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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참마속(泣斬馬謖) - 사사로운 정을 버리고 공정을 택하다 본문

한문놀이터/고사성어

읍참마속(泣斬馬謖) - 사사로운 정을 버리고 공정을 택하다

건방진방랑자 2020. 7. 23.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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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참마속(泣斬馬謖)

사사로운 정을 버리고 공정을 택하다

 

 

馬良. 幼常. 以荊州從事隨先主入. 除綿竹成都令 越雋太守 才器過人 好論軍計 丞相諸葛亮深加 器異 先主臨薨謂亮曰 馬謖言過其實 不可大用 君其察之 亮猶謂不然 以謖爲參軍 每引見談論 自晝達夜 建興六年 亮出軍向祁山 時有宿將魏廷 吳壹等 論者皆言以爲宜令爲先鋒 而亮違衆拔謖 統大衆在前 與魏將張郃戰于街亭 爲所破 士卒離散 亮進無所據 退軍還漢中 謖下獄物故 亮爲之流涕 良死時年三十六 謖年三十九 삼국지(三國志)』 「촉서(蜀書)마속전(馬謖傳)

 

孔明變色曰: “汝自幼飽讀兵書熟諳戰法. 吾累次叮嚀告戒街亭是吾根本. 汝以全家之命領此重任, 汝若早聽王平之言豈有此禍? 今敗軍折將失地陷城皆汝之過也. 若不明正軍律何以服衆? 汝今犯法休得怨吾. 汝死之後汝之家小, 吾按月給與祿米汝不必挂心.” 叱左右推出斬之.

泣曰: “丞相視某如子, 某以丞相爲父, 某之死罪實已難逃. 願丞相思舜帝殛鯀用禹之義, 某雖死亦無恨於九泉.” 言訖大哭.

孔明揮淚曰: “吾與汝義同兄弟, 汝之子即吾之子也不必多囑.”

左右推出馬謖於轅門之外將斬, 參軍蔣琬, 成都至見武士欲斬馬謖, 大驚高叫留人, 入見孔明: “昔楚殺得臣而文公喜. 今天下未定而戮智謀之士, 豈不可惜乎?”

孔明流涕而答曰: “孫武所以能制勝於天下者, 用法明也. 今四方分爭兵交, 方始若須廢法, 何以討賊耶? 合當斬之.” 須臾武士獻馬謖首級於階下, 孔明大哭不已.

蔣琬問曰: “幼常得罪, 旣正軍法, 丞相何故哭耶?”

孔明: “吾非爲馬謖. 吾思先帝在白帝城臨危之時, 曾囑吾曰: ‘馬謖言過其實, 不可大用.’ 今果應此言, 乃深恨己之不明, 追思先帝之明, 因此痛哭耳.”

大小將士無不流涕, 馬謖亡年三十九歲.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諸葛亮病篤, 有大星, 赤而芒, 營中, 未幾.

楊儀整軍還, 百姓奔告司馬懿. 懿追之, 姜維令, 反旗鳴鼓若將向, 不敢逼. 百姓爲之諺曰: ‘諸葛走生仲達

笑曰: “吾能料生, 不能料死嘗作八陣圖, 歎曰: “天下奇才也

爲政無私. 馬謖素爲亮所知, 及敗軍, 流涕斬之, 而卹其後. 李平廖立, 皆爲所廢, 及聞之喪, 皆歎息流涕, 至發病死. 십팔사략(十八史略)

 

 

 

 

조조(曹操)가 급파한 위나라의 명장 사마의(司馬懿)20만 대군으로 기산의 산야(山野)에 부채꼴[扇形]의 진을 치고 제갈량의 침공군과 대치했다. ()’을 깰 제갈량의 계책은 이미 서 있었다. 그러나 상대가 지략이 뛰어난 사마의인 만큼 군량 수송로(軍糧輸送路)의 요충지인 가정(街亭 :韓中)’을 수비하는 것이 문제였다.

만약 가정(街亭)을 잃으면 촉나라의 중원(中原) 진출의 웅대한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중책(重責)을 맡길 만한 장수가 마땅치 않아서 제갈량은 고민했다.

그 때 마속(馬謖:190-228)이 그 중책을 자원하고 나섰다. 그러나 노회(老獪)한 사마의와 대결하기에는 아직 어렸다. 그래서 제갈량이 주저하자 마속은 거듭 간청했다.

다년간 병략(兵略)을 익혔는데 어찌 가정(街亭) 하나 지켜 내지 못하겠습니까? 만약 패하면 저는 물론 일가 권속(一家眷屬)까지 참형을 당해도 결코 원망치 않겠습니다.”

좋다. 그러나 군율(軍律)에는 두 말이 없다는 것을 명심하라.”

서둘러 가정에 도착한 마속은 지형부터 살펴 보았다. 삼면이 절벽을 이룬 산이 있었다. 제갈량의 명령은 그 산기슭의 협로(峽路)를 사수만 하라는 것이었으나 마속은 욕심을 내어 적을 유인하여 역공할 생각으로 산 위에다 진을 쳤다. 그러나 마속의 생각과 달리 위나라 군사는 산기슭을 포위만 한 채로 산 위를 공격해 올라오지 않았다. 그러자 산 위에서는 식수가 끊겼다. 다급해진 마속은 전병력을 동원해 포위망을 돌파하려 했으나 위나라 용장 장합(張郃)에게 참패하고 말았다.

마속의 실패로 전군(全軍)을 한중(韓中)으로 후퇴시킨 제갈량은 마속에게 중책을 맡겼던 것을 크게 후회했다. 군율을 어긴 그를 참형에 처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듬해 5, 마속이 처형되는 날이 왔다. 때마침 성도(成都)에서 연락관으로 와 있던 장완(張垸)마속 같은 유능한 장수를 잃는 것은 나라의 손실이라고 설득했으나 제갈량은 듣지 않았다. 마속이 형장으로 끌려가자 제갈량은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마룻바닥에 엎드려 울었다고 한다.

 

 

겉뜻: 울며 마속의 목을 베다

속뜻: 법의 공정을 지키기 위해 사사로운 정을 버림을 비유한 말이다.

유의어: 휘루참마속(揮淚斬馬謖), 일벌백계(一罰百戒), 이일경백(以一警百), 징일여백(懲一勵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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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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