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하려는 고결한 마음을 지니다 공을 세운 사안
사안고결(謝安高潔)
『晉書』. 謝安字安石, 陳國陽夏人. 年四歲桓彛見而嘆曰: “此兒風神秀徹, 後當不減王東海.” 王導亦深器之, 由是少有重名. 初辟除, 並以疾辭, 有司奏, “安被召歷年不至, 禁錮終身.” 遂棲遲東土, 常往臨安山中, 放情丘壑. 然每遊賞必以妓女從. 時弟萬爲西中郞將, 總藩任之重, 安雖處衡門, 名出其右, 有公輔望.
年四十餘始有仕志, 征西大將軍桓溫請爲司馬. 朝士咸送, 中丞高崧戱之曰: “卿屢違朝旨, 高臥東山, 諸人每相與言: ‘安石不肯出, 將如蒼生何?’ 今蒼生亦將如卿何?” 安有愧色.
後拜吏部尙書, 時孝武立, 政不自己, 桓溫威振內外. 安盡忠匡翼, 終能輯穆. 進中書監錄尙書事, 苻堅率衆, 次淮肥, 加安征討大都督. 旣破堅, 以總統功進太保. 薨贈太傅, 諡文靖.
해석
『晉書』.
진서에 실린 이야기다.
謝安字安石, 陳國陽夏人.
사안의 자는 안석(安石)이니 진국(陳國) 양하(陽夏) 사람이다.
年四歲桓彛見而嘆曰: “此兒風神秀徹, 後當不減王東海.”
네 살 때 환이가 보고 “이 아이의 풍신이 빼어나고 명석해 훗날 마땅히 왕동해(王東海)【왕승(王承)을 말하며 자는 안사(安斯). 남전현후(藍田縣侯)라는 직위를 계승하였는데 관직은 동해태수에 이르렀다】보다 못하지 않으리.”라고 감탄했다.
王導亦深器之, 由是少有重名.
왕도 또한 심오하고 도량이 있다고 하여 이 때문에 조금이나마 명성 중대해졌다.
初辟除, 並以疾辭, 有司奏, “安被召歷年不至, 禁錮終身.”
막 불러 제수하니 병을 구실로 사양하니 유사(有司)가 “사안은 초빙을 당했지만 지나도록 오질 않으니 종신토록 금고【금고(禁錮): 벼슬에 오르지 못하게 하던 것.】해야 합니다.”
遂棲遲東土, 常往臨安山中, 放情丘壑.
마침내 동산에 오래 살았지만 항상 임안(臨安) 산중에 가서 골짜기에 정을 풀어냈다.
然每遊賞必以妓女從.
그러나 매번 유람하며 감상할 때 반드시 기녀들이 따랐다.
時弟萬爲西中郞將, 總藩任之重,
당시 아우인 만(萬)은 서쪽 중랑장이 되어 번방의 중임을 총괄했고
安雖處衡門, 名出其右, 有公輔望.
사안은 비록 산속【형문(衡門): 두 개의 기둥에 한 개의 횡목(橫木)을 가로질러 만든 사립문으로, 초야의 누추한 은자(隱者)의 집을 가리킨다.】에 거처했지만 명성이 위쪽에 있어 삼공(三公)이 될 만한 인물이란 촉망이 있었다.
年四十餘始有仕志, 征西大將軍桓溫請爲司馬.
나이 마흔 여세에 비로소 벼슬할 뜻이 있었고 정서대장군 환온이 청함으로 사마가 되었다.
朝士咸送, 中丞高崧戱之曰:
조정의 선비들이 다 전송하는데 중승 고숭(高崧)이 농담을 했다.
“卿屢違朝旨, 高臥東山, 諸人每相與言: ‘安石不肯出, 將如蒼生何?’
“그대는 자주 조정의 초빙을 어기고 높이 동산에만 누워 있었으니 모든 사람이 매번 서로 ‘사안이 나오길 기꺼워하지 않으니 장차 백성들은 어찌할꼬?’라고 했지요.
今蒼生亦將如卿何?”
이제 백성들은 또한 장차 그대가 어찌하려나 하고 있답니다.”
安有愧色.
사안은 부끄러운 낯빛이 있었다.
後拜吏部尙書, 時孝武立, 政不自己, 桓溫威振內外.
훗날 이부상서로 제배되었는데 당시 효무제가 즉위했지만 정치는 스스로 하지 않아 환온(桓溫)의 위험이 안팎으로 떨쳐졌다.
安盡忠匡翼, 終能輯穆.
사안은 충성을 다하고 바로잡고 도와 마침내 효무제와 환온을 화해시켰다.
進中書監錄尙書事, 苻堅率衆, 次淮肥, 加安征討大都督.
중서감으로 나아가 상서의 일을 기록하게 했고 부견이 무리를 거느리고 회비(淮肥)에 진을 치자 사안에게 정토대도독(征討大都督)을 겸하게 했다.
旣破堅, 以總統功進太保.
이미 부견을 깨부수자 모두를 통솔한 공으로 태보(太保)에 임명했다.
薨贈太傅, 諡文靖.
숨지자 태부(太傅)로 추증되었고 문정(文靖)이라 시호했다.
참고
『몽구』를 보면 깨끗하다[淸]는 글자가 많이 등장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사안고결(謝安高潔)」과 「왕도공충(王導公忠)」 항목만 보더라도 청(淸)자뿐만 아니라 소(素)ㆍ아(雅) 등도 같은 의미로 쓰였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깨끗하다는 이미지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위진(魏晉) 시대 또는 육조ㆍ남북시대, 특히 한족의 사회 도덕 기준은 반드시 현대의 기준과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깨끗함이란 노장의 허무사상 내지 후세에서 말하는 풍류ㆍ현실도피에 가깝다고 하겠다. 그러한 점은 『몽구』 전체를 통해서 독자가 저절로 느끼리라고 믿는다. 말하자면 당시로서는 도교적 청결이 도덕 기준이었다.
-『몽구』, 이한 지음, 권오석 옮김, 홍신문화사, 1998년, 36쪽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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