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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자람 - 4장 세상의 중심이었던 중국, 중화의 축: 촌놈이 세운 대제국(한나라, 군국제)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동양사, 자람 - 4장 세상의 중심이었던 중국, 중화의 축: 촌놈이 세운 대제국(한나라, 군국제)

건방진방랑자 2021. 6. 4.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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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촌놈이 세운 대제국

 

반란은 농민들이 먼저 일으키고, 지식인들이 뒤를 잇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진시황(秦始皇)이 죽은 지 불과 1년 만인 기원전 209년에 중국 역사상 최초의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 주동자인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은 하급 장교 출신이었다. 처음에는 이들이 징용에 끌려가던 농민 병사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내 일반 농민도 가세하면서 삽시간에 대규모 농민 반란으로 확대되었다. 반란군은 황허 이남의 수십 개 성을 함락하고 1년 가까이 맹위를 떨쳤다. 내친 김에 진의 타도를 목표로 삼은 진승은 장초(張楚)라는 국호까지 정하고 자신을 왕으로 자칭했다(국호에 초가 붙은 것은 옛날의 강국 초나라를 계승한다는 의미였다). 이듬해 반란은 간신히 진압되었으나 이 사건은 진의 붕괴를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진승과 오광이 그리운 옛날을 들먹인 것은 그만큼 옛 제후국들의 힘이 아직 살아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과연 진승과 오광의 반란을 계기로 통일 이전의 6(전국 7웅 가운데 진을 제외한 나라들) 세력들이 각자 자기 지방에서 들고일어나 옛 제후국의 부활과 계승을 표방했다. 그러자 수십 년 전의 세력 판도가 금세 부활했다. 다른 반란 세력들은 그런대로 진압할 수 있었지만, 옛날 진과 당당히 맞섰던 강적 초의 후예들은 역시 만만찮았다. 옛 초의 귀족 출신 항량(項梁)은 초의 왕족을 왕으로 옹립하고 반란군을 조직했는데, 이들 세력은 옛날을 그리워하는 지역 백성들의 지원을 받으며 크게 세를 떨쳤다. 항량이 전사한 탓에 전권을 인수받은 항우(項羽, 기원전 232~기원전 202)는 드디어 관군의 핵심인 장한(章邯)의 군대를 물리치고 기원전 206년에 진을 멸망시켰다.

 

그러나 패기와 용맹으로 무적이었던 항우는 전혀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나게 된다. 바로 항우와 달리 왕족 혈통도 아니고 변방의 하급 관리에 불과한 유방(劉邦, 기원전 247년경~기원전 195)이라는 인물이었다. 더구나 거병할 무렵 유방의 군대는 초라한 농민군에 지나지 않았다. 어느 모로 보나 그는 명망 있는 초의 귀족에다 정규군을 거느린 항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실제로 처음에 그의 군대는 항우의 휘하에 소속되어 있었다.

 

진을 무너뜨릴 때까지 두 사람은 공동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천하의 패권은 하나였다. 진이 멸망하자 두 사람은 6년간 치열한 결전을 펼쳤는데, 결과는 유방의 대역전승이었다. 항우를 무너뜨린 유방은 새 제국 한()을 세웠으므로 두 사람의 결전은 훗날 초와 한이 싸우는 장기판으로 이어졌다. 패배한 초패왕 항우는 해하(垓下)에서 자결로 삶을 마쳤다.

 

이후의 역사까지 통틀어 중국 역사상 가장 미천한 신분촌놈이 천하의 대권을 장악했다(1500년 뒤 명을 건국하는 주원장은 정규군을 거느리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홍건군紅巾軍이라는 명칭을 가진 군대의 두목이었다). 촌놈 유방(劉邦)의 승리는 옛 제후국의 귀족과 백성들에게 아직도 남아 있는 그리운 옛날에 대한 향수를 완전히 불식시켰다. 드디어 안정된 통일 제국의 기반이 구축되었다.

 

 

잠시의 분열기를 끝내고 중국을 재통일한 유방(劉邦)은 기원전 202년 부하들의 추대를 받아 한의 고조(高祖)로 즉위했다. 새 세상이 되었으니 제도도 바뀌어야 했으나 워낙 진시황(秦始皇)이 기틀을 잘 잡아놓은 덕분에 큰 문제는 없었다. 한은 진의 중앙 관료 기구인 3공과 9경도 그대로 유지했고, 진의 관료 제도도 거의 답습했다. 손보아야할 것은 행정제도, 즉 군현제였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수백 년간의 분열기를 극복하는 첫 단추는 이미 진의 군현제가 제시한 바 있었다. 다만 군현제는 너무 급진적이었다. 중앙집권제는 필요하지만 군현제처럼 강력한 제도는 부작용이 컸다. 게다가 평민 출신의 한 고조는 진시황보다 권위도 크게 부족했다. 그래서 그는 군현제와 옛 봉건제를 병용해 새로이 군국제(郡國制)를 시행했다.

 

군현제는 전국을 군으로 나누고 그 아래 현을 두는 제도였으므로 중앙집권을 도모하기에 유리했으나, 군국제는 군의 편제만 그대로 두고 지역에 나라[]의 위상을 부여하는 것이었으니 중앙집권을 반쯤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군국제는 수도인 장안(長安) 부근만 중앙집권제로 통치하고 각 지방에서는 봉건제를 실시하는 절충책이었다.

 

사실 오래 전 주나라 시대의 봉건제를 재활용하겠다는 고조의 결심에는 논공행상(論功行賞)의 문제가 깊숙이 개재해 있었다. 개국에는 공신들이 있게 마련이다. 이들을 배려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공신들을 마냥 우대하다가는 지방들이 분립하는 봉건시대로 되돌아갈 우려가 있었다. 따라서 한 고조는 개국공신들만이 아니라 자신의 성씨인 유()씨 일가들도 함께 제후로 봉했다. 그러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그는 차후 중앙 권력의 안정을 기하기 위해 온갖 구실을 붙여 공신 제후국들을 하나씩 제거했다. 하지만 그의 우려는 금세 현실로 드러났다. 지방 관리의 임용이나 재정 등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었던 제후들은 옛날처럼 독립국으로 행세하려 했다. 그래서 고조의 사후에 후임 황제들은 일가붙이인 동성(同姓) 제후국마저 억압해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차츰 국가 권력은 자리를 잡아갔지만, 아직 큰 문제가 남아 있었다. 그것은 한 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후 중국 역대 왕조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문제였으며, 종국에는 한족 중심의 중화 세계마저도 바뀌게 하는 실로 중요한 문제였다.

 

 

홍문의 사건 홍문(鴻門)에서 유방이 살아남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중국 민족은 한족(漢族) 대신 초족(楚族)이라고 불릴지도 모른다. 항우는 유방을 불러 연회장에서 살해하려 했다가 유방의 부하인 번쾌(樊噲)의 기지와 용맹, 충절에 감복해 그를 살려 보냈다. 그 장면을 되살린 게 위 그림이다. 왼쪽에 항우와 유방이 위, 아래로 앉아 있고 오른쪽 아래 서 있는 인물이 번쾌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죽 쒸서 개 준 통일

촌놈이 세운 대제국

한 무제의 두 번째 건국

흉노 정벌의 도미노

화려한 겉과 곪아가는 속

외척과 환괸의 악순환

또 다시 분열의 시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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