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한문을 맘껏 공부할 수 있는 지금이 좋다 - 2. 앎의 희열이 넘쳐 흐르다 본문

건빵/일상의 삶

한문을 맘껏 공부할 수 있는 지금이 좋다 - 2. 앎의 희열이 넘쳐 흐르다

건방진방랑자 2020. 10. 25. 18:08
728x90
반응형

2. 앎의 희열이 넘쳐 흐르다

 

 

어찌 모르는 걸 알아가는 게, 그리고 그걸 공부해나가는 과정이 즐겁기만 할까? 그럼에도 감히 재밌다고 표현한 까닭은 다른 데 있지 않다. 즐겁다는 것에도 여러 층위가 있으니 말이다.

 

 

이 글귀가 다르게 보이기까진 오로지 즐기는 사람만이 나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앎이 희열이 되는 이유

 

논어(論語)』 「옹야(雍也)18장엔 그것을 아는 사람은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것을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구절을 대충 읽으면 아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 즐기는 사람과 같은 세 부류의 사람이 제시되며 당연히 앞에 위치한 사람보다 뒤에 위치한 사람이 더 우월한 존재라는 인상을 갖게 만든다. 그런 이해 때문에 예전에 옛 이야기 전문가 김환희를 만나다라는 글에서 한참 썰을 풀어내기도 했었고 단재학교에서 야유회를 갔을 때 5분 동안 자기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 주어지자 위의 등호를 그대로 쓰며 무엇이든 즐기는 사람, 즐기는 교사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장광설을 펼치기도 했었다.

하지만 위 구절에 대한 김용옥 선생님이 쓴 논어한글역주를 읽고서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고 나의 짧은 이해를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호학(好學)은 앎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요, 앎이란 정확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치열하게 아는 자만이 그 대상을 좋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치열하고 좋아할 수 있는 자만이 그 대상을 즐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앎과 좋아함과 즐김은 가치관의 서열이 아니라, 오직 치열한 앎이 지향해야 할 상향의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결국 앎과 좋아함과 즐김은 일체(一切)인 것이다.

-김용옥, 논어한글역주, 통나무, 2008, 470~472

 

 

이 글을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그건 결코 층위가 아니다. 무언가를 좋아할 수 있고 즐거워할 수 있으려면 치열하게 알려고 노력하는 순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 모르는 것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면 그래서 앎의 하나의 단서(Schema)가 주어지면 그로 인해 조금이나마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고 즐길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는 것이다.

실제로 막상 한문공부를 다시 시작할 땐 모든 게 흐리멍덩하고 손에 잡히는 게 하나도 없어 발분(發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매순간이 잔뜩 긴장한 채 받아들여야만 하는 순간이었고 하나라도 놓칠세라 정리를 할 때면 정신의 뼈대를 하얗게 세우고 기억나는 것들을 하나하나 적어나기고 분주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조금이나마 한시에 대해 알게 되었고 시화집(詩話集)이 어떤 방식으로 기술되는지 알게 되었다. 그렇게 스키마가 생기며 앎의 길목이 조금이나마 열리자 그 다음부턴 아주 재밌고 신나게 공부할 수 있더라. 물론 그렇다고 한문실력이 월등히 좋아졌다곤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아무 것도 모르는 때에 비하면 하나라도 알게 된 것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공부하는 과정이 왜 즐겁지 않겠는가?

 

 

성독실은 리모델링을 해서 완전히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곳에 넘실대는 희열들.   

 

 

 

서사시와 한껏 친해졌던 올해

 

올핸 이조시대 서사시와 서사시와 한껏 어울릴 수 있었다. 서사시(敍事詩)는 매우 생소한 장르다. 예전에 임용을 준비를 할 땐 결코 보지 않았던 장르였고 한 번도 관심 가져본 적도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2014년부터 임용체제가 3차 시험에서 2차 시험으로 바뀌며 그때부터 서사시도 한문임용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고 임용을 준비하는 사람이라면 다 해석하진 않더라도 해석본 정도는 공부하게 되었다.

스터디를 하면 좋은 점은 대충 해석이나 보며 넘어갈 것도 스스로 준비를 하고 시에 담긴 스토리를 생각하며 한 구절 한 구절 깊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5월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서사시를 함께 보며 한시라는 정형화(定型化)된 틀로 일상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방식의 생소함을 그대로 맛볼 수 있었다. 당연히 산문보다 더욱 해석하기 어려웠으며 그에 따라 이야기의 맥락을 따라가기 힘들기도 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우리가 개떡 같이 해석을 해도 그걸 세련된 언어로 바꿔주고 내용을 두 깊이 있게 들려줄 교수님이 계셨고 그에 대해 다른 의견을 제시할 스터디원들이 있었기 때문에 주저하지 않고 할 수 있는 만큼 맘껏 준비를 할 수 있었다. 그때마다 도무지 이해가 제대로 되지 않아 얼렁뚱땅 해석한 부분에 대해선 다른 의견이 들어왔고 수정해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완벽하지 않기에, 아니 아직도 모르는 게 많기에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을 들을 수 있다는 것도, 교수님의 새로운 해석을 들을 수 있다는 것도 좋다. 하나의 해석에 빠질 게 아니라 다양한 가능성이 있다면 그걸 모두 수용하고서 나만의 방식으로 해석을 만들어가는 것도 공부의 한 방법일 테니 말이다.

 

 

밤이 깊었지만 진리관은 진리를 탐구하는 마음들로 따스하기만 하다.

 

 

인용

목차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