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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국토종단 - 32. 국토종단 중에 교회를 가려는 이유 본문

연재/여행 속에 답이 있다

2009년 국토종단 - 32. 국토종단 중에 교회를 가려는 이유

건방진방랑자 2021. 2. 5.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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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종단 중에 교회를 가려는 이유

 

 

한참을 23번 국도를 따라 걷다가 벽성대학교가 보이는 곳에서 이름도 없는 한적한 길로 빠졌다. 그곳은 국도와는 달리 2차선이어서 아무래도 차를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경치를 맘껏 구경하며 갈 수 있기 때문이다.

 

 

▲ 굳이 찾지 않아도 교회가 떡하니 보인다. 마을 어디서든 바로 보이는 교회다.

 

 

 

비신자가 교회를 찾는 이유

 

더욱이 이미 시간은 10시가 넘었기에 아무래도 큰 도로에서 교회를 찾는 것보다 이런 구도로에서 교회를 찾는 게 수월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기에 처음에 보이는 교회에 들어가기로 했지만, 그럼에도 작은 개척교회가 먼저 눈에 띄길 바랐다. 큰 교회에 비해 아무래도 가족 같은 분위기일 테니 자연스럽게 그분들이 사는 이야기, 마을 이야기도 자연스레 들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그런 기대와는 달리 처음에 눈에 띈 교회는 중형교회인 황산침례교회였다. 이런 시골에 저렇게 큰 교회가 있다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큰 규모였고, 저 멀리서부터 보일 정도로 언덕 높은 곳에 지어져 있었다. 막상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보니 규모만 큰 게 아니라, 신자 또한 많았으며 시설도 좋았다.

그런데 교회를 다니고 있지도 않다면서 저번 목포에서도 그렇고 오늘도 예배를 드리려 하는 게 의아해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비신자라고 해서 예배를 드리지 말라는 법도 없거니와 이렇게 드리려 하는 이유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제사보다는 젯밥에 눈이 멀다라는 말처럼 점심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를 댈 경우 흔히 신성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너무 불경한 것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이 이유야말로 잰 체하거나 멋들어지게 꾸미지 않는 진솔한 마음이라 생각한다. 둘째는 함께 밥을 먹으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의 주요 컨셉은 걸어서 우리 나라를 남에서 북으로 종단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방법에 관한 것일 뿐, 알맹이는 빠져 있다. ‘그렇게 걸어서 목적지까지 가면서 무엇을 하려 하는가?’라는 건 쏙 빠져 있으니 말이다. 바로 그 뚫려 있는 빈칸엔 사람들이 사는 모습, 그리고 지금껏 놓치며 살아왔던 가치들을 알아보고자 한다는 내용이 들어간다. 그러려면 어떻게든 사람들과 마주쳐야 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야만 한다. 그럴 때 예배를 드리고 점심을 먹는 건 가장 쉬운 접근법이라 할 수 있다. 셋째는 교회별로 다른 예배스타일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때는 열혈 신자로 교회의 모든 행사에 빠지지 않고 다녔고, 군대에서 군종(軍宗)이란 직책을 받아 중대 군인들의 신앙심 향상을 위해 봉사했던 적도 있었다. 이처럼 다년간 교회에 다닌 경험이 있기에 예배 스타일의 비교, 목사님 설교 말씀이 어떤지에 대해 나름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비신자가 되었음에도 교회를 찾아가려 하는 것이다.

 

 

▲ 20대의 열정 그대로 열심히 섬기고 열심히 활동하던 그대들.

 

 

 

구약의 하나님을 신약의 하나님으로 해석하다

 

성경 구절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어 하느님의 심판을 당하는 내용이었다. 교회에서 가장 흔히 들을 수 있는 이야기이며, 여기서 꼭 빠지지 않고 나오는 게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는 이야기다.

이 구절을 가지고 목사님은 하느님을 잃어버림=절망이란 공식으로 정의하셨다. 하느님이 아담을 만들 땐 하나의 규율만을 지키도록 하고, 나머지엔 완벽한 자유를 주었다. 그 규율이 바로 선악을 알게 하는 과일을 따먹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담은 뱀의 꾐에 빠진 이브의 유혹에 빠져 금기를 범하게 되고 그에 따라 하느님의 눈을 피해 꼭 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처럼 숨바꼭질을 하게 된다. 당연히 그에 따라 아담은 깊은 절망감에 빠져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하느님은 금기를 범한 아담에 대해 묻고 따지지도 않고먼저 찾아와주셨고 희망을 주셨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절망에 빠질 때 하느님은 어김없이 찾아오신다는 걸 믿고, 희망을 잃지 말고 살라고 결론을 내려주시며 말씀은 끝이 났다.

 

 

▲ 선악과 이야기를 통해 목사님은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인간은 죄를 짓지만, 하느님은 언제든 찾아온다는 것을.

 

 

분명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이 말씀은 가뭄의 단비처럼 포근히 감싸 안아주는 말씀이리라. 낙담하고 체념하여 주저앉고 싶을 때, 세상의 창조자인 하느님이 내 편에 남아 있다는데 그 어느 누가 싫다고 하겠는가. 그럼에도 이 말씀에는 어거지가 있다. 하느님이 다시 아담을 찾아간 것은 그를 용서하고 이해하려는 게 아니라, 죄를 심판하기 위해서다. 고로 하느님의 찾으심=희망이란 공식은 억지로 껴 맞춘 결말에 불과한 것이 된다. 아담이 징계를 받아 인간세상의 온갖 고초를 감당해야 했듯 하느님의 찾으심=더 큰 절망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절망조차 시간이 흐른 후에 결과적으로 희망이 될 수도 있다. 예수님의 핍박과 못 박히심이 그 당시엔 곤욕이고 치욕이지만, 큰 그림에선 인류 전체를 구원하는 역사라 말할 수 있는 것처럼, 그런 식의 감당하는 시간이 아담을 하느님의 충실한 종으로 탈바꿈시켰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위에 제시된 구절만으로 희망이란 메시지를 전하는 건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 구절 어디에도 새옹지마(塞翁之馬)’의 이야기와 같이 인생이 시시때때로 변해가는 이야기는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목사님은 구약의 냉정한 유대민족의 신신약의 인자하고 세계보편의 신으로 해석하고 싶으셨던 걸 터다.

하지만 그때 보여준 동영상은 내 심금을 울렸다. ‘닉 부이치치(Nicholas James Vujicic)’라는 손과 발(한쪽 발은 있지만 그 발은 지느러미 같은 역할을 함)이 없이 몸과 얼굴만 있는 외국 사람의 이야기를 담은 동영상이었다. 이 이야기를 하려면 꽤 많은 지면이 필요하기에, 이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여행기에 마저 쓰도록 하겠다.

 

 

▲ 구약의 하느님은 유대 일족의 신이며 심판의 신인데 반해, 신약의 하느님은 전 인류의 신이며 인자의 신이다.

 

 

인용

목차

사진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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