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식①: 살아있는 나에게 주는 선물
지금까지 잔 곳은 장소만 다를 뿐 공통점이 있었다. 그건 뭐니 뭐니 해도 나 혼자만의 공간에서 잤다는 점이다. 물론 상황에 따라 방의 생김새나 청결 정도는 엄청나게 차이가 났지만, 적어도 혼자 뒤척이다 잠이 오면 잘 수 있다는 점은 좋았다.
그런데 어젠 형수 형이 살고 있는 기숙사에서 함께 잠을 자야 하니, 정말 힘들더라. 형과 그렇게 친하지도 않을뿐더러, 늦게까지 불을 끄지 않고 책을 보고 있었기에 “얼른 자요”라는 말조차 꺼낼 수도 없었다. 그러니 누워는 있지만 잠이 쉬이 오지 않아 뒤척여야 했고, 새벽에도 깊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오늘은 걷지 않고 일주일 동안 잘 여행한 나를 위해, 이곳 김제에서 하루 쉬기로 했다는 점이다.
콩나물국밥이 해장국이란 생각을 버려
아침엔 콩나물국밥을 사줘서 함께 먹었다. 전주하면 유명한 음식은 단연 비빔밥을 떠올릴 테지만, 그건 이미지만 그럴 뿐 현지인들 중엔 비빔밥을 먹어본 사람이 거의 없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굳이 비빔밥을 사먹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외지 사람들은 ‘전주=비빔밥’이 이미 공식화되어 있기 때문에, 외지인들이 올 땐 어쩔 수 없이 비빔밥집을 찾아가곤 한다(실제로 2012년과 2013년에 전주국제영화제 때문에 학교 아이들과 전주에 왔을 때도 비빔밥을 먹으러 갔었다. 아이들이 “전주에 갔는데 비빔밥을 먹지 않고 오면 섭하잖아요”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2012년엔 꽤 유명한 곳에 가서 가격이나 맛에 실망했고, 그 후에 간 곳은 가격도 저렴하고 맛도 괜찮아서 만족했었다. 고로 유명한 비빔밥집이 아닌 저렴한 곳을 찾아 들어가는 게 훨씬 낫다).
그런데 실제로 전주 사람들이 많이 먹는 건 비빔밥보단 콩나물국밥이다. 값도 저렴(초반엔 오천원)하고, 속을 제대로 풀어주기 때문에 아침 식사대용으로 자주 먹게 된 것이다. 솔직히 대학생 때만해도 콩나물국밥을 먹기 위해 돈을 쓰는 건 아깝다고만 생각했었다. 그렇지 않아도 집에서 자주 콩나물국을 먹는데, 굳이 외식을 하면서 콩나물국밥을 먹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그만큼 내가 미식가가 못 된다고도 할 수 있으리라.
그런 가운데 처음으로 콩나물국밥의 진가를 제대로 맛보게 된 경험을 하게 됐다. 2007년쯤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학과 선후배들과 한바탕 술파티를 한 다음 날 경일이 형이 콩나물국밥을 먹으러 가자는 것이다. 그때는 전혀 콩나물국밥의 맛을 몰랐기에 ‘차라리 순대국밥 같은 게 나을 텐데’라며 아쉬워했었다. 하지만 막상 콩나물국밥집에 가서 한 숟갈을 뜨는 순간, 그 깊고도 감미로운 맛이 혀를 감싸며 속을 따뜻하게 데워줬다. 맵거나 자극적이지 않으며 기름지지 않은 담백한 맛이 일품이었던 거다. 그 담백한 맛이 입 안에 침을 고이게 하니, ‘시원하다’는 표현이 딱 맞았다. 그래서 그때부터 콩나물국밥을 좋아하게 됐고 술 마신 다음 날엔 땡기게 되었다.
그러나 이 날처럼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 콩나물국밥을 먹는 건 처음이었다. 그새 콩나물국밥이 익숙해졌기 때문인지, 아니면 국토종단을 하면서 잘 먹고 다니지 못하기에 ‘is뭔들’이란 생각 때문인지 그렇게 맛있던 적은 처음이었다. 역시 ‘시장이 반찬’이란 말마따나, 국토종단이 반찬이다(그런데도 고창 기사식당에서 먹었던 된장찌개는 정말 최악이었던 듯).
난 걷는 걸 싫어하나 걷는 걸 보고 있으니 걷고 싶다
아침밥을 먹으러 짐을 챙겨 기숙사를 나가는데 그 친구 분이 “난 걷는 걸 좋아하진 않는데, 동생이 걷는 걸 보니까 나도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는 얘길 해주었다. 그러면서 “부럽다”는 말을 덧붙이셨다.
누구나 자신의 일상에서, 반복되는 현실에서 떠나고 싶은 맘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걸 직접 실천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 친구 분이 나를 보며 일정 부분 부러움을 느꼈다면 그건 일상을 떠날 수 있는 ‘자유로움’과 ‘실천력’ 때문이지 않았을까?
그런데 내가 그런 부러움을 받을만한 사람인지는 모르겠다. 솔직히 말해서 길을 걸으면서도 내가 진정 자유롭다고 느끼진 못했으니 말이다. 물론 무언가에 쫓기거나 조급해하거나 하진 않았지만 중력에 구속 받고 배낭의 무게에 짓눌렸으며 하루에 걸어야 할 목표량이 날 재촉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주위의 풍경들을 맘껏 즐기며 걷는다는 건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그렇게 어느 순간부터 목표량 운운하며 앞만 보고 걷다보니, 이 여행 자체에 대한 회의가 들기도 했다. ‘내가 결국 이렇게 목적지에만 가기 위해서 여행을 떠난 것인가?’하는 회의감 말이다. 그런 회의감이 커지면서 ‘이럴 바에야 차라리 버스를 타고 여행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까지 들기에 이르렀다. 어차피 목적지에 가는 여행이라면 걸어서 가나, 버스를 타고 가나 매한가지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회의감에도 확실한 건 하루하루 걸어 목적지에 도착하면 뿌듯하다는 것이고 길을 걷는 순간순간에 행복이 깃든다는 것이다. 일상의 무게에 매몰된 사람들은 별 감정 없이 스쳐 지나는 풍경과 사람에 대해 기계적으로 반응하며 살아가지만 적어도 지금의 난 그러지 않으니 말이다. 어린아이가 된 마냥 모든 것이 새롭고 모든 것에 호기심이 어린다. 파란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빛과 그 햇빛을 정면으로 받기 위해 고개를 쭉 빼든 이름 모를 들꽃, 그리고 조금씩 봉우리가 터져 오르는 새싹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 맘에 여유가 생긴다(실제로 2015년에 떠난 ‘낙동강-한강 자전거 여행’에서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었다. 사람을 자주 볼 수 있는 환경에선 사람이 적이거나 날 귀찮게 하는 존재로 느껴지는 반면, 그렇지 않은 환경에선 누군가 있다는 것만으로 반가우니 말이다).
그뿐인가? 흐린 날엔 또 흐린 날의 운치가 있다. 빠르게 흐르는 먹구름들, 한 방울씩 비가 내려 땅을 적실 때 맡아지는 아련한 흙내음, 비를 맞으며 아우성치는 꽃잎들, 그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도로 위를 유유히 기어가는 두꺼비를 보는 것만으로도 ‘삶이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여행 중에 느끼는 이런 여러 감정들은 오히려 국토종단을 만끽하기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것이야말로 내가 펄펄 끓는 피를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증표인 거다. 이와 같은 다양한 감정으로 여행하기에 아마도 형의 친구가 부러워했는지도 모르겠다.
자축파티와 2주째 여행에 대한 기대
오늘은 나를 위한 파티를 열었다. 일주일간 고생한 나에게 주는 선물이다. 통닭 한 마리와 맥주 두 캔이다. 이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 있겠는가. 누가 뭐라 하건 나 혼자 행복하면 ‘장땡’이다. 빨래도 다 마쳤겠다, 먹을거리도 있겠다, 원 없이 먹고 원 없이 마시면 된다.
왠지 이렇게 나를 위한 파티를 여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더라. 신선놀음이란 게 ‘일상을 벗어나 자유를 누리는 것’이라고 한다면 지금의 내 모습이 딱 그렇다. 이런 소소한 행복을 만끽할 수 있는 지금이 좋다. 지금껏 살아 있어줘서 어찌나 다행인지^^
내일부턴 또 다른 한 주가 시작된다. 이제 조금씩 이 여행에 몸이 익숙해져 가고 있다. 1주차엔 바쁘게 갈 길만 갔다면 2주차엔 좀 더 지역 사람들과 밀착하도록 노력해볼 것이다. 마을 회관이나 교회에서 잘 수 있도록 아쉬운 소리도 많이 해보려 한다. 예전의 신조는 ‘민폐를 끼치지 말자’였지만, 지금은 ‘민폐를 끼쳐 인연을 만들자’다. 관점이 바뀐 만큼 행동도 좀 더 대담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뜻하는 바에 길이 있다. 이젠 그 뜻을 펼쳐볼 때다.
지출내역
내용 |
금액 |
맥주 2병 |
3.000원 |
통닭 |
14.000원 |
찜질방 |
4.000원 |
여관비 |
23.000원 |
총합 |
44.000원 |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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