성서의 배경을 알 수 있는 많은 역사자료와 고고학자료와 새로운 문헌자료를 발견하고 해석했다는데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역사서가 예수와 동시대를 산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AD 37~c.100)의 저술들이다. 요세푸스는 예루살렘 멸망 이전의 갈릴리전투를 이끈 유대인 장수였는데 투항하여 로마황제의 비호를 받았다. 로마에서 로마인으로 살면서 유대인의 당대사를 썼다. 이 요세푸스의 역사서에는 예수라는 역사적 캐릭터는 실제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리얼한 역사적 인물로서 중후하게 취급되고 있다. 내가 지금 서있는 곳은 바로 세례요한이 처형된 마캐루스 성채의 헤롯궁전이다. 사해의 동편에 있다. BC 100년에 지어졌는데 BC 30년에 헤롯대왕이 증축했다. 바로 이 자리에서 살로메는 요염한 춤을 춘 것이다. 이 마캐루스 성채의 동쪽 절벽기슭에 세례요한이 갇혀 있었던 동굴감옥도 스산한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석양에 성채를 오르는데 강풍이 휘몰아 쳤다. 리차드 스트라우스의 오페라 살로메중의 일곱 망사의 춤의 선율이 내 귓전에 흐른다. 동굴감옥을 들여다 보는 순간 2천년 세월의 동록에 숨겨진 섬뜩한 그 무엇이 나를 엄습한다. 그리고 쟁반에 올려진 세례요한의 머리가 퍼뜩 떠오른다. 이 인류의 광포(狂暴)한 역사가 과연 우리 실존에 무엇을 말하려는가? 숙고하고 또 숙고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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