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과 한국전쟁
버스를 타고 터널을 지나자마자 바로 내렸다. 고작 한 정거장 가는 것이지만 큰 배낭을 메고 버스에 타니, 꼭 내가 부산시민이 된 듯한 느낌이 들더라.
도심 한복판의 공장 지대를 지나 어제 버스에서 내렸던 사상구를 지나간다. 부산은 역시 대한민국의 제2의 도시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닷가에선 조선, 중공업 등의 대규모 산업이 활발하게 진행되며, 내륙에선 작은 여러 공장들이 큰 공장들을 뒷받침한다. 활기차게 살아 움직이는 도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오래 있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더라. 걷는 사람에게 매연과 소음은 고통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고통을 감내하며 여행할 마음은 전혀 없었기에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공장지대를 헤쳐나갔다.
한국전쟁 당시의 두 가지 어처구니 없던 일
한참을 걸으니 낙동강이 보이더라. 말로만 듣던 낙동강을 눈으로 보며 걷는 느낌은 특별했다. 이 강을 사이에 두고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화력과 남한의 화력은 맞부딪혔다. 이곳마저 뚫렸다면 6.25는 전혀 다르게 기록됐을 것이다.
6월 25일 새벽 4시를 기해 전쟁이 발발하자 인민군은 38선을 넘어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늘 입버릇처럼 ‘북진통일(北進統一)’을 입에 달고 살았고, 전쟁이 발발하자 ‘서울 사수’를 외쳤기에 사람들은 정말 그런 줄만 믿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군은 대응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밀리고 밀려 부산까지 내려오게 된 것이다. 이때 이승만 대통령은 이미 경부선 열차에 몸을 실었고 대구까지 내려갔다. 자신은 이미 서울을 버리고 기차를 타고 내려가고 있으면서도 라디오 방송을 통해선 ‘국군은 북진하고 있다. 그러니 안심하라. 생업에 종사하라’라는 말만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남한 사람들은 그 방송만을 믿고, 대통령이 하는 말만을 믿고 ‘국군이 제 몫을 톡톡히 하나 보다’라는 믿음으로 서울에 남아 피난을 떠날 생각을 아예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처구니없는 일이 두 가지나 발생한다. 첫 번째 사건은 대통령이 서울을 버리고 대구까지 단 번에 내려가자 그게 너무 무책임한 모습으로 보였던지 참모진들이 “각하 너무 멀리 오셨습니다.”라는 말을 한 것이다. 국민을 안정화시킨다는 미명 하에 새빨간 거짓말로 방송을 하여 수도권 시민들을 고립시켜놓고선 자기만 살고자 내뺐고 그런 상황이기에 참모진들의 아우성을 들어야 했다. 그래서 마지못해 대구에서 대전으로 올라오게 된 것이다. 그나마 첫 번째 사건은 대통령만 살려고 내뺀 것이니, 우리나라 역사에서 매우 익숙한 장면이라 ‘뭐 그럴 수 있지’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고려 시대 당시 몽고군이 쳐들어오자 강화도로 내뺀 무신정권의 피가, 임진왜란이 벌어지자 의주로 내뺀 선조의 피가, 병자호란이 벌어지자 남한산성으로 내뺀 인조의 피가 우리나라 집권자에겐 그대로 이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씁쓸하지만 집권자는 국란이 발생하면 백성들을 챙기기보다 자신이 먼저 내빼기에 바빴다.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두 번째 사건은 더욱 악랄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건 소위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정신으로 포장되는 행위였고 라디오 방송을 통해 서울 사람들을 고립시킨 후 단행되어 자국민을 버리는 행위였다. 바로 인민군이 남하하는 것을 막는다는 핑계로 유일하게 건설되어 있던 한강철교를 폭파한 사건이다. 이때엔 이미 많은 서울 사람들이 위험을 감지하고 피난을 떠난 상태였고 당연히 한강을 건널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한강철교에도 수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강철교를 폭파했고 그곳을 건너던 뭇 사람들은 폭사 당했다. 미처 그곳마저 건너지 못한 사람들은 서울에 남아 있다가 한국군이 서울을 수복한 이후엔 인민군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온갖 고초마저 겪어야 했다.
낙동강에 스민 아픔의 역사
부산은 밀리고 밀린 한국군이 낙동강에 방어선을 구축하였고 이곳으로 많은 피난민들이 밀려들면서 크게 성장할 수밖에 없었던 도시이다. 현대사의 아픔을 오롯이 간직한 도시이기에 낙동강의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보니 마음 한 구석이 아파왔다. 그땐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강이었는데, 지금은 사대강 사업으로 파헤쳐지고 있는 강이었다.
만약 낙동강이 하나의 인격체라면 현대사를 몸소 겪어낸 소감을 무어라 표현할까? 아마도 “어리석은 인간들아~ 너희는 자연의 증오와 한을 알아야 한다. -『원령공주』”이라 하지 않을까.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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