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를 충성스럽게 받든 왕도
왕도공충(王導公忠)
晉王導字茂弘, 光祿大夫覽之孫. 少有風鑒, 識量淸遠. 陳留高士張公見而奇之, 謂其從兄敦曰: “此兒容貌志氣, 將相之器也.”
元帝爲琅邪王, 與導素相親善, 導知天下已亂, 遂傾心推奉. 潛有興復之志, 帝亦雅相器重. 會帝出鎭下邳, 請導爲安東司馬. 軍謀密策, 知無不爲, 帝常謂曰: “卿吾之蕭何也.”
屢遷中書監錄尙書事. 及帝登尊號, 百官陪列, 命導升御床共坐. 導固辭曰: “若太陽下同萬物, 蒼生何由仰照?” 帝乃止 進位司空.
해석
晉王導字茂弘, 光祿大夫覽之孫.
진나라 왕도의 자는 무홍(茂弘)이니 광록대부(光祿大夫) 왕람(王覽)의 손자다.
少有風鑒, 識量淸遠.
어려서 풍채에 대한 식감이 있었고 지식과 도량이 맑고도 원대했다.
陳留高士張公見而奇之, 謂其從兄敦曰: “此兒容貌志氣, 將相之器也.”
진류(陳留)의 고사인 장공(張公)이 보고 그를 기이하다 여기고 종형인 왕돈(王敦)에게 “이 아이의 용모와 뜻이 장수나 재상이 될 그릇일세.”라고 말했다.
元帝爲琅邪王, 與導素相親善, 導知天下已亂, 遂傾心推奉.
원제는 낭야(琅邪)의 왕이 되었는데 왕도와 본래 서로 친하게 지냈는데 왕도는 천하가 이미 혼란스러운 걸 알고 마침내 마음을 다해 받들었다.
潛有興復之志, 帝亦雅相器重.
원제도 내심 부흥할 뜻이 있어 또한 우아하게 서로 도량이 크다고 할 정도였다.
會帝出鎭下邳, 請導爲安東司馬.
마침 원제가 하비에 나아가 진무할 적에 왕도에게 청해서 안동사마(安東司馬)로 삼았다.
軍謀密策, 知無不爲, 帝常謂曰: “卿吾之蕭何也.”
군대의 전술과 계책을 하지 않음이 없음을 아니 원제가 항상 “그대는 나의 소하일세.”라고 말할 정도였다.
屢遷中書監錄尙書事.
자주 중서감(中書監)으로 영전했고 상서(尙書)의 일을 기록했다.
及帝登尊號, 百官陪列, 命導升御床共坐.
원제가 존호【존호(尊號): 임금이나 왕비의 덕을 기리는 뜻으로 올리던 칭호】에 올라 모든 관료들이 나열하자 왕도에게 어상에 올라 함께 앉길 명하자
導固辭曰: “若太陽下同萬物, 蒼生何由仰照?”
왕도가 짐짓 “만약 태양이 아래의 만물과 똑같다면 백성들이 어떤 까닭으로 우러러 비추겠나이까?”라고 사양했다.
帝乃止 進位司空.
원제가 곧바로 그만두었다. 사공(司空)의 지위에까지 진출했다.
참고
『몽구』를 보면 깨끗하다[淸]는 글자가 많이 등장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사안고결(謝安高潔)」과 「왕도공충(王導公忠)」 항목만 보더라도 청(淸)자뿐만 아니라 소(素)ㆍ아(雅) 등도 같은 의미로 쓰였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깨끗하다는 이미지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위진(魏晉) 시대 또는 육조ㆍ남북시대, 특히 한족의 사회 도덕 기준은 반드시 현대의 기준과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깨끗함이란 노장의 허무사상 내지 후세에서 말하는 풍류ㆍ현실도피에 가깝다고 하겠다. 그러한 점은 『몽구』 전체를 통해서 독자가 저절로 느끼리라고 믿는다. 말하자면 당시로서는 도교적 청결이 도덕 기준이었다.
-『몽구』, 이한 지음, 권오석 옮김, 홍신문화사, 1998년, 36쪽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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