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사화에 휩쓸린 김구가 쓴 시첩의 가치
제자암시첩(題自庵詩帖)
윤근수(尹根壽)
기묘정인으로서의 성대함이 가득 담긴 시첩
自庵金公諱絿, 字大柔. 此帖, 卽公詩而手自寫者也.
公己卯正人, 往聞一時諸賢, 如趙靜庵則一意道學, 不暇他才藝, 金冲庵以下則蓋旁及文章矣. 諸賢之論, 以爲文則漢, 詩則唐, 眞草則晉, 人物則宋, 以是視法而爲終身俛焉之地, 亦盛矣哉! 今觀此帖, 不其信然乎.
공의 오르락내리락한 삶의 궤적
諸賢方得君行道, 力挽三代之治, 而憸人間之, 北門禍起, 遷謫四出, 而甚者命且不保.
公以副學, 遠投海上, 癸巳恩宥, 還禮山舊居, 遂以翌年甲午捐館舍, 享年僅四十七,
後復原職, 又以在玉堂時預宗系之議, 錄光國原從功一等, 贈吏曹參判, 此卽公衰榮之大槪也.
시와 문의 능력이 출중했음에도 꼬꾸라지다
樹德者獲報, 而公之孫持平韞ㆍ別提韐, 俱殞於壬辰兵禍, 天之報施善人者舛耶?
又聞公纔弱冠, 應生進試, 考官先正金慕齋, 見公文亟嘆賞. 兩試俱擢第一名, 旋以癸酉榜眼釋褐. 秉史筆上玉堂, 自正字, 積官至副學, 中間除外職者, 惟吏曹政府郞, 掌樂正而已. 其拜掌樂則以解音律, 而且賜暇湖堂, 以詩文預期於後日者固遠且大.
而卒以廢斥, 又奪其壽, 古所謂人忌之而天亦忌之者耶.
시첩의 가치
公書深得魏晉筆意, 至今學書者臨摸不衰, 而評書者或謂: ‘金某威而不猛, 姜漢猛而不威, 互致瑕瑜.’ 又安得爲定論乎?
詩宛有有唐風骨, 使假之以年, 綸而不息, 廓而大之, 則玆所就業, 豈其稅駕所哉.
帖爲主簿趙君大得所有. 余謂: “鍾趙ㆍ王儲諸人, 俱闕于行而徒有其藝, 後之人見其書法若詩, 猶愛玩不置. 況公之皭然名臣而才復兼至, 如此帖者, 其寶藏之當如何哉? 趙君其知所重乎哉.” 旣以語趙君, 復書所槪于懷者而歸之.
萬曆壬寅端陽月, 後學海平尹某題. 『月汀先生集』 卷之四
해석
기묘정인으로서의 성대함이 가득 담긴 시첩
自庵金公諱絿, 字大柔.
자암 김공의 휘는 구이고 자는 대유이다.
此帖, 卽公詩而手自寫者也.
이 시첩은 곧 공의 시로 손으로 스스로 적은 것이다.
公己卯正人, 往聞一時諸賢,
공은 기묘사화 때【기묘정인(己卯正人): ‘기묘명현(己卯名賢)’과 같은 말로,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희생된 조광조ㆍ김식 등을 말한다.】 희생된 사람으로 일찍이 듣기로 한 때의 여러 어진이들,
如趙靜庵則一意道學, 不暇他才藝,
이를테면 정암 조광조 같은 사람은 한결같이 도학에 뜻을 둬 다른 재주와 예술을 할 겨를이 없었고
金冲庵以下則蓋旁及文章矣.
충암 김정 이하의 사람들은 대체로 문장에 아울러 이르렀다【방급(旁及): ① 아울러 다루다 ② 연루되다 ③ 아울러 하다】.
諸賢之論, 以爲文則漢, 詩則唐,
여러 어진이들의 논의는 문장이라면 한나라이고, 시는 당나라이며
眞草則晉, 人物則宋,
진서(眞書)와 초서는 진나라이고, 인물은 송나라가 최고이니,
以是視法而爲終身俛焉之地,
이것으로 본받을 것으로 보아 종신토록 힘써야 할 경지로 여겼으니
亦盛矣哉!
또한 성대하구나!
今觀此帖, 不其信然乎.
이제 이 시첩을 보니 믿기지 않겠는가.
공의 오르락내리락한 삶의 궤적
諸賢方得君行道,
여러 어진 이들이 곧 임금의 마음을 얻어 도를 행하되
力挽三代之治,
힘써 삼대[夏殷周]의 다스림을 구현하려 했지만
而憸人間之, 北門禍起,
알랑거리는 이들이 이간질하여 북문에 화가 일어나【북문화기(北門禍起): 북문(北門)은 홍문관(弘文館)을 지칭하는 말로, 홍문관과 기묘사림들이 공신을 재정하고자 하자, 훈구파가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사류들을 몰아낸 사건을 말한다.】
遷謫四出, 而甚者命且不保.
사방으로 유배되어 쫓겨났고 심한 사람은 목숨 또한 보전치 못했다.
公以副學, 遠投海上,
공은 부제학(副提學)으로 멀리 바닷가로 유배되지만
癸巳恩宥, 還禮山舊居,
계사(1533)년에 용서함을 받아【은유(恩宥): 남에게 은혜를 베풀어 용서하는 것을 말한다.】 예산의 옛 집으로 돌아와
遂以翌年甲午捐館舍, 享年僅四十七,
마침내 이듬해 갑오에 관사를 버리고 돌아가셨으니【연관사(捐館舍): ‘살던 집을 버린다’는 뜻으로, 사망의 경칭(敬稱)이다. / 유의어 연관(捐館)】 향년이 겨우 47세였다.
後復原職, 又以在玉堂時預宗系之議,
훗날 원직을 회복했고 또한 옥당【옥당(玉堂): 조선 시대, 삼사의 하나로 궁중의 경서와 사적을 관리하고 왕에게 학문적 자문을 하던 관청】에 있을 때 종계변무(宗系辨誣)【종계(宗系): ‘종계변무(宗系辨誣)’를 말한다. 고려 말 윤이(尹彝)가 중국에 가서 “이성계는 고려의 역신(逆臣) 이인임(李仁任)의 아들이며, 연달아 네 임금을 시해하고 나라를 빼앗았다.”라고 하자, 『대명회전(大明會典)』 등에 그 내용이 실려, 조선 초부터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다가 결국 선조대(宣祖代)에 이르러 해결되었다.】의 의론에 참여하여
錄光國原從功一等, 贈吏曹參判,
광국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 1등에 추록(追錄)되고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니,
此卽公衰榮之大槪也.
이것이 곧 공의 오르락내리락한 삶의 큰 줄기다.
시와 문의 능력이 출중했음에도 꼬꾸라지다
樹德者獲報, 而公之孫持平韞ㆍ別提韐,
덕을 심은 사람을 보답을 획득한다고 하지만 공의 손자인 지평 온과 별제 급은
俱殞於壬辰兵禍,
모두 임진년의 병화로 죽었으니,
天之報施善人者舛耶?
하늘이 선한 사람에게 보시하는 것이 빗나간 것인가?
又聞公纔弱冠, 應生進試,
또 듣기로 공은 겨우 약관에 생원ㆍ진사시에 응시했는데
考官先正金慕齋, 見公文亟嘆賞.
시험관이었던 옛날의 현인【선정(先正): 옛날의 현인과 철인을 일컫는다.】인 모재 김안국(金安國)은 공의 문장을 보고서 자주 칭찬했다 한다.
兩試俱擢第一名, 旋以癸酉榜眼釋褐.
두 시험에서 장원으로 뽑혔고 계유(1513)년에 방안【방안(榜眼): 갑과(甲科) 2등을 말한다.】이 되어 첫 벼슬살이를 했다【석갈(釋褐): ‘천한 사람들이 입는 갈(褐) 옷을 벗어 버린다’는 뜻으로, 처음으로 벼슬살이함을 말한다.】.
秉史筆上玉堂, 自正字, 積官至副學,
사필을 잡고 옥당에 올랐고 정자로부터 관직에 계속하여 부제학에 이르렀지만,
中間除外職者, 惟吏曹政府郞, 掌樂正而已.
중간에 외직에 제수된 것은 오직 이조와 의정부의 낭관과 장악정 뿐이었다.
其拜掌樂則以解音律, 而且賜暇湖堂,
장악정에 제수된 것은 음률에 이해하였기 때문이고 또한 호당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니,
以詩文預期於後日者固遠且大.
시문으로 훗날을 예상하며 기대한 것이 진실로 원대하였다.
而卒以廢斥, 又奪其壽,
그러나 마침내 폐척되어 또한 목숨마저 빼앗겼으니,
古所謂人忌之而天亦忌之者耶.
옛날부터 말해지던 ‘사람이 시기하면 하늘도 또한 시기한다’는 것인가.
시첩의 가치
公書深得魏晉筆意,
공의 글은 깊이 위진의 필법을 터득하여
至今學書者臨摸不衰,
지금에 이르도록 글을 배우는 사람들이 베끼는 것이 시들지 않았으며
而評書者或謂: ‘金某威而不猛,
글을 평하는 사람들은 간혹 말들 한다. ‘김모는 위엄이 있으나 맹렬하지 않고
姜漢猛而不威, 互致瑕瑜.’
강한은 맹렬하나 위엄이 없으니, 서로 단점과 장점에 이르렀다.’
又安得爲定論乎?
또한 어찌 정해진 의론으로 삼을 수 있겠는가?
詩宛有有唐風骨, 使假之以年,
시는 완연히 당나라 풍골을 있었으니 만약 몇 년을 빌려주어
綸而不息, 廓而大之,
경륜하여 쉬지 않고 드넓혀 크게 했다면
則玆所就業, 豈其稅駕所哉.
이에 업에 성취한 것이 어찌 그만 두게【탈가(稅駕): ‘수레를 끌던 말을 수레에서 푼다’는 말로, 휴식하거나 머무름을 이른다. 『사기(史記)』 권87 「이사열전(李斯列傳)」에 “사물이 극에 달하면 쇠하니 내 어디에서 멍에를 내려두어야 할지 모르겠다.〔物極則衰 吾未知所稅駕也〕”라고 하였다.】 되었겠는가.
帖爲主簿趙君大得所有.
시첩은 주부 조대득의 소유가 되었다.
余謂: “鍾趙ㆍ王儲諸人,
내가 조대득에게 말했다. “종요와 조맹부와 왕희지와 저수량【종조왕저(鍾趙ㆍ王儲): 종요(鍾繇)는 삼국시대 위(魏) 나라의 서예가이고, 조맹부(趙孟頫)는 원(元)의 서화가(書畵家)이며, 왕희지(王羲之)는 동진(東晋)의 서예가이고, 저수량(褚遂良)은 당나라의 서예가이다.】의 여러 사람은
俱闕于行而徒有其藝,
모두 행실은 결여되어 있으나 다만 재주만 있었지만
後之人見其書法若詩, 猶愛玩不置.
후대 사람은 서법과 시를 보고서 오히려 사랑하고 완미함을 그만두지 않는다.
況公之皭然名臣而才復兼至,
하물며 공은 깨끗하게 이름난 신하이고 재주는 다시 겸하여 지극했으니,
如此帖者, 其寶藏之當如何哉?
이런 시첩과 같은 것은 보물로 그것을 간직하는 게 마땅하니 어째야 하는가?
趙君其知所重乎哉.”
조군은 소중한 것임을 알리라.
旣以語趙君, 復書所槪于懷者而歸之.
이미 조군에게 말하였고 다시 마음 속에 감개한 것을 써서 돌려보낸다.
萬曆壬寅端陽月, 後學海平尹某題. 『月汀先生集』 卷之四
만력 임인(1602)년 5월에 후학 해평 윤모가 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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