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상적인 이해와 맹렬한 비난
옛길을 따라 가다 보니 언덕에 교회가 보여 점심을 먹기 위해 들어갔다. 사순절 기간이라 성찬식도 하던데 먹진 않았다.
사람여행⑱: 도보여행을 하고 싶은 고등학생을 만나다
교회에서 남자 고등학생을 만났는데 도보여행에 관심이 많더라. 이미 중학생 때 자전거를 타고 일주일간 여행을 한 경험이 있단다. 나의 여행 이야기를 듣더니 당장에라도 부산까지 도보여행을 가고 싶다고 한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나를 보니, 나의 행동 하나하나가 그 녀석에겐 ‘산 교과서’로 보였나 보다. 아무래도 여행을 떠나면 나처럼 이곳저곳에 신세를 져야 하는데 나를 보며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행도 사람의 성향에 따라 여러 가지 방식이 있을 텐데, 내 여행의 방식을 하나의 전범으로 받아들이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나의 방식에 억지로 자신을 맞추려다 보면 여행 자체가 자신의 본모습을 상실케 하는 고행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건 ‘학의 다리가 길다하여 자르게 하고, 오리의 다리가 짧다 하여 붙이려는 격(오리의 다리가 비록 짧지만 다른 다리를 이어붙이면 근심스럽고 학의 다리가 비록 길지만 그걸 자르면 슬프다[鳧脛雖短 續之則憂 鶴脛雖長 斷之則悲]. 『장자(莊子)』 「변무(騈拇)」)’이니 말이다.
그렇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남의 방식을 고집할 게 아니라 직접 몸으로 부딪히며 자신만의 장점을 찾아내고 그 장점을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여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처럼 호기심이 생겨 여행을 꿈꾸는 것은 좋다고 생각한다. 어떤 얘기를 들어도 아예 호기심이 생기지 않는 사람도 있는데 어떤 이야기에 가슴이 뛰고 호기심이 생긴다는 건 삶에 대한 의욕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아무런 준비가 없이 충동적일지라도 떠난다 할지라도 여러 가능성과 마주칠 것이다. 너무 준비가 미흡해 중도 하차하게 되더라도 그런 경험은 어떤 것에도 비길 수 없는 경험이리라. 그런 경험들이 쌓여 스스로 여행을 하는 이유와 목적을 생각하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고자 하는 간절함까지 생긴다면 그땐 누구의 조언도 필요도 없는 자신만의 여행을 맘껏 떠날 수 있게 되겠지. 너의 그 호기심을 환영하며 언젠가 정말 여행자로서 함께 만날 수 있길 희망해 본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타종교 비판
점심을 먹으며 목사님에게 재림교에 대해 물어봤다. 그러자 목사님은 재림교가 이단이라고 단언하시더라. 기독교인의 일반적인 정서가 표출된 것이기에 하등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이단이라고 주장하는 내용이 황당했다. “그들은 예수의 존재를 믿지 않고 하느님만 믿어요. 유대교처럼요. 그러니 유대교의 안식일날에 예배를 드리는 거죠.”
도대체 이게 무슨 황당한 말인가. 피상적으로 아는 내용으로 한 종교를 낙인찍는 건 잘못이다. 그것이야말로 자신만이 진리의 사도요, 나를 대적하는 자들은 사탄이라는 근본주의에 다름 아니다. 재림교는 예수를 인정하고 예수를 예배한다. 단지 토요일에 예배드리는 건, 그게 성경내용에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비판에 재림교도 예외일 순 없다. 재림교에서 발간하는 소책자를 보면 이런 식의 비판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왜 다른 종교를 믿으면 안 되는지에 대해 간단하게 써놓았는데, 거기에 표현된 타종교에 대한 이해 수준이 피상적이었다. 혹 시험을 보기 위한 써머리노트처럼 말이다. 유교를 한마디 정의하여 ‘닦아라(修)’라고 했고 불교를 한 마디로 정의하여 ‘비우라(虛)’고 했다. 이런 정의로 어떻게 하나의 종교를 알 수 있는지 궁금하다. 이런 식으로 기독교를 표현하면, 기독교는 ‘사랑하라(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고린도전서」13:13)’쯤 되려나. 만약 이렇게 기독교를 정의할 수 있다면, 지금의 보수 기독교인은 이런 정의에서 어긋난다. 사랑하기보다 저주하고, 약자를 배려하기보다 짓밟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런 식의 피상적인 정의는 자신의 종교를 합리화하고 타종교를 깎아내리기 위한 자료일 뿐이다.
재림교가 이단인지 아닌지, 주류 기독교는 어떤지, 유교ㆍ불교가 옳은지는 중요하지 않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각 종교의 깊이는 더욱 깊어지며 궁극적으로 통한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증평에 둥지를 틀다
6시쯤 증평에 도착했다. 오늘은 꼭 성당에서 자고 싶었다. 증평성당은 역사가 깊은 지 건물의 분위기가 남다르더라. 꼭 ‘전동성당’ 같은 고적한 분위기가 풍겼다. 근데 신부님이 저녁 미사 때나 오신다며 무작정 기다려 보라고 하신다. 어찌될지 모르기에 일반 교회로 왔고 바로 허락을 받았다.
성당은 조직체이다 보니, 그만큼 경직되어 타인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이런 면에서 같은 조직체이지만, 포용적인 분위기인 재림교회와 비교된다. 그만큼 성당은 비신앙인이 접하기엔 여전히 먼 당신이었다. 살가움이나 친근함은 성당의 고풍스런 분위기에 묻혀 전혀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다른 곳에서 성당에 갈 기회가 있으면 또 도전해 볼 것이다. 성당도 신부님 성향에 따라 낯선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다를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23:00)
지출내역
내용 |
금액 |
없음 |
0원 |
일일 총합 |
0원 |
총 지출 |
129.400원 |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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