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1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2011년 사람여행 - 3. 두 번째 떠나는 도보여행의 비판에 대한 해명(11.03.06.일) 본문

연재/여행 속에 답이 있다

2011년 사람여행 - 3. 두 번째 떠나는 도보여행의 비판에 대한 해명(11.03.06.일)

건방진방랑자 2021. 2. 14. 10:21
728x90
반응형

두 번째 떠나는 도보여행의 비판에 대한 해명

 

 

어제 가족 모임이 있었다. 술을 마셔야만 나사를 반쯤 풀게 되고, 그제야 겨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스스로의 약함이 있다. 진실해진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인지 새삼 느끼게 된다.

 

 

 

가까이 있는 것의 소중함을 모르기에 떠나는가?

 

우리는 가족이란 정의를 곱씹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희생하길 강요하고 있었다. 가족 공동체와 비슷한 말은 가족 이기주의. 모든 걸 안으로 삼키는 블랙홀. 가족 공동체가 서로의 희생을 강요하는 배치 하에서는 가족 이기주의가 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있지 않는 가족이란 정의를 위해 개인의 행동, 개인의 사고를 가로막고 통제하려 하니 말이다.

가족 공동체가 실질적인 공동체가 되기 위해선 이와 같은 의식구조가 바뀌어야 한다. 너의 희생이 아니라, 각자의 가치를 인정하고 존재하는 것만으로 의미를 가질 수 있으면 된다. 그런 분위기에서는 서로의 개별성이 인정될 것이고, 그때 오히려 공동체에 시너지 효과가 나는 것이다. 함께 있기에 서로를 옥죄는 공동체가 아닌, 함께 있기에 서로에게 힘이 되는 공동체라 할 수 있으니 말이다

형은 도보여행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제시했다.

 

저번 여행에서 만난 인연들을 챙기며 더 돈독히 하는 여행이 됐으면 한다는 것

너의 해답은 가까운 데 있지 멀리 있지 않다는 것.

 

결국 여행을 떠나는 게 외부에 행복이 있고 그걸 찾아 떠나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근처에 있는 사람들에게 잘하지 못하면서 멀리 있는 것에만 집착하고 잘 해주려 하는 건 문제라는 얘기다.

형에게 여행은 잠시 즐기다 오는 것이었을 거다. 하지만 거기엔 현실이 빠져 있기에 놀 땐 즐겁지만 뭔가 씁쓸한 마음도 들었으리라. 그도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놀아야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가족과 떠나는 여행은 즐겁기보다 업무의 연장 같은 느낌에 더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일상을 떠난 곳에서 일상에서 하는 일들이 되풀이된다.

이런 관념 때문이었을까. 나의 여행도 그런 관점으로 보고 비판하게 된 것이다. 충분히 수용 가능한 비판이기에 그 말을 받아들이고 나의 생각을 개진해보련다.

 

 

▲ 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 가족의 환상이 잘 묻어난 사진. '스위트홈', 그게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 만들어진다.

 

 

 

거리를 둘 때 비로소 파랑새를 알게 된다

 

여행, 그리고 국토종단과 다른 경로, 그리고 무계획.

행복이 외부에 있고 사람들과 만나면 내 안의 불안이 해소되리라는 생각. 이런 생각으로 여행을 가려는지도 모른다. ‘~ 떠나자동해바다로라는 노래 가사와 같은 여행엔 낭만적인 요소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유토피아적인 환상이 실제인 곳이 있을 거라는 유아적인 생각으로 떠나는 여행이니 말이다.

하지만 현실이란 것도 잘 안다. 그리고 내 문제를 누군가 대신 풀어줄 거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한번 만난 사람이 나의 내막을 다 알고 충고해줄 순 없다. 설사 날 100% 알고 충고해주고 대신해준다 한들 그게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난 외부 상황이 날 규정하기 전에 내가 상황 속에서 나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지 알아보기 위해 가려는 것이다. 내 안엔 이미 해답이 있고 그만한 역량이 있고 그만한 됨됨이가 있을 것이다. 그걸 깨달아 알기 위해 가는 것이다. 고로 세상을 알기 위해 길을 떠났으나 나를 알게 되는 역설을 경험하기 위해 도보여행을 계획하게 되었다.

 

 

▲ 파랑새를 찾기 위해 떠난 여행은 아니지만, 여행이 끝날 때는 파랑새가 어딨는지 알게 된다.

 

 

 

국토종단과는 다른 경로로 여행을 떠나려는 이유

 

왜 기존의 인연들을 챙겨주고 더 긴밀한 관계를 맺지 않으면서 새로운 인연만을 맺으려 하는가? 혹 새 인연만이 더 좋다는 의식이 있는 건 아닌가?

이건 생각해보지 않았던 문제이기에 내 생각을 정리하는 기분으로 이야기해보련다. 맞다, 기존의 길로 다시 걸으며 인사도 드리고 관계를 돈독히 할 수도 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도 나름 좋은 생각 같다. 예전의 길로 다시 걸으며 차이와 반복을 느끼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하지만 하나 짚고 넘어가야겠다. 나에게 길이 같음과 다름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 나의 의식이 바뀌지 않으면 다른 곳을 걸어도 전주를 걷는 것과 같을 뿐이다. 환경의 변화란 기실 맘의 변화를 전제로 할 때만 가능하다. 이건 이미 국토종단기를 작성하며 방콕과 여행의 차이에 대해 논리 전개를 하면서 충실히 설명했었다. 결국 난 내 생각의 변화 경로를 추적하러 길을 나서는 것뿐이다. 어떤 장소에 가서 누구와 인연을 맺게 되건, 그건 내 안에 축적된 역량에 따라 차이가 날 것이다.

이런 맘인데도 굳이 다른 경로를 따라 여행하려 하는 건 형용모순 같다는 비판도 제기될 법하다. 그 비판엔 나 또한 자유로울 수 없다. 단지 좁디 좁은 남한도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기 때문에 돌아본다고 얼버무릴 수밖에. ‘우물 안 개구리 의식[坐井觀天]’을 벗어나는 방법은 의식의 확장으로도 가능할 테지만 경험을 하지 않으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아마도 난 경험을 더하여 좀 더 사람다워지고 싶어 다른 장소로 가려 하는지도 모르겠다.

 

 

 

걸은 만큼 그만큼 나의 삶이 된다

 

방법이 도보여행인 건, 몸을 움직이는 일을 하고 싶기 때문이다. 정직하게 걸어가면서 그때 느껴지는 내 마음과 기분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싶다. 내 안에 꼬인 마음ㆍ한계, 그리고 무의식까지 느껴지는 그대로 느끼고 싶다. 걷는 건 그런 것이다. 삶이 주는 안식은 고달픔, 아니 몸을 움직이는 수고스러움에서 나오지, 몸과 맘이 편한데 우러나진 않는다. 난 좀 더 정직하고 내 감정에 충실하려 걷는 것이다.

형의 비판은 갑작스러웠지만,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는데 중요한 요소를 제공해줬다. 내 자신이 완전무결하여 비판받아서도 안 되고 손가락질 받아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단지 그런 비판과 거부가 내 존재에 대한 전면 거부로 느껴져 그게 힘겨울 뿐이다. 자아존중감이 약하다는 소리다. 그런 식으로 확대해석하려는 의식을 개선하기 위해서라도 더 힘써 몸을 움직이고 나에 대한 마음을 느껴볼 테다. 길을 떠나 나를 만나기 위해, 난 그 길을 가려 한다.

 

 

▲ 길에 아로새겨질 내 삶의 이력들.

 

 

인용

목차

사진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