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 속 태종대와 현실 속 태종대
중부지방에선 비가 온단다. 다행히도 전주는 맑고 포근하다. 오늘 도착지인 부산도 날씨가 좋을 거라고 하더라.
버스는 3시간을 달려 서부산에 도착했다. 낙동강을 건너니 바로 부산이더라. 영화로도 나왔고 여름이면 늘 TV에 나오는 곳이라 ‘해운대’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서부산 터미널에서 지하철을 타면 한 번에 해운대까지 갈 수 있기 때문에 더 끌리는지도 모르겠다.
여행 첫날이기에 좀 느슨하게 즐기며 여행할 생각이다. 부산 지하철 노선도를 보다 보니, 해운대는 서쪽 끝인데 반해 태종대는 남쪽 끝이더라. 더욱이 중학생 때 수학여행으로 와본 경험이 있는지라 급하게 노선을 변경하여 태종대로 가기로 했다. 전철에서 내려 버스를 타니 바로 태종대에 올 수 있었다. 좀 헤맨 탓에 한 시간은 걸렸나 보다.
기억 속 태종대는 어딜 가고
기억 속의 태종대는 이순신 장군(?) 동상이 있고 바다가 바로 보이는 곳이었다. 중학교 졸업여행으로 처음 본 부산은 산꼭대기까지 집들이 빼곡하게 들어선 거대한 도시였고 그때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서 있는 곳을 거닐었던 기억이 있다.
평일이지만 날씨가 좋아서인지 관광객들이 많았다. 연인들도 보이고, 학교에서 단체로 온 학생들도 보인다. 사람들의 표정은 다들 환했다.
예전 생각으론 조금 올라가면 바로 이순신 장군 동상이 보이고 바다가 나지막하게 펼쳐질 줄 알았는데, 아무리 올라가도 이순신 동상은 없고 산책길만 계속되는 것이다. 오는 길에 버스에서 아주머니가 ‘한 시간 산책 코스’라는 얘길 얼핏 하셨는데, 바로 이런 상황을 이야기하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나의 기억 속에 있던 이순신 장군이 있는 곳은 어디란 말인가?
홀로 걷는 길은 쾌청한 날씨와는 반대로 쓸쓸하고 막막했다. 산책길도 어찌나 긴지, 자꾸 힘은 빠지고 맘은 바빠졌다. 더욱이 점심으로 먹으러 사온 김밥도 아직 먹지 않고 있었으니 기운이 팽길 수밖에 없었다. 누구도 보채거나 재촉하는 사람이 없는데도, 안에서 불안이 움트기 시작하니 그렇게 힘들게 사람여행을 떠났으면서도 온전히 즐기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떠난다고 무조건 행복한 건 아니다. 행복하기 위해서도, 그걸 만끽하기 위해서도 노력이 필요한 법이다.
힘은 빠져갔지만 이렇게 중도에 포기하긴 싫어서 무작정 걸었다. 배낭을 메고 걸으니 산책길이 아닌 도보여행길이 되어 버렸지만, 경치는 가히 일품이었다. 남해의 청명함과 탁 트인 시야가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다. 길가엔 목련도 활짝 피었고 개나리도 노란 꽃망울을 터뜨렸다. 혼자 걷기엔 가슴 시리도록 아름다운 곳이었다.
몸이 떠났다고 여행을 하는 건 아니다
여담이지만, 이순신 장군 동상이 있을 거라 생각했던 곳은 태종대가 아니라 용두산 공원이었다. 그때의 여행이란 우르르 버스에서 내려서 올라가라고 선생님이 말씀하시니 친구와 함께 올라와 사진을 열나게 찍고, 또 우르르 버스에 타서 어느 해양박물관 같은 곳에 가서 한 바퀴 둘러보고 또 버스를 타서 이동하기 바빴다.
학교에서 정한 여행지에 우린 몸만 얹고 떠나면 그뿐이었다. 그러니 그곳이 어딘지, 왜 그곳을 왔는지, 그곳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역사적으로 어떤 곳인지 전혀 궁금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중고등학생 때 기억에 남는 건 버스를 타고 어딘지도 모르는 곳을 돌아다녔던 것밖에 없다.
무엇을 위해 갈지 기획을 하거나, 가고 싶은 곳 따위를 정해본 기억이 없으니, 삶은 밍숭맹숭하기만 했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여행’이라 할 수 없다. 떠났지만 그저 일상에 머무는 것과 하나도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몸은 돌아다니고 있지만 의식은 일상에 들러붙어 있고, 의식이 움직이지 않으니 어떠한 깨달음도 느낌도 일절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여행’은 이와 다르다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몸이 떠났느냐 떠나지 않았느냐와 별개로 마음이 미지의 세계를 향해 활짝 열려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마주치는 모든 것들이 작은 변화의 단초들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몸은 일상에 머물지만 여행을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일상이 낯설어지는 것을 나날이 느끼는 사람에겐 일상이 곧 여행이라 할 수 있다.
초등학교(난 국민학교 출신, 1996년 3월 1일부터 명칭 바뀜) 때 수학여행으로 갔던 경주와 떠나고 싶어 찾았던 경주, 그리고 중학교 졸업여행으로 찾은 부산과 사람여행으로 다시 찾은 부산은 그래서 같지만 전혀 다른 장소라 할 수 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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